최근 특별하게 다가온 인연이 있다. 만해와의 새로운 만남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살아가면서 만해를 한 번쯤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만해를 떠올리며 “아 님은 갔습니다”라는 강렬한 그의 시 한 구절을 절로 읊조리기도 하고, 〈님의 침묵〉에서 말하는 님이 조국인지, 부처님인지, 아니면 연인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경험도 대부분 공유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만해와의 만남이 새로울 것까지는 없을지 모른다.

나 역시 만해와의 개인적인 인연은 중·고등학교 시절 〈님의 침묵〉으로 시작되었지만, 사회에 나와서도 만해와의 인연이 몇 차례 이어졌다. 1980년대 초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며 만해를 만났고, 1990년대 말 강원도와 인연을 맺으면서 만해마을 조성에 대해서도 처음 접했다. 만해마을 준공식 때는 강원도지사의 축사 원고 초안을 작성했던 인연도 있었다. 이런 인연들이 쌓여 2년 전 만해마을을 동국대학교에서 운영하게 되면서 이곳에서 일하게 되는 인연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내게 만해 한용운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요 불교 개혁자로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만해와 특별한 만남은 만해마을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만해에 대한 평가는 내가 아는 전부’였지, ‘만해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의문’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만해마을에서 처음 보았던 말년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 그리고 20대 중후반으로 추정되는 젊은 승려 시절 사진은 내게 무언가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동시에 왠지 모르는 부담감도 느껴졌다. 그래도 어떤 날은 꽤 오랜 시간을 그의 초상화와 청년 만해의 사진 앞에 서서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고,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연보를 보며 삶의 궤적을 쫓아가 보기도 했다. 덕분에 그의 삶이 머릿속에서 조금씩 정리되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만해의 삶은 우리에게 알려진 그 이상의 메시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커다란 울림을 전해주는 것 같았다. 

젊은 시절의 사진은 그야말로 꿈과 희망을 지닌 청년 승려 그 자체였다면, 일제의 침탈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영양실조에 걸려 몸과 마음이 몹시 힘든 생활을 하면서도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던 말년의 모습을 담은 그의 초상화는 분명 우리가 상상했던 영웅의 모습과는 거리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초췌한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 굳게 다문 입과 살아 있는 눈빛은 평범한 사람들이 마주하기에는 무언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그의 삶이 녹아 있었다. 20대 청년 승려에서, 몸은 늙었지만 정신은 살아 있는 60대 큰 그릇이 되기까지 40여 년의 세월이 만들어낸 그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했다. 한마디로 근대(近代)라는 대격변기이면서 냉혹했던 일제 강점기를 철저한 실천으로 살다간 근대 시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만해였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만해마을에서 다시 만난 만해는 내게 이렇게 다가왔다. 시인이며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던 독립운동가요, 불교의 개혁을 주장한 승려로서만이 아니라 스스로 깨어 있는 근대이고자 했고, 실천을 통해 모두가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평생을 실천하며 살았던 만해를 만난 것이다.

그는 승려가 된 후 서구 근대 문물의 유입과 함께 침탈의 대상이 되었던 동아시아의 지식인들이라면 필독서로 여겼던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처음 접하며 근대의 수용과 저항에 대한 고민을 했고, 《영환지략》을 읽고 세계여행을 두 번이나 직접 시도한 것도 근대의 진원지인 유럽을 직접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그 속에서 답을 찾고자 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36세에는 1,500년 역사의 우리 불교를 대중들에게 더 넓게 전파하기 위해 고려대장경을 탐독하고 《불교 대전》을 썼고, 41세에 민족 대표 33인으로 3·1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그 후 대중들이 부르는 곳이면 찾아가 강연을 하였던 그는 46세에 대표 시집인 《님의 침묵》을 냈고, 《흑풍》 등의 소설을 쓰고, 《유심》 등의 잡지를 발행하며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그의 삶 속에는 격변기였던 근대의 일상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의지를 ‘말과 글’을 통해 민중들이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스스로 답을 찾아 나설 정도로 실천 정신이 담겨 있었다. 그가 시를 통해 그토록 반복해서 외쳤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슬픔과 기쁨은 문학적인 키워드이면서 동시에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에 속했음에도 봉건적인 사회에서는 그 의미들을 구체화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근대어’이기도 했다.

몇 해 전 필자가 《정도전의 선택》이라는 평전을 썼던 기억도 새롭게 떠올랐다.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통해 불교의 타락을 맹렬하게 비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불교를 비판했던 내용이 종교적인 관점보다는 당시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에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개혁을 추구했던 정도전과 만해 사이에는 역사적으로 500년을 뛰어넘는 유사한 점은 없을까 하는 상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설픈 상상력으로 논리를 꿰어맞추는 것은 지나친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만해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그의 실천력을 본받기 힘들 정도로 나 자신이 초라함을 느끼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만해와의 만남은 새로운 의미를 찾기에 충분했다.

역사에서 위대한 삶은 시대가 지나도 분명 ‘역사에 살아 있다.’ 후세에 던지는 그들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반면 ‘역사적 교훈’을 의도적으로 내세운 단순한 영웅 만들기는 박제된 위인을 만들어 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영혼의 메아리가 없는 외침, 즉 ‘잘못된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만해와의 새로운 만남은 살아 있는 역사 속에서 그를 만날 수 있도록 좀 더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과제가 생긴 셈이다. 분명 특별한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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