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가바드 기따』의 까르마 요가의 입장에서

서론

부처님은 출가하기 이전의 아들 라훌라를 향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애욕의 다섯 대상을 버리고 신심으로 집을 떠나 괴로움 없애는 사람이 되라”고.1)

그런데 우리는 왜 불교 재가신도로 살아가는가? 우리에게 애욕을 따르는 자연스런 마음이 본래 있었고, 사회적 관행을 따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되었다. 도중에 불교를 만나 출가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업이 무겁고 책임감조차 느끼게 되어 삶의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 남아 불교를 실천하기로 결심하였을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고개를 돌려 출가자들의 삶을 살펴보아도 화합 승단은 잘 보이지 않고 진정한 구도자는 찾기 힘들며 참선을 열심히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었다는 큰 스님이 있다고 해도, 그의 행위는 반드시 중생 구제와 쉽게 연결되지 않더라.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행위를 통해 불교를 실천하고 해탈까지 소망하는 재가불자들이 있다고 해보자. 그들의 실천과 해탈에의 소망을 지지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바가바드 기따』(이하 『기따』)의 까르마 요가 사상이 하나의 근거는 될 수 있다. 『기따』는 봉사를 하라, 의무를 행하라 하고, 현실적인 삶과 수행의 일치 속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봉사나 의무 수행을 통해서 실제로 해탈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의 1장에서는 『기따』의 까르마 요가의 의미를 살펴 볼 것이다. 2장과 3장에서는 행위의 불가피성과 해탈의 의미를 『기따』의 시구를 통해 확인할 것이다. 4장에서는 간디(M. K. Gandhi, 1869~ 1948)가 보여준 해탈에의 소망, 고민, 그리고 진리에의 단호한 결의를 살펴볼 것이다. 간디의 까르마 요가 사상과 실천이 『기따』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으므로, 이 글은 『기따』와 간디의 말에 자주 경청하게 된다.

1. 『기따』의 까르마 요가

『기따』는 인도의 대중적인 경전이다. 근대 인도의 수많은 정치가와 지식인들에게 영감과 실천의 원천이 되었고, 이제 세계적 고전이 되었다. 인도의 많은 사상가들은 이 책에 주석을 달아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기도 했다. 간디는 “내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때마다 사전에 의지하게 되는데, 지금까지 나는 후회해 본 일이 없다. 그것은 진정 여의주”2) 라고 했다.

『바가바드 기따』는 ‘주님의 노래’라는 뜻으로, 끄리슈나 신의 가르침을 담은 시가(詩歌)인데 저자와 저작 연대는 미상이다. 다만, 기원 전 2~3세기에 지은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하지만 저자와 저작 연대에 대한 질문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기따』는 신의 지혜를 담은 책으로,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영적인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해탈(영적 자유)을 소망하는 자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기따』 이전의 경전들은 서로 다른 해탈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베다의 옛 길은 제사와 도덕적 행위(karma)를 구원의 길로 강조했고, 우파니샤드는 행위보다 지식(j뻨a)을 주장했다. 아울러 요가행자들은 훈련과 고행을 추천했고, 반면 숭배적 종교는 주재신에 대한 신애(信愛, bhakti)의 길을 따라갔다.

그런데 『기따』는 남녀 각자가 자신의 필요와 환경에 따라 가장 적합한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위, 지식, 신애, 제사, 보시, 고행 등의 길을 결합하려고 애썼다. 간디는 『기따』에 대해 학생들에게 연설하면서 봉사의 행위를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따』는 까르마 즉 행위의 복음, 박띠 즉 신애의 복음, 그리고 즈냐나 즉 지식의 복음을 포함합니다. 인생은 이들 셋이 조화를 이룬 전체여야 합니다. 하지만 봉사의 복음이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나라에 봉사하길 원하는 자에게 행위의 복음을 선언하는 장에서 시작하는 일보다 더 필요한 일이 있겠습니까?…필수 도구를 갖추고 『기따』를 읽으십시오. 그러면 전에는 결코 깨닫지 못했던 평화를 갖게 될 것임을 보장해 드립니다.(1927)3)”

간디는 우리의 인생에는 행위, 신애, 지식 사이에 조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봉사의 행위를 강조하고 까르마 요가를 다룬 3장부터 읽으라고 권유하고 있다. 간디는 봉사 행위가 학생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모든 구도자에게 가장 적합한 것으로 보았다.

2. 행위의 불가피성

『기따』의 3장 5절은 ‘행위의 불가피성’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구절로 유명하다.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왜냐하면 인간은 결코 단 한순간도 행위 하지 않고 있을 수 없으며 누구나 물질적 본성에서 생긴 요소들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행위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kryate hyavaa karma sarva praktijair guai)”

간디는 1932년 한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구절을 부처님의 일생과 관련지어 설명한 적이 있다. 그 지인은 그 전에 간디에게 편지를 보내고, 간디와 부처님의 차이를 아래와 같이 지적한 바 있었다.

“사심 없는 행동이 마음을 정화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일정 정도 정화한 다음 그 구도자는 자신의 정신적 활동을 조용히 관찰해야 하지 않습니까? 부처님은 그런 것을 목표로 삼아 행위(activity)와 명상(concentration)의 결합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바뿌는 행위만을 찬성합니다. 행위는 바뿌에게 자기완성의 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명상)이 구도자로 하여금 혼의 움직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까?4) ”

바뿌(아버지)는 간디를 부르는 애칭이다. 이 편지의 발신자는 바뿌가 행위만을 찬성한다고 간주하고 부처님을 본받아 행위와 명상을 결합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간디는 “한가한 생각(idle thought)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는 구절로 편지를 시작했다.5)

간디가 말하는 ‘한가한 생각’이란 ‘행위 없는 명상’을 가리킨다. 자신의 본성을 깨닫기 위해 주로 앉아 있는 좌선 수행은 ‘한가한 생각’의 일종이다. 선불교 전통에서 보아서 더욱 놀라운 것은 간디가 좌선이든 요가든 한가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정신적 방탕, 곧 청정행 계율의 위반으로 보았다는 점이다.6)

간디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따』의 3장 5절은 심원한 진리를 담고 있네. 과학자들은 『기따』안에 선언된 원리들이 보편적 법칙이라고 반복하여 말했네. 그것은 어떤 인간도 까르마를 한 순간이나마 중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네. 까르마 곧 운동(motion)은 모든 물질적 사물과 모든 생명체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법칙이네. 인간의 영적인 지식과 수월성은 무집착의 정신으로 까르마 법칙에 순종하는 데 있네. …부처님과 같은 위대한 혼을 내가 어떻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아니, 그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네. 하지만 그는 스스로 승원 조직을 설립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누가 승원을 설립했든지 설립된 승원들은 보편 법칙에 종속되어 정체되었고 점점 나태의 소굴이란 악명을 얻게 되었네. 오늘날에도 우리는 스리랑카, 미얀마 그리고 티베트에서 무지에 빠진 승려에게서 나태의 진짜 이미지를 보네. 인도에서도 산야시로 알려진 승려들은 인류의 빛나는 본보기가 아니라네. 그래서 사람은 일을 통해서만 진실하며 지속적인 심정의 정화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나는 개인적으로 확신하네…(『기따』의) 4장 18절은 무행위에서 행위를 보고, 행위에서 무행위를 보는 사람, 그가 진실한 요기이고, 참된 까르마의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네.7)”

이와 같이 『기따』의 3장 5절과 간디의 설명을 보면, 모든 사람은 구나로 이뤄져 있으므로, 행위는 불가피하고 인간의 본성이며 보편적 법칙이다. 부처님과는 달리 간디가 행위만을 강조한다는 비판적인 질문에 대해서, 간디는 부처님이 행위와 명상을 결합한 분이라는 질문자의 평가에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간디는 부처님과 초기 제자들이 모두 승원의 설립을 통해 심정을 정화한 분, 무집착의 정신으로 행위라는 보편적 법칙을 따랐던 분으로 보고 있다. 기원 전 6세기 경 고대 인도에는 불교 이외에도 출가자(沙門)들의 집단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부처님과 그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경전을 보존하기 위해 승단을 가장 성공적으로 조직했던 집단이라는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8) 간디는 진리파지 운동의 본부로 아슈람을 설립하면서 부처님의 승원 설립에서 그 모범을 보았을 것이다.

간디에게 심정의 정화는 세속의 변화를 위한 행위로 될 일이지, 선 수행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간디는 아시아 각국의 불교 사원이 나태의 소굴로 변했다고 꾸짖고 있었다. 깨달음을 강조하고 좌선을 위주로 삼는 선불교는, 인간의 본성과 부처님을 오해한 것이고 중국이라는 특수 환경에서 일어난 특수한 유형의 불교일까? 이런 관점이 옳다면 선불교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기따』에 행위에 대한 가르침은 풍부하다. 그 가르침 가운데 행위 없이는 우리의 육신조차 부양할 수 없다(3장 8절); 세계의 파멸을 막기 위해서라도 행위해야 한다(3: 24); 남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다르마(svadharma)를 행해야 한다(3: 35)는 시구가 포함되어 있다.

3. 『기따』가 제시하는 해탈의 의미

『기따』의 까르마 요가가 제시하는 해탈이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면 사심 없는 행위, 무집착의 행위가 바로 해탈의 요체이다. 먼저 관련 구절을 찾아보자.9)

“…그러므로 요가에 자신을 매라(yogya yujyasva). 요가는 행위의 기술이다(yoga karmasu kaualam, 2: 50).”
“모든 애욕을 던져버리고 아무런 갈망 없이 행하는 사람, 내 것과 나라는 생각이 없는 자는 평안에 이르나니(vihgya kmn carati nispha nirmano ahakra sa ntim adhigacchati, 2: 71).
이것이 브라만의 경지이며(e brhmi sthiti) 이것을 얻으면 더 이상 미혹함이 없나니 죽음의 순간에서도 그런 경지에 확고히 서면(sthitv ‘sym antakle ‘pi) 그는 브라만 열반에 가노라 (brahmanirvam cchati, 2: 72).”

“나에게 모든 행위를 맡기고서 최고의 자아(adhytma)를 명상하면서 소망도 없고(nirr) 내 것이라는 생각도 없이 되어 열정을 버리고(vigatajvara) 싸우라. (3: 30)”

“이러한 나의 가르침을 믿고 불평 없이 항시 준행하는 사람들도 행위로부터 해탈할 것이다 (muchyante te ‘pi karmabhi, 3: 31).”

“감각기관이 상대하는 대상에 욕정과 증오(rgadvea)는 자리 잡고 있다. 이 둘의 힘에 종속되지 말지어다(3: 34).”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고 항시 만족하며,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사람은(tyaktv karmaphalsaga nityatpto nirrayah) 행위에 관여한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행하지 않는 자이다(naiva kicit karoti, 4: 20).”

“아무런 소망 없이, 몸과 마음을 제어하며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tyaktasarvaparigraha) 단지 육체로만 행위 하면 그는 죄과(npnoti kilbiam)를 얻지 않는다(4: 21).”

3장 31절이 말하는 해탈은 행위로부터 해탈하는 것이다. 이는 행위의 결과에 대한 집착의 포기에서 오며, 앞서 언급한 ‘무행위의 행위’도 바로 이것이다. 행위는 무집착의, 무행위의 행위라야 한다는 사유의 아래에는, 행위의 결과가 부자유, 죄과, 환생 등을 초래한다(janmakarma phala, 2: 43)는 인도인의 깊은 통찰이 가로 놓여 있다. 따라서 행위자는 결과에 대한 집착, 애욕, 갈망, 내 것, 나라는 생각, 소망, 열정, 욕정과 증오, 모든 소유, 의존, 죄과를 전부 버려야 한다.

이상은 해탈을 소극적으로 표현한 것이지만, 적극적인 표현도 『기따』에 아주 풍부하다. 평안, 브라만 열반, 최고의 자아, 만족함, 독립을 얻는 것, 불사(amtatva)를 얻는 것(2: 15); 육신의 소유주(dehin)인 아뜨만을 보는 것(2: 29); 평화(prasda)를 얻는 것(2: 64), 이런 것들이 모두 해탈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0)

간디는 2장 72절에 나오는 ‘브라만의 경지’를 ‘브라만을 깨닫는 경지’라고 하고, 우리가 브라만의 경지에 머문 채 죽게 되면 죽는 순간에는 브라만 열반에 이른다고 하고, 브라만 열반은 브라만에 몰입하는 것이며 브라만에 도달하는 것이라고 했다.11) 간디는 어떤 사람이 브라만의 경지에서 죽었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그가 ‘목샤’를 성취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12) 간디는 이어서 불교의 열반과 『기따』의 열반을 비교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순야따(unyata, 空)를 뜻한다. 그러나 『기따』의 열반은 평화를 뜻한다. 이 차이에 너무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열반과 『기따』의 열반이 가리키고 있는 경지는 같은 것”이라고 했다.13)

4. 까르마 요가로 해탈할 수 있는가?

“자신을 생사의 악에서 해방시키고 브라만과의 합일함”을 의미하는 해탈, 그것이 모든 사람의 목표여야 함을 간디는 분명히 밝혔고 스스로도 해탈을 소망했다.14) 그런데 그는 실제로 해탈했는가? 아니다. 간디는 진리나 아힘사를 논하면서 곳곳에서 진리와 아힘사의 이상에 도달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한 평생 다음과 같은 말을 가슴에 담고 살아갔던 것 같다. “나는 해탈을 구하는 한 사람의 구도자에 불과하네. 그러나 금생에는 아직 해탈을 얻기에 적합하지 않네. 내 따빠스차르야(고행)는 충분히 엄혹하지 못하네”(1921)라고.15)

아래 긴 인용문은 「진리란 무엇인가」(1921)라는 글의 절반 정도에 해당된다. 이 글은 1948년 죽을 때까지 오십 여 년간 지속된 진리파지 운동에 임하는 간디의 태도를 잘 드러낸다. 간디는 여기에서 해탈, 진리, 신, 사랑(아힘사)의 문제에 대해 자신이 품고 있는 구도자적인 비전, 고민 그리고 단호한 결의를 진솔하게 묘사하면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그래서 진리를 이해하고 신구의(身口意)에 있어서 오직 진리만을 따르는 자는 신을 이해하게 되고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현자가 갖는 비전을 얻는다. 그는 육신의 틀 속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해탈(목샤)을 얻는다…우리 중의 일부는 사그라히(진리파지자)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진리를 철저하게 따르기를 열망하지만 그 말을 제한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그 일에 거의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서약의 준수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본다…나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진리 서약을 지키기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 이상은 어떤 것도 주장하지 않았다는 점이다…진리를 말하고 진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내 본성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오직 희미하게 밖에 보지 못하는 진리가 내 인생의 일부가 되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무의식적인 과장에 탐닉하기, 자화자찬, 혹은 업적을 늘어놓는 일에 관심 갖기, 나는 이런 일들을 아직 넘어서지 못했다. 이런 것들 안에는 모두 허위의 그림자가 있으며, 진리의 검증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진리의 정신으로 전적으로 충만해 있는 삶은 수정처럼 맑고 순수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의 면전에서 허위는 한 순간도 살아남을 수 없다. 어느 누구도 항상 진리를 따르는 사람을 속일 수 없다. 그의 면전에서 허위는 반드시 탄로 나기 때문이다. 준수하기가 가장 어려운 서약이 진리 서약이다. 진리를 따르려고 노력하는 십만 명 중에서 오직 극소수만이 금생의 노정에서 완전히 성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할 때, 나는 상대방보다 내 자신에게 더 화가 난다. 내 안 어딘가 허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그때에야 깨닫기 때문이다.

사(satya)라는 단어는 ‘있다’ ‘존재한다’를 의미하는 사뜨(sat)에서 나온 것이다. 오직 신만이 모든 시간에 걸쳐 언제나 동일한 존재이시다. 이 사(진리)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통해 진리의 임재에 영원히 자신의 심정을 열어 두는 데 성공을 거둔 자에게는 1천 배의 영광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진리를 섬기기 위해 분투했을 따름이다. 나는 진리를 위해서라면 히말라야의 꼭대기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을 만한 용기가 있다고 믿는다.

동시에 나는 여전히 그 진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고 있다. 진리를 향해 전진할수록 나는 단점을 그 어느 때보다 똑똑하게 보게 되는데, 그 지식이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내 자만심은 예전에 사라졌다. 나는 뚤시다스가 왜 자신을 망나니라고 불렀는지 잘 이해할 수 있다. 이 길은 용기 있는 자들만을 위한 것이다. 겁쟁이는 아예 밟지 않는 것이 낫다. 먹거나 마시거나 앉아 있거나, 물레를 돌리거나, 쉬거나 등등 무엇을 하든 하루 24시간 내내 진리에 대해 명상하며 분투하는 자는 그의 존재 전체를 진리로 채울 수 있을 것임이 분명하다.

어떤 사람의 심정에서 진리의 태양이 그 모든 영광 속에서 작열한다면 그는 감춰져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을 사용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가 발설하는 일체의 말은 힘과 생명으로 가득해서 민중에게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진리는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진리는 비폭력ㆍ브라마차르야·불투도, 그리고 다른 규칙들을 포함한다. 다섯 야마(禁戒)를 별도로 언급한 것은 오직 편의상 그런 것이다.

진리를 알게 된 후에 폭력을 범하는 자는 진리에서 멀어진다. 진리를 아는 자가 음탕할 수 있다는 것은 태양이 빛나고 있음에도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만큼이나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12월 31일 전 이렇게 완벽한 정도의 진리를 따르는 자가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스와라즈는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법으로 알고 순종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 빛은 손가락으로 가리킬 필요가 없다. 진리는 그 자신의 빛으로 빛나고 있음을 스스로 증명한다. 이 사악한 시대에 그렇게 완벽하게 진리를 따르기란 어렵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안다…우리는 오직 성실해야 한다. 짐짓 진리를 따르는 시늉만 해서는 효험이 없다. 우리가 1/10루삐 정도만 진리를 따르더라도 상관없지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진리여야 한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작은 양의 진리에 어떤 경우에도 고의적인 거짓이 섞여서는 안 된다. 이런 거룩한 야즈냐(제사)에서 나의 정직한 소망은 우리 모두가 진리를 원리의 문제로 따르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16)”

설명이 필요 없는 대목이며, 이 글에서 이것만 남아도 된다. 우리는 진리만을 따른다면 당연히 육신을 입고서도 해탈할 수 있다. 하지만 평생 진리 실험을 한 간디조차 진리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자신에게 허위가 남아 있음을 자각한다고 했다. 간디는 진리에 비폭력이 필수적이라고 믿었지만, 육신으로 살아가는 한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가슴 아프게 자각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으로 구도자로서의 결의를 또 다지는 것이다.

자신이 망나니임을 알면서도 구도자의 초심을 잃지 않는 것, 내가 성실하기만 하면 나라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확신으로써 행위를 하는 것, 그것이 재가자의 의무가 아닐까? 재가자의 주인 의식도 거기에 있을 것이고, 해탈도 거기에서 멀지 않을 것이다.

결론

재가자로 살아가면서 내 것을 축적하고, 민족주의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부처님은 이런 행위 아래에 탐욕(貪)과 분노심(瞋)이 가로 놓여 있다 하고, 인류에게 이런 탐진의 불을 끄고 민족, 국가, 종교를 넘어가면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가 세상을 (잠시) 버린 데에는 전 세상의 불을 단번에 끄기가 어렵다는 판단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추종자를 모아서 승원을 설립했다. 우리는 재가자이면서 불도를 닦기로 했다. 우리는 『기따』의 까르마 요가 사상과 간디의 실천을 보면서, 산 속의 선사, 선방의 수좌 이상으로, 그리고 염불하고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사람 이상으로, 성실하게 살아야 함을 알게 되었다.

재가자는 세상에 대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하고, 정치와 경제 등 사회적으로 커다란 이슈―전체의 문제이면서 개인의 심신에도 큰 영향을 주는 것―에도 진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재가자는 재국(在國)자, 나아가 세계 시민이기도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이라는 현장에서 살아가는 재가자의 급선무는 무엇일까? 먼저 열기를 좀 식혀야 한다. 2002년 이후, 우리는 정치 과정과 월드컵을 거치면서 평균 체온이 38도 쯤으로 상승했다. 울긋불긋한 색깔 아래에서 편 갈라 우리 편에 대해 환호하고 상대편을 혐오하다 보니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한 동안 민족, 국가, 국민, 국익, 붉은 함성, 그리고 줄기세포에 대해 쉽게 흥분하며, 그것들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원인과 그 결과에 대해 무지했다. 애착이 강해지면 혐오와 분노도 강해져서 우리는 진리와 비폭력에서는 멀어지고 허위와 폭력에는 가까워진다. 대상이 진리와 비폭력일 경우를 제외하면, 열정 안에는 진리, 비폭력, 아뜨만, 브라만, 해탈, 열반 가운데 어느 것도 없다. 월드컵 축구를 상대편과 함께 즐기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스포츠 내셔널리즘으로 치닫게 되면, 우리는 정말로 축구(蹴球)에 미친 바보 축구(畜狗)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선정적인 매체와 독선과 허위의 정치가들에 속지 않기 위해, 그리고 성찰적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라도, 눈은 반쯤만 뜨고 귀는 반만 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참선의 용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야 붉은 색깔에 눈멀고 붉은 함성에 귀먹은, 영락없는 국민·중생의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의무 수행이 재가자가 살아가는 이유라면 해탈의 소망이 따로 필요할까? 설사 그런 소망을 품는다고 해도, 해탈의 기준을 하향 조정하기 전에는 금생에 해탈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불가능하다고 해도 낙담할 필요는 없다. 성실하게 살다 보면, 평안과 평화를 얻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대 불교사에 가장 유명한 까르마 요가 수행자는 만해 한용운(1879~1944)일 것이다. 그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신분으로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오랫동안 싸우다가 「나는 왜 중이 되었나」(1930)라는 짧은 회고담을 쓴 적이 있다. 말미에 나오는 ‘영생’과 ‘둥글고 편한 마음’ 정도가 우리 재가자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위안이 아닐까?

“그러면 나는 승려 30년에 무엇을 얻었나?…안국동 법당 곁에 부처님을 모시고 일석(日夕) 생각함에 나는 결국 영생(永生) 하나를 얻은 것을 느낀다. 어느 날 육체는 사라져 우주의 적멸과 함께 그 자취를 감추기라도 하리라. 그러나 나의 마음은 끝없이 둥글고 마음 편한 것을 느낀다.17)”

허우성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하와이대학교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다. 미국 뉴욕주립대학 학술진흥재단 강의파견 교수를 역임하였고, 일본 경도대학교 종교학 세미나 연구원, 동경대학교 외국인 연구원을 지냄, 가산불교문화연구원 전문연구위원, 일본사상사학회 부회장 및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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