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사유와 공능 인정한 문장가

1. 머리말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민족문학과 민중문학을 소중하게 여기고 소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집필하는 한편, 철학적 수필집 《서포만필(西浦漫筆)》을 남겨 한국지성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특히 기존 학문사상의 절대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합리적인 태도로 지식을 재구축하려고 했다는 점, 거대 담론의 기성관념을 동어반복하지 않고 사실관계를 따져 해부적인 시각을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사상사의 큰 전회를 이루었다.

본관은 광산, 아명은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淑)으로, 김익겸의 유복자,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아우, 숙종의 초비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김장생의 증손이어서 가학(家學)의 연원이 있었다. 송시열이 증조고 김장생의 문인이었으며, 형 김만기가 왕실의 외척이었으므로, 그 자신도 서인 당파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현종 말 복제(服制)로 인한 예송 논쟁이 숙종 때까지 계속되어 서인 중심의 조정이 남인 중심으로 바뀌어가는 무렵에 서인의 당론을 주장했다.

하지만 상, 하권으로 분권된 《서포만필》은 경문의 역사적 사실을 논증하고, 불교와 정주학의 관계를 검토하며, 조선의 역사지리를 고증하고, 국난의 경과를 고찰하며, 민족문학의 여러 양태를 개괄하는 등 다양한 주제의 논문들을 수록하고 있다. 만록의 글쓰기를 통해 김만중은 권위적 언설로서 인용되어왔던 《통감》을 사실 자료로 전환시켰고, 《주자어류》를 치밀하게 읽어서 주자의 학문 방법을 비평했으며, 유학의 틀 속에 머물지 않고 불교의 논리를 참조하여 마음의 문제를 탐구했다. 특히 정주학의 논거를 비판하고 불교의 사회적 기능을 긍정했으므로, “그 강론의 말이 선유와 차이가 있고, 석씨(불교)의 설이 범람하는 듯하다”
는 의혹을 받았다.

김만중은 어머니를 통해 불교에 접했고, 그 접촉을 통해 불교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가지게 된 듯하다. 이하, 필자 역주의 《서포만필》(문학동네, 2010)을 기초로, 김만중의 불교론을 개괄하기로 한다. 원문은 생략하고 필자의 번역문만 든다.

2. 김만중의 안맥(按脈) 사유방법론

김만중은 《서포만필》 상권 52칙에서, 정주학이 ‘《대학》의 책을 따라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란 책을 가지고 자기 설을 입증하려 한다’는 점을 비판하고, 관념의 반복보다 학문의 실질을 중시했다.

주자가 강덕공(江德功)에게 답한 편지에도 말하길, “격물의 학설은 정자(程子)가 상세히 논했습니다. 내 변변치 않은 학설은 실은 이 뜻에 근거한 것입니다. 나는 15, 6세 때에 처음 이 책을 읽고 격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오락가락한 지가 30여 년이 넘었는데, 요즈음 실제의 용공처(用功處)에서 찾아보고서야 비로소 이 설이 적당함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대저 격물의 의미는 정자가 이미 상세히 언급했는데도 주자는 성인에 가까운 인물로서 30여 년이나 지난 뒤에 실지에서 용공(用功)함으로써 가까스로 터득할 수 있었다. 나는 혼미하고 침체된 소견으로 애당초 오랜 세월에 걸친 용공도 없고 자의와 문세를 가지고 뜻을 구하여 터득하려고 했으니, 지극히 우둔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격물이란 두 글자를 읽어 전혀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고서 수신·정심 등의 글자와 똑같이 한 가지 예로 보고 간과하고 있으니, 대단히 안일한 것 같다. 대개 정주의 학문은 《대학》이란 책을 따라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대학》이란 책을 가지고 증명할 따름이다.    

김만중은 격물을 궁리로 등식화시키는 주자학자의 설을 배격하고, 스스로의 학문 자세에 대해서도 반성을 했다. 《서포만필》 상권-92조에서는 사유와 학문에서 ‘스스로 맥을 짚어보는(自按其脉)’ 방법을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장계곡(장유)이 〈인심도심설〉을 지어 나정암(나흠순)을 정주(程朱)와 같은 반열에 둔 것은 아마 지나친 듯하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서를 할 때 마치 의술을 배우듯이 단지 《맥결》만 읽고 자기의 삼부는 짚어보지 않으면서, 정주의 말을 고찰해 낼 수 있으면 곧 격물하여 치지가 되었다고 여긴다. 선배들 가운데 거유들이라 해도 종종 이와 같을 따름이다. 계곡의 보는 바는 비록 착오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자신이 스스로 맥을 짚어본 자이므로, 얼추 뇌동하는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서포만필》 상권 49칙에서 김만중은 지식체계의 구축과 관련하여 자신의 기본태도를 말했다.

주자는 《시집전》에서 여러 유학자의 견강부회한 내용을 제거해 버리고 본래의 모습을 곧장 회복했으니, 이른바 만고의 쇄신을 가져왔다 할 만하다. 그러나 구설을 배격한 것은 분개 질투가 너무 지나쳤다. 추(鄒)·노(魯) 때부터 시를 논한 것이, 이를테면 ‘비현경지(不顯敬止)’는 자의(字義)와 관련해서, ‘융적시응(戎狄是膺) 형서시징(荊舒是懲)’은 본지(本旨)와 관련해서, 원래 정설이 없었다. 사람이 그 말단을 따르더라도 나는 그 근본을 찾고, 사람들이 편벽된 설에 만족하더라도 나는 완전함을 거두고자 한다면, 또한 양존(兩存)한다고 해서 무어 해가 되겠는가? 불교 서적에 이르길, “오백 나한들이 각자 자기들의 뜻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부처님께 묻기를 ‘누가 부처님의 뜻을 잘 터득했습니까?’ 하니, 부처님은 ‘모두가 내 뜻은 아니다.’ 하셨다. ‘그렇다면 부처님께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닙니까?’ 하니, 부처님은 ‘비록 내 뜻은 아니지만, 논한 바가 모두 선하여 세상의 교훈으로 삼을 만하니 공은 있고 죄는 없다.’ 하셨다.” 이 말이 오히려 통한다.

김만중은 구체적 증거가 없는 사실에 대하여는 이설을 병존시키는 양존(兩存)의 방식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또 오백 나한의 이야기를 인용한 데서 나타나듯, 사실의 진위보다는 진리의 효용적 가치를 더욱 중시했다.

3. 김만중의 유·불·도 소장(消長) 이론

유학자로서 김만중은 왕안석과 정이가 불교를 철저히 배격하지 못한 것을 비판했다. 즉, 《서포만필》 하-46조에서 김만중은 왕안석이 경학의 새로운 설을 내세우고 그것을 과거 과목에서 표준으로 삼게 했으나 과거 응시자들은 왕안석의 장구를 그저 암송만 하게 되었으며, 정이는 도학을 표명하면서 불교의 선학을 유학으로 변환시키려 했지만 오히려 유학자를 선학을 공부하는 자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는 한편, 하-76조에서는 주희의 벽이단(闢異端)을 옹호했다. 주희의 〈재거감흥(齋居感興)〉 20수 가운데 제15수에서는 불교에 대해 ‘탈사(脫蹝)’ 운운하고 제16수에서는 도교에 대해 ‘분서(焚書)’ 운운했다. 하나는 준절하고 하나는 완곡하므로, 주희가 도교를 허용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있었다. 또 주희는 《주역참동계고이》를 짓기도 했다. 하지만 김만중은 당나라 무종이 회창 연간에 불교를 탄압하고 송나라 휘종이 선화 연간에 도교를 배척했듯이, 주희도 불교와 도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준엄하게 배척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김만중은 주희의 불교 비판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다.

주희는 《주자어류》 권126 〈석씨〉에서 《원각경》의 “사대(四大)가 분산하거늘 망령된 몸뚱이가 어디 있으랴!”라는 말이 《열자》와 비슷하다고 보았고, 후한 때 들어온 《사십이장경》만 인도의 본래 불경이고 《유마경》은 남북조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김만중은 《서포만필》 상-104조에서, 《사십이장경》이 처음 한문으로 번역된 불경들이고, 불교 연구가 심화되면서 다른 불경들도 차례로 번역되었으며, 《유마경》은 이미 동진 시대에 존재했다고 추정했다. 또한 《세설신어》 〈문학〉에 보면 은중군(은호)이 폐출당해 동양(東陽)으로 가서 《유마경》을 보고 ‘반야바라밀’이 너무 많은 것을 의심했다는 사실, 《신수신기》 〈강하영모연(絳霞映暮煙)〉에서 축법사가 북조 중랑장 왕탄지를 위해 사생·죄복·보응의 설을 자신의 죽음으로 증명했다는 사실, 동진 때 고개지가 364년(흥녕 2) 건강(남경) 와관사 벽면에 유마상을 그린 사실을 들어 불교의 전래가 통념보다 빠르다고 논했다. 김만중은 중국에서 이루어진 불경이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주희가 불교사상의 기반인 불경의 존립 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반론 논거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다. 

김만중은 《서포만필》 하-1조에서, 불교의 정법·상법·말법의 시기를 구체적인 역사 시간에 배당하여 불교와 유교의 성쇠를 논했다. 《조당집》 권1 제7 〈석가불〉에서 말하듯 석가가 주나라 목왕 임신년에 죽었다는 설에 근거하여 추측하면, 정법 천 년은 한나라 광무제 때에 해당하고 상법 천 년은 송나라 인종 때에 해당한다고 했다. 송학이 선종에서 변하여 이루어졌다고 보았으며, 상산 육구연과 양명 왕수인의 사상이 말법의 시기를 예시한다고 파악했다.

선종의 6조(달마·혜가·승찬·도신·홍인·혜능)와 선가의 5종(위앙종·임제종·조동종·운문종·법안종)이 모두 상법 천 년의 기간에 있었다. 송나라 이후 불법이 쇠퇴하여, 선이 변하여 유교가 되었으며, 유작·사양좌·장구성·육구연 등의 시기가 바로 이 말법에 해당한다. 그리고 금계(육구연)와 여요(왕양명)의 학문은 아마도 천지와 더불어 종말을 같이할 것이다.

《서포만필》 하-2조에서는 역사적으로 볼 때 도교·불교·유교가 서로 연환하면서 소장(消長)해 왔다고 논하고, 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유학자들이 세상을 교화하고 경영하는 것은 보살들의 현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하-28조에서는 성리학과 선학을 소장의 관계로 파악하고, 선학의 영향을 받은 성리학은 결국 불교적 요소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지 않을 수 없으리라고 예견했다. 단, 김만중은 유·불·도가 역사적 기능 면에서 각각 부족한 면이 있다고 했다. 《서포만필》 상-44조는 도교·불교·유교의 근본 특색과 변질을 다음과 같이 논했다.

방사는 도사(禱祀)[기도]와 황백(黃白)을 근본 특색으로 하고, 불교 무리는 탑묘와 재계를 근본 특색으로 하며, 유학자는 정삭(역법)·복색·명당·벽옹(태학)·봉건·정전·주관(육관)·육형(형벌) 등을 근본 특색으로 한다. 진시황과 한나라 무제는 방사의 근본 특색을 이용했고 왕망과 왕안석은 유학자의 근본 특색을 이용했다. 그러다가 궁색해진 연후에 황백은 연단 제조로 변하고, 재계는 선정(참선)으로 변했으며, 주례는 격물·치지·성의·정심으로 변했다. 논리를 세움이 심원하고 교묘해 이를 설파할 수는 없지만, 실은 모두가 저쪽에서 궁색하게 되자 이쪽으로 도망했을 뿐이다. 《한서》에 이르기를, “왕망은 제도를 정비하면 천하가 저절로 태평할 것이라 여기고 예악을 제작하고 육경의 설을 강론해서 부합시키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느라, 급히 서둘러야 할 정무를 처리할 겨를조차 없었으므로 결국 패망하고 말았다”고 했다.

왕망의 일은 정말 천고의 웃음거리이다. 하지만 한나라 이래로 유자의 설이 거개가 이와 같았다. 비록 정이천(정이) 또한 (〈춘추전서〉에서) “덕이 우·탕에게 미치지 못하더라도 하·은·주 삼대의 정치를 이룩할 수가 있다”는 설을 주장했으니, 그 나머지야 알 만하다. 호인(胡寅)은 말하기를, “양나라 무제의 패망은 아마도 하늘이 경계했던 듯하다”고 했다. 뒤에 사람들 가운데는 아직도 그 잘못을 모르고 오히려 이를 따라서 논리를 세워 자기를 해명하려 한 자도 있으니, 또한 그들을 어떻다 해야 하겠는가? 왕망의 경우는 역시 하늘이 경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거늘 송나라 신종과 왕안석도 《주례》로 나라를 그르쳤는데도, 후대의 유학자는 또 이를 따라 논리를 세웠으니, 역시 탄식할 만하다.

유학은 《주례》의 이상 제도를 근본 특색으로 하며, 거기서부터 송나라 성리학의 격물·치지·성의·정심의 설이 변화되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주례》는 왕망이 받들어 정치 제도의 기본 이념을 제공하게 되었지만, 실상 한나라 유학은 그 틀을 벗어나기 어려웠고, 그 후의 유학도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다. 김만중은 도교와 불교가 근본 특색에 결함이 있듯이 유학 역시 근본 특색에 결함이 있었다고 본 것이다.
《서포만필》의 상-45조에서 김만중은 불교·도교·유학의 생사관을 비교하면서, 삼교는 각각 스스로 추구하는 지향과 실제 양상 사이에 모순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말했다. 석씨와 노씨는 죽음과 삶을 동일시한다고 표방하지만 그 둘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는 면이 있다. 이 점에서 구양수가 《문충집》 권139 집고록발미 6 〈당화양송(唐畵陽頌)〉에서 “석씨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노씨는 삶을 탐한다”고 지적한 것이 옳다. 그런데 그 양쪽의 관점에서 보면 유학은 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명예를 좋아하는 측면이 있다고 김만중은 환기시켰다.

김만중은 귀신의 존재를 믿었으나, 귀신을 모시는 방법에 대해서는 유교의 제사와 불교의 천도를 모두 긍정했다. 구준(丘濬)의 《대학연의보》 권51 〈치국평천하지요(治國平天下之要)〉 ‘가향지례(家鄕之禮)’에 보면, 사마광은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지옥이라는 것은 선을 권하고 악을 징치하기 위한 것이다. 상례를 지극히 공평하게 행하지 않는다면 귀신이라 해도 어찌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김만중은 《서포만필》 상-101조에서 사마광의 이 견해를 수용했다. 그런데 《이정유서》 권15 ‘입관어록’에 보면, 정호가 국가의 기천영명(祈天永命, 영구한 생명을 하늘에 기도함), 도가의 장생구시(長生久視, 오래도록 삶), 유교의 입어성인(入於聖人, 성인의 경지에 들어감)은 이치상 모두 같다고 한 말이 실려 있다. 《서포만필》 상-102조에서 김만중은 정호의 설을 수용하면서, 망자를 제사 지내는 방식으로서 유교의 제사와 불교의 천도를 모두 인정했다. 《서포만필》 하-24조에서는 한유가 〈논불골표〉에서 불교를 혹신한 제왕들이 횡액을 당했다고 논하고 주희가 〈산릉소〉에서 송나라 태조의 산릉이 북향이어서 후사 황제들에게 재액이 있었다고 논한 것을 정면 비판했다. 불교의 흥멸과 산릉의 향배가 제왕가의 운명에 간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것이다.    

4. 김만중의 마음 이론과 불교사상

김시습은 마음에 관한 논의에서 불교사상을 적극적으로 평가했다. 《서포만필》 상-64조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맹자》 〈고자·상〉의 ‘우산지목장’은 “사람에게 보존되어 있는 것도 어찌 인의의 마음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마는, 사람이 양심을 놓아버린 것이 마치 도끼로 산의 나무를 날이면 날마다 베어가는 것과 같으니, 산의 나무가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고 공자의 “붙들면 있고 놓으면 사라져서 출입이 정해진 때가 없으며, 그 방향을 알 수 없는 것은 오직 사람의 마음을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라고 한 말을 인용했다. 북송 때 범조우의 딸은 《맹자》의 이 조존장을 읽고, “맹자는 마음을 알지 못했다. 마음이 어찌 출입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정이는 이 말을 듣고 “이 여자가 《맹자》는 알지 못했지만 마음은 제대로 알았다”라고 했다. 주희는 “범조우의 딸이 마음은 알았지만 《맹자》는 알지 못했다. 이 여자는 마음이 실되어 혼란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출입이 없다고 말한 것인데, 다른 사람에게는 출입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는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남의 고통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장유는 〈이천과 주자가 인심의 출입 문제를 논함(伊川朱子之論人心之出入)〉에서, 마음이 출입한다는 말은 마음이 고요할 때도 있고 움직일 때도 있음을 말한 것일 따름이라고 전제하고, 주희가 “범조우 딸이 자기에게 혼란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경우 마음이 출입함이 있음을 모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마음이 실제로 출입한다고 여긴 것이므로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또 김만중은 범조우 딸의 ‘마음은 출입하지 않는다’는 설이 《능엄경》에 근거하여 일정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보았다. 《능엄경》 권1에 이러하다. “아난이 부처에게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저는 듣자니 부처께서 문수 등 제법(諸法)의 왕자들과 실상(實相)을 논하실 때, 세존께서도 역시 마음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바깥에 있지도 않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생각하건대 안으로는 볼 것이 없고 바깥은 알 수가 없습니다. 안으로 알 수가 없으므로 안에 있다는 것은 성립하지 않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기에 바깥에 있다는 것은 뜻이 성립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서포만필》 상-65조에서 김만중은 주희의 인심도심설을 비판했다.

주자의 〈중용장구서〉에 “인심이 도심으로부터 명령을 들으면”이라 했는데, 이 말 한 마디가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앞에서 “마음의 허령지각은 하나일 뿐이다”라고 했으니, 도심과 인심이 어찌 두 가지 마음이겠는가? 이를 임금에 비유하면, 도심은 마치 임금이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보거나 강론하는 때와 같고, 인심은 잔치하는 동안이거나 한가롭게 놀며 즐기는 때와 같으니, 실제로는 한 사람의 몸이다. 만약 인심이 도심으로부터 명령을 듣는다면, 이것은 잔치를 하는 임금이 조정 보는 임금에게 명령을 듣게 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바야흐로 그가 명령을 들을 때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모르겠다. 지금 이것을 두고, “의리에 맞는 마음을 항상 온몸의 주인으로 삼아서, 형기에서 때때로 발하는 것(기)이 의리로부터 명령을 듣지 않는 것이 없게 하면”이라고 풀이한다면 다소 분명해 보일 듯하나, 주자의 의도가 과연 이와 같은지는 알 수 없다. 대개 사람의 몸 안에서는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 같을 때가 있게 마련이다. 방편적으로 입언해서 사람들을 쉽게 깨닫도록 하는 것 역시 하나의 방법이다. 그 방편이란 석씨의 ‘마음으로 마음을 살핀다’는 설인데, 이것은 본시 이미 주자에게 배척당했던 것이다. 마음으로 마음을 살핌은 자기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스스로 검속한다는 것이다. 인심이 도심으로부터 명령을 듣는다는 것은 자기 마음이 자기 마음으로부터 검속받는다는 것인데, 그 둘이 서로 차이가 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김만중은 주희의 도심을 의리지심(義理之心), 인심을 발어형기자(發於形氣者)로 간주했다. 마음의 발(發)에 두 근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이의 설과 유사하다. 이이는 〈우계 성혼에게 답하는 첫 번째 편지(答成浩原其一)〉에서 “마음은 하나인데 도심이라고 하고 인심이라고 하는 것은 성명(性命)과 형기(形氣)의 구별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情)은 하나인데 사단이라고도 하고 칠정이라고도 하는 것은 사단은 오로지 이(理)로써 말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를 겸하여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심과 도심은 서로 겸할 수 없으며 서로 종시(終始)가 될 뿐입니다.”라고 했다. 주희는 〈중용장구서〉에서 “인심은 형기(形氣)의 사(私)에서 나오고 도심은 성명(性命)의 올바름에서 근원한다.”라고 했지만, 이이는 ‘혹생혹원(或生或原)’이 마음 발생의 두 소종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서포만필》 상-79조에서는 상산 육구연의 심학이 정이의 설과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상산 육구연은 극기복례에 대해 설명하기를, “사욕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별도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 따로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주자에게 선학이라 하여 굳이 배척당했다. 그러나 정자는 안연이 즐거워한 바를 논해 “만약 즐거워할 만한 도가 있었다면 안연이 아닌 것이다”라고 했고, 《예기》 〈제의〉의 ‘치재’에 대해 논해 “재계할 때 (고인의 평소 모습에 대해) 생각을 하면 안 된다”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주장을 육구연의 《상산어록》 속에 둔다면 어떻게 변별할 수 있겠는가? 주자는 정자의 설에 대해 “이윤이 요순의 도를 즐거워했다”는 말을 인용해 운운한 바가 있으니, 역시 정자의 설을 옳다고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주희는 《주자어류》 권124에서, “육상산이 극기복례에 대해 설명하기를 ‘자기의 사욕이나 이욕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극복해야 하는 것이 따로 있다’고 했다.” 육구연의 사상은 ‘심즉리’로 개괄된다. 곧 ‘마음’을 혼연한 일체로 파악하며 그것이 그대로 이치라는 것이다. 육구연의 학설은 정호에서 출발하며, 이것은 정이-주희로 이어지는 ‘성즉리’와는 대치된다. 정호가 “착하고 악한 것이 모두 하늘의 이치”라고 말한 것처럼 육구연도 천리와 인욕을 구분하지 않고, 본래의 마음을 자각하고 ‘먼저 그 중요한 바를 세우는 것’을 실천원리로 내세웠다.

1175년, 주희의 친구 여조겸의 중개로 강서성 아호사에서 주희와 육구연이 담론했으나 의견의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특히 육구연이 극기복례를 설명하면서 “사욕을 이겨 없앤다는 뜻이 아니다”라고 논한 것을 두고 주희는 그것이 선불교에 물든 결과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정이는 안연의 즐거움에 대해 논하며 “즐거워할 만한 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고, 치재의 설을 풀이해서 “재계해 사려를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했다. 김만중은 이러한 논설은 육구연의 심학과 그리 다르지 않다고 했다.

《서포만필》 상-100조에서는 불교의 살생 금지와 유교의 인을 유사하다고 보았다. 북송의 장구성(張九成)이 살생을 경계해 게를 먹지 않자, 양시(楊時)는 주공이 《맹자》 〈등문공·하〉에 나오듯이 이적을 병합하고 맹수를 몰아낸 사실을 들어, 인간과 기타 생물의 경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장구성을 타일렀다. 주희는 《주자어류》 권101에서 양시의 말이 적절하지 못하다고 여겨, 《주역》에서 복희가 생물을 포획하는 그물을 짰다고 한 기록과 《맹자》가 군자는 다만 푸줏간을 멀리한다고 했던 말을 인증해서 장구성을 계도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김만중은 경전에 기록된 성인의 언행은 시대에 대응하는 논리를 따른 것이어서 만고불변의 준칙은 될 수 없다고 보았다. 불교가 살생을 금한 것도 보편적 윤리로서 누구에게나 강요할 수는 없지만, 거꾸로 인(仁)의 가르침으로서 부분적으로 긍정할 수는 있다. 이렇게 김만중은 진리의 절대적 우위성보다 사실의 역사성에 주목했다.

《서포만필》 상-83조에서는 불교의 진공묘유(眞空妙有)와 주돈이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했다.

불경이 비록 번다하지만, 그 요지는 진공묘유라는 네 글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규봉종밀은 “진공이라는 것은 (현상적인) 유(有)를 어기지 않는 공(空)이고, 묘유라는 것은 본래 속성인 공(空)을 어기지 않는 유(有)이다”라고 했다. 이 말은 주염계(주돈이)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라는 말과 매우 비슷하다. 주자는 “(정호가 장재에게 답장으로 적은) 〈정성서(定性書)〉의 성(性)이라는 글자는 불교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고 했다. 대개 성은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선가에서는 작용을 성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들의 책에는 정성비구(定性比丘)라는 말이 있다. 정자와 장횡거(장재)의 학문은 선가에서 변용되어왔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이어받고서 고치지 않은 듯하다. (《육조대사법보단경》 〈기연품〉에 나오듯이) 와륜선사는 게송에서 “와륜은 기량이 있어, 능히 모든 생각을 끊어버리는구나. 경계(境界)를 대하여서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보리(菩提)가 날마다 자라나네”라고 했다.

혜능(慧能)은 그것을 고쳐 말하기를, “나는 기량이 없어, 온갖 생각 끊지 못한지라. 경계를 대하면 마음이 문득 일어나니, 보리가 어떻게 자라겠는가!”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장횡거와 정자의 정성(定性)의 지취이다. 주자는 나종례(羅從禮)[나박문(羅博文)]에게 보낸 답서(《회암집》 권3 속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래 이 일과 선학은 매우 비슷해서 터럭 끝을 다투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 터럭 끝이 도리어 심히 자리를 차지한다. 지금의 도학자는 선학을 알지 못하고 선학자 또한 도학을 알지 못하면서 서로 밀치고 때리고 하여 도무지 병통이 있는 곳을 찌르지 못한다. 아무래도 가소로울 뿐이다.”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규봉종밀은 일체를 공이라고 해서 부정했을 때 모든 사물은 그대로 긍정되어 묘유라고 말했다. 그런데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절대적 실체인 태극이 변화해 유형유상의 이기(二氣)와 오행이 나오고 그것이 다시 우주만물로 화하되, 그러면서도 태극은 무형무상의 무극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정호는 이른바 〈정성서(定性書)〉에서, 정성(定性)이란 실제로는 정심(定心)을 가리킨다고 보았다. 이 수양법은 맹자의 부동심 사상을 계승한 것이며, 도가와 불교에서 강조하는 심리수양의 경험까지도 받아들인 주장이다. 김만중은 불교의 ‘진공묘유’가 염계(주돈이)의 ‘무극이태극’과 같다고 보았으며, 정성은 불교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다. 불가와 유가는 근본원리가 같으므로 서로 배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덧붙였다.

《서포만필》 상-94조에서, 김만중은 안연·맹자·정자만 아니라 주희도 순수한 유교 사상가이며, 동중서·제갈량·사마광도 그다음으로 순수한 유학자라고 언급했다. 단, 노자와 불교의 설이 유행하고부터 유학자들은 그 설을 채택하고 함께 이용하게 되어, 성(性)을 이야기하고 심(心)을 논하는 것이 노자·불교의 사상과 뒤섞여 하나가 되어버렸다고 보았다. 《서포만필》 하-27조에서는 사대부-유학자와 불교의 관계에 대해 역사적으로 추적했다. 당나라 때 사대부들 가운데는 불교를 배운 자들이 매우 많았으나, 소우(蕭瑀)·두홍점(杜鴻漸)·원재(元載)·왕진(王縉) 등은 부처에 아첨하여 복을 빌었고, 백낙천(백거이)과 배휴(裴休)는 도달한 경지가 깊었지만 인과화복설에 편향되어 있었다고 판정했다. 송나라 때 이항(李沆)·왕차(王且)·양억(楊億)·부필(富弼)·여공저(呂公著)·조변(趙抃)·한유(韓維)·왕안석(王安石)·장방평(張方平)·유지(劉摯)·소식(蘇軾)·소철(蘇轍)·진관(陳瓘)·이강(李綱)·장준(張浚) 등은 불교의 청정을 근본으로 삼고 정력(定力)으로 제도하여 언론과 정사를 발휘했으므로 그 언론과 정사에는 탁월하여 볼 만한 것이 있었으며, 불교를 뒤섞어서 하나로 만들지도 않았다고 평가했다. 왕안석과 소식은 유학을 끌어다가 불교에 합했고, 정호·정이 문하의 사람들이나 육구연과 양간은 불교와 유교를 뒤섞고 말았다고 논평했다.

《서포만필》 하-34조에서 김만중은 서암화상(瑞巖和尙)의 ‘성성(惺惺)’과 사양좌(謝良佐, 1050~1103)의 상성성법(常惺惺法)이 같다고 보았다. 주희는 《주자어류》 권17에서 “우리 유학자들은 이 마음을 깨우쳐 무수한 도리와 호응하지만, 불씨는 공허하게 깨우쳐, 여기에 있기만 하고 더 이상 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김만중은 “구리거울 연마법이 다르다 해서 스승이 누구인지를 숨길 수는 없다”고 했다. 사실, 《명유언행록》 권2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마음은 거울과 같고, 경(敬)은 거울을 닦음과 같다. 거울을 잘 갈기만 하면 먼지와 때가 없어져서 광채를 발한다. 마음을 경(敬)의 상태로 두기만 하면 인간의 욕망이 소멸되어 천리가 밝아진다.” 이황은 역대 여러 성현의 명·잠·찬을 한데 모아 《고경중마방》을 엮었고, 〈답김돈서(答金惇敍)〉에서는 “평소 일이 없음은 본원성품을 함양하는 자리이다. 바깥으로는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정중히 하고 마음속으로는 하나를 주장해서 그때마다 깨어 있도록 하라.”고도 했다. 그런데 김만중은 바로 이 ‘상성성법’이 불교의 선종에서 왔으며, 그 사실은 결코 은폐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김만중은 유학 가운데서도 특히 정주학은 선불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우선 《서포만필》 상-80조에서는 정이와 선불교의 관계에 대한 주희의 설을 소개하고 그 설에 긍정했다. 주희는 《회암선생주문공문집》 권41 〈정윤부에게 답함〉에서 “소식과 소철 형제는 먼저 나았다가 뒤에 병이 들었고, 정호와 정이 형제는 먼저 병이 들었다가 뒤에 나았다”고 했다. 주희에 따르면, 처음에 불학은 존양 공부가 없다가 6조 혜능 때 이르러 존양 공부를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처음에 배우는 자들 또한 일찍이 신상에 나아가 공부를 한 적이 없다가 정이에 이르러 사람들에게 신상에 나아가 공부하는 것을 가르치게 되면서, 정이가 불교의 설을 훔쳐다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말하게 되었다. 김만중도 대개 이 설에 동조했다.

《서포만필》 상-84조에서는 정이 문하와 선불교의 관계에 대해 논했다. 《주자어류》 권18에서 주희는 “양시와 사양좌는 회수의 중류에서 좌우를 관망했으나, 유작(游酢, 1053~1123)은 회수를 넘어 오랑캐에 투항했다”고 비난했다. 김만중은 낙학(정호·정이의 학문)이 처음에는 선학에서 도움을 받고서도 나중에는 선학이 낙학에 크게 범람할까 염려한 나머지, 음탕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여색과 같다고 비판하는 경계를 시설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말류가 창궐하여 횡포(橫浦) 장구성(張九成, 1091~1159)과 금계(金谿) 육구연(陸九淵, 1139~1192)에 이르렀다고 서술했다. 김만중은 맹자·한유·구양수·정이·소옹 등 유학자들이 이단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했지만 “후대에도 항상 오랑캐의 화는 있었다”고 하여 불교와의 싸움이 만만찮았음을 지적했다. 사실, 주희도 15세 때부터 24세까지 10년 동안 불교를 공부했고, 24세 때 아버지의 동문 연평 이동(李侗)을 처음으로 만나 가르침을 받아 유학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 비로소 정이와 장재의 사유 방식을 계승해서, 불교의 이론이 유학의 사실구시(事實求是)의 태도만 못하다고 결론지었다.

《서포만필》 상-85조에서 김만중은 주희의 심학 체용론이 남선 지해종에서 나왔다고 했다.

왕세정(王世貞)은 만년에 불교를 공부해 우바이(upasika) 도정(燾貞)[담양대사(曇陽大師)]을 사사했다. 그는 (《담양대사전적》에서) 스승의 말이라 칭하며 이르기를, “육상산은 진실로 선을 추종했지만, 주자도 역시 오십 보를 도망가고서 백 보 도망간 자를 비웃는 꼴이다”라고 했다. 아마도 주자가 처음 도겸(道謙)을 좇아  영명(靈明)의 마음을 깨우쳤으니, 그 마음의 체용을 논한 것이 남선 지해종[5조 홍인의 문하에서 6조 혜능과 신수 북종이 나뉜 후 혜능의 제자 신회가 지해(知解)를 위주로 하여 지해종을 열었다]에서부터 나왔으며, 낙민파(정주학파)의 존양 공부도 조계종에서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주자는 선종과 육학(육상산의 학문)을 몹시 엄하게 배척했고, 또 정이와의 관계 때문에 소식을 몹시 증오했다.

《무문관》 제23칙에 보면, 혜능은 대유령에서 몽산혜명(蒙山惠明)에게 “선도 생각하지 말고 악도 생각하지 마라. 바로 그런 시기를 당해 있을 때 어느 것이 명상좌의 본래면목일까?”라 했고, 이에 명상좌는 즉각 깨달았다고 한다. 《서포만필》 하-61조에서 김만중은 정호·정이 문하의 나종언이 “고요한 중에서 희로애락이 아직 나타나지 않은 중간을 보라” 한 것이 혜능이 말과 유사하되, 이정 문하의 ‘보라(看)’는 글자는 병폐라고 지적했다. 혜능의 뜻은 희로애락의 경지를 찾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이 존재하지 않았던 본래면목, 즉 ‘무념’ 또는 ‘초월’의 경지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종언의 가르침은 혜능의 공안을 번안하기는 했으나 선학과는 별도로 ‘희로애락의 중을 살피며 유지하며 살라’고 가르쳤으니, 혜능이 선의 경지를 말한 것과 달리 행동 지침을 말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만중이 정주학이 선종에서 왔다고 파악한 관점은 적확하다고 생각된다.

《서포만필》 하-64조에서는 정주학의 함양치지와 불교의 정혜법문이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불교의 정혜법문은 그 정확함과 오묘함이 유학의 서적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이지만, 낙건 학자들의 함양치지 공부가 실은 이와 비슷하다. 그러나 《시경》 《서경》 《논어》 《맹자》만으로는 함양치지가 유학에 있었다고 증명할 수가 없다. 만약 《중용》의 계신이나 《대학》의 격치를 합한다면 이에 해당할 만하겠다. 하지만 격물의 글자 뜻이 명확하지 않았으므로, 주자는 평생의 정력을 들여 터진 곳을 깁고 새는 곳을 틀어막아 겨우 그 문호를 성립시켰던 것이다. 그렇거늘 왕백(王柏)이나 방효유(方孝孺) 등 여러 사람들은 불교의 정혜법문이 함양치지의 공부와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정말 생각을 깊이 하지 않은 일이다. 정말로 노재나 방정학의 설과 같다면, 장차 낙건의 학문은 어디에서 전승의 법인을 찾겠는가?

김만중은 정주학의 심학과 공부 방법이 불교에서 나온 것이 분명하므로 그 구별에 진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실지에서의 공부를 중시하라고 권했다.

5. 김만중의 조선불교문화 긍정론

《서포만필》 하-25조에서는 불교의 중국 유입 시기에 대해 상세히 언급했다. 불교인들은 불교의 중국 전래시기를 위로 올려 잡음으로써 불교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김만중은 위중거(魏仲擧) 편 《오백가주음변창려선생문집(五百家注音辯昌黎先生文集)》 권39 〈논불골표〉의 주석을 이용하여, 성제·애제 때 불교가 중국에 들어왔다고 논증하고자 했다.

주희는 운각의 유무에 따라 화(華)의 언어와 이(夷)의 언어를 양분하고, 불교의 게송 가운데 운각이 있는 것은 모두 중국 사람이 거짓으로 지어냈다고 보았다. 김만중은 《서포만필》 상-103조에서 주희가 《주자어류》 권126에서 《전등록》에 나오는 서천조사(보리달마)의 게송에 운각이 있는 것은 중국인이 거짓으로 지어낸 것이라 보았다. 하지만 김만중은 운각의 유무를 가지고 중국 시와 외국 시를 구별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지배 이데올로기로 되자 후세 사람들은 앞선 시기에 불교가 우리 문화에 미친 영향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일이 많았다. 조선 초에 산릉에서 제사 지낼 때 소찬을 쓴 것은 불교식을 따른 것이었으나 후세의 유학자들은 그것이 소를 아끼기 위한 것이었다고 왜곡했다. 《서포만필》 하-52조에서 김만중은, 유학자들의 말대로 그것이 제사에 쓰일 소를 아끼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는 예 중에서도 큰 것을 버리는 것이 되므로 오히려 위태로운 일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서포만필》 하-3조에서는 중국의 표의문자와 서역·몽고·조선의 표음문자의 차별성을 논하고 그를 통해 표의문자인 한자의 독존적 지위에 대해 회의를 표명했다. 또, 불교는 온 세상에 널리 전파될 수 있었던 반면, 유교는 기껏해야 조선과 월남까지에만 전파될 수 있었는데, 그 까닭은 언어구조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보았다.

종밀(宗密)의 《원각경소》에 보면, “‘바라밀다’는 중국말로 ‘도피안’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러나 ‘바라’는 ‘피안’이라 번역하고 ‘밀다’는 ‘도’라 번역하므로, 원래는 ‘도피안’이라 한 것이 아니라 ‘피안도’라 한 것이다. 서축어의 어법은 먼저 체언을 쓰고 뒤에 용언을 쓴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면 ‘독경타종(讀經打鐘)’이란 것도 ‘경독종타(經讀鐘打)’라 한다. 이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어법과 비슷하다. 또한 외국의 인명이나 물건의 이름 같은 것은 모두 가(歌)의 운자(‘ㅏ’ 운)로 끝맺고 있다. 예를 들면 불경 중에 싯달타·라후라·아수라·구반다(鳩盤茶) 같은 어휘들이 그것들이다. 이적의 나라 이름에서 달단(타타르)·말갈·직랍(지나) 같은 것도 종성을 쓰지 않는다. 서양의 〈만국도〉에는 구라파·아세아 같은 것 등이 나오는데, 너무 많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인명을 부를 때도 반드시 ‘아’나 ‘하’로 끝맺는다.

생각건대, 중국 주위의 여러 나라의 언어에서 그렇게 끝맺지 않는 예가 없는 것 같다. 서역의 범어는 초성·중성·종성이 합해져서 글자를 이루므로 새로운 글자를 무궁하게 낳는다. 원나라 세조 때 서역의 승려 파사파가 그 문자를 변화시켜 몽고 글자(파사파 문자)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는 그 글자를 이용해 언문을 만들었다. 청나라에서도 청서(淸書)라는 것이 있는데, 체제는 비록 다르지만 조자의 방법은 같다. 여기서 동양과 서양은 이치상 통하지 않음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오직 중국만이 어세와 자체가 스스로 일가를 이루고 있어 이들과 매우 다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만국 가운데서 홀로 높은 이유이다. 그러나 불법은 사바세계에 행해졌거늘, 주공·공자의 책은 동쪽으로는 삼한을 넘지 못했고 남쪽으로는 교지(월남)를 넘지 못했다. 이것은 언어와 문자의 이치가 서로 통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한글이 파사파가 개량한 몽고 문자를 본받았다고 주장한 것은 추정이 잘못이다. 단, 민족어의 독자적 가치를 인식했다는 것 자체가 민족적 개별성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서포만필》 하-4조에서는 불교의 문화적 기능에 대해 긍정해서, 기자보다 불교가 우리나라의 문명화 과정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주장했다. 김만중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기자가 봉해진 나라이지만 뒷날 그 유풍이 없어졌는데, 동진 말에 아도가 우리나라에 와서 비로소 문자의 교육이 있게 되고, 그로써 우리 민족이 독자적인 문화를 지니게 되었다. 고려 말의 정몽주와 이색 등이 유교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던 것도 불교가 민족문화를 개화시켜 문풍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만중은 불교가 우리 민족의 생활과 문화에 깊이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언어의 기미’가 통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6. 마무리 

《서포만필》 하-12조에서 김만중은 신라 말 고려 초의 도선, 고려 말 조선 초의 무학대사에 얽힌 전설이 허탄하다고 비판했다. 도선(道銑, 827~898)은 당나라 승려 일행(一行, 683~727)에게서 불법을 전수받았다는 이야기는 최유청의 〈백계산 옥룡사 증시 선각국사 비명〉(《동문선》 권117)과 휴정의 〈답양창해서〉(《청허집》 권7)에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일행은 당나라 개원 연간에 《대연력》을 만든 사람이고 도선은 고려 태조의 아버지와 동시대 인물이므로, 시기적으로 200년 이상 차이가 난다. 또 석왕사의 연기설화에 보면 무학대사가 이성계의 등극을 예견하는 해몽을 했다고 하지만, 김만중은 이 전설이 비루하다고 비난했다. 뒷날 정조도 《홍재전서》 권15 〈안변 설봉산 석왕사비 병게(安邊雪峯山釋王寺碑幷偈)〉에서 해몽담은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김만중은 불교의 사유와 사회적 공능에 대해 긍정적인 논설을 많이 남겼다. 《서포만필》 하-59칙에서는 병자호란 뒤 사대부들이 환향녀의 처지를 동정하지 않고 순전히 ‘제 한 몸의 계책’만 도모했던 편협한 의식을 비판했다. 여성의 처지에 각별한 관심을 둔 것은 모친 해평 윤씨(1617~1689)의 영향이 물론 컸겠지만, 불교의 자비심을 사회현실에 투영한 결과이기도 하리라고 생각된다.
김만중은 정주학이 대체로 선학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으므로 그 사실을 철저히 구명하고 유학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유교와 도교, 예수교까지 모두가 불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종교·종파들의 차별상에도 불구하고 그 배후에서 원리적 동일성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서포만필》 하-71조에서 김만중은 한유가 〈독묵자(讀墨子)〉에서 “공자와 묵자는 반드시 서로 활용해야 하지, 서로 활용하지 않으면 공자와 묵자가 될 수 없다”고 한 말, 황간(黃幹)이 한유의 〈사설〉의 뜻을 미루어 밝혀 “지금 세상에는 공자가 없으므로 장저·걸닉이나 접여 같은 사람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고 했던 말 등을 상기시키면서, 불교와 노자를 배척하고 스스로를 성인의 무리에 갖다 붙이는 사람들은 맹자나 주자의 참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서포만필》 상-65조에서 김만중은 사람의 몸 안에는 마치 두 가지 마음이 있는 것 같을 때가 있어, 마음으로 마음을 살핀다는 불교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했으며, 그것이 곧 주자가 〈중용장구서〉에서 말한 ‘인심이 도심에게서 명을 듣는 것’이라고 했다. 정주학의 논리와 용어가 불가에서 연유했음을 밝혀내어, 속유의 불교 비판을 반박한 것이다.

학문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병폐는 순결주의다. 김만중은 유학자의 편협함을 선가의 편협함과 마찬가지로 함께 비판했다. 종파를 뛰어넘는 균형적인 감각을 지녔던 것이다. ■

 

 

심경호 /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교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졸업. 교토대학 박사학위 취득. 메이지대학 객원교수 역임. 저서로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 《조선시대 한문학과 시경론》 《한국한시의 이해》 《김시습평전》 《한시의 성좌》 등 다수가 있다. 시라카와 시즈카 동양문자문화상, 성산학술상, 우호인문학상, 연민학술상 등 수상. 현 고려대 한자한문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