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사 연구의 주춧돌을 놓다

1. 우정상의 생애와 학연

소산 우정상
疏山 禹貞相
1917~1966

소산(疏山) 우정상(禹貞相, 1917~1966) 선생은 동국대학교의 교수로서 해방 후 한국불교사 연구의 불모지를 개척한 1세대 학자였다. 그는 1917년 2월 6일 경상남도 사천에서 단양 우씨 덕춘(德春)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사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에 졸업하였고 다음 해인 1934년 통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런데 20세가 되던 1936년에 양산 통도사에서 구암(龜巖)을 은사로 득도하였고 출가자로서 학승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8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전통적 승려교육 과정인 사교과를 수료하는 동시에 통도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에 서울로 올라와 중앙불교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1941년에 졸업할 당시는 학교명이 혜화전문학교(惠化專門學校)로 개칭된 후였다.

우정상의 다양한 학업 편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식민지기 승려 교육기관의 제도적 변천 과정에 대해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근대적 불교 교육기관의 효시는 1906년 불교연구회에 이어 세워진 명진학교(明進學校)였다. 이 학교는 서울 동대문 밖 원흥사(元興寺)에서 문을 열었으며 현재 동국대의 전신으로서 한용운, 권상로 등이 신학문을 통한 불교유신의 꿈을 키웠던 곳이다. 이후 1910년 3월에 당시 통합종단 원종(圓宗) 측에서 고등전문학교 인가를 당국에 신청하였는데, 8월 한일합병(경술국치)이 된 후 총독부는 전문학교 대신 불교사범학교를 인가하였다. 한편 1914년에는 서울에 불교고등강숙이 설립되었는데, 전국 사찰의 우수한 승려들을 학생으로 모집하였고 교과과정은 조선 후기에 강원에서 사용된 이력과정의 사교과와 대교과를 그대로 채택하였다. 사교과는 《금강경》 《능엄경》 《원각경》 《대승기신론》이었고 대교과는 교학의 화엄, 선의 《선문염송》과 《전등록》이었다.

1915년 이후에는 총독부의 ‘전문학교규칙’ 및 ‘사립학교령’에 의해 승려 교육기관이 불교 중앙학림과 지방학림 체제로 개편되었다. 즉 지방의 보통학교-지방학림-서울의 중앙학림으로 이어지는 3단계 교육체계가 완비된 것인데, 전통 강원의 교육방식을 고수했던 불교고등강숙은 1920년에 폐지되었다. 이후 1928년에는 서울의 중앙학림을 대체하여 불교전수학교가 세워졌다가 1930년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승격되었고 1940년에는 다시 혜화전문학교로 교명이 바뀌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지방의 대규모 사찰에서 새로운 시대조류에 부응하여 보통학교와 강당을 세우는 일이 유행처럼 번졌다. 1915년 3월에는 전국 사찰에서 강당 55개, 학교 26개, 포교당 41개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2년 후인 1917년의 조사에서는 사찰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보통학교가 10개, 학생 수는 290명이었고 지방학림 10개소에는 학생 222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사찰에 설립된 전문 강원은 25개, 소속 승려 수는 543명으로 전통적 강원교육이 근대식 교육보다 비중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신식교육이 중시되고 더욱 활성화되면서 사찰 전문 강원은 점차 폐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1927년부터 다시 강원 재건의 움직임이 나타나 그나마 조선 후기의 강학 전통이 지속될 수 있었다. 우정상이 보통학교와 중학교를 나왔음에도 통도사 불교전문강원을 나온 후 서울의 중앙불교전문학교에 다시 들어간 것은 신식교육과 전통적 강원교육이 병행된 당시의 불교계 상황을 잘 보여준다.

한편 우정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 유학을 떠나 근대불교학적 연구방법론을 터득하였다. 즉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임제종(臨濟宗) 종립대학인 교토의 임제대학, 현재의 하나조노(花園)대학에서 선학을 배웠다. 그는 귀국 후 1946년에는 신설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다시 입학하여 해방 조국과 함께 대학생활을 새로 시작하였고 1950년에 졸업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치달아가던 1953년에 대학원에 진학, 1956년에 마쳤다.

해방이 된 1945년 이후 1950년대까지 한국의 학계는 제도적 기반 확대를 이루지 못했고 따라서 연구의 괄목할 만한 성장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불교는 ‘전통과 근대’의 어느 쪽에서도 주류적 지분을 갖지 못한 분야였고 다른 연구 분야에 비해 학계의 관심을 크게 끌지도 못했다. 불교가 쇠퇴하고 존립조차 어려웠다는 인식이 강했던 조선시대의 경우는 그런 경향성이 더욱 심하였다. 해방 후 1959년이 되어서야 조선시대 승군과 호국사상, 추사 김정희의 불교관, 다산 정약용의 유불교류를 다룬 본격적인 학술논문이 나왔을 정도였다. 1960년대 전반에는 승역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승려의 신분 및 경제 활동을 다룬 사원경제 연구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우정상의 호국사상과 남북한산성 의승 방번제에 관한 연구는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에 나온 조선시대 불교사를 개척한 선구적 업적이었다.

우정상은 1954년에 경기대학교의 부교수가 되었고 1955년 육군사관학교에 불교부를 창설하여 지도교수를 맡았다. 1960년에는 동국대학교의 부교수가 되었고 1963년에 교수로 승진하였다. 다음 해에는 1962년에 개소한 국내 최초의 대학부설 연구소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의 간사를 맡았고, 1965년에는 중앙도서관장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966년 8월 학자로서 한창때인 50세의 아까운 나이에 별세하고 말았다. 저서로는 유고집이지만 조선시대 불교사에 대한 선구적 연구들을 모은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 교양교재로서 불교의 교리와 수행, 용어 등을 쉽게 풀어 쓴 《교양불교》 우정상·김영태의 공저로 나온 《한국불교사》가 대표적이다.

2. 불교와 한국불교사 이해

불교학자로서 우정상의 면모와 학식은 그의 사후인 1987년에 나온 《교양불교》에서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저자가 재직했던 동국대 불교학과의 후배 교수인 김영태 선생이 쓴 것으로, 그는 저자의 유고집인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를 펴냈고 《한국불교사》를 두 사람의 공동명의로 출간했을 정도로 저자와의 학은에 충실히 보답하였다. 1986년 12월에 쓴 그의 머리말에 의하면, 저자는 동국대 교지인 〈동대시보〉(현재의 동대신문)의 보리수란을 처음부터 10여 년 이상 고정으로 맡았고 여기에 실린 불교의 가르침을 알리는 글들을 모아 《교양불교》라는 서책을 간행하기로 생전에 이미 계획하고 있었음을 밝혔다. 하지만 저자의 급작스러운 타계 후 자신이 20년간 그 책의 목차와 유고 뭉치를 간직해 오다가, 저자의 막내아들이 동국대 불교학과에 입학 후 군에서 제대하자 그에게 원고를 정서하여 교정을 보게 하였고 불광사 광덕 스님이 후원을 해주어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다는 전후 사정을 소상히 언급하였다.

이 책의 목차를 소개하면 1장은 경전의 장, 2장은 바라밀의 장, 3장은 진리의 장, 4장은 반야의 장, 5장은 가르침의 장, 6장은 화합의 장, 7장은 보살의 장, 8장은 해탈의 장, 9장은 부처님의 장이다. 불교의 사상과 수행의 제반 분야와 주제를 전체 9장, 총 174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처음 1장에서는 대장경, 각종 경전과 논서, 구법전과 승전, 다라니와 결집 등을 다루었다. 2장부터 9장까지는 인생고와 무상, 무아와 공, 바른 생활과 믿음, 업과 열반, 삼법인과 사성제, 인연과 반야, 보리와 진여, 사문유관과 초전법륜, 독화살의 비유와 염화미소, 선재동자의 구도와 일념, 예불과 귀의삼보, 보시와 참회, 범패와 범종, 유마거사와 달마, 원효대사와 의상조사, 대각국사와 서산대사, 불교의 자애사상, 한국불교의 당면과제 등 다양한 불교 개념과 주제, 인물 등을 망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의 불교 이해 수준과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각별한 노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우정상의 한국불교사 인식은 그와 김영태의 공저로 1969년에 나온 《한국불교사》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의 서문은 두 공저자의 지도교수였고 당시 한국불교문화연구원장을 맡고 있던 조명기 선생이 1969년 5월 20일에 썼다. 서문에서는 먼저 불교문화의 축적과 지리적, 민족적 특수성의 온축이라는 관점에서 불교의 한국적 전개를 간략히 설명하였다. 그는 불교가 고대 한민족의 고유한 특질인 조상숭배의 종교적 측면, 그리고 혈연에 의한 사회집단의 인륜적 측면에서 결합하여 삼국시대 이후 통일신라, 고려를 거치며 한층 더 고급문화를 발전시켰다고 평가하였다. 나아가 불교가 한국의 고유한 문화를 파생시키고 정신적, 신앙적으로 인도, 중국과는 다른 한민족의 특이한 불교를 확립해 왔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현대의 한국불교는 불교의 정신을 다시 세우고 불교학을 부흥시키는 데서 출발해야 하며 한국불교의 역사적 진면목을 밝히는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끝으로 이런 점에서 김영태 교수가 고 우정상 교수의 유고 일부를 정리하여 한국불교사 개설서를 내게 된 것은 한국불교의 내일을 위해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며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거듭 치하하였다.

공저자인 김영태의 머리말에서는, 우정상 선생의 유고 일부와 강의 노트를 중심으로 책을 간행하게 된 저간의 사정에 대해 소개하였다. 즉 우정상 선생이 한국불교사의 출간이 시급함을 평소 절감하면서도 겸손함으로 인해 선뜻 저술에 착수하지 못하다가 동국대에 함께 재직하게 되면서 자신이 그 저술을 도와드리게 되었고, 선생이 전체 구성과 체제를 잡고 고려와 조선시대의 집필을 맡았으며 자신은 삼국 및 신라시대를 담당하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선생이 갑자기 타계하면서, 선생의 집필원고가 아닌 강의 노트를 중심으로 엮게 되었고 자신도 대학에서 했던 강의 내용을 중심으로 하여 책의 통일성을 기한 결과 상세한 전문 연구서가 아닌 교양 개설서 형태로 책이 나오게 되었음을 언급하였다. 또 타계 1주기에 책을 출간하기로 다짐하였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3주기가 되어서야 책이 나오게 되었음을 밝히고, 선생의 처음 계획과 뜻을 온전히 살리지 못했고 또 선생이 참고한 서적과 자료가 산실되어 고증 등에 문제가 있을까 염려된다고 하여 아쉬운 마음을 토로하였다.

《한국불교사》는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한국불교의 역사를 통사 형태로 개설한 책이다. 뒷부분에는 상당한 양에 달하는 한국불교사 연표가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1장 서설에서는 한국불교사와 연구의 의의, 한국불교의 특질, 한국불교사의 시대구분에 대해 집약적으로 서술해 놓았다. 먼저 한국불교는 한국의 문화, 철학, 사상, 종교, 문학의 여러 방면에서 고유성을 형성해 왔고 한민족의 정신이자 생활로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함께 살아왔다고 전제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이에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한국불교사를 객관적으로 정리하고 그 가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흔히 불교의 폐해만 말하고 그 이로움은 잊으려 한다. 불교는 민족의 자주와 긍지를 불러일으키며, 한국의 문화이자 민족의 생활이다. 한국불교사 연구는 우리 역사를 올바로 알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여 연구의 의의를 밝혔다.

다음으로 한국불교의 특질에 대해서는 호국신앙과 현세이익 사상을 형성하고 불연국토 사상과 현실정토 사상, 대중 및 서민의 생활불교를 완성하여 민족문화를 창조해 왔다고 요약하였다. 교학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의 교판 중심의 종파불교와 일승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총화불교, 통불교를 건설하여 불타와 대승의 이상을 실현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다만 고려시대 이후에는 기복불교의 폐해를 경험하였지만 이는 또 하나의 민족문화를 산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시대의 억불 분위기에서도 호국사상을 발양하여 불교가 국난을 구제하는 데 앞장섰다고 자부하였다. 마지막의 한국불교사 시대구분 논의에서는 불교 자체의 전개과정을 별도로 상정할 수 있지만 한국사 일반의 시대구분을 따라 삼국시대는 불교의 초전과 수용 정리기, 통일신라는 교학연구와 대중화 및 선법 전래기, 고려시대는 선교 병흥기, 그리고 기복 및 보국(補國)의 시기, 조선은 교단의 위축과 산중불교, 구세 호국과 (대중)보급의 지속기로 규정했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먼저 삼국시대는 불교 전래와 고유신앙의 접목, 삼국 불교와 한반도 남부의 가야 불교, 원광이나 자장과 같이 중국에 유학하고 돌아온 교학승려, 불교 대중화 움직임 등에 대해 상세히 서술하였다. 통일신라시대는 삼국의 통일과 불교 및 교학의 성행, 대중교화의 활성화, 교단제도와 불교문화, 선종의 전래 등을 주로 다루었다. 고려시대는 고려불교의 특성과 왕실의 숭불, 제도 및 종파의 변천, 대장경과 각종 법회, 교단의 병폐와 타락상 등에 대해 언급하였다. 교종인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의 조계종과 천태종이 비중 있게 다루어졌고, 진호국가, 비보산천(裨補山川), 신불사상(神佛思想) 등을 시대적 특징으로 거론하였다. 다만 고려시대에 지나치게 기복양재(祈福禳災)의 경향으로 치우치면서 불교의 저속화가 초래되었다는 뼈아픈 지적도 잊지 않았다.

이어 조선시대는 배불정책과 교단의 변천, 왕실의 숭불, 조선 후기의 문파와 교계 동향 등을 통시적으로 소개하였다. 여기서도 조선을 불교 억압과 수난의 시대로 규정하고 종파도 종지도 없이 선의 법맥만 겨우 명맥을 유지하면서 불교 예술 활동 또한 거의 없었다고 보아 기존의 통설적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끝으로 대한제국과 식민지기에 대해서는 국가의 관리와 교단의 동향, 통합종단 건설운동, 교육 및 문화사업 등에 대해 간략히 언급했고 해방 이후는 전망과 과제를 제시하는 선에서 마쳤다.

《한국불교사》는 격변의 정치·사회적 여건 속에서 안정적 학문연구를 수행하기 어려웠던 당시의 풍토를 고려할 때 해방 후 최초로 나온 한국불교사 개설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를 통해 간단하게나마 한국불교의 전체상이 새롭게 그려졌고 이후 후속 연구가 촉발되는 전기가 되었다. 한국불교학 연구자를 1세대에서 5세대까지로 나눈 한 논문에서는 식민지기에 주로 활동한 1세대(터전기), 2세대(파종기)에 이어 해방 후에 주로 활동한 3세대(양육기)를 1916년부터 1940년까지 태어난 학자군으로 정의하였는데, 이에 의하면 우정상은 3세대에 속하며 해방 후의 한국불교사, 특히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를 선도한 학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

3.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의 개척

우정상의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는 사후인 1985년 그의 논문들을 모아서 간행된 책이다. 이 책의 자서는 저자가 생전에 계획했던 《조선불교사》의 서언으로 1966년 5월에 쓴 글을 가져다가 썼다. 그는 조선시대에 대해 몇몇 왕대를 제외하면 ‘배불정책으로 일관된 법난의 시대’라고 규정했다. 또 조선시대의 정치적 억불은 유교의 현양과 고려 말에 일어난 배불론의 결과이며 당시 불교도들은 의욕을 상실한 나머지 어떤 대책이나 반항도 없이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던 시대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선시대에도 불교의 근본 자세는 잃지 않았다고 보았는데, 그 근거로 든 것은 신라로부터 이어진 통일불교의 완성, 경전의 한글 언해, 호국사상의 실천으로, 이 시기에 한국불교의 특징이 정립되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자서〉에는 원래 구상하고 계획했던 《조선불교사》의 목차 내용이 밝혀져 있다. 그에 의하면 왕대별 불교정책, 종파 통합과 사원경제의 성쇠, 간경과 역경, 호국활동, 대외교류, 국행법회 등을 살펴보고 외래 종교와의 관계, 사원의 고유한 풍속과 일반사회에 미친 영향 등에 대해 검토하려 한다고 밝혀 놓았다. 또한 교학사상은 비교적 간략히 서술할 것이며 미술, 문학 등의 특수 분야는 언급하지 않는다고 전제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그가 당시의 일반 통설과는 달리 조선시대 500년의 불교사를 선조대를 기점으로 해서 전기와 후기로 나눈 점이다. 그가 이렇게 시기 구분을 하는 근거로 제시한 것은 통일불교의 완성, 의승군을 통한 호국불교의 실천이 선조 대 청허휴정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으로, 앞서 한국불교의 특질을 통불교, 호국불교로 인식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기존에 조선시대 불교의 시기 구분론을 처음 제기하여 이후 학계의 인정을 받은 이는 경성제대 교수이자 《이조불교》(1929)의 저자인 다카하시 토오루(高橋亨)였다. 그는 교법의 성쇠를 기준으로 조선시대를 3시기로 나누었는데, 제1기는 태조부터 시작하여 불교가 억압을 받았지만 국가로부터는 여전히 공인되고 있었던 성종 대까지, 제2기는 연산군과 중종 대에 법제적 폐불 상황을 맞이하였음에도 교법이 완전히 쇠퇴하지 않고 다수의 명승을 배출한 인조 대까지, 제3기는 조선 후기의 효종 대 이후로서 교세가 완전히 몰락하고 승려가 경멸을 받아 불법이 없어진 시기로 보았다. 다카하시의 이러한 주장은 이후 일본인, 한국인 학자를 불문하고 대체로 받아들여졌다. 예를 들어 한국불교를 전공한 혜화전문의 교수 에다 토시오(江田俊雄)는 다카하시의 설을 그대로 가져다 공인기, 점쇠기, 쇠퇴기의 3기로 조선시대 불교사의 시기를 구분하였다.
다카하시 토오루는 조선시대에 불교가 억압을 당하고 쇠퇴했으며 종교로서의 사회성을 잃었고, 다만 여성과 서민 등 소외된 계층의 신앙으로서만 명맥을 유지해 왔다고 보았다. 즉 조선시대 불교사는 국가로부터 교권을 빼앗기고 모욕과 압박을 받은 기괴한 역사에 불과하다고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또한 한국불교 자체가 교리 면에서는 중국불교의 이식일 뿐이고 따라서 교리발달사로서는 내용이 소략하고 지극히 제한적이라고 폄하했다. 그가 한국불교의 역사적 특징을 의타성과 정체성으로 규정한 것은 한국사의 특징을 타율성, 정체성으로 매도하려 했던 식민사관의 전형이었다.

그러나 다카하시식의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평가는 역사적 실상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특히 조선 후기의 역사상은 불교가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활로를 찾아서 자립을 모색하였고 전기에 비해 여러 측면에서 더욱 활성화되는 모습이 확인된다. 현존하는 전통사찰 대부분이 조선 후기에 중창, 중수되었고 수많은 불서가 간행되었으며 교육 및 수행체계, 법통이 정립되고 강학과 염불신앙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 쇠퇴나 멸절이라는 자의적 판단은 유보되거나 재고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정상의 조선시대 시기 구분론은 선조 대 청허휴정의 활동을 계기로 하여 불교 사상과 문화의 다양한 전통이 계승되고 교단의 존립 기반이 만들어졌음에 착안한 것이어서 새로운 개척적 입론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선, 교, 염불 등을 겸수하는 사상과 수행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호국불교의 전통을 한국불교의 특징으로 부각시킨 그의 안목은 조선시대 부정론과 식민사관의 폐해가 짙게 남아있던 당시 학계의 상황에서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의 자서는 저자가 계획했던 《조선불교사》의 서문으로 써놓은 것이지만 책을 내지 못한 채 별세하였기에 그가 서문에서 생각했던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구상과 기획은 끝내 미완성으로 남고 말았다. 하지만 사후에 그가 썼던 논문들을 모아서 나온 본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의 목차를 보면 자서에서 밝힌 학문적 포부의 구체적 내용들이 어느 정도는 채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주요 주제는 서산대사의 출가동기와 선교관, 서산대사 전기, 저술인 《선가귀감(禪家龜鑑)》의 간행 유포, 그리고 호국사상에 대한 논문, 남북한산성 승군의 방번전(防番錢) 등이다. 이는 그의 관심사가 조선 전기와 후기를 획기한 서산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의 활동과 사상에 맞추어져 있고 호국불교와 승군 활동을 매우 중시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본서에 수록된 서산과 《선가귀감》에 대한 논문과 조선불교의 호국사상, 남북한산성 의승군에 대한 논문들은 지금까지도 선구적 연구로서 그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 이들 논문의 개요를 간략히 소개해 본다. 먼저 서산대사의 선교관 연구에서는 청허 휴정이 선과 교가 다르지 않다는 선교관을 확립하여 한국불교를 사상적으로 통일하고 불교사의 한 획을 그었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이는 신라의 원효 이후 고려의 의천, 지눌 등을 거쳐 이어져 온 선과 교의 통합적 전개를 완성한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휴정은 선교일치론과 교를 통해 선에 들어가는 사교입선 방식을 제안하였고 또 염불까지도 수행 방식에 넣어서 선, 교, 염불 등을 모두 포섭하는 종합적 체계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에 대해 불교가 억압당한 조선시대의 독특한 시대 배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대에 서산종이라고 할 정도로 휴정의 문도에 의해 교단이 단일화되었고 선을 중심으로 한 교리사상도 휴정으로부터 정립되고 전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선가귀감》의 간행유포에 대한 논문에서는 저술의 동기와 내용, 현존 판본을 중심으로 한 간행 문제, 언해본과 역자, 일본 유포 및 초전자 등에 대해 검토하였다. 언해본은 송광사에 전해진 1610년(광해군 2) 전라도 간본을 대상으로 분석하였는데, 언해본은 앞서 1569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초간이 이루어졌다. 한문본의 경우 휴정의 서문이 1564년에 작성되었으므로 그 이전에 저술이 이루어졌고 간행은 사명유정(四溟惟政)이 발문을 쓴 1579년의 일이었다. 즉 언해본이 한문본보다 먼저 간행된 것이다. 이 언해본은 휴정의 동문이자 부휴계의 조사 부휴선수(浮休善修)가 교정을 보았고 금화도인(金華道人)이 언해하였다.

저자는 금화도인에 대해 《석가여래행적송(釋迦如來行蹟頌)》의 발문(1571년)을 쓴 두류산 금화도인 의천(義天)으로 보았고 《선가귀감》의 유정 발문에서 거론된 휴정의 제자 벽천의천(碧泉義天)이라고 추정하였다. 한편 일본의 한 대학에서는 강의 교재로 《선가귀감》을 쓰기도 했는데 한국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조차 없는 실정이므로 그에 자극을 받아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음을 회고하였다. 그는 《선가귀감》이 1620년대에 국교 수교를 위해 두 차례 사신으로 왔던 일본 승려 현방(玄方)에 의해 일본에 전해졌다고 보았는데, 현방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종군하여 조선에 왔던 현소(玄蘇)의 제자이다.

조선불교의 호국사상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군의 군사적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그 활약상을 소개하였다. 그는 조선 태조의 건국이념에는 유교뿐 아니라 불교사상이 한 원동력이 되었고 건국과 개혁의 숨은 공로자로서 고승들이 기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 목적 중의 하나가 불교문화재의 약탈을 위한 것이라고 보았고, 당시 의승군의 활약이 매우 컸음을 강조하였다. 이후 승군의 남북한산성 수호도 사원경제의 고갈에도 불구하고 의승군의 호국사상을 계승하고 실천한 사례로 보고 있다.
이 밖에도 《조선전기불교사상연구》에는 원각사(圓覺寺) 탑파의 사상적 연구, 지천사(支天寺)와 개경사(開慶寺)에 대한 논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원각사 연구는 도판을 제외하고 책의 90쪽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글이다. 탑 건립의 경전적 유래와 사상, 호국과 통일로 특징되는 한국에서의 건탑의 역사와 의미, 세조 대 원각사 탑 조성의 국가적 의의, 탑의 층수와 13회의 관계, 13회의 뜻과 경전의 변상도에 대한 교리적 해석 등을 다루었다. 한편 지천사는 조선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 화엄종의 본사가 옮겨진 사찰로 보았고 국행 호국법석이 열리고 강화도에서 해인사로 옮겨질 때 고려대장경이 일시 봉안된 사실 등 지천사의 역사와 위상을 검토하고 있다. 개경사는 조선 태종이 부왕 태조의 재궁으로 창건한 사찰로서 국행법회가 열린 호국도량이었다고 소개하였다. 여기서도 저자가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통일과 호국의 문제를 강조하면서 그 사례 연구로서 이들 논문을 작성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 책의 부록 편에는 372년 처음으로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한 순도(順道)의 전기를 검토한 내용, 불교의 역사에 관심이 컸던 6세기 고구려 승려 의연(義淵)과 불기(佛紀)의 문제, 경주 석굴암에 대한 사상적 고찰 등을 다룬 글들이 실려 있다. 또 책의 말미에는 저자의 문하생이라고 밝힌 김영태 선생이 이 책을 간행하면서 1984년 12월에 쓴 후기가 실려 있다. 그는 저자 사후 18년이 지나서야 이러한 유고집을 내게 된 소회를 밝히고 저자와의 학연을 소개하였다. 특히 저자가 일본 임제종 대학에서 수학할 때 그곳에서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강의를 듣고 이후 서산 연구에 필생의 뜻을 두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시대 불교사를 전공하게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저자의 학문적 도정의 출발점을 보여주는 일화이지만 한국불교사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과 포부를 후학들로 하여금 새삼 되새기게 하는 대목이다.

4. 통불교론과 호국불교론의 제창

근대기에 조형된 한국불교 전통에 대한 상은 해방 이후 한국학자들에 의해 더욱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었다.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고 연구가 진척되면서 기존의 선입견과 오해가 불식되기도 했고 한국불교의 역사와 사상의 구체상이 더욱 분명히 밝혀지게 되었다. 해방 후 최초의 한국불교 통사로서 우정상·김영태의 공저 《한국불교사》(1969)가 나온 이후 안계현의 《한국불교사연구》(1982), 김영태의 《한국불교사개설》(1986)과 그 개정판인 《한국불교사》(1997) 등이 한국불교사 개설서로 출간되었다. 또 한국불교 사상을 통시적으로 개관한 연구서로 안계현의 《한국불교사상사연구》(1983), 김동화의 《한국불교사상의 좌표》(1984), 한기두의 《한국불교사상연구》(1985), 고익진의 《한국의 불교사상》(1988), 김영태의 《불교사상사론》(1992) 등이 나왔다.

이러한 통사적 개설과 함께 각 분야의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시대별 연구서도 나왔는데, 삼국과 통일신라는 김지견·채인환 공저 《신라불교연구》(1973), 고익진의 《한국고대불교사상사》(1989), 고려시대는 허흥식의 《고려불교사연구》(1993)가 손꼽힌다. 조선시대의 경우는 한우근의 《유교정치와 불교》(1993)를 시작으로 최근에 일련의 연구서가 나오고 있으며, 근현대불교는 1990년대 이후 김광식을 중심으로 의욕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한국불교 연구를 통해 조형된 전통의 상은 매우 구체화되었고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관한 통설이 생성, 확산되었다. 이 가운데 우정상이 한국불교의 특질로서 제창했던 통불교론과 호국불교론이 처음 제기된 식민지기의 학설을 간단히 살펴보고, 그에 대한 최근의 비판적 논의를 소개하여 그가 계승하고 제창한 이들 입론이 타당성과 유효성을 얻으려면 어떤 점들이 보완되어야 할 것인지를 검토해 본다.

첫째, 통불교론은 1930년 최남선에 의해 주창된 이후 한국불교 고유의 사상적 특질로서 회통과 원융이 강조되었다. 그에 의하면 통불교 전통은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에서 비롯되었고 중생구제뿐 아니라 이론과 실천의 통불교적 융화에서 한국불교의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최남선은 인도불교는 서론, 중국불교는 각론임에 비해 한국불교는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며, 원효야말로 이러한 전불교, 통불교, 종합 및 통일 불교를 구현하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당시는 식민지 상황에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사상 등의 독자적 가치를 발굴하고 새롭게 조명하는 ‘조선학’ 운동이 일어난 시기로 한국적 전통에 대한 긍정적 해석이 시도된 것이다. 이후 신라의 원효와 화쟁, 고려의 의천과 선교융섭, 조선시대 선, 교, 염불의 종합을 근거로 하여 한국불교의 특색으로 통불교 전통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통불교라는 개념이 단지 근현대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나타난 불교사 인식의 소산인지 아니면 역사적 실제를 반영한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논거와 검증이 요구된다. 또한 회통이나 통합은 한국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데 적합한 개념인지도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신라의 원효, 고려의 의천과 지눌, 조선의 시대상황과 사상적 과제, 또 각각의 문제의식과 지향점이 같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하나의 틀로 이를 묶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호국불교론은 한국에서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전반에 등장한 이후 민족주의가 고양된 1960~70년대에 통설로서 확고히 자리 잡았는데, 여기에는 우정상의 역할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호국불교 개념은 19세기 후반 이후 일본에서 전개된 체제불교 및 국가불교의 영향, 1930~40년대 전쟁 기간에 황도불교 노선을 답습해야 했던 식민지 한국의 상황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즉 역사 속에서 찾아지는 국가와 불교의 우호적 관계, 호교와 호국을 위한 불교의 주체적 기여 등을 강조하면서 나온 것이다. 우정상 또한 민족불교의 관점에서 한국사의 호국불교 전통을 확인하고 그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자 했다. 그 외에도 1960~70년대의 많은 연구자가 호국불교를 강조하면서 호국불교는 한국불교의 자랑스러운 전통을 상징하는 용어로 승화되었다. 이를 통해 불교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여한 민족 고유의 종교라는 점이 크게 부각될 수 있었다.

한국불교사에서 불교가 국왕의 안녕을 빌거나 국가안정에 기여한 사례는 수없이 많으며 승려들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호국불교 논의가 근대의 국가주의 체제에서 시작되어 민족주의에 의해 고양된 사실은 그 자체가 체제 친화적 속성을 태생적으로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종교와 국가권력의 관계, 승려의 전쟁 참여 등은 불교의 관점에서 원론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시대별 호국의 사례들은 각각의 시대성이 발현되면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므로 호국불교의 역사적 실상과 시대별 특성 또한 구체적 근거에 입각하여 검토되어야 한다.

우정상은 해방 후 최초의 한국불교 통사인 《한국불교사》를 남겨 한국불교의 전모를 새롭게 그렸고 이는 후속 연구가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조선시대 불교사 연구를 개척하여 식민지기에 고착된 조선시대 부정론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특히 서산대사 청허휴정의 통일불교 완성과 호국불교 실천에 주목하여 그가 활동하던 선조 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불교를 전기와 후기로 나눈 것은 이후 연구에 시사하는 바가 컸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에 나온 서산대사의 사상 및 저서 연구와 호국사상, 남북한산성 의승군에 관한 그의 논문은 조선시대 불교사를 개척한 선구적 업적이었다. 한국불교사 전체를 통관하는 그의 역사인식과 조선시대 불교사를 새롭게 바라본 그의 안목은 학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다만 그가 한국불교의 특질로 제창한 통불교론과 호국불교론은 과연 그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한 입론인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담을 수 있는 개념인지에 대한 더욱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이들 개념이 한국불교뿐 아니라 한국사나 한국사상의 주요한 특성으로 부각되기 위해서는 보편적 시각에서 한국적 특질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

 

김용태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HK교수·한국불교융합학과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졸업(석사·박사). 일본 도쿄대학 인도철학과 석사. 논문으로 〈역사학에서 본 한국불교사 연구 100년〉 〈동아시아 근대 불교연구의 특성과 오리엔탈리즘의 투영〉 등이 있고,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전통의 흐름》 《조선후기 불교사 연구: 임제법통과 교학전통》 Glocal History of korean Buddhism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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