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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논의와 종교의 위상 / 박상언
[63호] 2015년 09월 01일 (화) 박상언 laetor@hanmail.net

옛날의 약속은 조각조각 났다.
인간은 마침내 자신이 우주에서 다만 우연에 의해 생겨났다는 것과,
냉정하기만 한 거대한 우주 속에 혼자 있다는 것을 드디어 알았다.
그의 운명은 아무 데도 기술되어 있지 않다. 그의 의무도 마찬가지다.
하늘 위의 천당 혹은 땅 밑의 암흑, 그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 
— 자크 모노 《우연과 필연》 중에서


1.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논의의 배경

1960년 이후로 서구사회에서는 인간답게 죽을 권리가 주장되기 시작했다.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게 무의미한 치료로 고통을 안기는 의료행위에 대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되면서 의료 현장에서 인간의 생명을 종결짓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각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8년 소위 ‘김 할머니 사건’을 계기로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조성되었고 현재 이와 연관된 법안이 논의 중이다.
2011년 보건복지부 ‘생명나눔 국민인식도 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72.3%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지’에 대해서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2013년에 한국갤럽의 조사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78%가 찬성, 17%가 반대, 5%가 유보로 나타났다. 여기서는 종교별 통계도 분석되었는데,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불교인 응답자 가운데 82%, 천주교인 응답자 가운데 76%, 개신교인 응답자 가운데 74%, 무종교인 응답자 가운데 78%가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2014년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에서는 응답자의 88.9%가 연명치료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통계상의 수치로 보면,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해서 국민 대다수가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으며, 종교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일반인에게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용어보다도 ‘존엄사(death with dignity)’라는 용어가 더 친숙하다. 주된 요인으로는 연명치료, 존엄사, 안락사 등과 같은 생명윤리의 문제가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했고, 1997년 소위 ‘보라매병원사건’과 2008년 소위 ‘김 할머니 사건’이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랐을 때, 언론 매체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라는 용어보다는 존엄사라는 용어를 좀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혹은 ‘연명의료 결정’ 등의 좀 더 중립적이고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는 용어들이 제시되고 활용되고 있지만, 이들 용어와 함께 ‘존엄사’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존엄사’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존엄사’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개념에는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다. 유사점으로는 첫째, 환자의 품위 있는 죽음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 둘째로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 셋째로 의학적 치료의 ‘무의미성’을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 개념 간의 중요한 차이는 ‘안락사’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인위성’에 해당하는 요소가 있는가에 달려 있다. 1976년 미국에서 통과된 ‘존엄사법(Death with Dignity Act)’에는 일정한 요건을 갖춘 말기 환자의 죽음 과정에 의사의 도움이나 개입을 허용하는 내용이 들어 있기에, 미국의 존엄사법은 의사조력자살, 혹은 소극적 안락사의 범주에 해당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엄사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범주에서 가장 넓게 공통분모를 차지하는 것이 ‘품위 있는 죽음’이다. 곧 둘 다 존엄성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이다. 존엄성(dignity)은 라틴어 명사 dignitas에서 유래하는데, 가치 있음(worthiness), 가치 있는 요소(merit), 중대함(greatness), 권한(authority), 가치(value), 탁월함(excellence) 등의 의미를 지닌다. 또한 이 명사는 형용사 dignus와 어원이 같은데, 이 형용사는 산스크리트어 어근 dic와 그리스어 어근 deik에서 유래하는 말로서 밝히다, 보여주다, 가리키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존엄성이란 말에 담긴 이러한 의미들은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가치 혹은 가치 있는 요소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존엄성은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기보다는 그 사람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든지 존엄한 존재이고 그러한 존재로 대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유명한 화가의 작품이 지닌 가치는 그 작품에게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을 가치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예술 공동체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외부에서 주어지는 도구적 가치와 인간이 지닌 본래적 가치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이다.
존엄성이 본래적인 것이고 내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인정한다면, 존엄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느끼는 자존감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이 논의되는 주된 이유에는 오늘날의 의료체계가 인위적으로 생명을 연장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간과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놓여 있다.    


2.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종교계의 입장

우리나라의 천주교, 불교, 개신교 등 주요 종교는 무익한 치료 행위로 인해 환자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지 못하게 하는 현재의 의료 시스템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는 일반론의 관점에서는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동의하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동의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무의미한’ 혹은 ‘무익한’ 치료 중단을 말할 때 무의미성, 혹은 무익함의 용어가 지닌 평가적 성격 때문이다. 치료의 무익함은 전적으로 의사들의 판단에 근거하지만, 그 판단의 객관성과 정확성은 불확실하다. 예컨대, 2008년에 발생한 소위 ‘김 할머니 사건’에서도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경우에 자발적인 호흡이 불가능할 것이라던 의학적 판단은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김 할머니가 수개월 동안 자발적인 호흡을 함으로써 잘못된 것이었음이 입증되었다. 이와 더불어 ‘무의미함’이라는 개념의 다의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도 있다. 가톨릭 신학자 이동익은 무익함이란 단순히 의학적 관점에서만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가족, 영성 등의 여러 수준에서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다고 강조한다. 
둘째,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생명의 임의적인 처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염려이다. 그리스도교와 불교 모두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타인을 위한 희생과 숭고한 종교적 목적을 위한 ‘순교’라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계율로써 금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환자의 자기결정권은 생명의 신성성을 침해하거나 훼손할 소지가 많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천주교와 개신교에서는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안락사의 요소가 담긴 행위는 신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으로 보며, 불교에서는 아라한과 같은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 생명을 끊거나 타인이 생명을 끊도록 도움을 주는 행위를 금하고 있다.
이처럼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해서 그리스도교와 불교에서는 자기결정권보다는 생명권의 중요성을 내세운다. 2014년 천주교 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의 장봉훈 주교는 〈생명주일 담화문〉에서 연명의료와 관련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자신의 생명을 위해하는 행위까지도 환자 스스로 결정하면 그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개신교 신학자 이상원은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생명 종결에 관해서 인간에게는 자율적 결정권이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권”만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종교계에서는 연명치료 중단의 결정에서 환자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점에 우려를 표명한다. 곧 의료현장과 환자가 처한 가정환경에 따라서 치료의 유의미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판단은 환자의 의사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의료전문인과 환자의 대리자에 의해서 내려질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측면은 2010년 생명윤리정책연구센터의 〈연명치료 중단 조사연구보고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이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연명의료 결정에서 가족과 이견이 생기면 가족주도형(39.4%), 의사주도형(25.4%), 제3의뢰형(18.3%) 순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해서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에서는 국회의원 신상진 의원이 발의한 ‘존엄사 법안’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서 “수시로 바뀌는 사람의 마음이나 가족들에게 부담을 안겨준다는 죄의식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해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불교계는 그리스도교의 입장과는 다소 차이를 보여준다. 불교계의 생명윤리 논의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김재성은 안락사와 관련된 경전을 분석하면서 “죽음 자체는 수단으로서든 목적으로서든 결코 직접적으로 의도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제시하고, 불교에서 안락사는 자율성이라는 이유로 정당화할 수 없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관련해서 환자 본인의 의사와 함께 “사전에 대리인이나 가족에게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유보나 중단을 결정할 수 있도록 지정한 경우도 자신의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대리 결정을 할 수 있다.”고 밝힘으로써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대해서 천주교와 개신교에 비해 좀 더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입장에 관해서 불교의 연기론적 관념에 의해 생명의 개별적 권리는 관계성의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기에 특정한 상황에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대리 결정이 가능한 것으로 보게 한다는 분석이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지금까지 살폈던 이유들을 들어, 종교계에서는 소위 존엄사법의 제정과 관련해서 몇 가지 사항을 요구한다. 첫째, 소극적 안락사의 성격이 담긴 존엄사란 용어 대신에 ‘인간의 존엄과 인간생명의 불가침성을 보호하는 기본 정신’이 담긴 용어 사용과 제도 마련에 대한 요구이다. 존엄사란 용어에는 자칫 품위 있는 죽음, 생명의 자기결정권의 당위성만이 강조될 소지가 있기에,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이 임종 과정에 있으면서 회복 불가능한 환자가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데 의미가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계에서는 말기 환자의 치료와 임종을 목전에 둔 회복 불가능한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는 명확하게 구분돼야 한다고 본다.
둘째, 연명치료의 종류에 관한 명확한 규정이다. 2013년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의 ‘연명 의료 권고안’에 따르면, 연명치료의 종류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연명치료의 종류로 제시하고 있고 통증조절, 영양공급, 수분 공급 등은 연명치료로 보지 않는다. 천주교회와 개신교에서도 영양 및 수분 공급과 통증조절 등의 처치가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한 환자에게 제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셋째, 연명치료 중단 결정의 공정성 혹은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이다. 이와 관련해서 개신교 신학자 이상원의 경우에는 ‘사전의료지시서’의 효력은 뇌사 상태에서 이르렀을 때 장기기증서약을 하는 경우에만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환자의 의사표시나 대리적인 추정 판단의 전적인 수용에 반대한다.
넷째, 종교계에서 공통적으로 강력하게 요구하는 부분은 ‘호스피스-완화치료’의 제도화이다. 천주교에서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과한 법률을 제정하기 이전에 호스피스-완화치료의 제도화를 통해서 환자와 가족이 경제적, 심리적인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교학자 김재성은 ‘사분율’의 병자 공양을 언급하면서, 말기 환자가 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호스피스를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종교계의 호스피스-완화치료에 대한 강조는 연명치료의 중단 결정과 환자나 가족의 경제적, 심리적 압박과 불안간의 상관성을 고려할 때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다. 이와 관련해서 이동욱은 저소득층 노인의 경우에 연명의료가 자녀들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면서 자녀들로부터 원망을 초래할 수 있기에 ‘겉으로는 존엄한 죽음’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경제적 이유로서 연명치료의 중단을 선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3. 종교와 생명윤리의 정당화 과정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불교, 천주교, 개신교의 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단별로 다소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 종교가 윤리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방식에 따른 것이다. 특정한 사안에 대한 윤리적 정당화에 있어 종교는 세속적인 윤리학과는 다른 측면을 지니는데, 데이비드 리틀(David Little)과 섬너 트위스(Sumner B. Twiss)에 따르면 종교의 윤리적 정당화에서는 “성스러움의 고려(sacred-regarding)”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곧 종교는 ‘성스러운 권위’에 근거해서 종교인에게 행위의 중요한 판단 기준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 지침은 세 가지의 요소, 곧 상황 적용(situational application), 논증(validation), 옹호(vindication)로 구성된다. 상황 적용은 어떤 행위의 내용과 동기를 의미하고, 논증은 근본규범에 근거해서 어떤 행위의 수행에 대해 적법한 이유(논거)를 제시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옹호는 근본규범에 근거해 어떤 행위가 정당한 이유를 충분히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설명이 부족하게 여겨질 때 이루어지는 추가적인 설명을 의미한다. 다시 한 번 설득하고 확신시켜주는 과정이 옹호인 것이다.
윤리적 정당화에 있어 종교 간의 차이를 형성하는 주된 부분은 옹호이다. 종교는 윤리적 행위의 규범을 옹호하기 위해 세 가지 유형의 호소에 기대는데, 곧 공동체 합의에 근거한 호소, 합리적인 추론을 통한 인식론적 호소, 인간론과 우주론적 신념에 근거한 호소에 기대어 특정한 규범을 옹호한다. 합의적 호소는 한 집단의 문화적 혹은 전통적 관념에 기초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의 도덕적 행위는 십계명에 기초한다거나, 불교인의 도덕적 행위는 경전에서 제시하는 계율에 근거해야 한다고 말할 때, 이러한 주장은 합의적 호소에 근거하는 것이다. 인식론적 호소는 어떤 행위의 정당화가 인식론적인 명백함 혹은 자명함을 지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합리적인 추론 행위를 통해 상식적인 수준에서 종교가 제시하는 행위 지침의 정당성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인간론과 우주론적 신념에 근거한 호소는 인간과 우주의 본질에 대한 종교적 성찰을 통해 근본규범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불교의 업이나 연기론은 인간의 본성과 행위의 의미를 알려주고 이에 근거한 행동 지침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윤리적 규범을 옹호하는 방식의 차이에 따라서 각 종교가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해 취하는 입장이 세부적인 수준에서 달라진다. 예컨대 합의에 의한 호소를 준거로 비교해 보면, 천주교는 바이블, 교황의 회칙, 주교회의 성명서, 〈사목헌장〉 등이 규범을 옹호하는 근거가 된다. 곧 경전과 종교 기구에 의해서 체계적이고 명확하게 종교적 규범을 옹호하는 종교 내부의 환경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경전에 관한 다양한 신학적 해석이 제시될 수 있음에도, 그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인식과 판단의 혼란을 제어할 수 있는 교회 기구가 마련되어 있어서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일정한 규범이 제시될 수 있다. 이에 관한 대표적인 예를 들면, 1957년 교황 비오 12세는 의사들과의 담화에서 말기 환자에 대해 정상적인 간호 행위나 영양공급 등과 같은 일반적인 치료 수단의 의무를 말하면서, 특수한 수단의 사용은 정당하기는 하지만 항상 의무는 아니라고 가르쳤다. 비오 12세의 이러한 개념 구분에 근거해서 1995년 교황청 보건사목 평의회가 반포한 ‘의료인 헌장’은 “환자의 상태를 고려하여, 그와 같은 치료 방법들을 사용할 때에 사용된 수단과 의도한 목적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존재할 때 균형적이라 판단하며, 균형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불균형적이라고 간주한다.”고 밝히고 있고, 가톨릭 신학자들은 불균형적인 방법으로 간주되는 치료의 중단은 윤리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천주교에 비해서 개신교의 경우에는 합의에 의한 호소가 바이블에 제한된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개신교의 역사에서 형성된 신학 저서들도 활용될 수 있겠지만, 그것이 생명윤리의 문제에 대한 체계적이고 통합된 규범을 형성하는 데 충분한 기능을 발휘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개신교가 경전과 믿음을 주요 기반으로 삼고 있는 신념 구조를 지니고 있고, 또한 여러 교파로 분열되어 있는 데다가 개별 교회 중심적인 성향이 강해서 체계적이고 단일한 생명윤리의 관점이 형성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수적인 신학의 입장을 지닌 신학자와 교단의 경우에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법제화에 내포된 위험성에 대해서 지나치게 경계를 하는 반면에, 자유주의적인 신학의 진영에서는 환자와 가족, 그리고 의료전문가들이 직면한 어려움과 고통을 고려해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법제화에 대한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더 큰 문제는 보수적이든 자유주의적이든 신학자의 발언이나 견해가 해당 신학자가 속한 교단의 입장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된 개신교 신학자들의 적극적인 입장 표명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공식 입장과 윤리적인 지침은 찾기 어렵다. 이러한 측면은 개신교인들이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 신앙에 부합하는 윤리적 행위를 취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불교의 경우에는 합의에 의한 호소를 뒷받침하는 자원이 많다는 특징이 있다. 여러 경전, 논서, 주석서들이 종교 규범을 옹호하는 데 활용될 수 있어, 다양한 관점들이 형성될 수 있는 장점이 불교에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특징은 불교에서 일관되고 체계적인 규범이 형성되는 것을 방해하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예컨대, 뇌사의 인정 여부와 관련해서 초기경전에서 제시되는 생명유지의 필수 조건인 수명, 체열, 의식을 죽음의 기준으로 고려하는 입장에서는 뇌사를 죽음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보는 반면에, “불교의 근본교리에 비추어 본다면, 인간은 정신 신체적인 구성요소가 화합한 존재이므로 이미 정신적 작용이 없는 뇌사는 사실상 죽음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 있기도 하다.
또한 장기이식의 윤리적 전거로서 제시되는 《자카타》의 사신설화(捨身說話)에 대한 해석에서도 상반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윤종갑은 《자카타》에서 언급되는 사신에 관한 내용들은 붓다의 위대성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지 일반인들에게 사신을 권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러한 설화를 근거로 장기이식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교리적으로 미흡하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김재성은 《자카타》의 사신에 대한 해석에서 보살의 자비심과 자발심을 강조함으로써 장기이식의 불교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합의에 의한 호소에 다양한 자원이 동원되고, 특히 조계종의 경우처럼 비록 생명윤리위원회가 가동되고 있지만 교학적인 해석의 차이를 조정하고 체계적으로 윤리학적인 입장을 정립할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미비한 경우에는 종교 구성원에게 설득력이 있는 규범을 제공하기 힘들다. 또한 존엄사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불교계의 입장이 종단의 공식적인 입장 표명이 없이 일부 학자와 단체를 중심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은 공적 담론의 공간에서 불교계의 공식적인 입장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힘들게 할 뿐만 아니라 논의의 주체로서 불교의 위상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4. 생명윤리의 문제와 종교의 역할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 인간은 종교에서 삶의 규범과 행동의 지침을 발견해왔다.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누에고치와 같은 역할을 종교가 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종교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낙태, 안락사, 뇌사와 장기이식, 배아복제 등과 같은 사회 환경의 변화와 발전하는 의료기술이 일으키는 생명윤리의 문제 앞에서 종교가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생명윤리의 문제에 대해서 한국의 주요 종교가 겉으로 보여주는 인상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다. 천주교의 경우에는 개인의 성생활에까지 윤리적 지침을 내릴 정도로 지나친 훈육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경향이 있는 반면에, 불교와 개신교의 경우에는 생명윤리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매우 빈약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불교나 개신교에서 생명윤리에 대한 나름의 입장과 학문적 논의가 있지만, 그러한 입장과 논의가 교단이나 종단의 차원에서 정립되고 있지 못하며, 그런 경우라고 해도 그러한 입장과 논의가 신자들에게까지 전달될 수 있는 체계적인 의사소통의 구조는 취약하다.
이와 관련해서 강태화의 〈한국 노인의 죽음과 임종에 대한 인식: Q방법론적 접근〉은 주목할 만하다. 이 연구에 따르면, 임종과 죽음에 대한 세 가지 인식 유형이 한국 노인에게서 나타난다. 곧 운명수용형, 종교애착형, 현실중시형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유형은 종교애착형이다. 다른 유형에도 천주교, 개신교, 불교인 등의 종교인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지만, 종교애착형은 특별히 종교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의 인식 태도를 보여주는데, 이 유형에 속한 노인들은 다른 유형에 속한 노인들에 비해 연명치료 중단과 장기기증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오히려 이 유형보다 현실중시형이 연명치료 중단과 장기기증에 대해서 긍정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이러한 조사결과는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물론, 이 조사결과만으로 연명치료 중단과 장기기증과 같은 생명윤리의 문제와 관련해서 종교의 역할이 미흡하다는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의 주요 종교가 적극적으로 장기기증의 윤리적 정당성을 내세우며 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고 김수환 추기경과 고 법정 스님과 같은 대표적인 종교지도자들의 사례를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표본으로 제시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종교애착형에서 연명치료 중단과 장기기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태도가 발견된다는 점은 종교인에게 미치는 종교의 역할과 영향력에 대해 재고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현재 진행 중인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법제화와 관련해서 종교계의 역할을 살펴볼 때, 천주교의 경우를 제외하고, 개신교와 불교계가 종단이나 교단의 차원에서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법제화가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효과에 관해 각 종교의 공식 기구가 아무런 입장도 표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바탕으로 구원과 해탈을 논의하는 종교의 책무를 방기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법제화에 담길 수 있는 위험 요소와 관련해서 앞서 언급했던 이동욱의 연구는 중요한 점을 알려준다. 그에 의하면, 중병으로 인해 자신의 몸을 가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가족에게 부담, 짐, 폐가 된다는 인식이 변화되지 않는 한, 노인 여성들은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즉 죽음에 대한 선택이 자발적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죽음을 강요하는 사회문화적인 강제가 은폐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죽을 권리를 논하기 전에 노인 보살핌과 의존, 질병에 대한 사회문화적 인식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의 법제화가 진행된다면, 그 법률은 사회적 취약계층의 경우에는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감을 덜어주는 ‘합법적 도구’로서 작용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강태화와 이동욱의 연구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보건복지부나 한국갤럽의 통계조사와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들의 통계 결과에 따르면 종교를 막론하고 국민의 상당수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강태화와 이동욱이 취한 민족지학적 조사방식이나 면담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는 조사방식에 따르면, 주요 종교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관련해서 신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크지 않음이 발견되고 있다. 더욱이 계층별, 성별, 연령별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의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사회적 합의안 제시》를 살펴보면 대학병원을 포함한 대형종합병원을 대상으로 ‘사전의료지시서 작성 현황’을 조사한 결과, 환자 본인이 결정한 사례는 단 1건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와 실제 행위 간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간격이다. 여론조사에서는 불치병을 환자에게 고지하는 것에 대해 환자 96%, 가족 78%가 찬성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지만, 실제로 환자가 말기 상태임을 아는 경우는 26%에 불과하고,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한 사전의사결정에 대해서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90%가 찬성했지만, 실제로 사전의료지시서에 서명한 환자는 0.00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종교적, 철학적, 문화적 관점에서 생명과 죽음에 관한 성찰과 논의가 조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법제화가 진행되는 것은 문제가 있음이 분명하다. 로널드 드워킨(Ronald Dworkin)은 《생명의 지배영역: 낙태, 안락사, 그리고 개인의 자유》에서 이렇게 말한다.

안락사의 문제는 생명의 신성성이 인간성 또는 동정과 같은 어떤 다른 가치에 양보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신성성이 어떻게 존중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낙태와 안락사라는 거대한 도덕적 문제들은 삶다운 삶의 테두리를 형성하면서 비슷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 문제들은 각각 특정인들의 권리와 이익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인간생명 자체의 내재적이고 보편적인 중요성에 대한 결정들과 연관되어 있다. 각각의 문제에서 견해차는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경시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되는 가치들이 각자의 삶의 중심에서 누구도 그 의미에 대해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아들일 만큼 사소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드워킨의 지적처럼, 생명권이냐 자기결정권이냐는 식으로 존엄사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문제가 단순하게 논의되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신성성이 존중되는 방식에 초점을 둬야 한다. 그렇다면 종교계의 주장이 의료계와 법조계의 주장과 일치될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심지어 종교계 내부에서도 종교별로 신념과 교리의 차이에 따라서 동일한 윤리적 사안에 대해서 다른 견해를 제시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다른 견해들은 환자의 최선의 이익에 대한 고려에 근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관리의 정치학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관한 좀 더 근원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장치’의 개념을 확장해서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지도, 규정, 차단, 주조, 제어, 보장하는 능력을 지닌 모든 것을 문자 그대로 장치”라고 제시하면서, 어떤 장치를 사용하는 주체가 그것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예컨대, 휴대폰과 같은 테크놀로지의 사용이 일으키는 문제는 그것의 잘못된 사용에 있다는 식의 지적은 테크놀로지라는 장치의 힘을 간과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학과 공학의 기술적 결합에 의해 만들어진 장치들은 뇌사, 장기이식, 존엄사나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과 같은 생명의 영역에서 윤리적인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예컨대, 오늘날에 뇌사를 죽음의 판정으로 삼게 된 요인도 인공적인 생명 유지가 가능해졌기 때문인데, 뇌사는 장기이식과 연결될 때에만 법률적인 죽음으로 인정받는다는 점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장치란 “힘 관계에 대한 합리적·계획적 개입”이며 그러한 개입은 “힘 관계를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시키거나 봉쇄하거나, 힘 관계를 안정시켜 사용하기 위해서”라는 푸코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곧 생명유지 장치의 발전이 없다면 ‘뇌사’라는 특이한 죽음의 현상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는 뇌사자의 장기를 이식하는 의료 현실도 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현대의학이 질병 치유에 기여하는 공헌과 의사들의 사명감은 높이 살 수 있지만, 몸의 의료기술적 지배는 인간의 도구화라는 문제와 함께 ‘죽음의 배제’ 혹은 ‘고독한 죽음’이라는 사회·문화적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생명의 한계를 연장하려는 의학의 열정은 여러 생명유지 장치를 고안해 냈고, 결국 인간과 기계를 결합시킴으로써 죽음을 인간에게서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학적 노력은 죽음을 인간에게서 상당히 밀어내는 데 성공한 듯이 보이지만, 그와 함께 인간의 존엄성도 함께 내몬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종교는 물음을 제기하고 답을 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복잡한 생명유지 장치의 도움으로 숨을 쉬고 있지만, 그래서 피부에 체온이 감돌고 있지만, 깊은 침묵 속에 혹은 신음 속에 잠긴 인간에게 어떤 도움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지를 깊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존엄사 혹은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의 법제화가 진행되고 있는 현시점에서 종교계는 그 법제화의 과정에 수동적으로 참여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자신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입장 표명은 몇몇 학자나 단체를 통한 것이 아니라 종단이나 교단의 합의 기구를 통해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종교는 현실의 상황에 부합하는 경전과 전통의 재해석을 통해서 생명과 죽음, 자연과 문화의 경계에서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이정표를 마련해줄 의무가 있다. ■

 

박상언 / 한국종교문화연구원 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대학원 졸업(종교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배아줄기세포연구의 생명윤리담론 분석: 한국 기독교와 불교를 중심으로〉 〈몸·죽음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타계관〉 〈근대 미국사회의 종교와 의학의 상호간섭 현상에 관한 연구〉 〈신자유주의와 종교의 불안한 동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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