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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예측가능성에 대한 회의
백선혜 안양 삼성초 교사
[28호] 2006년 03월 10일 (금) 백선혜 안양 삼성초 교사
어른들의 꿈, 아이들의 노력

보통 교육을 정의할 때 ‘교육은 바람직한 인간형성을 위한 조성작용’이라고 한다. 이 말에는 바람직한 인간이라는 목표가 있고, 조성작용을 어떻게 해나갈지에 대한 계획이 담겨져 있다. 그래서 교육은 목적지향적이고 계획적인 활동이다. 요즘에 교육을 이렇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어 한다. 훌륭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고, 풍족하고 안정되게 살기를, 꼭 필요한 사람으로 커 주기를 바란다. 아이를 바라보며 우리는 아이보다 많은 꿈을 꾸게 된다. 그리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일들을 준비한다.

학교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하기 위해 다양한 학원에 보내고,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기 바라며 어른들이 일하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라고 한다. 여기에 ‘남들에게 뒤쳐지나 않을까’ 걱정하며 피아노, 태권도, 그림을 따로 시키고, 또 다른 사람은 뭘 가르치나 두리번거린다. 내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수고하는 건 고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힘들어도 즐겁기까지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많은 것들을 누가 하는가’이다. 어른들이 바란다면 당사자가 해야 할 텐데, 어른들은 시키기만 하고 아이들은 저녁밥도 제대로 못 먹고 여기저기 다녀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꿈꾸는 미래와 아이들의 보호자가 꿈꾸는 미래가 꼭 같다고 자신할 수 있을지, 비슷하지는 않을까 추측하며 합리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만약 우리 아이들과 진지하게 생각을 나누지 않았다면 꿈꾸는 사람과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다른, 이상한 모양새가 우리 교육의 모습이 되어 버린다.

어차피 교육은 계획성을 내포하고 있고, 아이들은 아직 미래를 생각하는데 서투니, 어른들이 안내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우리들 사이에 깔려 있을 수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계획과 결과는 얼마나 연관관계가 있을까? 교육계획을 통해 우리들이 예측하는 목표에 얼마나 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고대 성인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교육활동, 가깝게는 근대 공교육이 시작된 지 200년이 넘었으니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이제는 제법 예측된 계획에 따라 비슷한 성과가 나올 듯도 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렇지가 않다.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인생에서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며, 성공했다고 어른들의 꿈처럼 행복한 것도 아니다. 판사가 되기 바랐는데 평범한 회사원이 되기도 하고, 피아니스트가 되었으면 했지만 음악교사가 되기도 하고 음악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기도 한다. 어지간한 프로젝트를 200년 동안 거듭 끊임없이 개발했다고 해보자. 아마도 예상을 빗나가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일은 몰라도 ‘사람을 키우는 일’은 그렇지가 않다.

아이의 모습은 작지만, 그 안에 우주의 세월이 들어있고, 무수한 인과론이 통합되어 있는 연기(緣起)의 법칙을 담고 있어 낳은 부모도 아이를 다 헤아릴 수 없다. 아마 내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있다면 그렇게 찾아 헤매던 불성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1. 내가 만난 아이들

초등교육 현장에서 10년, 그동안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교육이라는 매개를 통해 많은 진단을 하고 다양한 시도의 교육활동과 그에 따른 기대를 꿈꾸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건대, 서툰 면은 있었을지언정 그 순간은 많은 고민 끝에 최선의 선택을 하며 학교에 있었다. 하지만 10년이 지나 훌쩍 자란 아이들은 나에게 다른 말을 하고 있다.

1)명희(가명)-나를 너무나도 두려워했던 아이

눈이 참 예쁜 아이였다. 작고 마른 몸을 가진 연약해 보이는 아이였지만, 얼굴에 대부분이 눈인 것처럼 크고 빛나는 까만 눈을 가진, 10년 전 사진 속의 명희는 너무나도 예쁜 아이다. 6학년 때 만났고 난 신규교사였다. 시골 작은 학교에 한 반에 17명 아이들 중 명희가 있었다.

공부 못 하는 아이가 안타까웠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어릴 적 공부를 못 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공부를 못 하면 큰일이 나는 줄 안다. 신규교사일 때 말이다.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이가 학교에서 인정받으며 지내기를 바랐고, 그 방법이 공부인 줄 안 거다. 공부시간에 못 알아듣고 지겨우면 하루가 얼마나 지겹고 자신 없을까 염려하며 열심히 공부를 가르치기로 했다.

수업을 다 마치고 친구들이 돌아간 뒤에도 명희는 남아서 나와 공부를 했다. 집에서도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숙제를 내고 철저하게 확인을 했다. 그런데, 집에서 공부가 잘 안 되는 모양인지 숙제를 잘 해 오질 않았다. 집에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가정방문이 별로 환영받지 못 하고 있기 때문에 퇴근 후에 소리 없이 다녀오기로 하고 명희와 함께 집으로 가 보았다.

명희네 집은 학교에서도 한참을 떨어진 곳에 몇 가구 안 되는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있었다. 지금이라면 아이를 보며 가정 사정을 추측하기라도 했을텐데, 신참인 나는 명희네 집을 보며 참 망연자실해졌다.

문조차 제대로 달려있지 않은 방에 할머니와 동생, 그리고 명희가 살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소식을 모르는지 오래고 할머니는 먹고 살기에 힘들고 아이들 미래가 걱정스러워 긴 한숨과 진한 눈물을 흘릴 뿐이셨다. 지금이라면 이런 명희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그렇게 쉽게 결정내리지 않겠지만 그 때 나는 더욱 굳은 마음으로 명희의 공부를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고, 아이를 몰아붙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애쓰며 따라오던 아이가 잘못을 했다. 무슨 잘못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는다. 아마도 숙제를 안 해 왔겠지. 나와서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런데 아이가 교실에서 오줌을 싸 버렸다. 매를 맞은 것도 아닌데, 크게 꾸중을 들은 것 뿐 인데도 13살, 그것도 친구들 눈길이 민감하게 느껴질 여자 아이가 교실에서 오줌을 싸 버린 거다. 그렇게도 내가 무서웠다. 엄마처럼 돌봐주거나 자신감을 키워주며 의지가 되도록 해야 하는데.

하지만 나는 그 다음도 엇나가는 선택을 했다. 그만 두고 아이를 보듬을 생각은 하지 않고 속옷 가게에 가서 명희가 입을 예쁜 팬티를 사고, 바지를 사 두었다. ‘자, 우리 해 보자. 또 옷을 버리게 되면, 내가 사 놓은 걸로 갈아입으면 돼’ 하고 말이다.

그 뒤 새로 산 옷들을 쓸 일은 다행히도 없었다. 그러나 명희의 학습능력이 향상되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명희는 조용하고 공부 못 하는 아이로 중학교에 갔고, 연락이 없었다. 2년이 지나 나는 그 옷들을 버렸다. 부끄러워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

2)제현이, 규만이(가명)-도와주고자 했지만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몰랐던 아이

주로 5, 6학년을 담당하는 편이라 제현이와 규만이를 만난 것도 6학년 담임을 할 때다. 두 아이는 학습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고, 숙제를 해 오지 않고, 공부 시간에 무기력했다.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까 고민을 했다.

먼저, 제현이는 학교에서 별 말썽을 부리지 않았고, 내 말에 잘 따르는 편이었다. 집에서 돌아갔을 때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물어보았다. 여기서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부모님이 이혼하여 아버지와 살고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의 넘치는 사랑으로 아이는 스스로 하기 보다는 밥도 아직 떠 먹여 줘야 먹을 정도로 의존적이었던 거다. 그래서 집에 가면 TV를 보며 뒹굴뒹굴 뒹굴다 밥 먹고 자고 그런다는 것이다. 마치 아기같이.

제현이에게 집에서도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기 위해 정해진 시간에 공부를 하고 다 마치면 내게 전화를 하도록 했다. 때로는 내가 전화를 걸어 약속한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는지 확인을 했다. 이러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이는 숨가빠했다. 제 딴엔 한다고 하는데도 잊어버리고 못 하는 게 한 두 가지씩 나오고 방법도 틀렸다. 이것저것 챙겨야 한다는 게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나도 날마다 제현이 전화를 챙기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제현이 아버님도 고마워하시고, 이렇게 공을 들이면 학습에 큰 도움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제현이의 학습태도와 성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날 엄마처럼, 저는 아들인냥,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정도가 성과라면 성과이다.

규만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느렸다. 한 박자 늦다 보니, 내 말이나 지시를 이해하는 것도 느렸다. 이게 쌓이고 쌓여 주의집중력이 약해지고 내 말이 귀 밖으로 흘러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수업시간에 설명을 들을 때는 집중의 표시로 손을 머리 위로 얹기로 했다. 규만이가 이해가 되면 손을 내리고, 이해가 되지 않으면 계속 올리고 있는 걸로. 사인을 정하고 난 규만이가 손을 내릴 때까지 천천히 반복해서 이야기를 했다. 점차 좋아지는 듯 해 보였지만, 문제는 또 다른 곳에서 터졌다. 규만이가 학교에 연락도 없이 안 오는 것이다. 집으로 전화를 해도 아무도 받지 않고, 부모님은 아침 일찍 나와서 모르겠다고 하고, 수업 중에도 발을 동동 굴리며 창밖만 바라보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 전화를 해 보면, 그제야 받는다. 지금 일어났단다. 밤새 컴퓨터로 게임을 하다 새벽녘에 잠이 든 모양이다. 부모님도 이렇게 심각한지 모르셨다고 한다. 아이보다 일찍 잠드시고 어쩌다 새벽에 일어나 보면, 숙제를 한다고 해서 자라고 하면 “네”하고 대답하거나 자는 척한다고 해서 그러려니 하셨다고 한다. 주의집중력의 문제나 학습의 문제 원인이 이렇게 다른 곳에서 터져 나오기도 한다.

3) 영석이와 한별이-그래도 나은 경우

영석이는 또래 아이들 보다 정서적 발달이나 학습 발달이 많이 늦은 아이였다. 지능 범위는 정상수준인 듯 하나 큰 체격에 비하면, 하는 행동은 동생 같다. 그러니 친구들과 말이 통하지 않을 밖에. 친구들은 답답해 하고 영석이는 제 뜻이 통하지 않아 억울한 듯 분통을 터트렸다. 그래서인지 영석이는 한 번 화가 나면 교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공격성도 쉽게 보였다. 이 상황에서 학습습관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았다. 어쨌든지 영석이가 학교에 나오는 게 싫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맨 앞에 앉히고 어르고 달랬다.

“영석이가 때려요.” “영석이가 실내화를 자꾸 얼굴에 들이대요.” 해도 아이들 앞에서는 엄하게 쳐다보고 영석이에게는 “장난이 치고 싶었구나.” “화가 난 일이 있었니?” 하고 공감 반응으로 대했다. 심지어 영석이는 수업 중에 계속 잠만 잤는데, 억지로 깨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자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학습결손이 쌓일 게 뻔해 깨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꾹 참고, 일어나면 엉덩이를 두드리며 “우리 영석이 잘 잤어? 이제 일어나야지. 점심 먹게.” 하기도 했다. 체육시간이 있는 날이었다.

체육 전담 선생님은 체육관에서 수업을 하시는데, 아이들이 체육관으로 이동을 시작한 걸 보고 잠시 연구실에 다녀와 보니 영석이만 혼자 덩그러니 남아 자고 있었다. 아이들이 깨우다 깨우다 자기들끼리 간 모양이다. 한숨을 한 번 쉬고 영석이를 깨웠다. “영석아, 체육관 가야지. 친구들 다 갔는데.” 했더니 아이가 부스스 눈을 뜨고 “친구들 다 갔어요?” 한다. “그래, 체육관으로 가.” 해서 보냈더니, 세상에! 체육 선생님이 그러신다. 영석이 체육관에 잘 갔냐고 물어보니, 오긴 왔는데, 매트위에 엎드려 내내 잤다고. 내가 영석이에게 해 준 것 중 가장 많은 것은 아마도, 참는 거였다.

이런 영석이의 상황을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혼자 아이들을 키우며 밤에 일을 하셔야 하는 상황에서는 밤새 하는 게임을 막을 수 없다는 걸 간곡하게 알렸다. 어머니는 큰 결심을 하고 친정이 있는 지방으로 이사를 하셨고, 영석이는 전학을 갔다.

영석이에게 편지가 왔다.
“5학년 때가 제일 재미있었어요. 공부하는 법을 배워서 지금은 아주 잘해요.”
잠만 자다 간 영석이가 재미있었다니, 공부하는 법을 배웠다니, 참 모를 일이다. 하여간 그 뒤 어머니와 통화를 해 보니, 아이는 아주 잘 지내고 5학년 때 이야기를 자주 한다고 하셨다.

한별이는 발령 받기 전에 사회교육센터에서 만난 아이다. 한별이는 중학교 2학년이었고, 난 글쓰기 교육에 관심이 많아 아이들에게 글쓰기 지도를 했다. 한별이는 공부도 잘 했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리더였고, 기타도 잘 치고 운동도 잘 하는 못 하는 게 없는 아이였다. 난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데, 그런 한별이에게 “니 글이 좀 더 따뜻했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그게 한별이 마음을 움직였다며 군대 갔다 온 지금도, 내가 전근을 가서 다른 지방에 있어도 찾아온다. 여자친구 생겼다고 인사 시키려오고. 많은 선생님들이 아껴주셨던 아이인데, 이 말이 아이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줄지, 난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2.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는 교육

아이들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부끄럽게도 실패한 일이나 후회되는 일이 더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게 아이를 만나 부족한 부분을 살펴보고 나름대로 열심히 지도했지만, 많은 경우 예상했던 것과 다른 결과가 나오거나 또는 성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학습 부진 학생을 지도하는 데 어려움을 묻는 연구 논문에서 1위가 따로 지도할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것이었고, 성과가 나오지 않아 힘들다는 응답이 네 번째일 정도니까. 내가 서툰 부분도 있지만 많은 교사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 어리둥절하게도 예상치 않은 긍정적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아직도 왜 변화가 없었을까 원인을 다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10년이 지난 지금, “선생님~”하고 찾아오는 아이들은 어릴 때 모습을 보며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다.

이쯤 되면 우리들은 더 많은 아쉬움이 생긴다. 좀 더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하고.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보기엔 정서적이고 사회가 도움을 주어야 하는 가정 문제로 겪은 어려움인데, 우리 교육은 아이들에게 더 많은 학습량으로 채워주려는 어긋난 선택을 한다. 더 많이 가르친다. 정규교과는 기본이고 컴퓨터에 영어에 한자까지. 배워서 나쁠 건 없지만, 너무 많다면 소화라도 제대로 될까. 그리고 그런 것들이 아이들에게 어떤 변화로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있을까?

서양의 많은 교육 이론과 연구 결과는 교육활동과 그에 따른 예측가능성이 단지 어른들의 희망일 뿐이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지능검사를 고안하고 IQ를 대중화시킨 사람이 Lewis Terman이다. 그는 날카로운 이성이 인간이 소유한 가장 가치 있는 특성이며, 인생 경로는 예측 가능한 것임을 믿었다. Lewis Terman은 캘리포니아 주의 수백 군데 학교에 편지를 써서 IQ가 135 이상인 상위 1%에 속하는 아이들 1,500명을 모았다. 각 아이마다 서류철 하나씩을 만들어 죽을 때까지 상세히 기록했다. 익명성을 보장했기에 아이들 중 대부분은 죽은 후에야 그들이 Terman의 아이들이었음이 알려졌다. Terman의 아이들은 열 명 중 한 명꼴로 유명인이 되었다. 그러나 노벨상이나 퓰리처상을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영재들의 수입은 미국인 평균보다 높았으며 건강 상태도 평균이상이었고 자살률은 평균보다 낮았다.

Terman의 아이들은 대부분이 도시의 중상류층 백인 자녀들이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두 명, 인도 출신이 한 명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니 표집범위를 넓힌다면 더욱 평범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Terman은 나중에 자신이 선택한 아동들의 삶에 개입해서까지 좋은 결과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IQ가 135 이상인 상위 1%에 속하는 영재들은 평범한 어른이 되었다.

Eleanor Maccoby와 John Martin은 교육의 영향을 연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부모의 행동이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거나, 그 영향이 같은 가정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사이에서 굉장히 차이가 나는 것”이라며 교육자들과 부모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이 연구 결과는 아이를 둘러싼 가장 밀접한 환경과 교육활동이 한 형제들 사이에서도 의도한 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즉, 같은 부모 아래서 자란 형제도 첫째 다르고, 둘째 다르다는 말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한 뱃 속에서 난 아이들이 어쩜 저렇게 다를까 고개를 갸우뚱거렸던 적이 한 번쯤은 다들 있었으리라.

또한 미국의 발달심리학자 Carol Tavris는 “수십 년간 노력했으나 학자들은 아이를 특정한 인격이나 능력, 특정한 문제의 소유자로 만드는, 아니 그렇게 될 가능성이라도 높이는 양육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며 교육의 불확실함을 주장했다. Terman의 동료인 행동주의 심리학자 John Watson과는 정반대인 주장이다. Watson은 “내게 열두 명의 건강한 아기를 데려오라. 그러면 나는 어떤 아이들이든 상관없이 그 아이들을 각 분야의 전문가로 키울 수 있다. 의사, 변호사, 예술가, 심지어 거지와 도둑으로도 말이다. 나는 아이들의 재능과 성향에 관계없이 모든 아이를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변수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생각이었다. 가장 우선은 ‘우리 아이를 이렇게 키워주세요’하며 심리학자 손에 맡길 부모가 없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학교와 어른들은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교육의 예측가능성이 이렇게도 희박하다면, 어쩌면 교육 무용지물론으로 이어지기 쉬울 것이고, 그것 또한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인지 교육은 그 제도를 더욱 정교하게, 더욱 많은 양을 마련하여 아이들에게 따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학습부진이 문제를 만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부진 학생을 돕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각 학교에 보내고, 학교는 그에 맞추어 아이들을 붙잡아 둔다. 많은 특기적성프로그램이 생겨나고,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들은 교사와 같은 시간에 하교를 하고 아침에는 한 시간 일찍 와 컴퓨터 수업을 듣고 있다. 교과목은 더 많아지고 각 교과목은 심화며, 보충이며 더 갈래가 갈라진다. 공부를 마치고 난 뒤 운동장에 남아 노는 아이를 보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진다. 또 우리 아이들은 공부하기를 싫어하고 지루해하고 있다.

발달심리학의 단계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은 근면성의 단계이다. Erikson은 이 시기의 아이들의 특성으로 배우는 것이 자연스럽고 즐거운 때로 ‘자급자족하는 로빈슨 크루소’라고 할 정도로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고 일하는 것(공부하는 것)에 집중력을 갖는 시기라는 것. 하지만 교실에 앉아 있는 우리 아이들을 보면 이 말이 무색해진다.

3. 연기를 이해한다면

우선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아이들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고 많은 부분 이해하고 있으나, 모두 알 수는 없다. 이 말을 우선 불확정성의 개념으로 차근차근 이야기 해보자.

Albert Einstein은 끝까지 세계의 모든 원인과 작용이 규정되어 있고 그것은 인간이 원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하느님은 정교하시다. 그러나 음흉하지는 않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그리고 현재 사회과학을 포함한 과학의 세계에서 Einstein의 생각은 튼튼한 기저가 되고 있다.

그러나 Werner Heisenberg가 ‘불확정성의 원리’로 그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은 양자이론의 진보에 지도적 역할을 한 원리로, 간단히 말하면 장소와 임펄스, 에너지와 시간이라는 측량 단위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가 한 가지를 결정하면 다른 한 가지는 불확실하고 우연한 결과가 된다는 것, 장소와 임펄스를 함께 확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연 속에 있는 것들은 이런 카오스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미국의 기상학자 Edward Lorenz는 현대과학이 일월식 같은 천체 운동, 로켓 운동 등은 정확하게 예측하면서도 왜 유독 날씨만은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하는가에 의문을 가지고 ‘나비효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개짓이 미국 텍사스 주에 발생한 토네이도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이 나비효과는 지표면의 대기 온도와 같은 단 세 가지 조건만으로 계산을 했는데도-너무 간단해서 Lorenz는 이것을 장난감 모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렇게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를 불러일으킨다는데 세계는 놀라워했었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에 대해 세상에 대해 알 수는 있으되 모든 것을 알 수 없고,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므로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와 함께 관심이 가는 것이 자기연관성의 원리이다. 주변 환경이 카오스적인 변수를 일으킬 수 있다면 외부에서 오는 자극이 거의 동일한 유기체에게서는 예측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여기서 가장 많이 연구되는 것이 쌍둥이들의 사례연구이다. 샴쌍둥이 창(Chang Bunker)과 엥(Eng Bunker)은 1815년 가슴이 서로 붙은 채 당시 샴이라 불리던 태국에서 태어났다. 창과 엥은 63세까지 서로 몸이 붙어있는 채로 지냈다. 하지만 그들의 성격은 너무나도 달랐다. 창은 엥에 비해 훨씬 똑똑하고 강했으나 분을 잘 내는 성격이었다. 분리를 너무나도 갈망했던 창은 한동안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에 반해 엥은 술을 마시지 않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 않은 수줍어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창이 밤새도록 노름을 즐기는 동안 엥은 기다리다 지쳐 잠드는 경우도 많았다고 하니 그들의 성격 차이를 알 수 있다.

환경이 비슷해도 유전자가 비슷해도 사람 일이 알 수 없다는 연구가 또 있다. 미네아폴리스 대학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쌍둥이 연구에 참가했던 여성 쌍둥이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서로 떨어져 자랐으며 어른이 되어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그 중 한 명은 피아니스트로 성공했지만 다른 한 명은 도무지 음악적 재능이 없었다. 둘은 일란성 쌍둥이로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이 되었는가는 환경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양쪽 부모의 환경을 살펴보니 한 쪽 집은 음악과 거리가 먼 사람들인데 반해 다른 한 쪽 집은 어머니가 피아노 레슨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피아니스트가 된 여성이 바로 피아노 레슨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틀렸다. 피아니스트는 전혀 음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양부모 밑에서 자란 여성이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열심히 연구하고 검증한 내용을 나는 불교철학에서 아주 쉽게 발견하곤 한다. ‘우리 아이가 똑똑하니, 좋은 대학에 갈 거야.’ 물론 그럴 가능성은 똑똑하지 못 하다고 느끼는 경우보다 높을 것이다. 그러나 내 아이 안에 있는 깊은 자기연관성은 어찌할 것인가? 어떤 번뇌가 깊이 말나식(末那識)에 있어, 지금 제공받고 있는 교육환경이 어떻게 반영될지, 자신도 알 수가 없다. 무슨 종자가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담겨 있어, 아이의 마음을 움직일 것인가? 그것은 부처님 법으로 모두 연기(緣起)되어 일어나는 것이지만 우리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말이다.

아주 미세해서 보통의 수행으로는 존재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모든 번뇌의 뿌리가 되는 말나식이 지독한 무명을 일으켜 더욱 나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중생이다. 또 윤회의 주체로 이어지고 이어져 쌓이고 쌓인 윤회의 업을 담고 깊게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는 아뢰야식은 현생의 부모가 알 길이 없다.

대반야를 이루신 부처님은 각 중생의 본성을 바로 보시고, 그에 알맞은 법을 설하셨다고 한다. 『잡아함경』에 법을 전하러 떠나는 제자 이야기가 나온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험난할 것을 염려하신 석가모니는 ‘만일(if)’이란 질문으로 가상 상황을 설정하고 대처 방안을 강구시키신다. “그 곳 사람들은 거칠다. 만일 그들이 눈앞에서 나무라고 꾸짖으며 헐뜯고 욕하면 어찌하겠느냐?” “만일 그들이 칼로 너를 죽인다면 어찌하겠느냐?”

또, 왕의 비만한 것을 지적하며 “마땅히 스스로 조심하여 먹을 때마다 절제해 양을 알아라. 그러면 고통이 줄어들고, 편히 소화해 목숨을 보존하리라”라는 계송을 밥을 먹을 때마다 읊게 하여 식사량을 절제하게 하셨다. 더 많은 사례를 살펴보면 석가모니는 대단한 상담자이며 교육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부처님은 이미 반야를 이루어 모든 것의 연기함을 꿰뚫고 계셨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만일’을 말하며 어찌하겠냐고 물었을 때, 상대의 반응은 갖가지로 나올 수 있다. 석가모니의 제자처럼 각 변수에 대한 구체적인 상황을 미리 미리 생각해 보는 이도 있을 것이요, 머릿 속이 복잡해서 더 혼란에 빠지기도 할 것이고, 답을 다 아는 듯이 묻는 상대에 반감이 드는 사람도 있을 거다. 이게 바로 자기연관성이고, 그 안에 있는 육식(六識)의 다름이다. 석가모니는 제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어 그에 맞는 교육방식을 택했지만, 생활의 지혜도 모잘라 쩔쩔매는 우리는 어떻게 할까?

가장 쉽게는 인과관계가 통합되어 있는 것을 연기라고 이해한다면, 두터운 무명(無明)에 가려져 있는 대중은 자연에 내재된 불확정성과 자기연관성에 의해, 그리고 내 안의 업식(業識)에 의해 그저, 우연히 그리 될 수밖에 없는 삶을 바라만 보아야 할까? 아니다. 그러기엔 삶은 너무나도 깊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연론에 빠지게 되면, 교육은 예측가능성을 논하기 이전에 그 존재 자체에 대한 무용지물을 생각해 보아야 할 지경이다.

1878년부터 닭 콜레라의 병원체를 연구하던 Louis Pasteur는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잠시 연구를 중단하고, 인공 배양된 박테리아를 여름 내내 실험실에 방치해 놓았다. 그리고 가을에 다시 연구를 시작하여 아무 생각 없이 이 변질된 병원균을 닭 몇 마리에 주사했다. 그러자 그 닭들은 가볍게 앓더니 이내 회복되었다.

사실 100년 이전에 Edward Zerner가 천연두 백신을 발견하였고, 알려고만 한다면 이런 유사한 과정으로 다른 백신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다른 병원균에도 적용된다는 ‘예방접종의 원칙’을 발견한 것은 Pasteur였다. Pasteur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간과 동물의 유기체에 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미생물 분야에 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연은 그런 Pasteur를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Pasteur는 “우연은 준비가 잘 된 사람에게 행운을 선사한다”고 말했다.

모든 것은 연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연기하는 과정을 모두 알아차리기 힘들다. 가깝게 또는 아주 긴 시간이 흘러서야 그러해야 했음을, 그럴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단순한 인과가 아닌 이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로 예측하고 기대하고 계획하는 것은 역시 무지의 반복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말나식을 발견한 유식학자들은 그 선천적이고 자동적인 성격에 얼마나 절망했을까. 하지만 그들이 찾아낸 건 그래서 끝이라는 좌절이 아니라, 그러므로 중생은 수행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과제였다. 멸진정에 이르러야 아라한이 되어야 번뇌의 뿌리가 뽑히고, 이 생에서 하지 않으면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질긴 번뇌에서 한 생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길은 주체적인 수행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찌 될지 모르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가 아니라 우리 아이에게 최선을 다한 “교육활동”을 준비하고 그렇게 아이와 만났을 때 아이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다. Pasteur의 예방접종처럼 말이다. 그 작은 우주가 가지고 있는 깊은 업의 과정에서 무엇이 도움이 될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니.
그리고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듯, 아무 것도 계획하지 않는 듯, 교육했으면 한다. 무엇이 그 아이에게 가장 필요하고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아이밖에 없다. 제도와 어른들이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그대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이에게 이미 교육이 아니라 부담이며, 때로는 학대가 될 수도 있다. 제도와 어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도와줄지 살펴보고 물어보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가장 최선이며, 가장 겸손한 교육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결과와 성과에 대해서는 놓아버리자.

아이 안에 있는 불성, 그것을 믿는다.

Rousseau는, 아이에게는 자연이 부여한 생명력이 있으며 그것은 몸속에 시간표처럼 계획되어 있으니 교육자의 일은 아이의 자연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식물은 재배에 의해 가꾸어지고, 인간은 교육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말을 남겼다.

자연은 아이들에게 이 시기에 최초의 용기를 배우게 하고 배우고자 하는 선천적 기질을 준비해 놓았다. 꾸준한 주의 집중과 지속적인 근면을 유지하여 자아력을 발달시키도록 말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지금 배우는데 지루해하고 힘들어하기만 한다.

이런 현상들은 아이들 탓이 아니다. 계획되고 제도화되어야만 불안해하지 않는 우리 교육은 더욱 정교하게, 더욱 부담스럽게 아이들을 공부거리로 몰아넣는다. 소중한 아이들이기에 실패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불안을 이기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 아이들이 자신의 생명력과 자연성에 의해 행복을 찾아갈 것이라는 믿음, 그래서 서양교육철학에서 말하는 자연성과 불교철학에서 말하는 불성이 이어짐을 느낀다.

불교철학은 누구에게나 불성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으며 아이일수록 부처에 가깝다고 한다. 그럼, 누가 누구를 가르쳐야겠는가? 아이에게 묻고 아이를 관찰하여 도움 줄 것을 함께 찾아나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아름다운 백조가 물위에 우아하게 떠 있기 위해 물 밑에서 열심히 움직여야 하는 두 발처럼 말이다.

아이에게 이미 불성이 있음을 믿는다면, 교육은 함께 수행하듯 찾아가야 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교육도 종교처럼 거의 탈과학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 마음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사람 키우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아랍의 철학자 Kahlil Gibran은 자식을 다른 이들보다 더 잘 키우기 위해 조바심을 내는 부모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자녀는 여러분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갈망하는 생명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를 여러분과 똑같이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뒷걸음 치지 않으며 어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명력을 발휘하며 더 나은 자신을 찾아가려는 본성이 우리 아이들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제보다, 우리보다 우리 아이들에게 더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 난 이 말이 참 좋다.

백선혜
안양 삼성초 교사·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석사과정 수료. 1994년 부산교육대학교 졸업. 2006년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 상담심리학과 자아초월상담학 석사과정 수료. 초등교사 경력 11년, 2000년부터 교사상담모임에서 활동, 학급아동들과 집단상담 진행 경력 7년. 현재 안양시 삼성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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