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가면 좋아질 것이다.

몸이 좋지 않아 늘 병을 달고 살던 나에게 어머니가 한 말이다. ‘산에 가면 좋아질 것이다, 네 몸에는 너무 많은 말들이 있다’는 어머니의 말이 귓바퀴에 닿기도 전에 흘려보냈다. 하지만 스물이 넘으면서 거듭된 병치레로 학교 다니기조차 힘들었을 때 그 말을 새삼 기억해 냈다. 산에 가면 좋아질 것이다. 그 말이 다가온 것은 장자의 일대기를 읽으면서부터인 듯하다. 장자는 어린 시절 산지기였는데, 산에 가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장자》에 매료되어 밑줄을 긋고 베끼기도 하면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장자》를 열심히 읽으면서 내 안에는 너무 많은 말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너무 많은 감정들과 소리들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기침이 멎거나 숨쉬기가 편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씩 몸의 열이 내리기 시작했다. 《장자》를 읽고 암기하면서 세속적인 욕망을 줄여나갔다.

그런 와중에 절을 순례하며 도를 닦는다는 모임을 알게 되었다. 산중의 절에 가서 마음을 수행하는 모임이었다. 본격적으로 장자처럼 산지기가 되기 위해서 그 모임에 참여했다. 용주사, 화계사, 상원사, 승가사 등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좌선을 배웠다. 그런데 좌선을 하는 동안에도 내 안에 있던 말들, 소리들이 전혀 죽지 않았다. 이 산 저 산을 다니면서 가부좌를 틀고 묵상을 하면 할수록 너무 많은 소리들이 내 안에서 솟아났다. 심장에서, 그리고 머리와 배, 어깨, 팔다리, 심지어 공기까지도 아우성을 쳤다.

탁! 탁! 탁!

가끔 울리는 죽비소리와 향내가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하여 그 아우성을 멈칫하게 하기는 했지만 불편한 가부좌의 자세와 함께 소리들은 흐느낌으로 바뀌는 듯했다. 내 안의 소리, 말들은 잠들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나 자신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좌선은 몸에서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말들과의 싸움이었다. 점차 말들이 섞이고 잡혀 들어갔다. 심장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려 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 만난 것이 《금강경》이다. 강사로 온 스님의 얘기였다. 아마 ‘점심’이라는 말의 에피소드를 얘기하면서 들려줬던 것 같다. 그 스님의 말의 의하면, 우리 민족은 금강 신앙을 갖고 있어서 《금강경》은 반드시 읽어 봐야 하는데, 《금강경》 속에 우리 자신의 지혜가 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처음 읽은 《금강경》은 번역자가 없고 한지로 옛날 책처럼 묶은 경전이었던 것 같다. 큰 글자체로 보기 쉽게 엮은 것인데, 읽어보니 처음엔 《장자》와 너무 비슷했다. 장자가 말한 허(虛)나 무(無)가 공(空)과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점점 읽는 횟수가 많아질수록 《장자》가 세속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면 《금강경》은 전혀 다른 차원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공(空)은 그냥 텅 빈 공(空)이 아니었다. 선정(禪定)의 지혜였다. 장자의 지혜가 세속의 언어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금강경》은 언어 밖의 지혜를 찾으려고 한 것 같았다.

그때부터 《금강경》에 빠졌다. 어린 시절 서너 해 서당을 다닌 경험으로 한문에 친숙함을 느껴 한적(漢籍)을 떠듬거리며 읽는 것을 좋아했기에 한문으로 되어 있는 경전을 혼자 읽어나가는 것은 신비 그 자체였다. 가부좌 틀고 앉아 단전호흡을 한 후 《금강경》을 읽는 맛은 그 옛날 어머니가 한 말을 새록새록 느끼게 해 주었다. 네 안에는 너무 많은 말이 있다.

침묵을 들어야겠구나!

침묵의 향기와 색깔을 느낄 수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금강경》을 번역해야겠다고 초발심을 냈다. 일 년여를 꼬박 수보리와 부처님의 대화 속을 거닐며 초기불교 시절의 그때를 연상해 보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십여 년 후에 만들어낸 것이, 사실상 원문은 거의 베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시가 있는 금강경》이다. 시는 침묵을 듣는 양식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내는 것이 시이다. 그것은 심장의 소리며, 영혼의 소리이다. 여기에서 내 안의 소리를 쫓아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야부 송 금강경》을 잡았다. 시와 《금강경》이 절절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무비 스님에게 많이 의지했지만, 진정한 시와 선의 세계는 어떻게 한 몸, 혹은 형제가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산에 가면 좋아질 것이다, 네 몸에는 너무 많은 말들이 있다. 어머니의 말이 야부 송까지 이끌어왔고, 그 뒤 김관호 선생을 만나 만해학회를 해가면서 조계의 산하에서 보잘것없는 일을 하며, 평생을 《금강경》 공부하면서 살아가겠다고 서원을 했다. 그랬건만 지금 그것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 언뜻언뜻 세속에 끌려다니는 삶이 허망할 때가 많다. ■      

 

전기철 / 숭의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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