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자택’과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를 다녀와서

프롤로그

청공(靑空) 윤이상. 그는 아직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했다. ‘한반도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현대음악의 거장’, ‘21세기의 오딧세이’, ‘상처 입은 용’, ‘분단의 상처를 어우른 음악가’…. 숱한 수사가 그의 이름 앞에 나열되고 있지만, 정작 그의 혼백은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한 채 구천을 맴돌고 있다. 아니 그의 불명 ‘청공’처럼 이미 이승의 인연을 훌훌 털고 관세음보살의 영접을 받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남은 자들은 그의 ‘영정’을 고향 땅 통영 언덕에 꽂지 않는 한 그의 출세간을 인정할 수가 없다.

그가 타계한 지 10년이 지났고, 지난해부터 그를 기리는 기념재단도 설립되었지만, 정작 그의 유족들은 ‘선생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아 아직도 고국에 돌아올 수 없다’고 한다. 그의 미망인 이수자여사는 올해 팔순이다. 영육의 관리가 철저하여 아직도 허리가 꼿꼿한 분이지만 노인의 안녕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어떤 지독한 걸림돌이 있길래 그의 영혼은 죽어서도 고향에 쉽게 돌아오지 못하는가.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서 선생의 ‘집사’ 노릇을 하는 필자는 선생의 숨결을 찾아 먼 길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2006 윤이상의 숨결 찾기’. 올해는 윤이상의 주변사람들에게 그런 해였다. 선생의 영혼이 머물만한 곳. 독일 베를린과 평양시 영광거리를 다녀왔다. 행여 이 보고서가 서둘러 윤이상의 영혼을 영접하는 초청장이 되기를 기대한다.

비가 새는 집, 베를린 자크로우어 자택

암스테르담을 거쳐 베를린 외곽 반제 호수가에 있는 윤이상 선생의 자택에 도착한 것은 지난 여름이다. 선생의 타계 이후,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평양으로, 미국으로 동가식서가숙하는 미망인 이수자여사가 베를린 자택에 돌아 간 때를 기다려 독일로 달려갔다.

 베를린 외곽 자크로우어 키르히베크 47번지. 수령 수백 살이 넘는 떡갈나무 숲 속에 자리한 선생의 자택은 한동안 비어 있었던 탓인지 별로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수자여사께서 서울 손님맞이를 위해 며칠 전부터 인부를 불러 집안의 잡초를 깎고 정원을 손질했지만, 채 시들지 않은 풀더미에서는 풀 향기가 폴폴 나고 있었다. 가지가 지붕을 덮어 할 수 없이 이번에 베었다는 늙은 소나무 밑동에서는 송진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집은 선생이 베를린 정착 이후, 주옥같은 작품들을 작곡했던 바로 그 산실이다. 여기서 세계가 인정하는 윤이상 음악의 대부분이 탄생했다.

오래간만에 남편이 없는 집에서 고국의 손님을 맞이한 백발의 미망인은 무척 감회가 설레는지 지하실에서부터 2층 다락방까지 부지런히 옮겨 다녔다. 그녀가 짚어주는 곳곳마다 선생의 진한 숨결이 묻어났다. 특히 선생의 서재였던 2층에는 아직 선생의 유품들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채 빛이 바래가고 있었다.

악보는 물론, 안경, 필기도구, 옷가지 등 선생의 고독과 아픔이 배어나는 주인 없는 물건들이 마땅히 상속할 대상을 찾지 못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다리를 놓고 겨우 올라 간 다락방은 이수자여사가 도자기를 빚던 공방이었다. 남편의 타계 이후, 다락방에 올라가지 않아, 공방에는 마른 진흙덩어리와 공구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길쌈을 하듯’ 먼 이국땅에서 이 의좋은 부부는 아랫층에서는 남편이 오선지를 그리고, 윗층에서는 아내가 도자기를 빚었던 것이다. 그들이 그린 것은 악보만이 아니고, 도자기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서로 의지하며 만지고 다듬은 것은,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귀향의 부푼 꿈이었을 것이다.

선생의 집은 곳곳이 비가 새고 있었다. 특히 현관 옆 주차장 창고는 누수가 심해 금방이라도 천장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선생께서 생전에 타던 자가용 승용차는 안으로 들여놓지도 못하고 도난의 위험도 무릅쓴 채 주차장 밖에 내 놓고 있었다. 미망인의 침실 쪽 천정도 그러했다.

벽을 타고 내린 빗물은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는 영혼의 눈물처럼 처연해 보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이내 폐가가 된다’고 그랬던가. 폐가 아닌 폐가가 되어가는 거장의 집. 별다른 수입이 없는 유족들로는 보수할 엄두도 내지 못해 세계가 인정하는 현대 음악의 보고가 이렇게 쓰러져 가고 있었다. 이것은 방치이다. 아직도 그의 조국이 그를 방치하는 것처럼 그 ‘상처 입은 용’의 둥지가 무심한 세월 속에 방치되고 있었다.

말라붙은 정원의 연못

선생의 집 정원에는 한반도의 지형을 닮은 작은 연못이 있다. 고향에 가고플 때 바라보면서 시름을 달래려고 만든 작은 연못이다. 주인 없는 연못에는 빗물이 고여 이끼가 돋고 낙엽이 뒹굴고 있었다. 선생의 삶이 그러했듯 선생이 가고 없는 집 곳곳은 그렇게 외로움과 기다림의 풍상에 떨고 있었다. 마른 연못에는 분단의 경계선이 없다. 선생은 저 연못에 물고기도 풀어놓고, 연꽃도 띄우면서 분단 없는 고국의 향기를 맡았을 것이다.

선생의 삶이 분단의 경계 위에 있었듯, 선생의 집도 오른쪽은 옛 동베를린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은 서베를린으로 가는 길이다.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은 경계위의 삶을 산 선생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세의 업보였는지 모른다. “결혼을 제외하고 내 생애는 언제나 분단의 경계 위에 선 것이었다. 내 음악의 대부분은 그 분단을 극복하는 일에 바쳐졌다”고 토로한 선생의 삶은 살아서도 분단의 벽을 넘지 못했고, 이제 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되었어도 그 분단의 장벽을 뛰어 넘지 못하고 있다.

선생의 집으로부터 5분여 정도를 걸어 나가면 바다 같은 반제호수를 만난다. 베를린까지 이어진다는 이 호수는 아침마다 여객선이 들어오고, 물가에는 고니 떼도 날아와 물너울을 일으킨다.

선생은 작품을 구상할 때, 또는 작품이 풀리지 않거나 조국의 일로 잠이 오지 않을 때, 이 호숫가에 나와 고향 통영 앞바다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어부들의 노랫소리, 뱃고동소리, 파도소리….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을 보며 동무들과 뛰어 놀던 바닷가 백사장을 떠올렸을 것이다. 선생의 손에 이끌려 때로 이 호숫가에 산책을 나오던 미망인 이수자여사는 1996년 5월 미국 서부 바닷가에서 이런 글을 썼다.

“내 그 바다에 가는 날, 흰 모래 밟으며 당신의 발자국 찾겠습니다. 파도 철썩이는 바위 위에서 당신의 음악도 듣겠습니다.”-「내 남편 윤이상」 하권

가토우 묘역의 ‘처염상정(處染常淨)’ 유택

집에서 7km 남짓 떨어진 가토우 지역묘지의 특별묘역에 윤이상은 잠들어 있다. 1995년 <화염속의 천사>를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공연하고 그해 11월 베를린에 돌아와 영면에 들자 그의 제2 조국인 독일은 그를 가토우 명예묘역에 안장했다.

묘지 입구의 안내판에는 이 공동묘역에 잠든 사람 가운데 유명인사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윤이상의 이름이 유난히 고딕으로 뚜렷하게 쓰여 있었다.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을 받은 그를 기려 독일 정부가 명예무덤에 안치시켜 최고의 예우를 한 것이다.

검은 대리석 표지석에는 ‘처염상정’ 이라는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 선생의 서거 소식을 접한 한국불교계의 중진스님인 설정스님이 건너가 그의 혼백을 달래며 헌정한 글이다. “어느 곳에 있어도 물들지 않고 늘 깨끗하다” 그래서 불명조차 푸른 하늘을 뜻하는 ‘청공’ 이라고 했을까?

묘비에는 선생과 함께 부인 이수자 여사의 이름도 선명하다. 죽음으로도 갈라놓지 않으려는 부부의 도타운 인연을 돌에 새겼을 것이다.

1995년 선생이 서거하자, 북한은 선생의 유해를 북으로 모시려 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미망인은 비록 선생이 생전에 남으로 가지 못했으나 유해마져 북으로 옮겨 놓는 것은 진정한 선생의 뜻이 아니라 여겨 일단 낯선 땅 독일에 그의 유택을 정한 것이다. 선생의 명예회복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고 부인 이수자 여사가 고향에 돌아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팔순 노구의 미망인 이수자여사가 어느 날 문득 평양에서 잠든다면 윤이상은 영영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는 결과적으로 남쪽에 오지 못하는 대신 북쪽으로 걸음을 돌렸지만, 그것은 그가 북을 택한 것이 아니라 남으로 오지 못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국제윤이상협회>의 사람들

지금 윤이상 선생과 그의 가족들이 떠난 빈 집과 무덤을 돌보는 사람은 국제윤이상협회의 회장인 볼프강 슈파러이다. 50대 초로인 그는 독신인 채 평생을 윤이상과 호흡하며 윤이상의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는 “나는 슬픔과 억압이 있는 곳에 음악으로 말하고 싶다”는 윤이상의 말을 듣고 평생을 윤이상에게 바치기로 다짐했다고 한다. 그는 말한다.

“한국에서는 윤이상을 서양의 아방가르드(전위예술가)라고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기에 그는 너무도 한국적인 탁월한 음악가이다. 그와 그의 음악은 내게 한국과 동양에 대해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의 음악을 계속 가꾸고 키워 나가야 한다. 베토벤도 그렇게 해서 세계적인 음악인이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계화이다.”

볼프강 슈파러는 1998년 여름 한국에 왔을 때 필자와 함께 ‘윤이상명예회복청원서’를 들고 청와대를 방문했던 사람이다. 그 때 우리는 청원서를 모 일간지에 광고를 통해 게재했고, 그래도 반응이 없자 청와대를 찾아 간 것이다. 하지만 소위 ‘국민의 정부’이며 김대중납치사건 당시 국제적 구명 운동을 펼쳤던 윤이상을 김대중정권은 문전박대했다. ‘죽은 사람이 무슨 명예회복이 필요한가’ ‘유족들이 귀국하고 싶으면 그냥 가방을 들고 오면 되지 꼭 이렇게 시끄럽게 하며 와야 하는가’. 그들의 논리는 그러했다.

김 전 대통령이 직접 우리들을 만났다면 사정은 달라졌을지 모르지만 구중궁궐 권력의 벽은 그렇게 높았다. 독일인 앞에서 참으로 창피하고 억울한 마음을 참고 되돌아 나오던 그날의 기억이 필자로 하여금 결코 윤이상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 과연 그러한가. 올해 초 국가정보원 과거사진실규명화해위원회는 1967년 동백림사건을 재조사하여 발표하며, ‘동백림사건은 간첩단 사건이 아님에도 확대 왜곡 조작되었으므로 정부가 그 당사자 및 유족들에게 포괄적 사과하기를 권고한다’고 하였다. 바로 이점이다.

현 노무현정부는 과거사 정리작업을 주요 정치적 성과로 내세우며 여러 가지 기구를 내세웠지만, 지금도 자꾸 파 뒤집기만 하고 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마무리 된 것이 없다. 이제는 머뭇거릴 시간도 없다. 정치적 동력도 소진되어 감에도 이런 부분에 대해 아직도 정리가 되지 못하고 있음으로 우리는 돌아오지 못하는 혼백을 찾아 지구촌 곳곳을 헤매는 것이다. 간첩이 아닌 사람을 간첩이라고 했으면 최소한 가해자가 사과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바로 이것이 명예회복의 초점이다. 침묵하는 것이 정부가 명예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잘못을 고백하고 사과하는 것이 명예를 지키는 것임을 이제라도 위정자들은 바르게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평양 윤이상음악연구소

지난 10월 중순 필자는 ‘핵사태’의 폭풍이 거센 가운데도 제25차 평양 윤이상음악제에 참석하기 위해 방북하였다. 애초 이 행사는 정명훈이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지휘자가 방북하여 윤이상관현악단과 협연하기로 계획했던 행사인데, 핵사태로 연주자들이 방북을 취소하면서 실무진들만이 대표단을 구성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필자에게 평양 길은 초행이 아니지만, 이번처럼 주변정세가 엄혹할 때는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음악회는 윤이상 선생의 체취가 묻어있는 윤이상음악당 윤이상연주홀에서 3일간 진행되었는데, 별무리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윤이상연구소는 1984년 김일성 주석이 평양을 방문한 윤이상 선생에게 북에 머무는 동안 창작활동과 후진양성을 원할이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지어준 건물로 현대식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4백여석 규모의 연주홀은 북의 건축가들이 유럽의 유명한 연주홀을 둘러보고 참조하여 지은 것으로 음향 설계와 조형미가 매우 뛰어나다. 이 건물 4층에는 윤이상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는 독일 베를린 집에서 옮겨 놓은 피아노, 녹음기 등 생전의 선생 유품이 다수 진열되어 있다. 선생이 타계하기 전 직접 지도하던 윤이상관현악단은 60여명의 단원들이 연주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윤이상 음악에 관한한 세계 정상급의 연주실력을 갖춘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번 평양 윤이상음악회에서는 윤이상 선생의 초기 곡 <융단>을 비롯해 <교향곡 제2번> <바이올린 협주곡>들이 연주되었다. 음악회에는 미망인 이수자여사를 비롯 문화상 강능수, 문화성 부상 최창일, 윤이상음악연구소 우승남 소장 등 문화계 인사들이 두루 참석하였으며, 남측에서는 서울대 음대학장인 김민교수 등이 참관하였다. 평양에서 남측 사람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번 음악회에서 이수자여사는 또 한번 회한에 겨운 눈물을 씻어내렸다. 윤이상음악연구소는 평양에서 외국 음악을 자유로이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이며, 세계가 인정하는 윤이상음악 전문 연주단이다. 어렵기로 소문난 윤이상음악을 그들은 종이 건반과 끊어진 줄을 통해 연습했으면서도 세계 최고의 기량을 갖추고 있다.

에필로그

윤이상과 그의 가족들은 독실한 불자들이다. 특히 미망인 이수자여사는 ‘문수월(文殊月)’이라는 그 불명이 말해주듯이 돈독한 신심으로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윤이상 선생의 영혼을 지켜주는 ‘문수보살’이다. 그들은 평양에 머무는 동안 묘향산 보현사 등 여러 사찰을 다니며 북한 불교의 개방과 내실화를 이끌어 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다 하였다. 이런 인연으로 남쪽 불교계에서는 일찍부터 윤이상연구소에 악기를 지원하는 등 인연을 맺었으며, 윤이상명예회복 운동에도 앞장 서 왔다.

지난 해 윤이상평화재단은 출범 이후, 첫 번째 가진 윤이상10주기 행사를 서울 조계사 대웅전에서 봉행하였다. 이 행사는 독일의 윤이상앙상불 연주단이 직접 출연하여 선생의 곡을 연주했으며, 불자들도 대거 참여하여 ‘상처입은 용의 귀환’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윤이상은 아직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했다. ‘선생의 혼백이나마 안고 고향에 가고 싶다’는 미망인 이수자 여사가 귀국을 미루기 때문이다. 그녀는 올해 초 금강산 신계사에서 열린 윤이상평화재단 설립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명예를 지키기 위해 선생이 이국에서 한을 품고 돌아가신 만큼, 그 명예회복 조치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고 하였다.

윤이상은 우리 곁에 돌아 와야 한다. 재단은 내년 봄 윤이상관현악단의 서울 공연을 추진하고 있다. 이 때 부인 이수자여사가 윤이상 선생의 ‘혼백이라도 안고’ 오게 하기 위해 명예회복을 위한 마지막 고개를 넘어야 한다. 한 영혼의 귀향이 아닌 남북의 화해를 위해 반드시 윤이상, 그가 와야 한다.

장용철
시인·윤이상평화재단 사무처장. ‘풍경소리’(지하철 법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작가인 장용철 시인은 투명한 동심을 통해 나와 너, 나의 세상이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는 따뜻한 화해의 세상을 꿈꾸고 그려왔다.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서울지옥』『늙은 산』 등의 시집과 『눈은 눈을 보지 못함같이』 『잊혀진 가람탐험』 등을 펴냈다. 지하철 ‘풍경소리’ 게시판을 통해 소개된 ‘아름다운 관계’, ‘처음 그것’ 등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 인터넷 블로그 및 카페의 인기 검색어가 되었다. 시인은 현재 진각복지재단 사무처장과 윤이상평화재단 사무처장, 문화복지연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19회 불이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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