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 내셔널리즘을 말하다

1. 들어가는 글

‘불교 내셔널리즘’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은 관련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현실에다가 이론적, 현실적인 난관도 존재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먼저, ‘불교 내셔널리즘’에 대한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불교와 내셔널리즘을 결합시키는 매개가 무엇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더욱이 불교는 나라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나아가 불교의 사회관이 뚜렷하지 않으며 다양하게 나타난다. 또한 중세 유럽의 가톨릭, 이슬람 신앙 공동체에 비해 불교는 통일적으로 권위를 가진 포괄적인 조직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20세기에 이르러 세계의 모든 불교가 일체라는 의식이 생겨났지만, 그것은 유럽에서 형성된 불교학의 영향과 새로운 시대 상황에 직면하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편, 내셔널리즘은 현실적인 영향에 비해 그에 대한 이론이 적은 편이며, 최근에야 다양한 이론과 연구 성과가 제시되고 있다. 내셔널리즘은 매우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며, 각지의 사회적 토양에 이식할 수 있는 모듈이 되어 다양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패턴과 하나가 되고 다시 융합되어 갔다. 따라서 내셔널리즘은 개별성에 눈을 돌리는 것이 중요하며, 각 국가와 지역의 역사적 맥락과 시대적 상황과 연관시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비서구사회에서 내셔널리즘의 확산이나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 장소, 상황에 따라 다양한 국가, 정치체에 의해 전개된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내셔널리즘과 불교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더욱이 불교가 놓인 현실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현실인식의 빈곤함이나 무관심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곧, 근대 이후 아시아는 대부분 식민지로 전락하였고, 불교의 역할과 기능이 상대적으로 제한되거나 축소되었다. 이러한 현실과 함께 학계에서 근대와 불교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고 생각하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적지 않기 때문에 근대불교에 대한 연구는 관심 밖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식민지와 분단을 겪었기 때문에 단일민족/국가의 범주로 내셔널리즘을 인식하고 사회변혁의 원동력으로서 저항민족주의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반면 1990년대에 이르러 내셔널리즘이 분단 이후 국가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한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근래 이러한 시각에서 사회과학, 인문학 전반적으로 다양한 연구 성과가 제시되고 있지만, 불교학계에서는 별로 거론되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이후 근대불교사 연구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민족불교론이라는 틀에 안주하고 있다. 민족불교론은 개념과 정의가 모호할 뿐만 아니라 근대불교라는 범주를 포괄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나아가 기존의 논의는 불교교단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궁극적으로 지금의 조계종으로 귀결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이상에서 간략하게 언급한 바와 같이 내셔널리즘과 불교라는 주제는 연구 대상으로 다루기가 쉽지 않다. 이 주제와 관련된 체계적인 이론도 없고, 근대불교사에 대한 연구가 형성 단계에 불과한 현실에서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시각이나 방법론을 제시하기가 곤란하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여 이 글에서는 내셔널리즘과 불교에 대한 논의를 편의상 아시아 불교문화권에서 국민국가 형성을 통해 제국주의로 나아간 일본의 경우와, 반대로 식민지로 전락한 경우로 나누어 진행하고자 한다. 아울러 제한된 지면을 감안하여 주로 동아시아의 근대불교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2. 국민국가 만들기와 ‘불교 내셔널리즘’

국민국가는 국경선으로 구획된 일정한 영역에서 주권을 가진 국가에 그곳에 사는 사람들(nation, 국민)이 국민적 일체성의 의식(national identity)을 공유하고 있는 국가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국민국가의 형성은 통치기구인 국가와 ‘우리는 같은 국민이다’라고 하는 일체감을 공유하는 사람들로부터 국민공동체를 각각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러한 국민국가는 근대에 이르러 형성되었으며, 국민통합을 위한 이데올로기 장치가 필요하였다.

국민통합을 위한 장치와 요소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국민종교는 국민과 시민의 규범적인 정치적 통합력으로서 기능하는 이데올로기와 의례, 심벌 등을 말한다. 일본에서 국민종교에 해당하는 것이 천황제이며, 곧 국체신화(國體神話)로 규정된다. 국체신화는 천황 숭배와 일본국체라는 관념에서 이루어지고, 근대 천황제의 정통성을 보증하고 근대 일본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관념이다.

이러한 국민국가 만들기의 원리는 불교계에도 수용되었으며, 메이지 시기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시되었다. 일본의 근대불교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정토진종, 조동종 등을 비롯한 모든 종파에서 드러나지만 ‘불교 내셔널리즘’의 전형은 니치렌종(日蓮宗)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學, 1861~1939)의 국주회 운동은 보편적인 구제를 표방하는 종교운동과 국가신도를 결합하여 인류의 종교적 구제와 천황제 국가에 기반을 둔 국가구제를 결합시킨 종교운동의 대명사이다. 치가쿠는 1880년에 법화계 재가불교교단 국주회(國柱會, 본래 蓮華會, 立正安國會)를 창설하고, 정교일치에 의한 니치렌불교의 국교화를 주장하였다. 1900년대에 그는 니치렌주의와 일본국체학을 표방하고, 천황이 직접 기원을 드리는 국립계단(國立戒壇)의 건립을 주장하였다. 국립계단은 국가가 건립하는 본문의 계단이라는 의미이며, 그것은 결국 천황의 개종으로 니치렌종이 일본의 국교가 되는 것을 바란 것이다.

치가쿠는 니치렌유문(日蓮遺文)을 메이지기의 시대 상황에 맞추어 재해석하여 국교화 실현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국민의 국체관념 자각과 니치렌불교의 사회적인 보급에 의한 일본통합[二法冥合]이다. 둘째, 천황에 의한 계단 건립의 대조환발(大詔渙發), 제국의회에 있어서 본화묘종[日蓮主義] 국교제도의 제정과 계단 건립의 의결, 국립계단 건립에 의한 니치렌불교의 국교화(정교일치)의 실현[事壇成就]이다. 셋째, 일본과 일본에 적대하는 국가와의 세계 대전쟁, 일본에 의한 세계의 통일[閻浮統一]이다. 이와 같이 치가쿠는 니치렌주의의 국교화에 의해 국민과 국가의 통합(왕불명합, 입정안국), 세계인류의 통일이 달성되어 이상세계가 실현한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니치렌불교의 사회적인 보급에 국민에 의한 국체관념의 자각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국체신화의 교화를 스스로의 언설과 실천에 적극적으로 넣은 점이 치가쿠 니치렌주의가 지닌 특징이다. 그는 니치렌주의에 의해 의미를 갖는 국체를 호소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국체관념을 자각하고 국민적 일체성을 가진 국민공동체가 만들어져, 그 결과 국민이 니치렌주의 신앙이 이끄는 정교일치가 실현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치가쿠의 니치렌주의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민중적 내셔널리즘이며, 종교적 내셔널리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왜 불교와 일본국체가 결합되었을까? 국체 언설은 근대일본에서 일본 내이션의 연원적인 유래를 설명하고 근대일본의 내셔널 아이덴티티(국민적 일체성)와 내셔널리즘에 근거를 제시하는 신화로서 기능하였다. 국체신화는 근대일본에서 만들어진 전통이며, 천황 권위의 정통성을 구축하여 근대일본의 국가체제를 정당화하는 지식체계이자 근대일본의 정치문화이다. 겔너가 말하는 것처럼 내셔널리즘은 정치적인 단위와 민족적 단위가 일치해야 하는 하나의 정치적 원리이다. 따라서 국체신화는 국가에 의한 정치적인 경계와 국민이라는 공동체의 단위를 일치시키기 위한 매개였다.

치가쿠가 말하는 니치렌주의는 인간세계의 일체에 이르는 지도 원리이며, 국민사상의 커다란 표준이었다. 근대 이후 사회 시스템이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기능별로 분화해갔지만, 치가쿠에게 근대사회를 통합해야만 하는 성스러운 종교적 가치가 니치렌주의였다. 세속생활에 대한 관여에서 치가쿠가 가장 중시했던 것이 국민국가와의 관계이다. 근대에 국민공동체와 국가 기구에의 대응을 스스로의 사상과 운동에 넣었던 치가쿠의 니치렌주의 특징은 니치렌주의를 국민사상으로 규정한 것이다.

치가쿠는 일본이 본래 니치렌주의와 일본국체의 선천적인 대응관계를 기반한 성스러운 종교공동체라는 특질을 가진다고 보았다. 그것을 국체관념의 자각이라는 이미지를 공유하여 현재화시키는 것으로 성스러운 국민공동체를 만들어가고, 니치렌불교를 국교로서 내셔널한 종교공동체라고 하는 상상의 공동체로 전환되는 것을 지향하였다. 나아가 일본국체의 세계화를 통해 트랜스내셔널한 성스러운 종교공동체에 의한 세계 통일을 추구하였다. 이와 같이 국주회의 재가불교운동은 근대일본의 내셔널리즘 생성 및 형성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이러한 치가쿠의 ’불교 내셔널리즘’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제기된 것이 아니라 메이지 일본이 놓인 현실적인 상황과 근대불교의 형성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갖고 출현한 것이다. 국가신도가 확립되고 지식인 사이에 내셔널리즘의 기운이 높아지는 1890년대 이후 니치렌을 숭배하고, 국민적 이상을 들면서 실존적인 신념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니치렌의 생애와 가르침은 국가신도에는 결여된 교의체계와 생사관, 실존적인 차원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그러한 종교성에 의해 개인적인 아이덴티티 탐구에 응하고, 또한 국가구제, 나아가서는 세계구제라는 숭고한 이상도 제시하는 빛나는 존재로서 니치렌이 드러났던 것이다.

또한 니치렌주의 불교는 국가신도가 가진 한계, 즉 보편적 성격의 결여를 보완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 내지 초국가주의 방향에 부적합한 한계 문제를 극복하는 데에 적합한 이론체계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다만, 니치렌주의 불교는 일본불교라는 특수성을 벗어나기 어려운 성격을 갖고 있다. 이러한 한계는 제국 일본이 식민지 지배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시아의 불교문화와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한편, 니치렌의 사상이나 니치렌주의에 심취한 이들은 불교계만이 아니라 지식인, 문인 등 사회 전반적으로 확산되었다. 메이지 시기에 애국자 니치렌상은 지식인과 문학자의 관심을 폭넓게 끌었다. 이노우에 엔료, 다카야마 쵸규, 우치무라 간조 등이 니치렌에 대한 높은 평가를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주목되는 것은 쇼와 전기(1926~1945)에 천황 숭배를 표방하는 초국가주의적인 변혁운동(국가개조)을 주도하였던 지도자의 대다수가 니치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1906), 《국가개조안 원리대강》(1919) 등을 저술하여 2·26사건의 이념적 배후로 지목된 기타 잇키(北一輝, 18 83~1937)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 외에도 니치렌주의의 영향은 다양하게 드러난다.

이노우에 닛쇼(井上日召, 1886~1967)는 1910년에 만주에 건너가 10년 이상 중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변혁 활동, 공작 활동에 관련하였다. 그는 귀국 후에 신비적 체험을 하였고, 1928년에 입정호국당을 세워 니치렌불교에 기초한 국가개조운동을 육성하였다. 1930년 이후 닛쇼는 다양한 국가개조운동 집단과 접하였고, 1931년에 혈맹단을 결성하여 정·재계 인사에 대한 테러를 하였다.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1889~1949)는 일본 육군의 엘리트이며, 만주사변을 계획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만주사변 발발에 즈음하여 치가쿠의 교학을 기반으로 니치렌주의적 신념에 기초한 모략군사정책의 입안을 실행하였다. 그는 국주회 회원으로서 치가쿠의 국체론적 니치렌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하였다. 다만, 그는 국가지상주의에 한계를 느끼고 니치렌불교에 의한 세계통일의 신앙으로 향하였다. 나아가 그는 군사사 연구와 니치렌의 예언을 결합시켜 《세계최종전쟁론》(1940)을 저술했다. 그는 니치렌의 예언에 따라와야 하는 세계최종전쟁을 통해 세계통일이 곧 실현된다고 확신하였다.

한편, 이러한 경향과 다른 니치렌주의자도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세노 기로(妹尾義郞, 1889~1961)는 닛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신흥불교청년동맹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니치렌불교의 계보에서 반체제적인 운동을 전개하였다. 후지이 닛다쓰(藤井日達, 1885~1985)는 천황숭배와 니치렌불교에 의한 국가구제를 아시아 해방과 결합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니치렌불교를 민중에게 확산시켜 아시아를 결합하고 서양의 물질주의와 식민지주의의 억압에서 해방하고, 또한 일본의 망국을 막고자 하였다. 다만, 그는 불교와 천황숭배를 모순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고, 군대에 의한 일본의 세력 확대에 협력하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원초적인 내셔널리즘이 초국가주의로 변질되고, 불교와 깊은 관계를 맺은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열광적인 초국가주의자의 경우에 자아의 부정이나 기묘하고 신비적인 자아의 경험을 포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일본의 파시스트 상당수가 《법화경》을 신봉하였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들은 《법화경》의 교의가 초월적인 것을 세속적 세계로 회귀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메이지 이후 일본에서 국민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불교 내셔널리즘’이 어떻게 형성되며, 그 사상체계와 특징이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제시하였다. 일본의 근대불교에서 제기된 ‘불교 내셔널리즘’은 불교가 내셔널리즘과 어떻게 매개되어 기능하는가를 보여준다.

나아가 이것은 일본 근대불교의 사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불교문화권 전체와 연관된다. 제국 일본의 식민지가 동아시아를 넘어서 동남아시아, 태평양까지 확산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의 불교교단이 대단히 폭넓게 협력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의 ‘불교 내셔널리즘’은 식민지 내셔널리즘으로서 기능하였고, 반대로 식민지에서는 이러한 식민지 내셔널리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대응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3. 식민지국가의 내셔널리즘과 불교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은 제국주의 침략과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격동의 시대였다. 아시아 대부분 지역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식민지 사회는 식민지 지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나아가 서구 근대문명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현실적인 과제에 놓이게 되었다. 불교는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에 직면하면서 위기와 함께 새로운 대응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대응은 각국에서 불교의 위상이 어떠한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이 글에서는 편의상 동남아시아 상좌부불교의 경우와 동아시아 불교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라는 차이와 함께 식민지 지배 상황을 비롯한 역사적 경험의 차이를 감안한 것이다.

16세기 이후 동남아시아는 타이를 제외하고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 의해 식민지로 전환되었다. 동남아시아 불교는 식민지 침략에 대한 저항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1818년 스리랑카의 대반란, 1930년의 미얀마 사야 산의 반란, 1902년 타이 피-븐의 난 등은 독립회복운동이고 반유럽의 내셔널리즘운동이었다.

한편, 동남아시아 각국에서는 19세기 이후에 국어가 되는 민족언어문자로 팔리 불전을 번자(翻字)하고 국가불교를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팔리 삼장의 국어문자로의 번자는 경전을 대중화하는 것과 함께 국가가 불교를 근대적인 교양지의 영역에 넣는 것을 의미한다.

1886년에 타이 국왕 라마 5세는 신민을 국민으로 하는 국어교육과 징세제도를 확립하고 전국에 존재한 사원을 학교로 만들었다. 이어 라마 5세는 일본을 모범으로 하는 세속교육제도의 정비와 함께 불교를 국가에 내속하는 종교로서 내셔널리즘을 선전했다. 국가 제도가 된 불교는 지방의 사원시설과 교육 면에서 승려의 불교를 평준화하는 틀을 정비한다. 그것은 세속교육 정비와 연계해서 관청이 제도적으로 관할하고, 사원을 근대적인 의미의 교육복지기관으로 하는 노선으로 연계된다. 이와 같이 타이에서는 국가 통치원리의 하나로서 불교를 이용하였는데, 그것은 불교로 국민통합을 도모하면서 정책에 유용한 역할과 장식을 불교에 구하였던 것이다.

미얀마는 1886년에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는데, 식민지 정부는 기본적으로 종교 불개입정책을 취하였다. 그 결과 미얀마불교는 국가의 지원이 끊어져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상가의 타락과 그에 대한 대응으로 자기 정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정치 활동과 분파 형성이라는 대조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1921년에 설립된 전상가단체총평의회(GCSS)는 외국제품 불매운동 등 반영국적인 저항을 하였다. 나아가 국민의 일치단결과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지향하는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승려에 의한 정치 활동은 상가와 일반신도 사이에 확산되고 있던 반영 감정을 수용한 것이며, 불교를 기초로 한 초기 내셔널리즘 운동을 견인하였다.

한편 1890년대에서 1910년대에 걸쳐 각지에서 재가불교도 조직이 탄생하고, 신문, 잡지, 출판을 이용하면서 불교 보호를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적인 주체는 새로운 교육제도 아래 등장한 식민지 관료, 상인, 지적 전문가 등 신흥중산층이었다.

재가불교도 조직에 의한 일련의 불교 부흥운동은 그 후의 내셔널리즘 운동의 단서가 되었다. 곧 20세기 초에 각지에서 생긴 불교 부흥운동은 1906년에 설립된 청년불교도연맹에 의해 서서히 통합되어 갔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정치운동으로 변화해갔다. 곧 1920, 30년대에 자치, 독립을 지향하는 내셔널리즘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미얀마의 불교는 내셔널리즘과 결합하여 현실의 정치운동으로 전환되었지만, 1948년 독립 이후에는 국가권력과의 새로운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해방 후의 우 누 정권 시기에 불교에 대한 우대정책이 시행되었지만, 다양한 국민을 통치해야 하는 근대국민국가의 틀과 충돌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한편, 동아시아에서 불교는 저항민족주의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식민지 내셔널리즘으로 기능하거나 문화 내셔널리즘의 차원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나아가 서구 근대와 대응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복합적인 양상이 드러난다.

주지하듯이 식민지는 수탈의 대상만이 아니라 자본이 집중하고 대도시를 매개로 초기 글로벌화가 진행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서구 근대문화와 마주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근대지가 형성되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세계적 규모의 사상적 연쇄가 진행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물론 연쇄는 일방통행적인 것이 아니며, 다양한 형태와 균형을 이루지 못한 것이긴 하지만 쌍방향적인 것이었다.

근대기의 중국은 서구 근대에 대항하면서 새로운 국가사회상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하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청일전쟁 이후에 일본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메이지 일본의 근대지를 매개로 서구 근대사상을 배웠고, 새로운 사상을 형성해나갔다. 이들 가운데 양계초(梁啓超)와 장병린(章炳麟)은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며 사상가였고, 두 사람 다 공통적으로 불교와 관계가 깊다.

양계초는 중국의 국민국가 건설을 위한 국민의 창출에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의 문명개화론은 일본 망명 이후 12년간 체류하면서 메이지 일본에서 형성된 근대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그는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민중의 동원과 통합에 불교를 주목하였다.

장병린은 신해혁명을 지도한 혁명가이며, 중화민국이란 국호를 만들고 한자의 표음방식을 고안한 내셔널리스트였다. 그는 일본 체재 중에 메이지 일본의 근대지, 나아가 서양 근대사상을 수용하였다. 그는 불교, 서양철학과의 만남을 통해 개(個)와 민족혁명을 지향하는 중생과의 새로운 관계를 민족사상으로 창출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그는 불교를 통해 중화민국의 창출을 위한 전통의 창조로서 국수를 생각하고, 국학을 만들어갔다.

이와 같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중국에서는 불교가 근대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사상적 원천이 되었다. 중국의 사회를 구원하는 개혁적, 혁명적 구제이론으로서 불교, 특히 유식학이 높게 평가되었고, 나아가 불교의 독자성과 우위성을 확인시켜 참된 불교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불교가 당시 지식인의 주목을 받고 내셔널리즘과 연계하여 중국의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사카모토 히로코가 지적하듯이 근대중국 내셔널리즘의 아이덴티티 형성 과정에서 나타나는 허구성은 젠더, 인종, 신체라는 문제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이러한 문제는 사회진화론, 문명, 국가, 민족 담론과 연계되어 잘 드러나며, 당시의 불교 이해나 인식이 이러한 한계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메이지 시기 일본의 근대지가 양계초를 비롯한 중국 지식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이러한 사상 연쇄는 애국계몽운동기에 조선에도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불교의 경우 한용운의 언설과 저작에서 이러한 흐름이 잘 드러난다. 한용운은 양계초의 글을 통해 메이지 일본의 근대지를 받아들이면서 식민지 조선의 불교를 어떻게 근대화하고 개혁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나아가 한용운은 민족주의 담론과 관련하여 불교개혁론을 표방하였지만, 근본적으로 일본의 근대지를 사상 연쇄를 통해 모방하는 데에 그친 한계도 그대로 드러냈다.

또한 이러한 한계는 한용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1920년대 이후 일본 유학을 통해 식민지 조선의 불교를 근대화하고자 하였던 흐름에서도 나타난다. 민족불교론에 입각한 연구 성과와 달리 식민지 조선의 불교는 식민지내셔널리즘으로 기능하였던 경향이 적지 않으며, 그것은 1930년대 이후에 현저하게 드러난다. 만주사변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대적 상황에서 불교는 식민지내셔널리즘으로서 전쟁 협력에 나섰고, 그것은 대표적인 불교 지식인이었던 권상로, 김태흡, 허영호 등의 언설을 통해 확인된다.

예를 들어 허영호는 1937년 이후에 조선불교의 의미, 특성 등에 대한 논설을 집중적으로 발표하였는데 대개 원효불교의 이해, 통불교론 등 조선불교의 독창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논리는 동양문화, 일본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나아가 허영호는 ‘총후보국(銃後報國)’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선양하였다.

그는 전시국가에 처한 국민으로서 국가 정책을 충분히 이해하고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단순히 전통을 묵수하는 남방불교의 성격이 동남아시아의 정체를 가져온 이유이며, 북방불교도가 그들에게 새로운 생기를 주고 밝은 희망, 굳은 신념과 자각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제국이 동양 국민을 지도해야 하는 세계사적 전환을 맞이한 시국에서 불교도가 담당할 불교 원리를 확립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허영호의 주장은 대동아공영권의 이론을 합리화하는 교토학파의 언설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나아가 허영호가 제시한 전쟁협력의 담론은 내선일체론에 입각하여 일본의 동화정책에 추종하는 논리이고,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면서 식민지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총동원 담론이었다. 따라서 허영호를 비롯한 식민지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 승려들이 제기한 전쟁협력 담론은 식민지 내셔널리즘의 전형적인 것이다.

한편, 식민지 조선에서 내셔널리즘과 불교와의 관계에서 당시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던 최남선과 이광수가 주목된다. 대부분의 연구자가 승려 중심으로 근대불교사 연구를 진행하였지만, 당대 사회에서의 위상이나 사회적 영향을 생각하면 오히려 최남선, 이광수의 경우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최남선은 잡지 매체와 역사 연구를 통해 문화내셔널리즘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최남선은 하나의 민족공동체를 상상하는 내셔널리즘의 입장에서 조선인의 손으로 조선문화를 연구하겠다는 조선학을 천명하였다. 그는 조선문화가 고대부터 최근까지 일본에 영향을 미쳤던 것을 강조하면서 조선의 문화 역량이 우월함을 강조하였고, 조선문화의 구체적인 사례로서 조선불교를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지만, 거꾸로 제국 일본의 식민지 내셔널리즘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현실적으로 식민지 지배정책이 광범위하게 시행되면서 그것에 무의식적으로 추종하거나 동화된 측면도 존재한다. 이러한 식민지 내셔널리즘은 문화 내셔널리즘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식민지 조선에서 불교는 문화유산으로서 보호되고 식민지 정책의 선전을 위한 도구로 기능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식민지 조선의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그 성과가 《조선고적도보》(15권)로 간행되었다. 이러한 문화유산 조사는 일본의 식민통치로 쇠락한 조선의 영광을 얼마나 돌려줄 수 있었는지를 자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총독부의 문화재 수리, 복원 공사가 집중된 통일신라 불교미술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근대의 일본은 인도와 중국에서 양성된 아시아문화의 정통적인 계승자로서 서양의 문화전통에 대치하고자 하였다. 일본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이러한 경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로 중국에서 가장 세계적인 넓이를 가진 당의 문화를 수용한 나라 시기의 불교문화를 일본의 고전적인 시대라고 규정하였다. 마찬가지로 일본과 같은 8세기 당의 문화를 수용, 향유한 통일신라의 미술을 높이 평가하고, 그 후 한국미술의 역사를 쇠퇴라고 간주하였다. 그것은 아시아문화의 전통이 오직 일본에만 계승, 보존되었다는 사실을 표방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인 사례이자 식민지 문화정책이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석굴암의 복원이었다. 석굴암의 복원과 수리는 식민지 병합의 정당성과 일본의 성공적인 식민 통치를 과시하는 데에 적절한 선전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석굴암의 복원과 수리는 고적의 기술적 근대화 과정을 수반한다. 아울러 유물, 유적의 물리적 근대화는 박물관으로 옮겨져 관람되거나 관광 대상으로 탈바꿈되는 탈맥락화로 이어졌다.

본래 제국주의는 식민지 문화유산을 복원하여 식민지 주민에게 그들이 과거에 생성한 위대한 문화유산을 지킬 능력도, 그만한 업적을 다시 이룩할 능력도 없다는 것을 확인시킨다. 예를 들어 앙코르 와트, 보로부두르 등은 식민 지배기에 재발견, 재인식되었던 문화유산이다. 프랑스가 앙코르 와트에 대한 고고학적 성과를 내보이기 위해 1931년 국제식민지박람회를 개최하고 ‘대프랑스제국’의 위신을 과시한 것은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식민 지배가 정교해지면서 문화재와 관련된 분야에 정치색이 강해지기 시작하였고, 식민지의 명성이 식민 본국의 명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던 것이다. 앤더슨이 지적하듯이 박물관은 식민지 민족주의의 형성에 중요한 정치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복원된 고대 유적은 사진을 통해 무한대로 복사되어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국가의 기장(regalia)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불교계나 학계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불교계는 박정희 정권이 민족문화의 복원을 내세우면서 경주를 비롯한 문화유적을 발굴, 정리하고 관광지화하는 과정에서 최대의 수혜를 입었다. 그 결과 전통문화의 상징으로 불교가 제시되었고, 불교 문화유산은 박물관에 박제화되거나 전통사찰 그 자체가 박제화된 박물관으로 전락하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문화 내셔널리즘이 초래한 문제에 대해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본래 불교의 종교의례나 신앙의 대상이 문화유산으로 탈바꿈한 데에 대해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는 것이다.


4. 나오는 글

아시아의 근대불교는 국가, 지역에 따라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사회적 위상의 차이도 존재하였다. 근대불교가 가진 사회적 위상은 점, 선, 면으로 비유해볼 수 있다. 그것은 각각 대표적인 인물 차원에서 제기된 논의 수준, 인물 간의 네트워크로 이어진 단계, 더 나아가 사회 전반으로 불교의 영향력이 확산된 경우라 하겠다.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아시아의 근대불교가 가진 사회적 위상이나 영향력은 과도하게 평가할 수 없는 측면도 있으며, 그렇다고 무시할 만한 수준도 아니다. 특히, 근대불교의 형성, 전개와 관련하여 일본불교의 위상과 영향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불교는 19세기 서구의 근대문헌학에 토대를 둔 불교학을 수용하여 근대불교를 형성하였다. 나아가 동아시아,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역에 제국 일본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불교는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와 비슷한 성격을 드러냈다.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식민지 내셔널리즘, 문화 내셔널리즘으로서 제국 일본의 정책이 어떠한가를 간략하게 언급하였지만,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불교의 역할이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근래 다양한 성과가 이어지고 있다. 종래의 동아시아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동남아시아에서 일본불교의 협력 양상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일본불교계는 흥아불교협회, 대일본불교회 등을 통해 제국 일본의 국가 시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더욱이 학술적인 교류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이미 1902년에 프랑스가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지배를 위해 설치한 프랑스 극동학원과 교류 관계가 시작되고 있었다.

따라서 내셔널리즘과 불교라는 구도에서 접근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일본의 근대불교에 대한 이해가 기본적으로 요구된다고 하겠다. 나아가 각국의 근대불교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내셔널리즘과 불교에 대한 문제를 유형화하거나 이론적으로 제시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적지 않다.
한국불교계에서 제대로 된 문제 인식조차 없는 현실이지만 문화 내셔널리즘에서 드러난 문제점은 비판적인 시각에서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아가 국가주의에 매몰되었던 불교계가 갖고 있는 사회인식의 부재와 빈곤함도 되돌아보아야 할 과제라고 하겠다. ■

 

조명제 / 신라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부산대학교 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일본 고마자와대학 불교학부 박사후과정, 교토대학 연구원 역임. 주요 논저로 〈근대불교의 지향과 굴절〉 〈백암성총의 불전 편찬과 사상적 경향〉 〈선문염송집의 편찬과 종문통요집〉 등의 논문과 《고려 후기 간화선 연구》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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