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21일

요즘 지인으로부터 건네받은 카톡 내용이다.

 < 어느 날 가정주부가 삶을 비관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빨리 천국에 가고 싶어요. 정말 힘들어요.”

그때 갑자기 하느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살기 힘들지? 소원대로 천국에 데려다 줄 테니 그 전에 몇 가지 내 말대로 해라. 네가 죽은 후 마지막 정리를 잘 하고 갔다는 말을 듣도록 집안 청소를 해라.”

그녀는 그 후 며칠 동안 열심히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그리고 3일후, 하느님이 다시 와서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엄마가 우리를 정말 사랑했다고 느낄 수 있게 3일 동안 최대한 사랑을 주어라.”

이후 그녀는 3일 동안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정성을 드려 맛있는 요리도 해주었습니다. 다시 3일후 하느님이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참 좋은 아내였는데...‘라는 말이 나오게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해주라.”

그녀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천국에 빨리 가고 싶어 3일 동안 남편에게 최대한의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이제 천국에 갈 날이 된 부인이 자신의 집을 둘러보니, 깨끗하고 애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고, 남편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묻어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니 결혼 후 처음으로 “내 집이 천국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느님! 갑자기 이 행복이 어디서 왔죠?”

하느님이 말했습니다.

 “네가 만든 것이다. 진정한 천국은 바로 살아 있는 이 순간이다.”

누가 지어낸 얘긴지 모른다. 자신의 사적 경험을 토대로 이렇게 비화 내지 극화시켰을 거란 생각이 든다. 우수개소리로 보이기도 하는 빤한 계몽성의 이런 글을 여기 소개한 이유는, 언뜻 아들러 심리학의 요체를 하나의 우화로 재미있게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연상이 돼서다.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 1870~1937). 그의 개인 심리학이 요즘 새롭게 조명되고 있나 보다. 기시미 이치로(岸見一郞)의 책 <미움 받을 용기>가 서점에서 조용히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덕분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 저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공자로 알려졌는데, 아들러 심리학을 만나게 되면서 상담 경험도 쌓았다고 한다. 그의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 이유는 청년들이 궁금해 하는 ‘철학적’ 문제를 일상적인 대화의 형식을 빌려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며, 그런 가운데 아들러 심리학을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는 매력이 있어서일 것이다.

아들러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정신분석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사실 당대에 그는 프로이트의 제자였고, 융과 더불어 정신분석학의 거두였다.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라면, 그 갈래에서 융은 분석심리학을 체계화시켰고, 아들러는 스스로 명명한, <개인 심리학>을 건립시켰다. 프로이트나 융의 심리학은 일반에서 이해를 구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전문적인 용어들이 난무할 뿐 아니라 그 해독도 간단치가 않아서다. 뿐더러 정신분석 쪽의 글은 잘못 해독되어, 사유의 유희거나 관념으로 치우치게 될 위험성도 다분히 내재돼 있다. 하나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은 이해가 그리 어렵지가 않다. 일반에서도 납득이 갈 수 있는 일상의 말로 쓰였기 때문이다. 구체적이고 명료한 표현. 그것은 아들러의 의도이자 특징이기도 하다. 앞의 우화는 아들러 심리학의 인상을 단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의도였다. 물론 지나친 단순화다. 그러나 아들러는 인간 심리에 대해 복잡한 방정식을 제시하기 보다는 일상용어로 풀이하여 보통 사람도 알아듣기 쉽게 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나 융과는 그 차이가 뚜렷하다.

좀 더 자세하게 들어가 아들러 심리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 보자. 위 일화에서 우리는 이런 상상을 해봄직도 하다. 이야기 속 가정주부는 삶이 퍽 고달팠다. 실은 오랜 동안 남편과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어 늘 답답해하는 그녀였다. 남편은 평소 퉁명스럽고 아내를 무시하는 스타일이다. 물론 아내의 입장에서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남편은 제조업에 종사한다. 일 중독자에 가깝다. 술도 자주 하는 편이다. 아내는 까다롭고 예민한 성격의 그를 대함에 눈치를 보는 습관이 몸에 뱄다. 그래선지, 아내는 집안일을 갖고 남편과 세세하게 얘기 나누기가 무척 조심스럽다. 요 몇 년 사이에 부부생활은 아주 뜸해져 관계는 갈수록 뜨악해진 상태다.

물론 아내가 남편의 라이프 스타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살가운 정을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이 눈에 띄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집의 아이들과 비교해 보자면 모자란 게 많다. 아이들을 제대로 공부시키는 방법에도 눈이 어두운 편이었다. 엄마로서 어떻게 해야 아이를 잘 키우는 건지 자신도 없었다. 큰 애는 도통 말이 없다.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작은 아이는 게임에 빠져 공부를 아주 소홀히 한다. 남편은 아이들이 공부 잘 안한다고 이따금씩 아이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윽박지르곤 한다. 아이들에게 관심은 많은데 아이들은 엄마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못내 섭섭하다는 심정을 안고 산다.

그녀는 마흔 중반이 넘어서면서부터 이따금씩 인생이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하는 문제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자신은 모든 게 잘못되어진 삶을 살아온 것만 같다. 엄한 아버지 밑에 5남매의 셋째로, 가난한 살림에 여러 형제자매들 틈에 끼어 부대끼며 살았다. 어려서 두 차례나 성추행을 당했던 창피스런 경험이 있다. 이 트라우마로 처녀시절 내내 마음이 편치 못했다. 연애시절 두어 차례 남자 친구로부터 겪은 깊은 배신감과 상실감으로 한동안 힘들어 했던 추억이 있다. 이제껏 자기를 보호해주거나 따뜻한 경험을 뜻 깊게 나눈 일이 기억에 없는 듯하다. 교회를 나가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하지만 믿음이란 게 뚜렷하지가 않다. 내세에 대한 생각은 성경이나 설교를 통해 대략 짐작하는 바였다. 가끔 무언가에 좇기는 기분이 든다. 우중충하게 낮은 구름이 깔린 듯한 이 우울한 정서는 아주 오래 됐다.

역시 가정이겠지만, 예의 가정주부가 정신과적 치료를 받기 위해 상담실을 방문했다고 상정해 보자. 그럼 상담자는 먼저 그녀가 살아온 과정, 특히 인간관계의 여정에 귀를 기울인다. 상담자는 자연스런 대화의 흐름 속에서 그녀를 ‘괴로움’에 빠뜨리게 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고 오가는 대화 내용과 그 맥락에 깊은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또 그 가운데 그녀 스스로 그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다뤄왔는지도 눈여겨보게 될 것이다. 상담자는 어떤 이야기 속에 관통하는 특정의 감정도 알아보고, 이런 감정의 추이에 대해서도 두루 주시를 할 것이다. 내담자가 갖고 있는 핵심 문제, 곧 핵심 갈등에는 거기에 따르는 특정의 감정이 반드시 내포돼 있음도 유의할 것이다. 물론 상담에는 현재 느끼고 있는 내담자의 ‘곤란’이나 증상을 입체적으로 충분히 평가할 시간도 요한다.

상담은 지난 날 어떤 배경 하에서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overdetermined)하여, 증상/현상이 생기게 된(symptom formation) 것인지를 내담자가 말로 드러내도록 하는 의도도 있다. 상담을 통해 내담자의 증상 형성의 인과(因果) 관계를 내담자가 스스로 깨달아감이 제일 나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엔 상담자의 조력으로 그런 맥락을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도록, 여러 방편을 동원해 돕기도 한다. 이런 방편들은 궁극적으로 내담자의 근기(根機, ego strength)에 맞게 이뤄진다. 치유 방책이란 서로가 협력하는 가운데 ‘발견’되는 일이라 비유할 수 있다. 상담자의 주 역할은 내담자가 ‘현실 적응’을 잘 할 수 있도록, 내담자의 내면에서 부딪치는 걸림돌을 제어하거나 소화시키도록 돕는 일이다. 물론 증상이 심각하거나, 여러 임상적 상황을 고려하여, 약물투여가 긴요한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상담치료의 전모를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지만, 실상 상담치료라는 과정에는 보이지 않는 여러 ‘난제’들이 깔려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초보 상담자는 상담이론을 넉넉히 습득했다 해도 그 실천 과정에서 일어나는 ‘난제’들이 무엇인지를 간과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해서 반드시 스승의 슈퍼비전을 필요로 한다.

상담을 배우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어떤 스타일의 접근을 하느냐, 곧 내담자를 ‘해석’하는 관점의 틀 문제를 꼽을 수 있겠다. 흔히 프로이트 학파에서는 그 ‘해석’에 있어 기본적인 오리엔테이션을 요구한다. 예컨대 인간 행동의 근저에는 리비도라고 하는 성욕이 자리 잡고 있다고 봄이 그것이다. 이는 생물학적 욕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리비도/욕망은 생애의 다른 시기를 거치면서 형태를 달리 한다. 욕망의 충족이 좌절되면, 그 끝엔 자신을 아예 파괴시켜버려서 안정을 찾으려는, 죽음에 대한 충동도 있다고 본다. 또 하나. 인간 의식계의 일부로 무의식이 있다는 것도 숙지해야 한다.

무의식이란 것이 의식적인 앎보다도 인간행동에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앎도 경험을 통해 체득돼야한다. 무의식이란 살아오면서 당사자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억압된 소인(素因)들이 저장된 일종의 거대한 창고라고 비유를 하곤 하는데, 여기엔 사물에 대한 이미지나 감정들이 뒤엉켜 지내는, 원초적인 우주적 공간이랄 수 있다. 유식불교에서 말하는 제8식, 아뢰야식과 유사한 개념이다. 외부 사건을 접하거나 어떤 경험을 하게 될 때, 그것의 자극은 곧바로 무의식에서의 어떤 소인/세력을 불러 일으켜, 의식에서 어떤 구체적 감정이나 생각 혹은 행동을 부추기도록 작용시킨다. 인간의 의식적 행동은 기억 메커니즘의 작동과 더불어, 무의식 안에서의 이런 여러 소인들이 동시에 작용을 하여 나타난다는 소리다.

예컨대 어려서 성추행을 겪었던 일이 있었다고 하자. 그녀는 말하기 어려운, 그리고 당시엔 어리기에 표현하기도 곤란한, 수치스런 그런 경험을 겪고는 이를 억제하거나 억압해야만 했을 것이다. 정신적으로 그에 대처할 만한 능력이 부재한 탓이다. 의당 그 나이에 이런 방어 기제(defense mechanism)의 동원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처럼 ‘자동적으로’ 억압이나 억제를 했던 경험은 소위 무의식의 여러 층위에 지워지지 않은 채, 인생에서 영구적으로 그림자처럼 살아남게 된다. 해서 그녀는 성인이 된 뒤로도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될 때, 몹시 긴장을 한다고 하면, 바로 그 ‘나쁜 남자’에 대한 기억이 연상돼 그녀는 무의식에 잠자고 있었던, 두려웠던 그 경험의 ‘소인’이 저도 모르게 왕성하게 작용한 결과이리라.

이 같은 방식으로 무의식계의 여러 소인들은 인간의 감정과 인식과 행동에 두루 그 영향을 미친다. 에고 발달이 잘 안된,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일수록 그 사람의 인생에 보다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심리발달학적 견지에서 볼 때, 아마 5~6세 전에, 늦어도 10세 전에 이미 그 사람의 인격의 기본 골격은 짜여 져 있게 된다고 봄이 프로이트 학파의 일반적 견해다. 인격 형성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도 큰 작용을 하게 된다. 물론 당사자의 성격 스타일은 어려서부터 자주 접해온 부모의 영향이 클 수밖에 없다. 사람이 성장해 가며, 여러 환경이 변해도, 어려서 ‘이미 형성된 기본적인 갈등/성격 구조’는 여러 다양한 ‘증상들’로 반복 재현될 따름이라는 것이 프로이트 학파의 대체적 견해다. 물론 이미 형성된 기본 인격의 구조라 해도 다소의 변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생애 중간에 당사자에게 ‘오래 된 갈등 구조’를 변화시킬 만큼의 강력한 영향력 있는 사람(스승이든, 친구든, 선배든, 책에서 만난 경험을 통해서든)을 통해, 그의 갈등 구조가 다소 완화되기도 하고, 변형이 될 여지는 있다. 어떤 창의적 활동을 통해 그의 억압된 심리가 해방 또는 승화가 되어 새로운 스타일의 삶을 구가하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새로운 학습을 통해 내면의 변화를 얻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자아의 능력 내지 적응 능력에 변화가 생겼을 터고, 딴은 거친 양심 세력에도 탄력성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신경증적이었던 여러 방어기제에서도 유연성을 얻어, 자신의 ‘현실문제’를 해결하는데 지원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굳이 정신분석학적 이해를 구하지 않더라도, 예의 주부는 그간 겪었던 과거 환경, 특히 인간관계에서 큰 영향을 받아왔을 거라는 점은 능히 이해할 수 있겠다. 물론 상담을 받게 될 때, 자신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심층의식의 측면에서 이해가 보다 구체화 될 것이다. 아무튼 상담 결과, 그녀가 안고 있는 핵심 문제가 내내 가까운 타인에게서 사랑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살아와, 지금의 나이에도 우울한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고, 정리가 됨직도 하다. 하지만 내담자가 스스로 그런 문제가 ‘있음’을 받아들이기까지, 다시 말해 상담을 하면서도 자기 내면에서 벌어졌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까지에는, 왕왕 짧지 않은 시간이 요구된다. -고(苦)에 깊이 빠져있으면, 고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알아채는 일도 쉽지 않거니와 집(集, 苦의 원인)을 스스로 알아내기에도 상당 많은 노고와 공을 들여야 한다.

상담과정에서는 내담자가 상담자에 대해 여러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일이 빈번하게 생긴다. 문제는 자연발생적인 이 ‘의구심’이란 것이 진정한 의사소통의 장애(碍膺之物)가 되어, 자신의 속사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기를 어렵게 한다는 사정이다. 상담자는 능히 이런 분제들을 예견한다. 믿을 만한 사람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던 그녀로서, 상담자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의 싹을 틔우려면,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도 필요할 것이다. 요컨대 내담자가 상담자에 대한 깊은 신뢰가 생긴 뒤라야, 자기 스토리를 꺼내면서도 별 스트레스를 받지 않거나 경직된 방어를 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다. 안이든, 밖이든 그 대상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상당 내려진 다음이라야,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일이 용이해지지 않겠는가. 상담이 제대로 진행이 된다면, 내담자는 그간에 두텁게 방어를 해야만 했거나, 무지 속에 내버려두었던 감정과 생각들을 상담자와의 신뢰를 통해 슬슬 풀어내게 될 것이다. 실상 내담자가 상담자에게 슬슬 풀어내는 이야기는 다름 아닌 자신에게 고백하는 말이기 하다. 해서 자연스럽게 카타르시스의 과정도 이뤄지고, 과거에 얽매였었던 감정의 부담도 조금씩 덜어지니, 그간 억제되고 뒤엉켜왔었던 실태래 같은 마음의 내용들도 어렵지 않게 풀리어질 수 있게 되는 여지도 갖게 된다. 또 상담과정에서는 이따금씩 꿈 내용을 다루기도 한다. 꿈은 바로 무의식이라고 하는 심층의 심리를 알게 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혹여 그녀는 공포의 꿈이나 누구에게 복수를 하는 꿈이거나 어떤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그런 성질의 꿈들을 꾸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꿈을 갖고, 꿈의 의미를 함께 풀려는 시간도 가질 법하다.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초기 회상)을 떠올려 그 상징적 주제를 갖고 심도 있게, 자유 연상도 해가며, 그녀의 인간관계에서의 핵심 갈등의 재연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혹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지도 조심스럽게 탐색되어진다. 평소의 공상이나 인간과의 만남에서 느꼈던 여러 감정이나 생각도 그때그때마다 상호 확인도 하며, 스스로 알아채도록 하는 노력도 기울이게 된다.

이런 부단한 상담의 과정은 상담자와 내담자간의 ‘복합적 상호 과정’을 통해, 종국에는 내담자가 자신의 핵심적 갈등 문제가 명료화 되고, 의식화 되고, 그리하여 자신의 갈등의 원천을 알게 함이 주된 목적이다. 아울러 그 동안 방어/적응해왔던 나름의 ‘병적인 전략’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큰 심적 부담으로 작용해왔는지도 깨달아, 이제부터는 다른 식의 새로운 적응 방식(마음 자세)을 갖게 해주려는 노력이 상담치료의 목적이라 할 것이다. 프로이트 학파식의 치료 의 대강이다.

그럼, 아들러는 프로이트 학파와 대체 어떤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그는 당대의 주류 프로이트 식의 ‘질환에 대한 원인 해석론’에 대해서는 물론 그 치유 방식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었다. 프로이트 식의 치료는 아마도 너무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허비하고, 지나치게 성욕에 초점을 둔다는 게 그의 마음에 안 들었지 싶다. 아들러 심리학에 천착을 한 바 없지만 나름 아들러의 저술을 통해 들여다 본 그의 치료 방식, 그리고 그가 직접 토로한 지론에 의거해서 내린 결론이다. 그럼 여기서 몇 가지 그 차이의 주요 내용에 대해 훑어보자.

첫째, 아들러는 프로이트 학파의 결정론에 동의를 하지 않는다. 결정론이란 하나의 환원론적 해석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앞의 주부의 사례를 보자. 그녀의 괴로움, 외로움의 뿌리는 과거 그녀가 겪었던 인생 경험, 곧 부모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못 받고 내내 일종의 심리적 유기 상태를 겪어왔다고 봄이다. 물론 그녀의 부모는 사실 그녀에게 나름 관심과 사랑을 보내줬다고 할 것이다. 유년기부터 학창시절에 이르기까지 좋은 추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는 어려서 다른 형제자매들과의 ‘권력 투쟁’의 틈바구니에 끼어 지내다 보니 좋은 추억이 별로 없었다는 기억만을 떠올린다. 성적 트라우마도 크게 그녀를 위축시켰을 것이다. 이 문제는 알게 모르게 그녀의 성격 형성에 부정적으로 크게 그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요컨대 자기 과거의 독특한 경험의 영향으로 그녀의 라이프 스타일/성격/ 갈등 구조는 이미 결정된 거나 다름없고, 이에 변화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보는 게, 심리 결정론이다. 그럴만한 원인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게 결정론적 해석이다. 일반 과학(물리계/생명계)의 입장에서도 통상 그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을 하지 않던가. 인생사, 역시 인과의 틀에서 벗어날 리가 없다는 견해다. ‘갈등/현상’은 ‘트라우마/과거’의 반영일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삶에서의 갈등/모순은 과거에서 찾아질 수 있고, 과거를 밀밀히 분석하는 가운데 현재의 면모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다는 관점이다. 현상에 대한 이런 ‘해석’은 매우 ‘과학적’인 자세로 보인다.

하지만 아들러는 자신의 임상체험을 토대로 프로이트의 ‘가설’을 부인한다. 한 마디로 그는 결정론이 아니라 목적론을 지향했다. 인간은 주어진 조건, 그 너머를 추구한다고 그는 믿었다. 결코 결과를 원인으로서만 환원을 시켜, ‘해석’하는 일만으로는 만족을 할 수 없다고 봤던 것이다. -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목적론을 지향했다고 해서, 프로이트가 발견한 그의 위대한 업적인 무의식 작용의 중요성이나 인간 심리 과정에서의 인과성을 무시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일본 철학자 기시미 이치로의 글을 읽다 보면, 자칫 이 점을 간과할 위험성이 있다.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추천의 글을 쓴 김정은은 프로이트가 마치 구시대의 잘못된 심리철학을 유포시킨 자로 매도한 느낌마저 주는 데, 이것은 프로이트에 대한 오독이요, 동시에 아들러에 대한 오독이기도 하다.)

그럼 그의 목적론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가령, 사람이란 인과관계에 얽매여 살아가지만 동시에 인과관계를 넘거나 ‘극복’을 하여, 계속 ‘위로’ 향해가는 삶의 목적이 있다는 말을 뜻한다. 그의 인간심리 해석에 있어, 남다른 특징적 이론으로 여겨지는, 열등/우월 콤플렉스를 갖고 말하면 보다 이해가 쉬워지겠다. - 참고로 그는 프로이트가 강조한 범성욕설에 대해서도 의문을 품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보편성에 대해서도 부정했다. 이는 응석받이로 자란 특별한 경우에나 적용될 수 있는 콤플렉스라 여겼다. 그는 외려 인간 성장 과정에서는 열등의식이라는 것에 더욱 주목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랐다면 가난의 콤플렉스가 있을 터고, 키가 작다거나 외모에 자신이 없는 아이는 그런 신체적 기관에 대한 열등감을 지닐 테고, 공부를 잘 못하고 있음에 대한, ‘권력(힘)’이 없음에 대한, 사랑을 못 받고 있음에 대한, 등등의 여러 콤플렉스도 지니고 있을 법하다. 그는 콤플렉스(강한 차별화된 의식)가 없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요컨대 인간은 나름 주어진 콤플렉스를 여하히 해결해나가는가에 따라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주어진 콤플렉스를 해결하지 못하면 인생 낙오자로 남게 되고, 이를 극복하면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간혹 그는 어느 경우에는 내담자와의 상담 중에 암시적으로, 때로는 명료하게 이렇게 ‘행동’하면 어떨까, 하는 방도를 제시하기도 한다. 내담자의 문제 관련, 나름의 열등의식을 스스로 직시하게도 하고, 그런 열등의식 관련 문제를 ‘일상 활동의 실천’을 통해 스스로 풀도록 독려도 한다. 물론 그런 독려의 기연은 상대가 능히 ‘소화’를 할 수 있는, ‘때’가 와야 성립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핵심 열등의식이 해결됨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되면서부터, 의식이 도약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해결로 말미암아, 향후 내담자의 ‘의식의 진화’는 지속될 수 있으리라. 이런 게 바로 목적론적 인생관이다. 다시 말해 열등의식은 우월의식으로 극복된다는 소리인데, 여기서 뜻하는 우월의식은 결코 열등의식의 상대적 개념이 아니다.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보다 나은 차원의 의식을 뜻한다. 그러니 간혹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 그와 반대 되는 행동을 하는 것은 과잉 보상적 행동이거나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한 자기 속임의 행동으로 취급된다. 이런 행동은 결코 우월의식이라 볼 수 없다.

아들러는 진정한 우월의식은 결국 타자에 대한 공헌으로 귀결돼야 마땅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우월의식은 내적으로 우월하다는 ‘주관적, 감상적 평가’만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결국 내면의 생명 에너지를 타인을 위해 공헌하려는 구체적 행동을 통해 ‘승화’가 된다는 것이다. 타인을 위한 공헌이라고 하니까, 거창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말은 자신이 가까이 하고 있는, 비록 한 사람인 경우일지라도 무방하다. 먼저 타인을 위한 공헌을 하다보면, 열등의식은 자연스럽게 해결되고,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행복의 에너지가 충전된다고 보았다. 이런 <진리>는 아들러 자신의 체험에서 그리고 그의 수많은 성공적 임상체험에서 나온 경험의 소산이었다.

이 글 모두에 주부 스토리를 소개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과 관련 있다. 하느님이 어디 밖에 있는가. 그녀 내면에는 이미 우울증의 원인이기도 한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싶은, 진정한 우월의식이 불가불 잠재돼 있을 것이다. 비유로 드러낸 하느님의 목소리는 본시 그녀가 듣고 싶어 했던, 믿음의 원천의 목소리일 것이다. 그녀는 단지 믿음이 아니라, 아니 진정한 믿음을 통해, 일상에서 ‘행동 실천’(가까운 타자를 위한 공헌)을 했다. 그녀는 생각이 아니라 실행에 옮긴 경험을 한 뒤에, 비로소 그 열매/행복을 맛보게 되었다. 아들러 심리학을 긍정의 심리학이라 일컬은 이유일 것이다.

프로이트 학파는 상담을 통해 그녀 ‘증상’의 원인으로, 여러 트라우마와 더불어 스트레스 요인들도 분석되고, 사물에 응하는 그의 감정 패턴도 상호 알아보고, 그에 따라 심리적 대처로‘ 새로운’ 건강한 방안이 모색되기도 한다. 아들러 역시 이런 ‘탐색의 작업’을 무시한 것이 아니다. 다만 프로이트 식의 접근법을 어떻게 보면 간명하게, 그리고 보다 실사구시의 측면에서 정리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남긴다. 그는 인간 행동의 목적론을 지향했기에, 내담자는 실천적 행동으로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아마 그는 프로이트 식으로 자기 문제를 ‘밑도 끝도 없이’ 분석하는 일은 그다지 경제성/효용성이 떨어지는 일이라 내다봤을 것이다.

둘째, 아들러는 개인적 ‘증상’이든, 성격이든, 주어진 현실이든 그 모두가 ‘자신이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어느 경우가 됐든, 인생의 의미는 자기 자신이 정한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나 행복에 있어서, 외적인 조건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말뜻이다. 사실 거개의 인간들은 외부 조건이나 과거에 얽매여, 그리고 집안이나 제 운명을 탓하기도 하며, 주어진 ‘현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만일 불행의 원인을 외부 조건 탓이라며 한탄을 일삼는다면, 매정한 논리라 여길지는 몰라도, 분명 그건 그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취급했기 때문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다.

또 아들러는 ‘인생의 거짓말’을 짓고 산다는 것을 사람들이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고도 했다. 인생의 의미를 자신이 다 지은 거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 제가 지은 ‘인생의 거짓말’에 더 이상 ‘특별한 의미부여’ 같은 것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 되면, 이제껏 자신의 인생에서 부여받은 과제는 반드시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한다는 자각이 자발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인생의 거짓말이란 정신분석학적 입장에서 볼 때, 내면의 불안이나 각종 두려움을 직시 하지 못하거나 감추고, 자신을 어떤 ‘가면’으로 방어를 하는 태도/관념/이미지/행동 등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 ‘연극처럼 산’ 제 인생을 깊이 성찰/관(觀)해 보는 여유의 공간을 가져야, 행복에의 자유의지도 발동될 수 있으리라.

셋째, 아들러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요건으로서 무엇보다 인간적 자립/홀로 서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야 하고, 만약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와 마주하게 될 때는 다른 사람에게 적극 도움을 요청해 해결해 나가려는 의지도 자립정신에 속한다. 어느 경우엔 주어진 조건을 흔쾌히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자립을 위해, 때에 따라 존재에의 용기를 발휘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의존적인 성향의 사람이나 부정적 감정에 깊이 물든 사람들은 흔히 타인을 의식하는 일이 많다. 지나치게 공격적인 사람들은 남을 애써 무시해버리거나 안하무인격으로 행동을 하곤 한다. 이런 사람들의 행동은 잠시 자립을 가장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인간적 자립의 정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자립은 절대 독립을 뜻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이란 서로 의존해서 사는 이 사회를 떠나서 산다는 게 불가능하다. 삶의 기반 자체가 연기적/관계적으로 맺어져서다. 자립이란 말은 우리라고 하는, 그 ‘공동체 감각’을 지녀야만 비로소 그 의미를 온전히 알 수 있게 되는 단어다. 일체의 현상이 내 안(마음)에서 펼쳐지지만, 동시에 한 개체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 남아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주어진 위치에서 인간 사회가 지닌 제반 자원들(물질적 자원이든 정신적 자원이든)을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 이 역시 자립정신이다. 이런 사유의 소유자라면, 인생이란 장(場)을 끊임없이 창조해야 하는 ‘의식의 실험 장소’로 여길 만 하겠다. 그래서 지난 날 누구나 지녔을 법한 열등콤플렉스는 이런 식의 창조정신을 통해, 진정한 우월의식으로의 전변을 꾀하게 될 거란 풀이다.

넷째, 행복을 원하거든 평범해지려는 용기가 있어야 된다고 아들러는 힘주어 말한다. 왜인가. 거개의 인간들이 행복을 찾으려 하는데도 행복을 끝내 찾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행복에 대한 장애임을 깨닫지 못해서다. 가령 열등의식이 있는 자는 열등의식이 없는 어떤 이상적 존재를 가정한다. 이상적 존재로 인정받고 싶어서다. 권력을 추구하든, 돈이나 명예를 추구하든, 아무튼 그 모든 것의 바탕에는 그 누구로부터의 인정받음에 목말라하고 있다는 공통의 근심이 깔려 있다. 인간의 이런 인정 욕구란 것은 사실 생존 본능만큼이나 강력하다. 인정욕구는 본능만큼이나 그 뿌리가 깊다. 실상 포유류인 우리 인간은 어려서부터 누군가로부터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않았다면 살아남기가 어렵다. 사랑 받음은 인정 욕구와 매우 가까운 사정이다. 어려서의 사랑과 관심 받음은 성인이 되어 주위의 관심이나 인정받고 싶음의 형태로 그 모양만 달라질 뿐이다. 그리 보면 인정받고 관심 받음은 ‘정상적 행동’으로 여겨질 만도 하겠다.

하지만 아들러는 그 전에 먼저 인간은 모두 평등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평등 정신이란 곧 상대가 아이가 됐건, 노인이 됐건, 적대자가 됐건, 피부색이 다르든, 상관없이 존중해 주는 마음으로 구체적으로 표현이 될 것이다. 이 정신에는 또 자기 입장에서 상대를 함부로 내지 임의적으로 재단하거나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내포돼 있다. 이런 마음 자세라면 ‘사사로운 인정 욕구’는 그런 (평등의)마음 씀 가운데 자연스레 누그러지기도 할 것이다.

‘특별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해도,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형편에 가까운 게 우울증 환자다. ‘죽고 싶은’ 그의 마음속엔 또한 잠재된 열등의식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특별한 인간’으로 인정받거나 주위에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서려있을 법하다. 하지만 그는 제 열등의식이 드러날까, 두려워한다. 이렇듯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처럼 반대되는 감정과 생각의 병존으로 ‘괴로움’을 겪는 것이 모든 신경증의 특징이다. 한편 열등의식은 그를 자아도취적 성향으로 이끌어, 그의 현실 인식/인지를 왜곡시키기도 한다. 이 역시 그가 ‘특별한 인간’으로 남고 싶어 하는 강한 열망에서 나온 병리 현상이다. 이로 인해 곧잘 남의 의견을 무시하거나 제 주장만을 펴거나 해서, 스스로 고립을 자초시키기도 한다. 종국에 ‘특별한 사람’이 되려는 의식은 행복의 장애물임이 자명해진다. 평범해지려는 용기가 있어야, 참 행복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아들러 심리철학의 요체다.

마지막으로 아들러 개인 심리학에 대한 불교적 관점에 대해서다. 먼저 아들러의 목적론적 인생관이다. 실상 주요 종교는 다 목적론이지 않은가. 불교 역시 ‘깨달음’을 소중한 양식으로 삼으니, 목적론과 그 궤를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이른바 이 삶에 목적이란 게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본래 갖춰진 자성/불성, 곧 행복의 원천을 체득해야 되는 일인 것이고, 성숙된 그 마음의 안팎으로는 자비/사랑의 마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행복/지복에 이르게 된다는 맥락일 것이다. 온전히 자성을 깨닫는 일이란 일련의 수행과정을 요구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자아실현과는 그 층위에서 차이가 난다. 불교적 수행이란 자아실현을 포함하여, 그 수준을 넘어선, 일종의 <의식혁명>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알다시피 상담심리학의 영역이 불교 수행과 유사한 것은, 양자는 모두 ‘밖’이 아니라 ‘안’을 깊이 비추어려는 공통의 지향 의식이 있다. 심리학은 자기 경험의 분석과 더불어 ‘괴로움’의 원인인 핵심의 애응지물(碍膺之物)을 깨달아, 이를 제어하는 힘을 키우게 함이 주 목적이라 볼 수 있다. 반면, 불교적 수행은 명상/참선/염불 같은 수단을 통해, 보다 근원적으로 에고(Ego, 五蘊의 假和合)의 실상을 깨달아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는 게 그 지향하는 바다. 그 깨달음에는 일체가 평등하다는 앎, 그 어느 것에도 ‘나’라고 지칭할 만한 것은 없고, 에고란 것은 환영이라는 것을 체험적으로 앎이다. 깨달아야 할 궁극의 앎이 있으니, 불교는 목적론적 입장이다. - 하지만 불교에서는 결정론적 입장에서 보는 인과의 관계성을 결코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연기적/인과적 현상을 이해하고, 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도 하지만, 동시에 그 인과에 얽매여 <이치>를 그르치지 않게 보는 게 불교적인 세계관이라 여겨진다. 연기 공(緣起 空)의 참뜻이 아니겠는가. - 참고로 이런 선문답 일화가 있다. 예전에 인과의 <진리>에 눈 밝은 한 학인이 어느 선사에게 도에 대해 물었다. 선사는 “인과에 어둡지 않다.”는 말로 응수 했고, 이에 그는 크게 깨우쳤다고 한다. 우주 내에 벌어지는 인과/과학적 법칙을 수용하되, 그 작용 안에 머물지 않는, 향상일로의 마음을 단적으로 가리켰다고 봄이다.

아들러의 인생관은 불교에서 보는 세계관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가 인생은 자기가 만든 것이고, 인생의 의미도 자기가 부여한 것이라는 말. 해서 인생의 의미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자기뿐이라고 한 말은 기독 세계관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 유럽 사회에 꽤나 큰 충격을 주었으리라. 이 말은 화엄경에서 이른, 일체유심조(一體唯心造)란 말과 상통하는 말이 아닌가. 일체가 마음이 만들었다는 말은, 바로 이 마음 안에 세상이나 우주에 대한 앎이 있다는 것이고, 이 마음 말고, 이 마음을 떠나서 따로 세상이나 우주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뜻이다. 이 마음, 곧 자신이 인생/현실을 만든 것(自業自得)이라 봄이니, 이를 바꾸는 주체도 자신의 마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들러가 ‘인생의 거짓말’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고 한 말은 바로 에고의 실상을 알아차리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은 말이다. ‘인생의 거짓말’이란 이 에고가 누리는 삶에 <진실>이란 것은 없는 것이며, 삶은 하나의 꿈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는 함의이기도 하다. 육근(六根)을 갖춘 에고는 하나의 물건, 이 삶을 온전히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훌륭한 수단이 아니겠는가.

또 하나. 아들러가 말한 자립정신에 대해서다. 실상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이란, 진정한 자립정신의 화현으로, 곧 나르시시즘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도 있겠다. 곧 ‘나’라고 하는 것에 대한 모든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제 삶의 에너지를 타자를 위해, 즉 타인을 위한 공헌을 하게 될 때, 자연 보살도에 들어서게 된다는 말이다. 열등의식은 ‘나’만을 생각하는 나르시시즘의 산물이다. 열등의식을 극복하려는 우월의식의 성취는 궁극적으로 육바라밀을 통해서이지만, 그 중 보시를 으뜸으로 삼는 이유는, 진정한 보시를 행함에 나머지 다섯 바라밀이 다 녹아져 있기도 해서일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먼저 진심에서 보시를 행하는 자라면, 꾸준히 그 선근 종자를 심은 결과, 번뇌의 원천인 나르시시즘의 감옥에서 벗어날 길을 찾게 될 것이다. 자립은 물론 홀로 있음의 정신이 뒷받침돼야 온전해지겠다.

불교에서는 정(禪定)의 체험이 뒤따르지 않고서는 제 몸과 마음을 ‘자율적으로’ 다스리기 어려울 거라 내다본다. 하지만 아들러는 현실적으로 일상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제대로 챙기려는 자세가 긴요하다고 말한다. 일상의 작은 일부터 정성을 다하는 가운데 자립의 정신은 싹틀 수 있다.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의 구별을 명료히 한 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려는 태도. 이게 자립의 기반이요, 행복의 열쇠라는 것이다. 더욱이 그 행동이 타자를 위한 공헌이라면 자기에게도 매우 유익하게 돌아옴이다. 자리가 이타요, 이타가 바로 자리가 된다는 말이다. 열등의식을 우월의식으로 전변시키게 되면, 연민의 마음이 스며들기 마련이고, 해서 여러 방편의 자비행도 자연 우러나오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평범해지려는 용기에 대해서다. 아들러는 자신의 인생/임상 체험에서 우러나온 실천적 의미의 평등정신이었다. 사실 일체가 평등하다는 말은 <진리>다. 제법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이치를 깊이 이해한다면, 모든 게 오온(五蘊)이 가화합(假和合)하여 형성됐다는 앎에 이른다. 일체는 본래부터 평등한 입장에 서있음이 자명하다. 불교에서 무분별지나 평등성지란 말이 있다. 제7식의 전식이기도 하다. 문수보살은 선문답에서 “前三三, 後三三”이란 멋진 말도 남겼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분별지/현실적 ‘차이’를 알아야, 주어진 상황/현실에 현명하게 대처를 할 수 있게 되는 셈인데, 실상 이런 일은 내면의 진정한 힘인 평등정신/무분별지/‘차별의식’을 두지 않는 마음이 뒷받침 돼야 순탄하게 이뤄질 것이다. 평등정신은 아들러가 말했듯이 상호 존중의 마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앎과 실천의 병행>이 진정 행복에 이르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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