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한국에서 최초로 간행된 불교잡지는 현전하지 않지만 1910년경에 간행된 《원종(圓宗)》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한국 불교잡지의 역사는 올해로 105년이 되는 셈이다. 주지하듯이 근대 잡지는 신문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여론을 형성하고 지식의 발전을 가속화시킨 매개물이었다. 언론매체라는 것이 원래 없던 시절에 생겨난 것이기에 어떻게 보면 오늘날의 TV나 인터넷보다도 더욱 놀랍고 획기적인 대중 커뮤니케이션 수단이었을 것이다. 불교잡지는 일반적인 잡지가 지니는 의미에 더해 종교 잡지라는 특수성을 지니며 발전해 왔다. 즉, 영리를 추구하는 상업용 잡지가 아닌, 포교를 주목적으로 하는 계몽 잡지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초기의 잡지들은 치열한 종교경쟁 시대에 불교 여론을 형성하고, 불교 지식의 보편화를 통해 대중불교를 실현하려 했던 의지의 소산이었다.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간행된 불교잡지의 수를 정확히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잡지 간행의 여건이 여러모로 간단치 않았던 해방 이전과 1960~70년대까지는 차치하더라도, 그 이후 특히 1990년대 이후로는 개별 사찰에서도 제각각 잡지를 펴내고 있을 정도로 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오늘날 정보의 홍수 시대에 불교잡지도 그 조류를 타고 있다.

결국 변명이 되겠지만, 이러한 이유로 이 글에서는 100년 동안의 모든 불교잡지를 대상으로 논지를 전개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면의 한계도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필자의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단, 해방 이전의 잡지들은 그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되도록 기존의 연구성과에서 밝힌 잡지명을 최대한 밝히기로 한다. 그러나 그 이후의 잡지들은 잡지 수가 급격히 늘어나기 이전인 1970년대까지를 한정하여 기관지 성격이나 주요 단체 및 사찰에서 간행한 것 중에서 어느 정도 지속성을 유지한 잡지들만을 대상으로 특징들을 살펴볼 것이다. 부득이 분석의 대상에서 제외된 수많은 잡지는 어디까지나 필자의 주관에 의해 선별하여 분류된 것으로, 이에 대한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

2. 근현대 불교잡지의 간행

한국 불교잡지의 역사는 1910년경 조선불교 원종 종무원에서 발간한 《원종》으로부터 시작된다. 초기 간행된 잡지의 성격은 바로 기관지였다는 점이다. 《원종》에 이어 간행된 《조선불교월보》(1912~1913), 《해동불보》(1913~1914), 《불교진흥회월보》(1915), 《조선불교계》(1916), 《조선불교총보》(1917~1921)는 모두 기관지 성격의 간행물로서, 불교 포교 역사에 있어서 전근대의 분수령을 가르는 혁신적인 매체였다. 잡지가 개인이 아닌 기관지 성격으로 주로 간행된 데에는 식민치하의 엄격한 검열제도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금의 조달과 사업 전개상의 편의가 개인보다는 기관에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관지라 할지라도 각 잡지는 1~2년의 짧은 기간밖에 간행되지 못했는데, 이를 보면 당시의 출판 여건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잡지들은 처음 시도되는 대중 잡지였던 만큼 내용적인 면에서 크게 분화되지 못하고, 불교계의 개혁 호소와 교리 소개 및 유물·유적 등의 소개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불교계의 사회진화론에 대한 입장과 더불어 일제의 불교정책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근대적인 개혁의 시행을 강조하면서도 불교사, 고승대덕의 행장, 불교 교리 등을 많이 게재하고 있는 점은 타 종교와의 경쟁 속에서 전통적인 불교 본연의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기관지 외에 개인이 간행한 최초의 잡지로 한용운의 《유심》(1918)이 있다. 《유심》은 불교적 수양을 주로 하고 다수의 문예작품을 중심으로 편집이 이루어졌다.

1920년대는 본격적으로 ‘대중’적 규모의 독자층이 형성된 시기였다. 3·1운동 이후, 총독부의 정책 전환으로 출판법, 신문지법 등의 규제가 완화되었고, 그에 따라 1910년대에 비해 출판 산업의 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져 신문·잡지의 구독도 그만큼 일반화될 수 있었다. 불교잡지도 1920년대에는 12종이 신간(新刊)된 것으로 확인되며, 일부는 중간에 휴간되기도 했지만 1930~40년대까지 이어지기도 하는 등 본격적인 문서포교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또한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의 기관지로 《불교》가 지속적으로 간행되면서 그와 더불어 청년회나 지방 불교 단체, 중앙불전 교우회 및 학인연맹, 유학생 단체 등에서 잡지를 간행하여 잡지 간행 주체의 외연도 확대되었다.

통도사 불교청년회가 발행한 《취산보림》(1920)과 《조음》(1920), 불교 단체들이 발행한 《불일》(조선불교회 불일사, 1924), 《조선불교》(조선불교단 1924~1936), 《평범》(부산 평범사, 1926), 《불교세계》(김천 불이교당, 1927), 유학생들이 발행한 《황야》(북경 불교유학생회, 1924), 《금강저》(조선불교동경유학생회, 1924~1943), 중앙불전 교우회가 발행한 《일광》(1928~1940), 조선불교학인연맹이 발행한 《회광》(1929~1932), 발행처가 확인되지 않는 《무아》(1928) 등이 이 시기에 간행된 잡지이다.

대표적으로 1930년 이후까지 이어졌던 세 가지 잡지를 살펴보면, 우선 《금강저》는 재일(在日) 불교 청년들이 펴낸 잡지로서 당시 불교계의 실상을 비판한 글이 다수 게재되었다. 일본 유학생들은 잡지를 발간하기 위하여 방학을 이용해서 전국 사찰을 순행하며 간행비를 모으기도 하였으므로 잡지를 통한 문서포교와 더불어 포교 방면에서 큰 효과를 달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조선불교》는 일본어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불교의 각 종파가 후원한 조선불교단에서 간행한 기관지로서, 친일파의 활동과 인식, 일제의 불교정책 등을 파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불교》는 무엇보다 1920~30년대의 대표적인 불교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불교》는 당시 불교계를 대표하는 재단법인 조선불교 중앙교무원에서 발간하였고,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월간으로 통권 108호를 간행하는 등 단연 돋보이는 잡지이다. 이 잡지는 기관지였기에 재단법인 교무원의 회의록에서 간행 실상을 살펴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일제 강점기 불교잡지, 특히 기관지의 간행과 포교 형태의 단면을 들여다볼 수 있다.

각 연도 교무원의 평의원 총회 회의록을 보면, 《불교》는 매월 1,000부에서 1,500부 정도가 간행됐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간행된 잡지는 각 지역의 본산에 배포되어 다시 각 말사나 개인에게 필요한 부수를 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잡지의 구독률이 높은 사찰은 김룡사, 마곡사, 범어사, 법주사, 통도사, 해인사 등으로 매달 평균 50부 이상을 구독하였다. 각 본산은 지사(支社)를 설립하고 종무소의 감독하에 지사장이 잡지의 구독과 각 사암의 지대(誌代)를 수납하였다. 또한 각 본말사암에서 각 개인이 생활 능력이 되는 수입이 있는 자라면 필히 잡지를 구독하게 하였고, 승려 이외의 개인 독자도 종무소나 지사에서 구독 신청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불교와 관계되어 직접 경영하거나 간접 관계에 있는 기관에 종사하는 이들에게도 의무적으로 잡지를 구독하도록 권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신도들이 잡지를 접할 수 있었던 일반적인 방법은 각 사찰을 통해서였다.

1920년대부터는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많은 지식인이 필자로 참여하고, 그런 차원에서 내용 구성의 질적인 향상을 보였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따라 ‘종교’의 본질에 대한 탐구, 불교 정체성의 정립에 대한 인식, 교학 및 불교사에 대한 소개, 역경(譯經)에 대한 중요성 인식 등이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 또 본격적으로 국내외의 불교 유적을 답사하고 쓴 기행문과 시·소설과 같은 문학적인 글들이 게재되어 다양한 독자층을 흡수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1920년대는 불교 대중화에 대한 적극적인 실천과 확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던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30년대에도 불교잡지의 발간은 활발하여 새로 신간된 잡지로 총 11종이 확인된다. 《관서불교》(관서불교사, 1931), 《불청운동》(조선불교청년총동맹, 1931~1933), 《선원》(선학원, 1931~1935), 《불교시보》(불교시보사, 1935~1944), 《금강산》(표훈사, 1935~1936), 《경북불교》(경북불교협회, 1936~1941), 《신불교》(경남삼본산협회,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 1937~1944), 《룸비니》(중앙불전 학생회, 1937~1940), 《홍법우》(봉선사 홍법강우회, 1938), 《탁마》(묘향산 보현사 불교전문강원, 1938), 《불심》(1939) 등이 그것이다. 《신불교》는 1920년대부터 발간되었던 기관지인 《불교》의 속간이며,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청년회를 비롯한 불교 단체와 사찰, 학우회 등의 소식지가 활발히 간행되었다.

1940년대 들어와 해방 전까지는 새로 신간된 잡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1930년대 중반에 시작된 《신불교》와 《불교시보》가 해방 전까지 불교계의 대표 잡지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일본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표방하며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던 때로, 식민지 조선 또한 황국신민 사상을 강요받으며 전쟁 물자를 동원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던 때였다. 한편 당시 불교계는 분산된 사찰 세력을 통합하여 총본산을 건설하려는 분위기가 강하였다. 결국 1937년 총본산은 건립되었지만, 총독부의 인가를 통해 추진되었다. 이후의 불교계는 친일성향으로 경도되어 심전개발 운동은 물론이고 승전기원법회, 황군장병 위문, 창씨개명 운동 등에 적극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신불교》와 《불교시보》 또한 친일성향의 글이 많이 게재되었다. 시국의 동향과 발간 주체의 성향에 따라 잡지의 성격이 크게 좌우된 사례라 하겠다.

해방공간의 불교잡지는 《신생》(1946), 《불교신보》(1946), 《대중불교》(조선불교혁신총동맹, 1947), 《불교공보》(조선불교 중앙총무원, 1949) 등 4개가 확인된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잡지 발간은 한동안 주춤하다가 1956년에 재개되었다. 《법륜》(1956), 《녹원》(1957~1958), 《불교세계》(1957), 《정토문화》(1958), 《현대불교》(1959) 등이다. 해방 후 어수선한 정국 속에서 불교계도 일제불교의 잔재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던 시기였다. 특히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諭示)는 비구−대처 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현대불교》는 대처승 측에서 발간한 잡지로서 1962년 7월, 《불교사상》 제10호로 속간된 후 1964년 3월에 폐간되었다.

해방 이후 1950년대까지만 해도 불안정한 정국 속에 불교잡지도 오래 간행되지 못하고 폐간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는 불교잡지의 수도 조금씩 증가하고 장수하는 잡지도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법시》(법시사, 1963~1992)와 《법륜》(월간법륜사, 1968~1993)은 비록 중간에 결호가 생기긴 하였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던 장수한 잡지였다.

그 외에 1967년 박대륜이 창간한 《불교계》는 1970년 《불교》(월간불교사, 1970~ )로 이름을 바꾸었다. 박대륜은 1970년 비구−대처의 분쟁 결과 한국불교 태고종이 새로 창종되었을 때 초대 종정으로 취임한 승려이다. 그가 창간한 《불교》는 태고종의 기관지로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불교》 제1호에서는 1920년대 기관지였던 《불교》의 전통을 정신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어, 역사성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불교》와 함께 1970년대 창간된 잡지로 오늘날까지 간행되고 있는 《불광》(불광출판사, 1974~ )이 있다.

1980~90년대는 불교잡지의 황금기라 할 정도로 많은 잡지가 생겨났다. 종단 등록 수도 늘어난 데다가 각종 불교단체, 각 지방의 크고 작은 사찰 및 개인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열거하기도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이전 시기보다 잡지 출판의 여건이 좋아졌고, 공급이 늘어났다는 것은 그만큼의 수요가 있었다는 얘기다. 이제는 불교잡지도 순전히 포교를 위한 의미보다는 말을 살짝 바꾸면 홍보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3. 불교잡지의 기능과 역할

1) 근대 불교 지식인의 등용문

1906년에 설립된 명진학교는 조선불교도 비로소 신식교육을 시작했음을 대내외에 선포한 상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 강원교육이 중심이 되어 왔던 승려 교육은 이때부터 신식교육을 병행하여 근대사회에 적합한 종교로서 조선불교의 위상을 정립하려 했다. 당시 불교계의 숙원이었던 근대화·대중화의 동력은 인적 자원의 쇄신에 있었고, 국내의 자구 노력과 더불어 1910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일본으로 유학생을 파견하기에 이른다. 전체 유학생 수를 산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기존 연구성과에 의하면 1910년대 10여 명으로부터 해방 이전까지 360명 정도의 이름이 파악된다. 이 외에 중국에서 공부한 승려들의 이름도 더러 확인되며, 김법린과 백성욱과 같이 유럽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승려도 있었다. 이들 불교 유학생은 이른바 근대 ‘지식인’으로서 조선불교의 근대화를 책임진 역군으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외적인 체제 발전뿐 아니라 내적으로 종교성의 함양과 불교학 발전의 토대를 구축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해외유학을 통해 근대불교학의 세례를 입은 세대와는 반대로, 전통적인 교육을 받았지만 근대적 지식인 계층으로 볼 수 있는 이들도 있다. 박한영, 백용성, 한용운, 이능화 등이 이에 속한다. 혹자는 이들을 ‘전근대적인 교육을 받아 성장했지만 근대적 각성을 통해서 전근대적 전통과 가치를 새롭게 인식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들 근대와 만난 전통적 지식인들은 대체로 유학생 그룹보다 선배들로서 오늘날 불교학 형성의 주춧돌을 놓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불교학은 바로 이 두 부류 지식인 계층의 학문적 업적에 토대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전문 학술잡지가 없던 시기였기에, 이들의 불교 지식과 학문적 업적은 초창기 대중 잡지를 통해서 발표되었다. 다시 말하면, 당시 불교잡지는 불교 지식인들의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파리 대학에서 유학한 김법린은 《불교》에 〈구미학계와 불전연구〉(49호, 1928. 7) 〈유식이십론(唯識二十論)의 연구〉(96~99호, 1932) 〈불란서의 불교학〉(100호, 1932.10) 등을 발표하며 서구 불교학의 동태와 불교 문헌학 연구를 시도했고, 독일에서 유학한 백성욱은 자신의 학위논문 주제였던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7~14호, 1925)의 연재를 통해 형이상학적 불교철학의 성격을 다뤘다. 일본 유학생인 허영호도 〈십이상연법(十二相緣法)에 대해서〉(59~63호, 1929) 〈범파양어(梵巴兩語)의 발음법에서 본 조선어발음법에 관한 일고찰〉(80~84·85호, 1931) 〈대소품반야경의 성립론〉(96~101·102호, 1932) 등을 발표하며, 문헌학적 방법론에 의한 불교학 성과를 내놓았다. 이러한 글들은 1920년대에 들어서 간행된 잡지에서 보이기 시작되며, 그것은 1910년대부터 시작된 해외 유학생들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잡지는 한국적 근대불교학 형성의 기초를 살펴볼 수 있는 1차 사료를 담고 있다. 이후 1960년대 들어서 전문 학술잡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일반 대중 잡지에서는 학술적 성격의 글(논문) 대신 지식인들의 칼럼이나 에세이 등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근대 불교 지식인의 등용문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얘기할 수 있는 분야로 불교문학을 들 수 있다. 근현대 잡지에는 현대시는 물론이고 평론이나 수필, 기행문, 소설과 같은 산문 형식의 근대 문학 작품들이 끊임없이 발표되었다. 대표적으로 한용운은 여러 잡지에서 수많은 시와 산문들을 발표했으며, 이미 1910년대에 발간한 《유심》 등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문학운동을 직접 이끌기도 했다. 불교 지식인들의 문학성을 드러낸 시나 산문 형태의 글들은 잡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이 외에 특징적으로 불교 희곡이 다수 발표되었다. 그 대표주자는 희곡을 발표할 때 주로 ‘김소하’라는 필명을 사용했던 김태흡이다. 그의 희곡 작품들은 단순한 문학 작품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부는 직접 공연을 올렸다는 점에서 연극사적인 의미와 가치를 동시에 지닌다. 특히 경전이나 교리의 내용을 현학적인 극형식을 빌려 표현한 것은 일반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한 불교잡지의 근대적 포교 방식의 채용이라는 점에서 편집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초창기 잡지는 근대불교학과 불교문학을 위한 지식인들의 등용문으로 기능했다. 따라서 오늘날 이 시기를 연구함에서 불교잡지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현재 이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 심지어 다양한 필명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오늘날은 일반인들도 잡지에 많이 참여하고 있지만, 당시처럼 문맹률이 높았던 시절에 글을 기고했다는 것은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20세기 초 불교 지식인들에 대한 연구는 그들이 쓴 글을 통해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잡지는 이 시기 불교 연구에 많은 소스를 제공해 주는 자료라 하겠다.

2) 종교적 위상 강화와 문화전통의 강조

초창기 불교잡지의 논설란에 가장 많이 등재된 주제는 불교개혁론과 종교 정체성에 관련한 내용이다. 불교개혁론은 교육·포교·행정·사찰·승려 등 불교 집안의 모든 구태를 벗어던지고 근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 기본 골자였다. 도심불교를 표방하며 근대화에 몰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전통은 무조건 없애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개혁론은 체제 개선과 종단 설립 문제에 집중되었고, 내부적으로 승려의 인식부터 변해야 함을 피력했다. 결국 불교 개혁을 통해 ‘문명’에 걸맞은 종교로서 위상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개혁을 통해서만 종교적 위상을 세울 수는 없었다. 문명 종교에 부합하는 이론과 논리가 필요했다.

19세기 말까지도 체제 내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던 조선불교는 천주교·기독교의 확장 속에 위기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문명 종교로 인식된 기독교와는 달리 미신이나 무속으로 인식된 불교였기에 무엇보다 종교적 성격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사실 서구 종교의 유입은 전통 종교의 ‘종교성’을 자각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불교 지식인들은 기독교적 종교 개념에서 나아가 문명 종교로서 불교의 종교 개념을 규정하려 하였다. 기독교와의 비교를 통해 이끌어낸 불교의 특성은 전반적으로 무신론(無神論)이라는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천지창조의 일신교적(一神敎的) 기독교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반론으로, 불교가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닌 자유의지에 의한 해탈을 궁극의 목표로 하는 종교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종교로서 가장 큰 특징으로 ‘철학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철학적 성격은 이성과 합리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근대 논리에 부합하면서 전통적인 교학 체계를 계승할 수 있는 적합한 것이었다. 서구의 학자들은 불교의 무신론과 철학적 특성 때문에 종교가 아닌 석가모니를 정점으로 하는 철학으로 분류했지만, 불교 지식인들은 오히려 역으로 본래 지니고 있는 불교만의 특성을 문명 종교의 이상으로 부각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20세기 초 불교 지식인들은 서구의 ‘종교’ 개념을 새롭게 재해석해 근대 종교로서의 불교 정체성을 정립했다. 잡지에 게재된 불교의 종교 정체성에 대한 내용은 불교도들의 공론을 형성하였고, 타 종교와 경쟁할 수 있는 논리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근현대 불교잡지는 ‘불교문화’에 대한 인식을 강조한다. 불교 역사와 고승에 대한 탐구, 불교 유적지에 대한 탐방 등을 다룬 글들은 독자들에게 불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증대시키고, 불교 전통의 계승과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특히 기행문학의 형식을 빌려 전통사찰과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글은 잡지 간행 초창기부터 오늘날까지 끊이지 않고 게재되는 단골손님이다. 종교가 보편적으로 인간의 간절한 염원을 희구하여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는 것이라면, 문화는 종교성이 외면으로 형상화되어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문화유산은 불교를 통해 바라는 인간의 염원이 예술성의 경지로 승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한국의 지정문화재 중 상당수가 불교 문화재인 점을 감안한다면,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차원에서도 불교문화유산이 지니는 가치와 의미는 매우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불교잡지는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추적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불교문화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자부심을 동시에 가질 수 있게 한다. 불교잡지가 지니는 이 두 가지 특징은 결국 불교의 종교로서 성격을 강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문화와 전통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특수한 불교문화의 전통을 발굴하여 일반에 소개하고 한국문화로서 보편성을 획득하는 일은 불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3) 불교 대중화의 선도자

불교잡지는 오늘날 포교의 가장 일반적인 수단 중 하나이다. 강연이나 법회는 일회성인 데 비해 잡지는 반영구적이며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여 포교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장점이 있다. 또한 단순히 일률적인 주제나 장르로 엮은 단행본이나 소식을 전하는 목적이 강한 신문에 비해 당대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여러 필진의 참여와 다양한 장르의 글들이 복합적으로 구성된 산물이라는 점도 잡지의 가장 큰 매력이다. 결국 이러한 매력에 불교잡지의 대중화 전략이 숨어 있다. 즉, 전문성을 갖추면서 지루함을 없앨 수 있는 기획과 편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다양한 편집 전략은 초창기 불교잡지에서도 나타난다. 지식의 보급은 물론 독자층의 확대와 참여를 이끌기 위해 문답란이나 여성란, 소년란, 현상공모와 같은 코너를 개설하였고, 불전의 번역 및 해설을 게재하여 어려운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전략은 오늘날 잡지까지 이어진다. 특히 2000년대 이후로는 추세가 읽는 잡지에서 보는 잡지로 전환하고 있다. 이에 가독성뿐만 아니라 시각적인 디자인을 고려하여 삽화뿐 아니라 다양한 사진으로 독자들의 눈길을 끌어야 하는 전략이 필요하게 됐다.

그리고 초창기 잡지에서 불교의 포교와 대중화에서 크게 기여했던 것 중의 하나는 불전의 번역이었다. 한문으로 된 부처님 말씀을 한글로 번역하여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당시 포교사업의 최우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역경 사업의 선두주자는 백용성이었다. 그는 3·1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타 종교 신자들이 한글로 된 경전을 읽는 것을 보고 그렇지 못한 불교의 현실을 통탄했다. 그래서 출감 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세워 조직적인 역경 사업을 전개했다. 한용운도 일찍이 “경전이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사람들이 미신처럼 믿으니 종교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개탄했다. 그래서 1930년대 초 전주 안심사에서 한글 경판이 발견되었을 때 언어도(言語道)를 초월하는 쾌락과 환희를 느꼈다고 술회했다. 역경의 중요성은 많은 이들이 공감했고, 단행본뿐만 아니라 여러 잡지에 연재 형식으로 게재되었다.
그러나 초기 잡지에 게재된 경전의 단순 번역은 요즘 잡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동안 경전 번역서가 많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도 볼 수 있어서 이제는 쉽게 경전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단순 번역을 넘어 필자의 불교학 지식을 반영하여 경전에 대한 강의 형식으로 꾸려지기는 한다. 지식 열람의 창구가 제한적이었던 20세기 초반에는 비록 번역문만 게재하는 형식이었지만 불교 대중화를 위한 첫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현대 잡지에서 불교 대중화를 위한 기획은 지식의 전달이나 종교성 추구보다는 현대인의 삶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다. 바쁜 현대인들을 위한 생활법문 코너가 지속적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불교와 현대과학’ ‘불교와 21세기’ 등 새롭게 바뀌어가는 일상 속에서 불교적인 모습들을 발견하고 실천해 나가는 모습들을 담아내려 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각 잡지가 내건 표어를 보더라도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대중과 더불어 생활하는 월간지’(《불교세계》), ‘현실 속의 불교를 지향하는’(《불교와 문화》), ‘창조적인 생활인을 위한 교양지’(《불광》) 등 이제 불교잡지의 주된 관심은 현대인의 삶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2000년대 들어서는 선(禪)불교와 불교 명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템플스테이나 신행 수기 등을 다루는 코너가 늘어나고 있다.

《불광》의 발행자 고광덕은 “한 권의 책은 한 사람의 법사(法師)와 같다”고 했다. 일반 서적이 1명의 법사라면, 불교잡지는 수십, 수백 명의 법사를 두고 불교 포교를 하는 셈이다. 그것도 불교 강좌를 비롯해 역사, 문화, 문학 등 다양한 방면에 걸친 지식과 정보를 갖춘 능력자를 말이다. 불교잡지는 단순히 불교인들만을 위한 잡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잡지가 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4. 나오며

지금까지 근현대 불교잡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일반 잡지와는 다른 불교잡지로서 가지는 종교적 특성에 대해서 앞에 서술한 내용을 정리하며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기로 한다.

근대 불교잡지는 전통과 근대의 교차점에 선 당대 불교 지식인들의 사회인식과 생각들을 보여준다. 주지하듯이, 종교 개념은 19세기 말에 수용되었다. 근대적·서구적·기독교적 개념인 것이다. 이 기준에 의하면 불교는 전통에 속한다. 하지만 종교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전통만을 고수할 수 없었다. 근대 종교로 옷을 새롭게 갈아입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과 같은 과감한 개혁론도 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편에선 물질만능주의의 신사조를 비판하며 전통을 강조하기도 했다. 불교잡지에는 전통 종교이자 근대 문명에 부합하는 종교로 불교가 어떻게 처신하고 있는지에 대해 많은 논설이 담겨 있다. 이러한 글들은 당시 불교인들의 공론을 형성하고 불교의 종교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발간되는 불교잡지는 단순히 불교 자체를 알리는 차원을 넘어 현대인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생활법문과 명상에 대한 내용이 중심이 되고 있다. 또한 초창기에도 해당되지만, 불교문화에 대한 강조가 더욱 두드러진다. 이것은 특히 2000년대 이후 문화 전통을 되살려 세계 속에 한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추세와 발맞추어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오늘날 발간되는 불교잡지의 이러한 특성들도 결국은 불교의 종교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주목적이 있다.

그리고 불교잡지는 10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수많은 지식인을 배출한 재원이기도 하다. 초창기 잡지의 필자들은 상당수가 해외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시대인식과 사상을 불교잡지를 통해 접할 수 있다. 동시에 재가불자들의 불교운동과 동향을 살피는 데도 불교잡지는 유용한 정보를 제공한다. 잡지의 눈높이는 독자들에게 맞춰져 있고, 독자들은 잡지를 통해 공통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한국 근대불교의 가장 큰 과제는 근대화와 대중화였다. 종교 경쟁 시대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근대화가 시급했고, 오랜 기간 산중불교에 머물러 왔기 때문에 불교 대중화를 위한 포교에 힘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불교잡지는 가장 근대적인 방법으로 가장 효율적인 포교를 할 수 있는 매개체였다. 지난 100여 년 동안 불교잡지는 포교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왔다. 세상에 빛을 본 잡지만 해도 아마 100종이 넘을 것이다. 하지만 잡지가 시작된 1910년대부터 적어도 1960년대까지는 지난한 역사였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상과 어수선했던 해방공간, 그리고 6·25전쟁으로 모든 기간산업이 피폐해진 현실들은 제아무리 종교계라도 정상적인 출판 사업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1970년 이후로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잡지 수가 늘어났다. 안정적인 경영으로 1970년대에 창간되어 40년이 넘도록 간행되고 있는 《불교》와 《불광》과 같은 잡지도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인터넷 잡지도 등장했다. 이로 인해 잡지의 역할이 웹상으로 이동한 면도 없지 않지만, 문서로서 잡지가 갖는 의미가 퇴색하지 않는 이상 불교잡지의 역사는 21세기에도 계속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불교의 대중화는 잡지의 목표가 아니다. 이제는 그 이상을 바라보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불교의 문서 포교 역사가 가장 오래된 나라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과 금속활자본이 우리나라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대장경의 조판과 조선시대 간경도감의 불서 편찬은 단순한 불심에 의한 불사였다기보다는 우리나라 불교가 지닌 포교 역량의 발현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근현대 불교잡지의 간행도 문서 포교 역사의 오랜 전통의 연장 선상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

 

김성연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주요논문으로 〈근대 불교의 종교 비교방법을 통한 정체성 인식〉 〈1930년대 한용운의 불교 개혁론과 민족의식 고취〉 등이 있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ABC) 사업단에서 재직하며 동국대 강사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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