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대승의 상대개념은 소승이다. 불교에서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나눈 시기가 있었다. 북전불교(北傳佛敎)는 오랜 기간 대승불교를 자처하고 남전불교(南傳佛敎)를 소승불교로 간주하였다. 남전불교는 출가 집단인 상좌부 중심이고 북전불교는 재가신도를 포함한 대중불교를 보살사상으로 미화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소승불교란 남전불교의 자칭도 아니고 남전불교라고 해서 모두 상좌부 중심도 아니며, 북전불교에도 상좌부 요소가 포함된 경전이 많다. 그러나 대체로 남전불교는 신도를 포함한 보살사상을 강조하는 북전불교보다 상좌부를 강조한 특성이 유지된다는 개연성도 부정하기 어렵다.

동아시아의 불교에 대해서 《돈황본 육조단경》을 연구한 후즈(胡適)는 선종은 대승불교의 혁신이고 동아시아에서 기원한 종파라고 정의하였다. 서구의 학계도 이를 따랐고 다른 의문이 없었다. 근대에 동아시아의 불교를 정리하여 서구에 소개한 스즈키 다이세츠(Daisetz Teitaro Suzuki, 1870~1966)도 후즈의 견해에 대하여 이론(異論)이 없었다.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 서구의 학계는 물론이고 거시적인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한국의 불교계는 자신의 전통이 전부 대승불교라는 관점에 조금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세계의 불교학계와 동아시아의 불교의 일부인 한반도 불교사에서 남전불교의 요소를 정리하고자 한다. 고려에서 남전불교와 관련이 깊은 소승종이 있었으나 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소승종과 같은 의미로 쓰인 시흥종을 천태종에 가까운 군소종파로 간주하였다. 심지어 고려의 4대종파에 속하는 조계종과 천태종에도 남전불교의 요소가 잠재하고, 군소종파인 소승종과 상통하는 특성이 있었다는 견해를 제시하였으나 이를 검토하여 인정하거나 비평하지 않았다.

개항과 더불어 외국의 불교와 접촉이 활발해지고 현대에도 남전불교의 수행방법인 위빠사나도 소개되었다. 위빠나사는 본래 수양과 경전과 계율을 불가분의 관계로 상좌부불교의 수행과 상통하였고, 이보다 앞서 고려 후기 지공선현(指空禪賢)이 스리랑카에서 보명존자(普明尊者)의 사상을 바탕으로 저술한 《선요록(禪要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대승불교를 자처한 북전불교에서 비하한 소승불교보다 전파된 공간을 반영하는 남전불교와 상좌부불교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남전과 북전에도 시대에 따라 상반된 요소가 존재하는 경우가 나타나기도 한다. 불교사에서 남전불교가 쇠퇴하여 북전불교의 고승을 초청하여 지원을 받거나 반대의 경우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로 남전불교가 쇠퇴하여 북전불교의 지원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만 반대의 경우는 적다. 실제로는 남전불교보다 민족이동과 전쟁, 그리고 자연조건이 가혹한 북전불교에서 남전불교보다 위기가 더 자주 있었지만, 남전불교의 영향에 대한 서술이 없을 만큼 불교사에서 북전불교의 위력이 강하게 서술되었다.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는 물론 동아시아에도 수도는 북쪽에 위치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교사도 거의 수도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국가에 의하여 지원된 불사가 주로 수록되는 경향 때문에 북전불교가 강조된 경향이 심하다. 동아시아의 남쪽에는 남전불교의 요소가 북쪽보다 강하지만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전체가 북전불교라는 견해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불교사에도 다양한 요소를 보존한 고려에서 적지 않은 남전불교의 자료가 남아 있다. 이를 정리하여, 시대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북전불교 속에도 남전불교의 요소가 의외로 강하게 존재하였음을 여러 차례 밝혔다. 대체로 상좌부불교와 남전불교와 소승불교는 서로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고 혼용하는 경우가 많으나, 현대에는 남전불교와 상좌부불교를 주로 사용하는 차이가 있다. 이와 상반되는 대승불교와 북전불교와 대중불교는 역시 강한 상관성이 있다. 이를 감안하면서 시대와 공간과 내용 그리고 불교가 지향한 방향과 상반되는 개념이 있지만 이를 포용한 측면도 있음을 살피고 이를 규명하였다.

동아시아의 불교는 흔히 말하는 대승불교가 주류이다. 그럼에도 북전불교의 전통과 대중불교의 보살사상이 강조된 일반적인 통설에도 불구하고 남전불교의 요소가 공존하거나 강하게 전승된 요소가 없지 않음을 염두에 둘 필요를 제시하였다. 그렇다고 이 글을 통해 동아시아의 불교가 북전의 대승불교가 주류라는 통설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동아시아 불교를 거시적으로 살피면 소승불교로 표현된 남전불교의 상좌부 요소를 무시하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불교가 동아시아에 전파된 초기와 중앙아시아에서 사막화가 진전되고 민족이동이 심하였던 중세에는 의외로 남전불교의 요소가 강화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1. 소승의 개념과 혼용된 용어

불교의 역사는 시간과 공간에서 어느 종교보다 포함하는 범위가 방대하다. 오랜 기간 여러 지역으로 불교가 전파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토착 종교와 뒤섞이는 경향이 생기고 불교의 성격이 지역별로 많은 차이를 보였다. 이는 불교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지만, 불교사에서 더욱 심각한 경향이 있다.

불교를 공간적으로 바라보면 몇 가지 특성이 있다. 하나는 불교의 기원지인 인도에서, 기원후 5세기부터 브라만 계층을 중심으로 불교 이전의 신화종교를 재구성한 힌두교에 의하여 주도적 사상의 위상을 점차 상실하고 불교가 전파된 지역에만 무성하여 중심부가 빈 껍질로 변하는 이른바 공동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기독교의 경우에도, 기원지에서는 이슬람교와 유대교에 의하여 구축되고 주로 서쪽으로 전파되었는데, 그곳이 기독교의 중심지로 정착된 사실과 상통한다.

불교의 또 다른 현상은 종파가 지역성을 반영하지만 혼재하거나 이와 반대로 가톨릭의 교구처럼 지역성을 나타내는 두 가지 경우이다. 동아시아에 전파한 불교는 대체로 수행에서 지관(止觀)을 중요시하는 천태종과 참선을 수행으로 강조하는 선종은 음료인 차(茶)가 재배되는 따뜻한 남방에서 성행했고, 교학을 중요시한 교종은 민족이동이 심하고 사막화로 자연환경이 거칠었던 북방에서 성행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가톨릭의 교구제와는 다르게 혼재하면서 경쟁한 속성도 있었다.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전통시대에는 대승과 소승이란 용어가 널리 쓰였다. 대승이란 소승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포함되었고 실제로 대승불교를 표방한 지역에서 소승불교는 교세가 신장되지 못한 경향이 있다. 이와 달리 근대에는 우열평가의 의미를 포함하지 않고, 공간적으로 구분하여 남전불교와 북전불교로 호칭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북전불교와 남전불교라는 분류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다. 남전의 불교에도 북전의 보살사상인 대승불교가 포함된 경우가 있고 북전불교에도 초기에는 상좌부불교의 경전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소승과 남전 그리고 상좌부불교 사상 사이에는 공통적인 개연성이 있지만 대승과 북전 그리고 보살사상이 반드시 일치한다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다만 두 가지 상반된 분류는 개념을 이분법으로 나누면 선명한 속성은 있으나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상관성이 크다는 유보적인 요소도 인정해야 한다는 한계가 있다.

불교의 초기에는 상좌부가 중심이었고 이후의 북전불교에서 대중을 포함한 보살사상이 강화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인도의 서북방과 중앙아시아로 전파된 북전불교는 대륙성 기후와 민족이동, 낮은 기온과 습도 차이가 심한 가혹한 자연조건을 극복하고 적응하기 위하여 대중을 포함한 집단의 구성을 강화하여 대응한 특성이 있었다.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 종교가 새로운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전통과 결합하여 변질되는 현상은 불교만의 특성도 아니다.

2. 최치원과 의천이 말한 한반도의 소승불교

최치원은 회창폐불(會昌廢佛)이 끝난 12년 후에 태어났고 다시 12년 후 당에 유학하였으므로 선종이 일어나는 시기의 인물에 해당된다. 회창폐불은 장안의 교학불교에 타격이 컸으므로 그가 수학하고 급제한 시기에 불교의 영향을 적게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가 급제한 다음에는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서, 황소(黃巢)의 난에는 관군의 편에서 주로 양자강 유역에서 활동하였다. 그가 귀국한 신라에서도 선종이 일어나고 기존의 교학과 활발한 경쟁을 벌이면서 중앙의 통제가 약화될수록 종단을 형성하는 불교계의 인맥이 강화되었다.

최치원은 만년인 900년에 지은 해인사의 〈선안주원벽기(善安住院壁記)〉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소승인 비파사를 언급하였고 당시 신라에 존재한 불교계의 여러 요소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곳곳의 인재들이 다투어 출가할 뜻을 보이고, 온 나라의 승려들이 모두 부처의 가르침에 젖었으니 이른바 유가(瑜伽), 표하건나(驃詞健拏: 華嚴), 비나야(毗奈耶: 戒律), 비파사(毗婆沙: 小乘) 등이 있다. 또한 학풍을 서로 같이하거나, 수준이 떨어지면서 뛰어난 체하거나, 참회와 염불을 중요시하거나, 진언(眞言)을 사용하거나, 참선을 내세우거나, 고행을 일삼는 각각의 경우가 있으나, 이들은 부처가 베푼 바를 각각 부분적으로 내세웠다.

위의 자료는 용어가 매우 어려우므로 견해의 차이가 염려되지만 가능한 한도에서 유추해 본 해석이다. 최치원은 한자를 사용하여 불교의 용어를 사용하였으나 한자 문화권에서 내용을 의석(義釋)하기보다 음사(音寫)한 용어로 사용하였다. 유가는 고려에서 종파 이름으로도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자은종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증가하였고 법상종으로 의석한 용어를 사용한 경우는 찾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 밖에 화엄과 계율 그리고 소승을 음사의 한자로 사용한 경우는 더욱 적었으므로 최치원의 글은 특색이 크다. 소승을 음사하면서 범어를 사용한 희소한 경우에 속한다. 한자를 사용하면서도 더욱 외래어에 속하는 음사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구미에 유학한 학자들이 유별나게 고대의 중원 지명이나 인명조차 오늘날 중국어 발음의 한글로 표시하려는 경향이 국내는 물론 중국의 교민보다도 강한 현상과 상통한다.
최치원은 소승(小乘)을 비파사로 표현하였다는 해석도 쉽게 동의를 얻기 어렵다. 비파사는 나름대로의 경률론 삼장이 있지만, 때에 따라 경보다 논이나 수행 방법을 강조하는 경향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비파사를 포함하여 불교계의 큰 주류를 넷으로 나누었다. 그 밖에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으로 몇 가지 학파의 장점을 겸비한 종합적인 학파, 또한 그의 안목에 맞지 않는 형식적인 학파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위의 글은 화엄사상을 펼친 중요한 사원인 해인사에서 화엄종을 종파로 발전시킨 구심점의 하나였으므로 더욱 중요성이 크다. 최치원은 선종 고승의 비문에서도 비파사란 용어를 사용한 사례가 있었다. 위에서 신라 말기에 등장하였던 불교의 여러 사상 경향을 포괄하여 열거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위의 글에서 소승과 대승의 차이나 전파된 공간에 대한 설명이 없고 융성한 시기를 구분하여 사용하지도 않아 아쉬움이 있지만,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했다.

최치원은 당시까지의 신라의 불교사를 향상된 체계적인 관점을 선종 고승의 비문에서도 음사된 용어의 한자를 사용하여 나타낸 자료가 있다. 그가 지은 봉암사 지증대사 비문에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그 가르침(佛敎)이 흥성하게 된 계기를 보건대, 먼저 비파사(毘婆沙)가 전래되어 사군(四郡)에 사제(四諦)의 법륜이 달렸고, 마하연(摩詞衍)이 후에 전래되어 온 나라에 일승(一乘)의 거울이 빛났다. 경의(經義)가 널리 전파되고 계율이 바람처럼 번졌다. 모든 이치는 모두 불교에 융해되었다. (중략) 장경초(長慶初)에 도의(道義)가 서쪽으로 유학하여 서당지장(西堂智藏)의 가르침을 배워옴으로써 비로소 선종을 알게 되었다.
 
사제란 아함경에 속하는 상좌부 교학의 일부이고 《불설사제경》이 독립된 경전으로 전하기도 한다. 마하연은 대승을 말하므로 앞에 인용한 〈선안주원벽기〉보다 소승을 대승 교학보다 더욱 선명하게 대비시켰다. 최치원의 범어학에 대한 수준이나 당시에 해로로 전래한 인도 언어에 대한 수준이 대표적인 제2외국어로 사용될 만큼 의외로 높은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위의 내용에서 최치원이 신라를 중심으로 불교사를 3시기로 시대를 구분하였음이 확인된다. 즉 삼국 전의 소승불교 시대, 그리고 삼국의 후반과 통일신라의 중기까지 풍미한 대승불교의 교학과 계율, 그리고 말기부터 도의에 의하여 소개된 선종이 그것이다. 최치원의 이러한 불교사 체계는 몇 가지 주목되는 견해가 발견된다. 첫째로 이 기록은 현존하는 불교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대구분이 실린 관점이고, 둘째로 소승불교 시대를 설정하였다는 특색을 가진다.

최치원이 설정한 비파사가 현재 통용되는 4세기 후반에 수용된 교학불교보다 앞선 시대에 전래하였다는 해석은 학계에서 통설로 수용되지 않고 있다. 비파사란 위빠사나를 말하고 상좌부불교이며 대승불교인 마하연에 대응하는 소승불교란 의미이다. 오늘날은 위빠사나가 남전불교의 수행방법을 주로 의미하지만 거시적인 안목으로 정리하는 시대구분에서 개인이 독창적으로 시대를 새롭게 설정하기는 어렵다.

삼국에서 북전불교를 수용하기에 앞서 설정된 소승불교 시대가 학계에서 인정되지 않더라도, 이러한 견해의 기원이 최치원보다 훨씬 앞서부터 존재하였고 그가 이를 수렴하여 글을 썼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소승경전인 아함경이 많이 포함된 《사십이장경》이 일찍이 북전으로 전래하였다거나 실제로 인도에서 상좌부의 부파불교가 먼저 확립되고 다음에 대중을 포함하는 보살사상이 북전하면서 강화되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최치원 다음으로 거시적인 불교의 시각을 보였던 지식인은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그는 출가하였지만 국제적인 감각과 경세적인 경제사상으로 화폐의 실용성을 강조하기도 할 정도였다. 의천은 고려의 불교가 종파 중심으로 갈등의 조짐이 나타나자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한 사상가였다. 그는 원효의 교학사상에 이상을 두고 학파시대의 불교로 돌아가 모든 교학사상을 단계별 겸학으로 수렴하였으나 남종선의 직지인심이나 심전을 주장하는 선사상을 배격하였다.

의천은 남종선보다 지의(智顗)에 의하여 확립된 천태종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그는 최치원과는 달리 음사된 인도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인도어를 대표하는 범어를 배우지 않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의 사후에 바로 조성된 묘지에서 서천범학(西天梵學)에 대하여 송에 머무는 시간을 할애한 사실을 밝히고 있고 그의 문집에는 이를 지도한 고승의 이름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해로로 전파된 외래어의 무분별한 남용이나 이의 사용을 억제하고 적어도 선종보다 먼저 전래되어 북전불교에서 의석(義釋)된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남전의 음사된 언어에서 나타나는 해석의 부정확한 내용을 극복하고 동아시아의 불교경전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태도를 견지하였다고 하겠다. 범어를 사용하거나 주술적인 힌두교와 타협한 신비주의에 빠진 불교를 극복하고, 남용되는 범어보다 북전의 불교를 기준으로 앞서 정착된 불교 용어의 의미를 찾아서 경전을 확립하려는 의지를 보였다고 하겠다.

의천은 현재의 종파를 벗어나 신라의 원효에 의하여 서술된 불교의 해석으로 복귀를 희망했으며, 의상이 대덕이라면 원효는 보살이라고 치켜세웠다. 의천은 14개월 동안 송에 머물면서 다양한 종파의 뛰어난 고승들을 만났으면서도 그가 추구한 목표는 선종보다 선행한 천태종을 우위에 두었음이 확실하다. 그가 원효를 추앙한 원인도 남전의 선사상이나 경전을 북전의 언어로 표현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의천의 문집은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으나 현존하는 내용으로 미루어 선종의 수양 방법에 대한 관심은 많지 않았다. 그의 문집에는 비파사란 표현은 있을 수 없고 소승에 대한 이론적 중요성을 구사론(俱舍論)에 국한시켰음이 한 번 등장한다. 그는 성상(性相)을 대비시키고 유식론과 기신론을 각각 상(相)과 성(性)으로 대비시켰고 이를 일월과 건곤(乾坤)으로도 비교하였다. 그는 상에 대하여 구사와 유식으로 크게 나누고 이를 시교(始敎)라 하였고, 기신과 화엄을 깨달음과 원융의 기반이라고 하였다. 그는 소승에서 이승(二乘)으로 다시 대승으로 단계적 겸학을 주장하였고, 선종에서 소승을 무시하거나 돈오에 이를 수 있다는 주장은 웃음거리에 불과하다고 일축하였다.

의천의 사상은 화엄종과 유가종 그리고 선종이 삼대종파를 이룬 가운데 군소종파가 있었던 고려 전기의 불교계에 큰 변동을 예고하였다. 그의 이상대로라면 화엄종을 중심으로 삼고 유가종과 소승종의 순서로 단계별로 종파가 학파시대의 교학으로 돌아가 겸학의 일부로 포섭되기를 바랐다. 천태학은 선종을 대신한 소승과 대승의 중간에 위치하는 중요성이 있었다.

의천의 이상은 그가 생존할 당시에는 그대로 진행되었고 실제로 군소종파는 소멸될 정도였다. 14산문의 남종선은 산문의 표방마저 약화되고 그 가운데 5산문은 산문마저 해체되어 그의 문도로 예속되고 말았다. 의천이 입적한 다음 30년 지나 천태종의 시조로 그를 추앙하는 선승들이 선봉사에 비를 세우면서 천태종을 중심으로 종파를 선포하였다.

의천에게 소승이란 종파나 독립된 수행체계의 하나이고 인식론에서 구사론의 일부로만 파악되었다. 한국의 중세는 동아시아 고대의 요소를 보존하면서 창조성을 강하게 지닌 고려불교의 특성을 나타냈지만 의천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알려진 소승불교에 속하는 경전으로는 아함경이 가장 대표적이다.

3. 고려 군소종파인 소승종과 시흥종

고려시대의 연구에서 종파는 불교사를 이해하기 위한 뼈대와 같다. 신라 말기에 종파의 기반이 무르익었고 태조는 이를 공인하면서 고려는 다양성의 포용과 개방을 내세우고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대표적 고승인 국사의 종파별 배출과 왕실의 대표적 사원인 진전(眞殿)을 연결시키면 불교사의 뼈대인 종파의 성쇠가 어느 정도 파악된다.

고려와 조선 초기의 불교사에서 가장 어려운 과제는 3대종파나 4대종파보다 군소종파의 기원과 확립된 시기, 그리고 각 종파의 종조와 종지의 문제이다. 3대종파의 경우에도 종조와 종지에 대한 기존의 연구에서 차이가 있지만 필자는 두 차례에 걸쳐 이를 선명하게 정리하였다. 처음은 1986년에 간행한 《고려불교사연구》이고, 다음은 이를 보충하여 2013년에 출간한 《한국의 중세문명과 사회사상》이다. 다만 군소종파의 명칭과 종조와 종지는 아직도 선명하게 규명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

군소종파도 4대종파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기에 기원하고 10세기에 소멸되거나 잠재하였다가 13세기에 등장하거나 새로 출발한 경우가 많다. 소승종이 고려 초기 종파로 존재했다는 증거는 없으나 13세기 중반의 하천단(河千旦)은 소승종의 삼중대사였던 고승을 수좌로 승급시키는 임명장에 해당하는 관고(官誥)를 남겼다. 이를 보면 두 가지 중요한 내용이 확인된다. 소승종은 국가의 제도에 의하여 높은 승계인 수좌로 올랐던 고승을 배출한 교종의 하나였다. 비록 고승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외적이 변방을 시끄럽게 하는 시기에 국가에 이로움이 많았다고 그 역할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천단이 살았던 13세기 중반의 불교계는 조계종과 천태종이 신장된 대신 교종인 화엄종과 유가종은 종세가 침체하였다. 13세기 군소종파는 지념종을 제외하고는 거의 교종을 승계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로 보면 당시의 군소종파는 화엄종과 유가종이 침체한 분위기에서 이탈하여 선종의 특성을 절충하면서 근접한 특성을 지녔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불교계의 인사행정을 담당한 문한관이 작성한 관문서에 올라 있을 정도로 소승종은 국가제도에 포함된 하나의 종파였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에는 군소종파로서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다. 종파란 단시일에 나타나기도 어렵고 더구나 국가의 제도에서 감지하여 높은 승계를 제수할 정도의 종파였다면 쉽게 사라지기도 어렵다. 지금까지 소승종이 다른 명칭으로 변하였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밝히려는 노력이나 성과는 적었다. 따라서 소승종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다만 군소종파의 하나로 교종에 속하는 승계로 국가제도의 일부였다는 사실뿐이다.

소승종보다 후기인 공민왕 시기에 시흥종이라는 군소종파의 용어가 쓰였다. 군소종파에 대하여 가장 선명하게 명칭을 종합하여 열거한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종실록》에는 4대종파와 8개의 군소종파가 실려 있고 그 가운데 시흥종이 포함되어 있다. 모두 12개 종파가 같은 시기에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되는 셈이지만, 이를 11종파로 해석한 근거 없는 해석을 굳이 통설로 답습하고 있다.

시흥종은 소승종처럼 교종에 속하였으며 대승불교보다 먼저 한반도에 소승불교가 유행하였다는 최치원의 해석을 따른 용어로 짐작된다. 상왕인 태종의 불교 종파를 통합하려던 정책을 준수한 초기의 세종은 7종으로 정리한 종파를 다시 선교양종으로 더욱 단순화시켰다. 아무리 단순화시킨다 하더라도 다양한 교학의 전통이 후에도 적지 않게 나타나지만 이전부터 불교계는 이미 사상이 통합되는 경향이 선행하였다. 사상의 통합이란 부정적으로 보면 다양하게 발전할 요소를 상실하고 사상의 빈곤해짐을 의미한다. 다양성은 선의의 경쟁으로 통합하는 시기에만 일시적으로 위력이 나타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소승종의 기원은 최치원이 대승불교보다 먼저 동아시아에 도착하였다고 지적하였는데, 실제로 북전불교와 상반되는 상좌부의 남전불교를 가리킨다. 의천은 동아시아의 서북쪽의 사막화로 인하여 북전불교가 미약해지고 남전불교의 존재가 더욱 강화된 시기에 살면서 북전불교에 이상을 두고 교학불교의 완성을 이상으로 삼았던 불교사상가였다. 어찌 보면 시대의 대세에 역행하는 복고적 이상주의자였던 의천의 추종자는 후에 의외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4. 조계종에 접목된 지공선현의 남전불교

고려에서 남전불교의 요소는 조계종과 천태종에서 확인된다. 10세기 초 해로로 고려에 왔던 마후라와 시리바일라는 13세기 천태종의 고승비에 다시 등장한다. 이로 보면 오월의 법안종과 더불어 천태종의 남전불교의 영향을 보존한 요소도 있다. 조계종 지눌의 저술에는 영명연수의 강한 영향이 감지되지만 가장 직접적 관계는 지눌과 같은 사굴산문에 속하였던 나옹혜근에게 감화를 준 인도 출신의 원 순제의 국사였던 지공선현(指空禪賢)과 직접 연결된다.

지공의 행적이 실린 자료는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가장 생생한 자료는 민지가 남긴 《선요록》 서문이다. 《선요록》은 지공의 사상을 담은 선사상과 함께 그의 생애를 보여주는 가장 초기의 자료이다. 다음은 회암사에 세웠던 이색이 남긴 탑비가 자세하다. 탑비는 장문이고 음기를 갖춘 가장 포괄적인 자료이지만 1821년 파괴되었고 본래의 탁본을 판독하였다고 짐작되는 권상로의 《퇴경당전서》에 실린 자료가 본래의 비편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비문은 크게 비의 형식에서 갖추어야 할 여러 내용이 실려 있다. 제목과 찬자와 서자, 그리고 서두에는 지공의 말년 활동, 그리고 그의 행록이 중간 대부분을 차지하고, 다음의 생애와 다비와 유골이 고려로 이동한 사실이 실렸다. 끝에는 다시 총괄한 명문과 후면에는 비를 세우는 과정에 참여한 승속과 단월이 실려 있다.
지공은 나란다에서 북전불교의 계율과 교학을 탐구하고 스리랑카의 보명존자로부터 유파별전의 남전불교를 계승한 고승이었다. 비문에 축약된 그의 행록과 보물로 지정된 《무생계경》, 그리고 선사상을 집약한 《선요록》에는 그가 나란다 대학에서 계율과 경학, 그리고 불교에 대하여 공격하였던 96가지의 다른 사상을 극복하는 다양한 불교이론을 습득하였음이 확인된다.

그의 생애와 수학 과정에서 랑카의 정음암에서 계승한 보명존자의 선사상은 남전불교를 말한다. 행록이나 《선요록》에는 나란다의 스승 율현이 랑카의 보명존자를 찾아서 삼학에서 계율과 교학의 다음 단계로 선사상을 완성하여 득도하라는 부탁을 실현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한다면 한국의 불교사는 다시 쓰여야 한다.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의 불교에서 남전불교의 요소도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지공에 앞서서도 해로로 남전불교의 요소가 간헐적으로 전래되었다. 중앙아시아 사막의 확장으로 북전불교의 교류가 8세기 중반 이래 막히고 해로를 통해 남아시아와 교류가 활발해진 시대적 여건과 관련이 깊다. 이와 동시에 인도에서 신화종교를 힌두교로 재구성하고 그 영향에 의하여 불교의 기원지에서는 오히려 약화되어 공동화된 현상과도 관련이 크다.

이슬람의 확장은 남아시아에서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타격을 받았고 일한국의 성립과 함께 주춤하였다. 지공은 가톨릭 신자인 마르코 폴로보다 후에 그리고 이슬람교도인 이분 바투다보다 앞선 시기에 몽골제국으로 왔다. 지공은 북전불교에 바탕을 두었으나 랑카의 남전불교를 계승한 고승이었음이 확인된다.
지공이 보명존자로부터 득도한 선사상은 무심선이고 그의 선사상의 저술인 《선요록》에 핵심이 실려 있다. 무심선의 요지는 정교의 철저한 분리와 신도로부터 자발적 믿음이다. 북전불교는 보살사상을 내세워 대승을 표방하고 정치와 권력과 결합하는 속성이 강하였다. 순제는 라마교의 환희불을 숭배하고 쌍수법을 도입하였으나 지공은 이에 반대하였다. 고려에도 공민왕과 신돈이 유행시킨 쌍수법은 공민왕의 재위를 단축시켰다.

지공이 몽골제국의 황제와 황후, 그리고 재상에게 말한 쓴소리는 지공화상비문의 첫머리에 나오는 내용과 상통한다. 비문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었다.

순제의 황후와 황태자는 대사를 연화각에서 세상을 경영하는 방법을 물었다. 지공이 대답하기를 “불교의 세계는 성직자에게 따로 있습니다. 전념하여 천하를 다스리면 다행이겠습니다. 또한 다양한 행복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가 없어도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시주한 보물을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비문에 대화가 자세하게 실리기는 어렵지만 이색은 이를 요약해서 사실성을 높였다. 위에서 연화각은 도종의가 지은 《철경록》에 인용된 《영락대전》의 원궁실제작(元宫室製作)에 실렸던 내용이 가장 중요하다. 명 태조 문집에는 순제가 지공에게 자문하였다고 썼지만 비문에는 기황후와 태자가 자문하였다는 내용으로 차이가 있다. 지공은 주원장이 명을 선포하고 즉위하기 전에 입적하였고 지공의 비문은 명 태조가 즉위한 다음 11년 지나서 세웠다. 명 태조가 말년에 기억하여 지은 기행문보다 앞서고 태자까지 등장할 정도로 상황이 자세하므로 사실성이 크다.

명 태조가 기억한 지공의 사상과 비문에 불교와 정치의 분리와 황제는 통치에 충실해야 한다는 역할의 분담에 대한 지공의 사상도 비문과 상통한다. 지공이 황후와 태자가 시주한 보물을 사양한 사실도 일치한다. 명 태조에게 백성의 혈세로 만든 재정을 황제가 시주하는 선심이 불교의 취지에 배치된다고 말한 것은 지공의 사상이 통하는 내용이다. 결국 지공의 사상은 명 태조의 불교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음이 확인된다. 지공의 비문에는 이어서 다음 사실이 대화의 형식으로 실려 있다.

천력 이후 먹지 않고 말하지 않기를 10여 년이 지났다. 말이 나오면 때때로 “나는 천하의 주인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황후와 후비를 가리켜 “모두가 나의 시녀이다.”라고 말하였고,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까닭을 묻지 못하였다. 후에 그런 이야기가 황제의 귀에 들어갔으나 황제는 “그가 불법의 우두머리로서 자부심을 나타냈을 뿐이고 우리 가족에게 무슨 관련이 있겠는가?”라고 문제 삼지 않았다.

비문에 나타난 지공 화상의 황후와 후비에 대한 불손할 정도의 태도는 기철을 제거한 이후 고려에서 지공을 숭앙하는 자세가 어울려 증폭된 관점일 가능성이 있으나 명 태조의 문집에는 승상 삭사감(搠思監)이 선물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행운을 빌어주기를 바랐다는 사실이 실려 있다. 삭사감은 기황후의 오라비인 기철을 죽인 복수를 위하여 황후를 꼬드겨 황후의 조카를 내세우고 최유와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공민왕을 응징하려 출정하였다가 패하고 처벌된 인물이었다. 지공은 승상에게 선물을 가지고 와서 자신의 복을 바라는 자세는 백성을 착취하고 황제를 속이는 행위이므로 그만두라고 하였다. 시주를 받아 퇴락한 암자를 중창하라는 요청을 거절한 지공에게서 감화를 받은 황제와는 달리, 국왕에 의존하여 후원을 받으려는 원나라 승상의 모습은 북전불교에서 자주 보는 장면이다. 명 태조의 훌륭한 태도는 적국의 고승인 지공의 가르침에서 깊이 감명을 받았음이 재확인된다.

지공은 《명태조문집》에 원제국의 국사였다고 적혀 있다. 황제와 황후와 황태자, 그리고 승상이 자문을 구할 정도였고, 국사였으나 라마교와 달리 실권자와의 밀착을 경계하였음이 확실하다. 진종(晉宗)이 재위하였던 천력 연간에 수난의 시기가 있었지만 고려의 재원 거류민과 고승이 그를 보호하여 명예가 회복되고 만년에는 위상이 상승하였음이 비문에서 확인된다.

지공 사상의 특징은 국왕과 대신은 정치에, 불교는 불법에 각각 전념하여 서로 간섭하지 않고 서로의 위치에서 백성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정교의 분리였다. 백성은 신도로서 생업에 열중하여 세금을 비롯한 의무를 다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국왕은 국정에만 전념하고 신도가 자발적으로 불교에 시주하고 황제나 재상이 재정을 써서 시주할 필요가 없다는 남전불교의 교리에 충실하였다.

대승불교를 자처한 북전불교에서 소승불교로 폄하한 남전불교에 대한 평가는 동아시아의 불교사에서 보편적인 상식으로 통용되었다. 그리고 명 태조는 불교와 도교를 탄압한 황제로 간주되었다. 필자는 지공의 《선요록》과 《명태조문집》의 사상을 비교한 결과 명 태조가 지공의 사상을 기반으로 불교와 정치의 관계를 정립하였음을 확인하였다. 지공은 황제와 대신과 결탁하여 시주를 받아 불교를 유지하려는 북전불교의 한계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동아시아의 불교계는 일반적으로 대승불교의 계승을 강조하고 권력을 포함한 승속과 밀착한 역사성을 정통으로 삼고 높은 가치로 간주하였다. 북전불교에서는 지공과 명 태조의 불교사상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의 불교계는 지공에 관한 풍부한 기반을 보유하고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거나 정통에서 배제하려는 분위기가 강하다. 동아시아의 불교계는 부처의 근본사상보다 국가의 지원을 바라는 북전불교의 속성에 젖어 있다.

지공과 나옹으로 계승된 법맥을 보유하고도 이를 인정하기보다는 북전불교의 통설을 신봉하는 대한불교조계종의 종헌은 지공을 포용하기 어렵다. 지공을 계승한 나옹의 법통은 소수의 마녀로 취급되고 사라져야 할 대상이라 하겠다. 이러한 관점은 영향력이 높았던 종정의 저술인 《한국불교의 법맥》에 잘 나타나 있다.

맺음말

지공과 나옹으로 이어진 한국불교의 법맥은 세 가지 전통이 결합되었다. 하나는 조계산에서 활동한 육조혜능을 계승한 9세기 고려의 여러 산문에서 선종과 조계종이 혼용되었다. 보조지눌을 계승한 수선사의 산문은 천태종으로 흡수된 5산문을 제외한 구산문을 조사문으로 설정하였으나 실제는 사굴산, 가지산, 희양산문 등 4산문만 고려 후기 국사와 왕사를 배출하였다.

나옹혜근은 사굴산과 임제종 양기파의 평산처림, 그리고 남전불교의 지공화상의 세 갈래 범맥을 계승하였으나 남전불교의 법통을 이어온 지공의 계승을 철저히 강조하였다. 가지산문과 임제종 양기파를 계승한 태고보우는 지공과는 계승 관계가 없었다. 명의 임제종을 의식한 조선의 불교계에는 지공의 계승을 강조하기 어려운 분위기에서 태고보우의 법맥으로 연결시킨 불교의 법통이 조선 후기에 등장하였다.

남전불교의 요소를 강하게 계승하였던 나옹의 계승자는 불교사에서 점차 약화되고 근대 외국의 불교사에서 북전불교를 강조한 분위기에 휩쓸린 대한불교조계종에서 지공화상의 법맥을 인정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학문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소수의 의견이고 진실을 규명한 견해를 존중하는 특성이 있다. 소수의 지지를 받은 진리가 다수의 지지를 얻으면 종교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으므로 종교의 출발은 학문과 가까웠으나 기존 종교는 다수의 지지와 보수성이 강한 특징이 있다.

기존 종교의 하나인 불교는 소수의 진실을 밝힌 학문과 차별된다는 관점에서 접근도 가능하다. 또한 학문에서도 종교의 하수인으로 진실을 인정하기보다 다수의 타성에 편승하여 마녀의 사냥에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 사실과 다른 종교와 학문은 함께 발효를 촉진하여 새로운 시대의 밑거름으로 작용하는 순기능도 있다. 다수의 기존 종교에 의하여 소수의 진실은 질시당하여 사냥의 목표가 되었던 시대가 있었다.

기존 종교에 의한 이른바 마녀사냥은 한국불교사에서도 존재한다. 학문과 종교가 함께 진실을 외면하고 부패할 경우, 소수의 진리는 악마의 품성을 지닌 마녀로 지탄되지만 기존 종교의 성직자에 의하여 유린당한 진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수의 거짓에 의하여 소수의 진실이 짓밟히는 현상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진실을 말하는 소수는 마녀가 아니라 어두운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새벽을 준비하는 해돋이와 같다고 하겠다. ■

 

허흥식 /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경북대학교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역임. 주요 저서로 《고려불교사연구》 《고려에 남긴 휴휴암의 불빛-몽산덕이》 《고려의 동아시아 시문학-百家衣集》 《동아시아의 차와 남전불교》 등 다수. 두계학술상과 출판문화저작상 수상.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