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논단 60회기념 특별기획 : 한국불교 괜찮은가

열린논단 60회 기념 특별기획 : 한국불교, 정말 괜찮은가

한국불교 지성을 대표해온 계간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공동으로 주관해온 ‘열린논단’이 지난 2월로 60회를 맞았다. 2009년 2월 27일에 첫 모임을 시작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그동안 이 모임에서는 한국불교의 현실을 반성하고 발전적 대안을 모색하는 주제를 선정해 전문가 발제를 듣고 토론해왔다. 참가자들은 자유로운 의사개진과 토론을 통해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폭넓은 인문적 교양을 공유해왔다. 《불교평론》은 60회를 기념하여 2월, 3월, 4월 세 차례에 걸쳐 ‘한국불교, 정말 괜찮은가’를 주제로 ‘열린논단’을 개최했다. 여기서 발표된 내용을 특별기획으로 소개한다.

들어가는 말

나에게 주어진 질문은 ‘불교의 사회적 역할, 잘하고 있는가’이다. 이 질문은 한국불교의 실천과 참여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고 있는 질문 같다. 필자가 평소 이런 문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편집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3, 4년 전부터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입장이 좀 더 래디컬하게 변하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의 주장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나의 관점들을 말하고자 한다.

우선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발표의 배경을 먼저 얘기하고자 한다.

먼저 여태까지 우리가 불교를 비추어온 거울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럽의 근대불교학이 일본으로 수입되었고 우리는 근대불교학이 복원한 불교를 전통불교라고 착각해왔다. 한편 무엇을 비추어 보는가에 따라 사물의 모습은 굉장히 달라 보이는 것인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불교를 서양 종교 특히 기독교라는 거울에 비추어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불교의 역할, 불교의 본질을 서양적 관점 특히 기독교적 관점을 거울삼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종교의 ‘사회적 역할’ 이외에 어떤 다른 역할이 있는가?” 이에 대한 내 대답은 다음과 같다. 은둔적 종교가 아니라면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모든 제도적 종교는 사회적 종교다. 컬트화되거나 은둔적 종교를 제외한 제도적 종교 중에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는 종교는 없다. 한국 현대불교에서 성철 스님은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많이들 한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얘기하는가? 과연 성철 스님은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한국불교계에서 상식처럼 통용되는 얘기다. 용성, 만해 등은 사회적 실천을 한 분들이고 한암은 실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도법 스님은 사회적 실천을 하는 분, 성철은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고 구분할 때, 여기서 근본적으로 묻고 싶은 점은, 과연 ‘하지 않은’ 사회적 역할은 무엇일까? 성철 스님은 초대 조계종 종정이셨으니 그만한 사회적 역할 또한 없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의 김수환 추기경에 종종 비교하여 성철 스님은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러한 근거 없는 평가는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가 사회적 역할에 대해 무엇을 기대하고 있기에 성철 스님과 같은 분들은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일까? 그 근거는 무엇이며 그것은 정당한 근거인가? 어떤 면에서는 지금 불교학자, 활동가들이 바라보고 있는 방식에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고자 한다. 모든 종교는 제도적 종교이다.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나, 종교는 제도적인 것인데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는 종교는 과연 존재하는가? 그리고 참여불교의 반대말을 산중불교라고들 하는데, 그 산은 우리 사회에 속한 것이 아닌가? 마치 가정주부는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가 기대하는 사회적 역할이란 과연 어떤 일들인가?

이와 관련하여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Engaged Buddhism’의 번역어로서 ‘참여불교’라는 용어가 적절한가이다. (socially) Engaged Buddhism이란 용어는 틱낫한 스님의 조어(造語)이다. 여기서 engaged란 ‘참여’라기보다 ‘개입’을 뜻한다. ‘참여’라는 번역은 그렇게 적절한 번역어는 아니다. 모든 종교활동은 사회활동에 언제나 참여하고 있다. 여기서 틱낫한 스님이 말한 engaged buddhism의 ‘engaged’는 ‘참여’라기보다는 ‘개입’을 뜻한다. 참여보다는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가 어떠한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른가? 흔히 우리는 왜 당연히 개입/참여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용산 사태라든지, 제주 강정마을 사태라든지 등에 대해 불교의 개입/참여를 촉구한다. 그것이 민중불교이고 대중불교라 믿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어떻게’ 개입/참여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노사의 노 측만 편을 든다든지, 고통받는 자만의 편을 드는 것이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러한 사회문제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가르는 방식은 곤란하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회문제에 무조건 개입/참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노사 문제라든지, 정치의 문제라든지 등에서 하나의 입장을 취하여 종교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종교가 본래 해야 할 역할을 오히려 제한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권력의 편을 드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란 말은 아니다. 다만 어느 편을 드는 것이 과연 종교의 역할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는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개입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개입할 것인가는 대단히 어려운 문제라는 것이다.

1. ‘사회참여’에 대한 한국불교의 강박
     : 그 기원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성찰

불교의 사회참여, 사회적 역할에 대한 한국불교의 강박은 근대 이후의 문제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불교의 사회참여 여부는 문제로 삼을 수 없다. 사회적 역할이 완전히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참여가 배제된 경우와 참여를 하지 않은 경우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문제이다. 그러므로 사회참여에 대한 한국불교의 강박은 근대 이후의 것이며 그에 대한 근원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어떻게 하는 것인 ‘사회참여’인가?

전통불교적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우 무엇이 사회참여인가? 대부분은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의 두 가지로 논의된다.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사회참여이고 상구보리는 개인적 수행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부터 이러한 구도가 생겨났는지 모르겠다. 둘 다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혹자들은 상하, 좌우 등의 레토릭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 또한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다. 하화중생이 전제되지 않은 깨달음, 깨달음이 전제되지 않은 하화중생이 가능한 것인가? 다른 하나가 전제되지 않은 나머지는 불가능하며, 어떤 하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이 두 가지를 나누어 생각하고 마치 한 가지를 선택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하화중생만이 사회적 실천이라는 그릇된 구분과 오해는 사라져야 한다.

한편 흔히 생각하는 참여불교의 형태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는 것 같다.

우선 권력에 저항하는 형태의 사회적 참여가 그것이다. 민주화 운동 과정, 독립운동 과정 등에서 한국불교가 서구 전통에 기반한 기독교에 비해 역할들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며 그에 대한 이유는 분명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콤플렉스가 여전히 현재의 한국불교에도 전해오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아직도 권력에 저항하는 형태를 불교의 바람직한 사회적 역할로서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의 형태는 다른 시민단체보다도 불교가 이니셔티브(in-itiative)를 가졌던 환경 및 생태 문제와 같은 경우다.

세 번째의 형태로서 사회복지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주로 서양 종교의 사회복지 형태를 염두에 둔 것으로 대학, 병원, 도서관 등과 같은 복지시설에 관여하는 것을 또 다른 형태의 사회참여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불교계에서는 위에 언급한 세 가지 정도의 참여 형태만을 사회적 실천으로 보는 경향이 있으며 개인적 수행과 같은 것은 은둔불교요 산중불교의 비참여적 불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근거 없는 이분법적 시각에 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2) 종교의 사회적 참여는 왜 필요한가?

종교의 사회적 참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경우 주로 두 가지 관점에서 거론된다. 사회적 유용성과 사회적 가치의 실현 즉 정의 혹은 정법(正法)의 실현이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종교의 사회적 유용성이 과연 필요한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사실상 종교가 사회에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은 근대의 일이다. 종교의 사회적 유용성은 주로 기독교적 시각에서 비롯된 것인데, 유용함이라는 자질이 종교가 사회에서 존립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그 종교 자체에도 유익한 것인가? 종교가 사회에 있어 유용함을 증명하려 한 것은 근대 과학적 사고의 등장 이후의 일이다. 서구 기독교가 생존 전략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복지의 분야이다. 국가가 담당할 일을 종교가 대신한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역할을 보통 서구 기독교에서 우리가 배워온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통불교는 고려시대에도 국가와 함께 이러한 사회적 역할을 분담해온 것이 사실이다. 다만 500여 년 조선시대의 단절에 의해 그 전통을 이어오지 못한 것뿐이다. 기독교가 이러한 복지 분야를 선점한 것은 근대적 사고 체계 안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으로 존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 등장한 자구책일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역할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었던 장소는 오히려 동양이었다. 기독교는 의술이라든지 여성의 교육이라든지 근대적 문명을 들여와 동양의 ‘미개한 사회’를 진보시키며 이것이 종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 것처럼 포장했고, 이를 본 조선 불교인들이 이것이 종교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이해한 것이 사실이다. 종교의 사회적 유용성에 대한 강박증은 여전히 내려오고 있으며 이에 대한 회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편 종교의 가치실현 문제와 관련하여 필자는 무엇이, 어떻게 하는 것이 정법의 실현인가에 대해서는 늘 조심스럽고 고민이 된다. 그러나 사회참여에 있어서 대부분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곧바로 행동의 근거가 된다. 과연 이것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 공적 영역과 달리 신앙은 매우 개인적인 것이며 이념적인 것이다. 어떤 것도 개인적 신앙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낙태나 동성애 문제 등과 같은 사회문제에 종교적 신념을 갖고 접근할 때 그것은 위험한 일이 된다. 왜냐하면 개인적 신앙에 근거한 옳음이 유일한 옳음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개인의 종교적 신념은 자신만의 정법이기 때문이다. 환경 문제에 근본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경우도 그러하다. 통일 문제 또한 그러하다. 한 개인의 신념 특히 자신의 종교에 근거한 가치가 정의의 이름으로 실천될 때 그것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가를 지적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사회적 실천의 근거로서 종교적 가치의 실현을 들기에는 그 관계가 자명하지 않다고 판단된다. 그렇기에 종교가 사회문제에 참여하려 할 때 일정한 매뉴얼이 필요해진다. 즉 사회적 약속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다문화, 다종교가 섞인 사회 안에서 어떻게 공동선을 세울 것인가, 어떤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무엇을 위하여, 어느 범위까지 종교적 신념이 개입할 수 있는 것인가 등등에 관한 사회적 약속이 필요하게 된다.

한 예를 들겠다. 국가대표 축구선수인 박주영 선수의 골 세리머니에 대한 기사 댓글들을 보면 개인 신앙의 표현의 자유가 주로 문제가 된다. 신앙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 왜 잘못되었는가 하는 반박 또한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어느 범위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것이다. 피파(FIFA)는 골 세리머니로 종교적 표현을 금지하고 있다. 공적 영역에서 개인적 신앙의 공공연한 표현을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정당하다. 이것이 오늘날 기대하는 시민사회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표현의 자유를 막는 것이 아니다.

그 외에도 이명박 대통령의 예가 있다.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좋은 장로가 되는 것이 좋은 대통령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종교가 더 컸던 것이다. 그 자체는 나무랄 수 없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는 공직을 감안하면 수행원을 동행하여 참가한 장소의 위상 등을 고려하여야 한다. 구한말 황사영의 사례 또한 그러하다. 천주교에서 그를 시복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민족의 입장으로 보면 조국을 타국에 팔아넘기려 한 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개인적 신앙과 사회(의 이익)는 언제나 긴장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간과한 채 개인적 종교 신념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옳음을 쉽게 주장하곤 한다. 기독교에 있어서는 하나님 왕국의 건설이라는 긴박한 배경에서 이루어진 사회참여 정신을 지금 우리의 상황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제는 한 걸음 물러나서 다른 방식의 참여, 다른 가치의 참여를 논의해보아야 한다. 불교만의 배경과 맥락 또한 고려되어야 한다.

2. 불교의 ‘사회참여’
    : 사회적 역할에 관한 전사(前史)

1) 초기불교

불교가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화가 있다. 부처님이 태어나자마자 아시타 성인이 관상을 보고는 이 아이는 출가한다면 부처님이 될 것이고 출가하지 않는다면 전륜성왕이 된다고 예언했다. 이 예화에서 도출될 수 있는 질문은 어째서 부처님과 전륜성왕의 길이 양자택일의 문제이냐는 것이다. 기독교의 경우에는 하나님은 왕 중의 왕, 하늘과 땅 모두의 왕이다. 하늘의 왕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이 기독교의 목표이다. 그러나 아시타 성인의 예언이 시사하는 바는 그 두 가지가 양자택일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매우 인도적인 구분이다. 그 인도적 구분이 동아시아에 불교를 통해 전해지자 동아시아는 당황스러웠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요순(堯舜)으로 상징되는 성왕 즉 scholar king의 분리되지 않는, 분리되어서는 안 될 두 가지 역할을 나누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는 출가의 불교, 은둔의 불교라는 인식이 강했고 그렇기 때문에 사회참여가 모자랐다고 평가 내렸을 것이다.

그 이분화된 구조 속에서 부처는 사회를 떠난 적도 사회적 역할을 놓은 적이 없다. 전륜성왕이 실천하는 방식과 부처가 실천하는 방식이 달랐을 뿐이다. 출가라는 것은 일종의 수행 기간이며 복전의 기간이지 사회적 역할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깨달음만을 위하고 사회에 참여하지 않는 불교는 존재한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떠한 거울을 비추고 있기에 잘못된 재구성을 하고 있는 것일까?

2) 대승불교

대승불교 안에서는 이러한 전륜성왕과 깨달은 자의 간극이 좁아지고 하나의 역할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금광명경》 같은 경전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경전류는 동아시아에서 많이 유포되었다. 여기서는 전륜성왕과 부처의 역할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대승 보살도라는 개념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향이 역사적으로 실현된 적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불교적 이상향은 매우 추상적이며 관념적인 것이었다. 강력한 유교 질서가 사회제도를 구성하고, 왕이 곧 성인이어야 하는 동아시아에서는 전륜성왕이 아닌 깨달은 자의 역할은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그랬기 때문에 불교는 삶 이후의 세계로 그 역할에 제한되거나 사회적 역할에서 배제되곤 했다.

우리는 보통 당나라 시대가 불교의 황금시대라고 말하지만, 당나라 시대처럼 불교가 권력에 그토록 예속된 적이 없다. 현장, 규기 등의 쟁쟁한 인물을 거론할 수 있지만, 그 시대는 철저히 관료에 의해 이끌어진 시대였고 불교는 사회로부터 배제되거나, 어느 하나의 제한된 역할만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불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사회적 구조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불교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불교가 원래 출세간적이기에 사회참여적이 아니라고 쉽게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3) 한국불교: 근대 이전

고려시대 당시의 불교는 사회구조와 불교가 그렇게 분리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양조권을 갖는다든지, 승군을 조직한다든지 세속 즉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은 종교였다. 복지 문제 또한 불교가 주도해 나가고 있었으며 항마군과 같은 군대 조직까지 갖춘 권력과 유착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서는 역시나 역사적, 사회적 구조와 흐름의 영향으로 불교는 사회에서 극도로 배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를 본다면 한국불교는 깨달음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 상황에 따라 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든가 배제되든가가 결정되었다.
 
4) 근대불교

흔히 조선시대 임란과 관련된 호국승병의 활동을 불교의 사회참여의 한 예 혹은 형태로 언급하는 경우가 있다. 호국활동에 관한 조선불교의 이야기는 근대기 일본과 유착된 조선 승려들을 비판하는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의 승려는 부끄러움도 없는가? 서산, 사명이 일본과 싸웠던 호국의 정신을 잊었는가?’ 하는 비판을 통해 당시 조선불교와 일본불교의 유착관계를 경계하는 시선과 함께 승병의 임란참전을 나라를 위한 호국활동으로 바라본 것은 불교 바깥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서 비롯되었다. 이후 승군 활동을 사회적 참여의 예로써 불교계에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시대에서 시작된 것일 뿐이며, 이에 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불교는 조선시대에 사회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다가 근대를 맞으며 급작스럽게 사회로 끌려 나오게 되었다. 산중에서 갑자기 풀려난 불교는 인적, 경제적 자원도 없는 상황에서 기독교 등 서양 종교와 문화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을 급박하게 시작하였다. 당시의 불교계 잡지들을 살펴보면 조선불교는 일본불교를 굉장히 부러워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종파불교를 부러워한 것이 아니다. 그 당시에도 일본불교가 가진 강력한 종파성에 비해 조선불교는 간경, 염불, 선을 함께한다는 점을 자주 언급하며 불교의 다양한 측면을 수용하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다만 조선불교가 가장 급박하게 확보하고자 하였던 것은 종파의 설립과 전통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권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오늘날 일부 한국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용성 스님이 그토록 민족을 부르짖으며 일본 스님들과 서한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이상하다고 여기는데, 당시 조선 스님들은 일본 스님들에게 동료 의식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 조선의 불교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치권력의 압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한편 최남선의 글에서 잘 드러나듯, 일본에서 목격되는 불교는 과학적이고 문명적이기에 신문명에 걸맞은 불교의 형태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조선불교가 바라보는 일본불교는 첨단 불교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근대와 함께 수입된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서구에서 보이는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라 신문물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서구 근대에서 기독교는 과학과 배치되는 일종의 미신처럼 여겨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기독교는 오히려 여성교육, 서양의학 등 복지와 신문물을 상징하는 종교로 여겨졌다. 개신교가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들어올 당시 유교는 무너져 있었고 불교 또한 오랜 침체에서 제대로 깨어나지도 못한 상태였다. 당시 한반도는 일종의 ‘조직공백(organizational vacuum)’의 상태였다. 서구의 기독교가 한반도에 도입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공백 상태가 있어 가능했던 것이라고 본다.

한편 조선총독부는 서구를 의식하고 은근하게 기독교를 탄압하였기 때문에 반일 혹은 항일적 이미지를 쉽게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며 때로 민족담론의 발신지 역할 또한 가능하였다. 반면에 식민주의자인 일본의 종교가 불교였기 때문에 자칫 조선불교는 친일로 여겨지기 쉬운 입장에 있었다. 일본의 종교가 불교였다는 사실은 조선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고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종의 반사이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기독교 역사는 이렇게 독립운동과 결합되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는 오히려 한국에 전통의 무게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오늘날 서구에서 불교가 의외로 쉽게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과 같다.

 3. 결론
   : 종교의 사회적 역할, 불교의 사회적 참여에 대한 새로운 생각

몇 가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결론으로 삼고 또 오늘날 불교학계가 불교의 사회참여에 대해 자기고 있는 고정관념에 문제를 제기하고자 한다.

우선 종교의 사회참여 범위와 방식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를테면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운동에 참여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종교의 사회적 역할인가? 단지 그들과 함께하는 것뿐이라면 종교가 시민운동과 다른 점이 과연 무엇일까? 종교만이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역할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경우에 시민사회에 동참하지 않으면 무조건 비겁하고 사회적 역할을 하지 않는 종교라고 낙인찍힐 뿐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종교의 역할인가?

두 번째 질문은 시민사회의 공동선과 종교적 선은 합치될 수 있는가의 문제다. 요컨대 종교적 가치와 신앙적 신념, 공공선의 차이는 극복될 수 있는가? 이를테면 1980~90년대 미국 미주리 주에서 극렬하게 벌어졌던 기독교인들의 낙태 반대 운동과 같은 것이다. 당시 자신들의 종교적 신념과 가치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벌어졌던 방화, 테러 심지어 살인행위 등은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세 번째 질문은 모든 종교는 동일한 방식으로 참여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에 매우 잘 ‘가톨릭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불교 또한 그 방식을 벤치마킹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참여 방식은 어떤 것이 될 수 있을까? 달라이 라마가 그의 책, 《종교를 넘어(Beyond Religion)》에서 고백했듯, 아팠을 때 동료의 기도보다는 첨단 의학 시설이 더 위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말대로 우리는 종교를 가지고 도덕적 가치를 실현할 때 좀 더 고민해봐야 한다. 근대 이후 불교는 언제나 다른 종교가 사회참여하는 데 숟가락 하나 얹는 형태로 따라오기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불교만의 가치가 드러나는 참여 방식은 등장하지 않았다. 한 사회가 특정 종교적 가치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불교적 가치가 드러나는 참여 형태 또한 별개로 존립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는 좀 더 균형 잡힌 모습을 띨 것이다. 특정 행위, 특정 방식만을 참여 종교라고 생각하는 사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사회의 다양한 고통에 반응하기 위해서 요구되는 바이다.

기독교에서는 늘 개인적 영성과 사회적 정의를 대립적으로 설정하는데 과연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그 둘이 대립적 가치로 정의되는가? 불교에서는 이 둘이 굳이 이분되고 대립되는 가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상구보리와 하화중생은 둘이 아니다. 깨달음이 다만 종교적 체험으로만 머문다면 불교는 개인적 문제를 해결하는 종교라는 비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는 스스로 제도적 종교로서의 존립 근거를 없애는 일이며 연기와 무아를 핵심으로 삼는 불교의 세계관과도 맞지 않는 일이다. 불교에 있어서는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이분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불교의 사회참여를 얘기할 수 있는 단초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에 독특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만이 종교의 사회참여라고 여기는 것 자체가 근대적 문제의식이라 본다. 한국불교가 사회참여에 갖고 있는 강박증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현대의 한국 사회, 포스트모던의 시대에서는 이 프레임 자체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흥미로운 것은 늘 세속사회에 두 발 다 딛고 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려던 기독교는 새삼 영성이라는 이 땅의 문법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가치를 요구받고 있으며, 불교는 세속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구현해보지 못한 불교적 가치의 사회적 실현 이른바 대승 보살도의 진정한 실천을 요구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불교의 소극적 사회참여를 질타하는 질문, “불교의 사회적 참여, 잘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


 

조성택 / 고려대학교 철학과 교수. 고려대 영문과와 동국대 대학원(불교학 석사), 미국 버클리대 대학원(철학박사)을 졸업했다. 뉴욕주립대학교 비교종교학과 교수와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부원장, 불교평론 주간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깨달음의 사회화에 관련한 몇 가지 고찰〉 〈서구에서의 불교의 미래〉 등과 저서로 《불교와 불교학》이 있다. 불이상, 불교평론 ‘올해의 논문상’ 등 수상. 현재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장, 화쟁문화아카데미 대표.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