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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산속에서 만난 유교와 불교 / 이경순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산수유람 기록 검토
[61호] 2015년 03월 01일 (일) 이경순 glib14@korea.kr

1. 조선 후기 산수유람의 유행

조선시대 산수유람은 유가적 덕목의 함양과 문장력을 강화하는 방법의 하나로 행해졌다. 성리학에서는 산수를 천리(天理)를 체득하는 공부처로 여겨 산수에 대한 경험을 중시하였다. 조선시대 15세기 후반 김종직과 그 문하의 영남 사림에 의해 유람기가 저술되기 시작하였고 사화(士禍)를 거친 16세기 후반 이후로는 조식(曺植)과 같은 처사들에 의한 산수유람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조선 전·중기 산수유람은 지역의 지리·문화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그 가치를 천명하려는 사대부에 의해 주도되기 시작하였으며 ‘사족(士族)’으로서 정체성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송대(宋代) 주자(朱子)의 산수 은거와 유산(遊山) 행적의 소개가 큰 영향을 미쳤고 사대부의 유람이 따라야 할 전범으로서 역할을 했다. 16세기 이후 주자학에 대한 이해 심화와 사화의 시기에 대두된 처사들의 출처관은 산수 자연에 친연적인 삶의 형태를 형성시켰다. 이에 따라 산수유람이 사족의 문화 행위로서 보편화, 일상화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후 산수유람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하였다. 산수유람 기록이 17세기 중반 이후 급증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 시기에는 기행시문(紀行詩文)이 양산되고 진경산수화가 출현했으며, 18세기 후반부터는 기행가사, 금강산 민화 등이 민간에 유통되었다. 심지어 18세기 말 강세황(姜世晃)은 당시 산의 의미도 모르는 많은 이들이 유람에 나서면서 금강산을 유람하지 못한 사람은 부끄러워 사람 축에 끼이지 못할까 두려워한다고 개탄할 정도였다.

17세기 이후 산수유람의 급격한 유행은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호란 이후 조선 사족사회에서는 ‘오랑캐가 중원을 차지하여 도가 행해질 수 없는 난세’라는 현실 인식 속에 은사(隱士)를 추앙하는 풍조가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 산림(山林) 세력이 중앙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여 정계와 사상계를 이끌면서 은사적 출처관과 산수 자연을 벗 삼는 사대부의 문화 양태를 보편화시켰다. 17세기 이후 명말청초에 유행하던 실경(實景)을 중시한 문예가 소개되어 큰 영향을 미쳤고, 조선 산천의 실경을 묘사한 문예가 주류로 떠올랐다. 그러나 18세기에 들어서 점차 산림 처사의 위상과 가치가 퇴조하면서 새로운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산수는 은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문사들의 문예 주제로 여겨졌고 도학적 관심보다는 취향과 취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족층의 분열과 새로운 유람계층의 등장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18세기 후반 중인·서얼층, 양민, 승려, 여성 등이 유람에 참여하였고 모두가 선망하던 유람지인 금강산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조선 후기 유람지는 말할 것도 없이 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사대부들의 유산 기록은 산에서 이루어진 유불(儒佛)의 만남을 보여주면서 산중불교의 실상과 사회적 위치를 증언해준다. 또한 유불의 교유와 이해, 대립의 차원을 넘어 유람자들은 산이라는 공간에 대해 새로운 담론을 생성시켰다. 이러한 측면에 주목한다면 사대부들의 유람을 산이라는 공간이 문화적 명소(名所)가 되는 과정일 뿐 아니라, 사대부에 의한 산수의 전유와 장소화로 파악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몇몇 유람기록에 나타난 당시 불교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유람기는 유불의 만남이 가장 일상적으로 드러날 수 있는 자료이다. 이를 통해 당시 간행된 지지(地誌)나 불서(佛書)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생생한 산중불교의 모습을 확인해보도록 하겠다.  

2. 사대부 유람에 동원된 승려들

조선 후기 산수유람의 유행 속에 주목할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산중 사찰의 여행 거점화이다. 조선 후기 사대부들이 산을 여행하면서 사찰의 방문과 승려들과 접촉 빈도는 높아갔다. 그러나 접촉의 양상은 교유와 침탈의 양면적 모습을 띠었다.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불교 경전에 통달한 상층 승려들은 사대부들과 교유를 했지만, 대부분의 하층 승려들은 사족의 유람에 노동력으로 동원되었다.

조선시대 대다수의 유람기에는 사족 유람객을 맞는 것이 일상화된 사찰 모습이 드러나 있다. 사찰에 머물며 자는 곳과 음식을 제공받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었다. 유람자들은 사찰에 머물면서 숙식을 제공받을 뿐 아니라 장기간 여행에 필요한 식량까지 얻어갈 정도였다. 사찰을 찾는 유람객이 점증함에 따라 이로 인한 폐단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유람객의 증가로 사찰의 부담이 가중되고 산중 생활에 대한 침해가 빈번하게 일어났을 것은 짐작이 어렵지 않다. 유람 온 사족 접대를 위한 경제적 부담도 증대되었을 뿐 아니라 수행 환경과 신앙 활동에 대한 침해와 간섭 역시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또한 접대를 받는 이와 접대하는 이 사이에서 지각될 수밖에 없는 위계도 확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족 유람객들은 사찰을 산수유람의 거점으로 이용하였을 뿐 아니라 승려들을 유람을 위한 노동력으로 활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지로승(指路僧)의 경우이다. 지로승은 산길을 인도하고 명승을 설명하는 역할을 맡은 승려를 말한다. 지로승은 유람자들을 산중 곳곳의 명소로 안내하였다. 산길 안내는 금강산과 같은 볼거리가 많은 탐승지에서는 필수적이었다. 유람자들은 이들 승려에게서 길 안내를 받고 그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자신들이 목격한 곳의 지명과 유래 등을 유산기에 기록할 수 있었다. 1671년 회양 부사였던 임규(任奎)가 금강산에 오르려는 스물한 살의 김창협(金昌協)에게 “아무 땅이니 아무 산이니 하는 것들은 다만 승려들의 손가락 끝에 의지할 뿐이네. 그렇다면 비로봉을 올라갈 필요 없이 승려들의 손가락 끝만 보면 족하네.”라고 말했던 것은 지로승의 역할을 잘 설명해준다.

한편 사대부들은 승려들로 하여금 가마를 메게 하였다. 이렇게 동원된 승려들은 남여승, 담여승, 견여승 등으로 기록되었다. 승려가 메는 남여를 이용한 산행은 16세기부터 이루어졌다. 그전까지 여행자들은 도보나 나귀 혹은 말을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남여의 등장은 공공연히 승려들을 유산의 노동력으로 동원하였음을 의미했다. 당시 유람객들은 출발 시 대동한 나귀나 말을 이용하다가 사찰 입구에서 미리 준비된 남여를 이용하였다. 남여는 두 사람이 앞뒤로 어깨에 메게 되어 있어서 앞의 사람이 끌고 뒤의 사람이 밀며 따라가는 구조였는데, 실제로는 한 대당 몇 명이 동행하여 교대로 메게 하였다. 따라서 사찰의 인원이 다수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승려들을 동원한 남여의 이용은 그동안 유람자의 연령과 체력의 한계로 인해 제한되었던 이동 범위를 크게 넓혀 주었다. 실제로 17세기 이후에 남여는 산행에서 빈번하게 이용되었다. 오랜 기일이 소요되고 명승지가 산재한 금강산의 경우 남여의 이용은 빈번할 수밖에 없었다. 서쪽에서 금강산으로 들어온 유람객들은 장안사 입구에서부터 가마를 이용하였다. 내금강의 초입 격인 장안사는 본격적 입산 기점으로서, 대동한 말이나 나귀를 그곳에 머물게 하며 남여나 짚신, 지팡이를 가지고 길을 나섰다. 도보로 산을 오르지 않는 이상 장안사에서부터 승려들의 남여를 이용한 내금강 유람을 본격화했다. 내금강 여행을 마치고 외금강으로 가려면 고개를 넘어야 했다. 내수점이 그 고개였다. 내수점은 안문점으로도 불렀다. 이곳에서 타고 온 가마에서 내려 다시 새로운 가마를 이용하였다. 즉 승려들의 남여 운행 구역이 사찰별로 정해져 있어서 한쪽 편의 가마가 내외 금강산을 넘나들지 않았다. 내금강에서 남여는 장안사, 표훈사, 정양사 승려가 주로 맡고, 외금강에서는 유점사 승려가 주축이 되었다.

금강산에서 보이는 각 사찰의 남녀 역 분담은 다른 지역에서도 확인된다. 전라도 순천 조계산(曹溪山)의 경우 동쪽 사면과 서쪽 사면에 각각 송광사와 선암사라는 거찰을 끼고 있는데, 두 사찰 중간의 고개를 경계로 가마 운행이 분담되었다. 이렇게 유람객의 수가 늘고 남여 운행의 요구가 증가하자 산내 사찰들은 남여 운행의 범위를 설정하고 권역을 나누어 일을 조직적으로 분담했다. 또한 남여를 메는 것에도 승려들 사이에 숙련도에 따라 등급이 있었고, 상대의 체중이나 체격을 보고 체급에 맞춰 일을 분담하였다. 유람객을 감당하기 위한 승려들의 조직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승려들의 남여 운행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려들의 입장에서 유람객을 맞는 일은, 중앙 정치는 물론 지방 행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력 사족을 접대하고 교유를 맺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를 통해 승려들은 공물(貢物) 진상, 승군(僧軍) 징발의 피해뿐 아니라 각종 공사(公私)의 침탈도 막고 사격(寺格)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였다. 16세기 중반 지리산에 올랐던 조식(曺植)은 사찰에 머물던 중 목사(牧使)에게 부역을 줄여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써달라는 승려의 부탁을 받고 이를 들어주었다. 이뿐 아니라 사찰의 각종 기문(記文), 비문(碑文)을 작성하는 데 유람 시 인연을 맺은 사족 문인들의 글을 받아 해당 사찰 혹은 승려들이 속한 계파·문파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따라서 사족의 유람을 위한 승려들의 노동은, 가혹한 사적 침탈의 예이기도 하였지만, 승려들의 존립을 위한 자구책, 생존 전략의 하나로 이해할 수 있다.

3. 유람가들의 눈에 비친 불교

17세기 이후 사족의 산수유람 기록에서 눈에 띄는 특징 중 하나는 바로 먼 거리를 장기간 여행하는 경우가 증가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장기간의 여행이 전 시대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드문 현상이었음은 분명하다. 향리 인근의 산수나 외관의 부임지 근처 명승을 찾았던 전 시대에 비해, 17세기 이후에는 거주지로부터 먼 특정 산수에 대한 실견을 목적으로 한 여행이 늘어났고 그를 위해 긴 시간을 보내는 여행자들이 등장했다.

1) 17세기 산중 사찰 생활 보고서, 정시한의 〈산중일기〉

그중 대표적인 이가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이다. 그의 가문은 누대에 걸쳐 당상관(堂上官)을 배출한 명문가였지만 정시한 자신은 일생 동안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강원도 원주에 살았다. 그는 물론 어려서부터 성리학 수업을 닦았지만 본격적인 학자로서, 여행가로서 삶이 시작된 것은 부모상을 마친 50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젊은 시절 지방관으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금강산을 유람하기도 했지만 이후 유람의 행적이 나타난 것은 52세(1676)에 이르러서이다. 이때 정시한은 속리산을 유람했고 56세(1680)에는 백운산과 두타산을 유람했다. 이때까지의 유람은 기간이 오래지 않았다. 정시한이 본격적인 원유(遠遊)에 나선 것은 62세 이후의 일이다. 이때부터 3년 동안의 유람이 〈산중일기(山中日記)〉라는 일기 속에 기록되었다. 〈산중일기〉는 1686년에서 1688년에 걸친 3년 동안에 걸친 각지의 유람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 기간 내 유람은 모두 4차례에 이르렀으며 유람 일수는 총 600일에 가까이 이른다.  

내 나이 예순이 넘었고 양친을 영원히 이별하였다. 이전에 일삼았던 공부가 거친데 만약에 다시 너희에 얽혀서 일에 빠져버린다면 나의 일생을 저버리게 되는 것이니 책을 가지고 산에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는 것만 못하다. 너희는 나의 뜻을 막지 말라.

부모봉양과 조부의 신원, 가속(家屬)을 이끄는 의무에 얽매어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인생을 살지 못했던 정시한은 60세가 넘어서야 그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게 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꿈꾸던 산행을 시작한 정시한은 노구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도 정력적으로 산을 찾았다. 정시한에게 여행은 그야말로 자유와 은거의 실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생 동안 출사하지 않은 처사였지만 실상은 처사적 유유자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평생 가장으로서 생업을 챙기고 후손으로서, 사대부로서 일상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살아내야 했다. 그에게 여행은 그러한 번잡한 세사에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을 의미했다. 출사를 하지 않는다고 모두 은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었다. 친족과 향리에서 사대부의 삶은 수많은 의무와 책임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산중생활은 그로부터의 자유를 뜻했고 여행은 이후 생애에서 거의 일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사대부 유람 기록에 불교에 대한 침탈의 모습만 나타난 것은 아니라 교유의 측면도 분명히 존재했다. 산중 유람 기간 동안 유람자들은 불교에 대해 ‘교유’와 ‘침탈’의 양면적 태도를 동시에 보여주었다고 하는 편이 실상에 가까운데, 이것은 조선시대 승려 집단이 다양한 층위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즉 사대부와 교유가 가능했던 것은 상층 승려에 한정되었다. 그럼에도 정시한의 경우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의 〈산중일기〉에서 자신이 만난 거의 모든 승려들을 기록하려 하였다.

심지어 유람 중 방문한 사찰에서 자신이 가지고 온 양식을 내어 식사를 해결하려고 하였고, 사찰에서 제공받는 식사에 대해 반드시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식사 외에 승려들과 선물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아래는 정시한이 3일 동안 머문 금강산 표훈사를 떠나려 하자 승려들이 준 선물을 나열한 것이다.  

지장암에서 혜쌍이 생밤 약간을 갖고 왔으며 정양사의 종장 풍열이 와서 내게 시를 주고 갔다. 전주에서 온 쌍헌은 말린 생강 예닐곱 개를 놓고 갔다. 저녁식사 뒤 혜쌍이 돌아가면서 네 가지 물건을 주겠다고 해서 경복을 딸려 보냈는데, 그 밖에 잣도 약간 보내주었다. 조영도 역시 일승을 보내왔다.

이에 대해 정시한은 다음날 조영, 혜쌍 승려에게 부채 두 자루를 선물로 보내었다. 또한 10월 12일 오대산 동관음암에 올라가서 노승이 토굴에 머무는 것을 보고 쌀과 엿을 조금 나눠주기까지 하였다. 사찰의 식량 사정이 항상 여유 있을 리가 없었다. 정시한의 경우, 규모가 작은 암자에서는 아침 식사를 재식(齋食)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었고 암자에 식량이 떨어져 쌀 한 되로 세 사람이 나누어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편, 정시한은 1688년 팔공산에 석 달이나 머물렀는데 그동안의 일기에서 언급된 사암은 은해사, 운부사, 상용암, 고봉암, 중암, 사자암, 묘봉암, 동화사, 부도암, 염불암, 내원암, 수도사 이다. 이것으로 보아 지리지류나 기타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팔공산의 사암들이 17세기 후반 실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팔공산에 머물던 정시한에 의해 법명이 언급된 승려만 해도 거의 100명에 이른다. 정시한은 잠시 들리기만 한 객승의 이름도 나중에라도 확인하여 기록하였다.

그리고 근 3개월 동안 정시한이 기록한, 여타 지역에서 온 객승은 모두 25명인데 이들은 각각 평안도, 이천, 통천, 양구, 대둔산 등 전국 각지로부터 온 인물들이었다. 이들 중 염불암을 방문한 4명은 당시 명망이 높았던 승려 우징을 방문한 경우였는데 그에게 수계하기 위해 온 사람이거나, 혹은 우징의 스승인 혜원의 동문 제자들이었다. 또 산내 암자에서 이동하는 경우 산내의 연락사항과 물품을 전하기 위해, 또는 불가사 점안의식 같은 산중행사를 치루기 위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재를 지내기[設齋] 위해서였다. 특히 다른 곳에서 염불암에 재를 지내기 위해 온 경우는 4차례에 걸쳐 9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거의 모두가 동화사로부터 온 것이었다.

한편, 일기에서 진언(振言)으로 표기된 이는 당대 화엄학의 대가로 알려진 모운진언(慕雲震言, 1622~1703)으로 추정된다. 모운진언은 벽암각성(1575~1660)의 제자였으며 부휴계 화엄 강맥의 대표적 인물이다. 1688년 정시한이 방문했을 당시에도 운부사에 머물며 강석(講席)에 오르고 있었다. 진언의 팔공산 강학은 호남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부휴계의 활동이 팔공산 지역에도 미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가운데 당시 운부사에는 ‘학도백여인(學徒百餘人)’이란 기록이 있어 강원의 존재와 그 규모를 짐작하게 해 준다.

식후에 진언(振言) 종장이 법당에서 여러 학도들을 모아 놓고 경전을 강설하는 것을 보았다. 금고(金鼓)가 울리자 책상 앞에 앉아 말을 시작하는데 먼저 《치문》과 《서장》을 강설하고 다음에 《화엄경》과 《원각경》을 강설했다.……북쪽 지방의 종장(北方宗匠) 천우(天祐)는 화엄경을 강하러 올해 3월에 이곳에 왔다고 한다. 이야기를 나눠볼 만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진언 종장이 학인들을 모아 놓고 《치문》과 《서장》 《화엄경》과 《원각경》을 강설했다는 것이다. 강원의 이력과정이 현대 강원체제와 비슷하게 정비되는 것을 일반적으로 17세기 전반으로 보는데 사미과, 사집과, 사교과, 대교과가 그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된 《치문》 《서장》 《화엄경》 《원각경》은 각각 사미과, 사집과, 대교과, 사교과에 속한 과목에 해당한다. 다만 《치문》은 16세기부터 이미 간행되었지만 이력과정에 포함된 것은 18세기 이후로 보기도 한다. 위의 순서라면 하루의 수업에서 각 과의 한 과목씩 택하여 강의했다는 것으로 보이며, 《화엄경》과 《원각경》의 순서가 바뀐 점이나 《치문》이 강의된 점은 강원 이력과정이 지역적, 혹은 가풍상 조금씩 다르게 형성되었을 가능성도 보여준다. 또한 당대 화엄학의 대가인 모운진언이나 《화엄경》을 강설하기 위해 두 달 전 운부사로 초빙되었다는 천우종장의 존재를 볼 때 17세기 후반 이후 활발히 전개되던 화엄 강학의 일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5월 29일의 일기에서 정시한은 운부사 ‘학도백여인’ 대부분이 동냥(動鈴)차 마을로 내려갔다고 전해 듣고 있다. 또 6월 11일에는 염불암에서 아침 식사 후 승려 종혜가 보리를 탁발하러 나갔다고 하였다. 이 시기는 춘궁기를 이제 막 넘겨 보리가 수확되었을 시점이었을 것이다.

또한 흥미로운 기록은 승려들이 속가 가족의 제사를 사찰에서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징의 경우 자기 부친의 제사를 지냈고, 응열은 재를 주관하였는데 그 부친이 당중에 음식을 대접했다는 것을 보면 이 경우도 집안 제사였을 것이다. 한편, 추석 하루 전인 음력 8월 14일에는 암자의 대부분 승려가 마을로 내려갔고, 8월 15일 추석에는 암자에 남은 승려들이 입적한 선사들에 대한 재를 올렸다고 하였다. 다음날인 16일에는 밖에 나갔던 이들이 점차 돌아오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예들은 이들이 비록 승려들이지만 속가와의 인연을 끊지 않고 있었으며 부모의 제사를 모시고 심지어 추석에는 속가의 집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중반 이후 승가의 의례에서 《주자가례》의 영향으로 상례에 오복제(五服制)가 수용되었는데 여기에는 속가와 승가의 촌수와 그에 해당하는 상복이 규정되었다. 즉 승려들은 속가 친족과 승가 스승의 상은 물론 기제나 향사를 치러야 했다. 물론 그것은 성리학이 규정한 예법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정시한이 염불암에서 관찰한 것은, 조선 후기 불교의 17세기적 상황, 즉 유교적 예법이 불가에 영향을 미치고 수용되어 승가의 예법이 새롭게 정립되어 가던 시기의 모습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2) 18세기 초반 호남불교의 관찰기, 이하곤의 〈남유록〉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역시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까지 활약한 유명한 유람가로서 당시 불교에 대한 풍부한 기록을 남겼다. 이하곤은 김창협의 문도로서, 일세를 풍미한 문장가로서, 서화 수집가 겸 평론가로서, 산수유람을 즐긴 풍류가로서 당대 이름이 높았다. 그는 평생 동안 고향 인근의 호서지역을 비롯하여 광주(廣州) 일대, 부친의 임소였던 강화도 지역, 황해도 일대, 금강산, 호남지역 등지를 유람하고 이를 문예적으로 승화시켜 기행시와 산수유기를 남기는 데 주력하였다. 산수유기로는 일기체의 기문으로서 〈동유록(東遊錄)〉과 〈남유록(南遊錄)〉이 있다. 이 중 〈동유록〉은 미완성인 채 남아 있고 〈남유록〉은 완성된 형태를 띠고 있다. 〈남유록〉은 이하곤의 호남 여행을 기술한 것이다. 〈남유록〉은 1722년 10월 중순부터 12월 중순까지 약 65일의 기록이다. 호남지방에 대한 여행기록으로 이 같은 장기간의 산문 여행기는 당시까지 드문 것이었다.

이하곤은 호남 여행에서 27개 사암(寺庵)을 거치고 아홉 곳의 사암에서 숙식을 해결하였다. 이하곤은 자신의 경로 상에 있는 이름난 사암은 거의 돌아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하곤은 약관의 나이부터 불교에 관심을 두었음을 피력한 바 있었고 《능가경》 《대승기신론》 등 다양한 불교전적을 접했으며, 설암추붕(雪巖秋鵬) 등의 선사를 비롯한 몇몇 승려들과 교유하였던 인물이다.

이렇듯 불교와 친연성을 지닌 인물로서 〈남유록〉에는 호남의 사찰과 관련 유적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관련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이하곤의 기록은 18세기 전반 호남 불교계의 실태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예를 들어, 전주의 금산사에서는 “낭요는 무너지고 쓰러졌으며 깨진 기와며 썩어버린 석가래…… 말운의 폐해가 유가(儒家)에만 일맥(一脈)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사찰의 피폐상에 탄식한 반면, 장흥 보림사에서 “호남 승려들은 매우 부유하여 절이 천궁처럼 호화롭다”라고 하여 사찰들의 경제적 여건을 평하고 있다. 이하곤이 호남 사찰 중 거찰로 꼽은 것은 대둔사, 보림사, 도갑사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웅장한 사찰의 규모와 전각의 화려함에 대해 감탄하였다. 그중 조선 후기 호남불교를 대표하는 대둔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거주승이 매우 많으며 웅대하고 부유한 것이 남방에서 제일이다. 승려들이 서산의 필적과 금선가사, 벽옥발우 등 여러 법보를 보여주었다. 또한 적시원감도(寂時圓鑑圖)를 보여주었는데 대개 태극권자(太極圈子)의 하나이다. 필화가 달과 같이 원만하여 그 정력을 알 수 있다. 사명(四溟) 이후에 법사가 쇠미해져, 절에 비장해 둔 것이라 한다.  

이것은 피상적 서술로 보이기는 하지만 18세기 전반 대둔사의 상황에 관련해서 몇 가지 점을 간취할 수 있다. 즉 당시 대둔사의 사세가 남방 즉 호남 제일로 평가할 정도였음 알 수 있다. 또한 대둔사의 승려들이 이때 이미 자사의 권위와 관련하여 서산 의발의 보존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는 점이다. 17세기 중엽 묘향산에서 대둔사로 서산의 가사와 발우가 전수되었다는 후대의 기록도 이하곤의 이 언급으로 신빙할 수 있게 된다. 이후 이러한 서산대사 의발의 보장은 1788년 대둔사가 사액사우 건립을 발의하여 1789년 표충사(表忠祠)가 세워지는 데 근거가 된 것이었다. 즉 18세기 후반 이후 이러한 표충사 건립과 더불어 대둔사가 ‘종원(宗院)’을 표명하며 사세를 떨치게 되는데 이하곤이 대둔사를 방문한 18세기 전반 승려들이 이미 대둔사의 위세를 서산과 연결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대둔사에서 사명 이후 법사가 끊어졌다는 인식도 엿볼 수 있다. 사명은 당대에는 휴정 적전으로서 위상이 있었지만 사명파는 18세기 이후 뚜렷한 세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따라서 사명의 법사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이하곤의 판단은 타당하다. 하지만 휴정의 제자들은 4대 문파로 분기했고 그중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와 그의 제자들로 이어진 편양파가 휴정의 문파인 청허계 주류로서 17세기 후반 이후 불교계를 주도했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편양파는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의 제자들 문파인 소요파가 함께 대둔사를 주도하고 있었음은 이미 입증된 바 있다. 그런데 이하곤은 이러한 편양파와 소요파의 활동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그들의 존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서였을까? 아무튼 이하곤의 기록은 당시 대둔사의 면모를 흥미롭게 증언하고 있다.  

한편, 이하곤이 사찰을 방문하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사찰과 유물의 유래 등의 산중고사였다. 사찰에서 참관한 유물을 묘사하고 그에 대해 승려들에게 설명을 듣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식으로 서술하였다. 또한 천관산과 같은 산중사찰에서는 승경과 산중암자의 정취를 주로 서술하였다. 그런데 이하곤은 호남의 승려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하였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나주 쌍계사에서 이하곤은 자신들을 잘 맞아주지 않자 “거주하는 승려들이 완고함이 심하여 손님을 맞이할 의사가 없다”라며 비난을 하였다. 월출산의 용암사에서는 암주에 대해 불경의 뜻을 이해하고 있으며 성품이 순박하고 진실하다고 하였다. 이하곤이 호남 사찰에서 마주친 승려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들이 문자를 알거나, 불경의 뜻을 이해하여 이야기를 나눌 만한가, 또는 비범한 승려인가라는 것이었다. 승가의 특수한 조건, 승가가 처한 사회적 위상에 대한 고려는 찾아볼 수 없고 철저히 유람 중인 사대부의 시각에서 승려들을 평가하고 있었다.

또한 여러 불서를 읽고 고승들과도 교유했던 인물임에도, 이하곤은 불교사나 유적에 대해 승려들이 주장하는 전승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보였다. 예를 들어 도갑사에서 수미(守眉) 대사의 유물들을 살펴보고 수정합 속에 안장된 사리를 보게 되었는데 이하곤은 그것이 사리가 아니라 조개에서 나오는 진주라고 반박하며 승려들이 황탄한 설만을 믿는다고 탄식하였다. 더 나아가 불전의 웅장함을 화려함과 사치로 보며 이를 민력의 낭비로 보았다. 또한 신라가 불교에 경도되었던 것을 ‘괴망’으로 보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불가의 유적과 전승, 사찰 조성에 대한 태도는 다른 유학자들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하곤이 불교에 관한 이해는 이론적, 지식적 수준에 한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 유산기(遊山記)에 나타난 사찰의 변화 

사대부들이 남긴 유산기를 시대순으로 살펴본다면 사찰이 겪은 변화를 일별할 수 있다. 아래는 북한산성 축조 후 6년이 지난 시점인 1717년 북한산을 유람한 송상기(宋相琦)의 기록이다.  

5리쯤 가니 새로 축조한 북한산성 남문이 있었다. ……이어서 어영청 별관과 보국사를 두루 관람하였다. 보국사는 새로 창건한 절이기 때문에 하나도 볼만한 곳이 없다. 보광사가 그 남쪽에 있다고 하는데 역시 누추하다고 한다. 금위영 별관은 동문 안에 있는데 규모가 어영청 별관보다 작다. 동문에서 성벽을 따라 걸어가면 장대(동장대)에 도착한다. 매우 높은 곳에 있으므로 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백운대, 노적봉 등 여러 봉우리가 늘어선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 중흥사에 도착하니 벌써 저녁이 되었다. 경리청 별관과 창고는 백여 칸이 되는데 중흥사 전후좌우로 연이어 늘어서 있다. ……중흥사는 예부터 이름난 절이다. 성을 쌓고 창고를 만들 때 군졸들 발길에 지저분해진 곳이 여러 곳이 생겨서 그 청결한 맛이 줄어들었다. 저녁에는 경리청 별관에서 유숙했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노적사를 둘러보았다. 이 절도 새로 건축했는데 노적봉 아래에 있다. ……능선 하나를 넘어 산 밑으로 내려가는데 훈련도감 별관과 창고를 지나 능선을 넘어가니 북문이 그 뒤에 있었다.……국녕사와 원각사 두 절은 원효봉 아래에 있다. ……증봉 아래에는 부왕사를 새로 건축했다. 그 단청이 소나무, 회나무 숲을 은근히 비추고 있는 모습이 눈에 크게 뜨였다. 다시 산영루를 거쳐 행궁으로 가서 둘러본 후에는 처음 왔던 길을 따라 남문을 통해 성을 나서서 돌아왔다.

17세기까지 한성 사대부들의 고즈넉한 산행이 기록되던 북한산 유람기는 1711년 북한산성의 축조와 북한산을 지키기 위한 승영사찰의 조성 후 전혀 다른 내용이 등장한다. 즉 18세기 전반 북한산 유람에는 어영청별관, 금위영별관, 경리청별관 같은 관부(官府) 건물과 행궁(行宮)이 포함되고 유람기록에 보국사, 국녕사, 원각사와 같은 승영 사찰로 산성의 축조 후 새로 건립된 사찰이 기록에 올랐다. 또한 예전처럼 힘들게 봉우리에 오르지 않고 성벽을 따라 동장대(東將臺)까지만 가면 산중 형세와 산 아래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중흥사는 예부터 이름난 절이지만 “성을 쌓고 창고를 만들 때 군졸들 발길에 지저분해진 곳이 여러 곳이 생겨서 그 청결한 맛이 줄어들었다”고 기술될 만큼, 예전에 선사들이 머물던 수행사찰에서 그 성격이 변화되어 있었다. 1793년에 북한산을 유람한 이옥(李鈺)이 관찰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절에서 이틀을 묵는 동안 밤이면 문득 범패를 부르는 자와 《병학지남(兵學指南)》 및 〈대장청도도(大將淸道圖)〉를 외우는 자가 있었는데 등불이 꺼져 누구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인지 알지 못하였다. …… 허리에는 청금대(靑錦岱)를 늘어뜨려 엉치 부분에 이르고, 쟁그랑 쟁그랑 쇳소리를 내며 걷는 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승려로서 군직(軍職)에 있는 자였다. ……여러 절에는 불교경전이 전혀 없었는데 오직 승가사와 부왕사에만 약간 남아 있었는데, 비록 있기는 하지만 책장이 떨어져 나가고 꿰맨 실이 흩어져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은 〈결수문〉과 《은중경》 《법화경》 등의 대여섯 묶음뿐이다. 경전에 통한 승려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북한산의 승려들 중에는 병서를 외우고 군인의 행색을 한 이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한편 경전에 대한 강학(講學)이나 선수행과 같은 불가 본연의 수행 모습은 적극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렇게 18세기 이후 유람기에 등장한 불교의 모습은 17세기 전반까지 보이던 것과 달랐다. 사대부와 교유를 할 정도의 학식을 갖고 있는 승려들의 존재나 적막한 암자의 분위기가 아니라 군직을 담당한 승군과 승영사찰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4. 나가며

산은 행정적 지배력이 미치는 못하는 지역으로서 불교, 신선사상, 산악신앙, 무속 등 다양한 신앙이 공존하던 공간이었다. 사대부 유람자들은 산중여행에서 사찰을 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대부는 승려들을 유람에 종속된 노동력으로 삼았다. 조선 후기 산중으로 향한 유람자들은 사찰과 승려를 자신들의 유람을 위해 활용하면서 산에 대한 유교적 교화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유람자들은 산들의 봉우리의 이름들을 유가적 의미의 지명으로 바꾸거나, 주자(朱子)의 행적을 이어받아 경치 좋은 산수를 구곡(九曲)으로 설정했다. 또한 산중에 전승되던 불가의 전승들을 합리적 고증에 의해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것을 필자는 조선 후기 사족층의 산 공간에 대한 영역화, 유교화 과정으로 파악해왔다. 즉 사족 유람자들은 불교적 지명을 유교적으로 바꾸고 불교 전승을 앞선 세대 유학자들의 전승으로 대체하며, 산수 공간을 조선 중화의 성지로 만들려고 하였다. 이것은 유교 세력이 산 공간에 대한 문화적 지배력을 확장하고 산에 대해 새로운 의미와 유교적 표상을 이식하려는 노력이었다. 불교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산 공간에 대해 사족층 문인들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맥락을 삽입하고 자신들의 전승을 수립한 것이다. 이러한 추세는 조선 후기 선현들의 발자취를 좇아 감회를 남기고 추숭한 산수유람을 통해 더욱 확실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물론 사대부들의 유람에 이러한 침탈적, 배타적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정시한의 예에서 보듯이 승려들과 깊은 교유가 있었고, 산중 생활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또한 호란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지향한 은거에 대한 시대의식이 투영되어 있었다.

현재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다양한 사찰 순례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이 이제까지는 유불 간의 풍류나 교유라는 측면으로 피상적으로 해석되어 온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유람 기록들은 조선시대 유불의 사회적 위상, 유불 담론, 문화적 지배권 등에 대한 심도 있는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자료이다. 무엇보다 당시 산중 사찰의 일상과 승려들의 존재양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조선 후기 불교의 변화상과 역동성을 다채롭게 확인할 수 있는 보고이다. ■    

 

이경순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서강대학교 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선우도량 한국불교 근현대사연구회 연구간사 역임. 박사학위 논문은 〈17-18세기 사족의 유람과 산수공간 인식〉이며, 주요 논문으로 〈조선 후기 사족의 산수유람기에 나타난 승려동원과 불교전승 비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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