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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참 고맙다 / 류지호
[61호] 2015년 03월 01일 (일) 류지호 불광출판사 주간

빨간 돼지저금통을 털었다. 얼마 만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꽤 오랜만이다. 점점 현금을 쓰는 대신 카드 이용을 많이 하다 보니 동전 생길 일이 많지 않다. 동전이 자주 생기지 않으니 돼지 저금통에 손이 가는 횟수가 뜸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분명 1년은 넘은 듯한데 그렇게 많이 차지는 않았다.

내가 쓰다 남은 동전을 돼지저금통에 넣는 것은 꽤 오래된 습관이다. 그런데 어제 돼지저금통을 털면서 느낀 것은 옛날과 비교하면 10원짜리와 50원짜리 동전은 많지 않고 100원짜리와 500원짜리 동전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는 느낌이다. 하긴 물건값이나 계산 후 거스름돈을 받을 때 10원 단위는 보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어디에 쓸까 잠시 생각했다. 어디 기부를 할까 하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샀다. 카트에 옮겨놨지만, 미처 사지 못한 책이 10여 권 있었는데 돼지저금통에서 나온 금액과 얼추 비슷했다. 오랫동안 한 푼 두 푼 모은 것을 책 사는 것에 쓰는 것이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나 스스로를 보면 출판업에 종사하면서부터 그 이전보다는 책을 더 많이 사고 있다. 읽고 싶은 책을 주로 사지만 베스트셀러도 심심치 않게 산다. 대중들에게 호응받는 이유가 뭘까 궁금하기도 하고 시대 트렌드를 알아야 한다는 책무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한 동기는 책 만드는 사람도 책을 안 사 보면 누가 사 보겠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모든 출판사 구성원들이 그렇겠지만 좋은 책을 만들어서 잘 팔렸으면 싶은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출판인이라도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좋은 책을 사줘야 계속 좋은 책을 낼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차피 많은 책을 봐야 하는데 가능하면 사서 보자고 마음먹기도 했다.

내가 책에 빠졌던 시기는 중고등학교 때와 재수생 시절이었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는 도스토옙스키, 헤르만 헤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 세계문학전집과 김동인, 현진건, 이광수, 만해 등 한국문학전집 등 주로 소설, 시, 수필 작품을 읽었다. 《대망》 같은 대하 장편소설의 재미를 알았던 것도 김소월, 윤동주 등의 시에 마음을 푹 뺏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198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사회는 격변기였다. 《사상계》 《뿌리 깊은 나무》 《씨알의 소리》 같은 잡지를 찾아 청계천 헌책방을 순례하고, 함석헌 선생 등 재야인사들의 책을 즐겨봤다. 《불교성전》과 법정 스님의 여러 저서 등 불교 관련 서적을 접하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청준, 이병주, 이문열, 박경리 등의 소설을 읽기 시작하던 것도 이때였던 것 같다. 그러나 가난했던 이 시절 읽었던 책들의 대부분은 친구들이나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다만 청계천 등 헌책방에서 지난 잡지와 책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하고 기뻐했던 기억이 난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불교학생회 동아리에서의 학습 커리큘럼 책을 보기에도 바빴던 것 같다. 불교 책과 인문사회과학 서적 위주였다. 이 시기에는 책을 사기도 했지만 대개는 선배에게 얻어 보기도 하고 친구들과 돌려보거나, 필요한 부분만 복사해서 보기 일쑤였다. 친구 중에 크리슈나무르티 광팬이 있어 내가 갖고 있던 책과 바꿔본 기억도 새롭다.

졸업 후에도 독서 패턴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불교, 인문사회과학, 문학 등이 대부분이었는데,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는 우주의 신비를 눈뜨게 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분야로 시각을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조정래 선생의 《한강》 《아리랑》 《태백산맥》 연작 장편소설도 각 10권 총 30권의 대작이었는데 나오는 즉시 사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학교를 졸업하고 그래도 몇 년간은 책을 보려고 신경 썼는데 언제부턴가 책은 어쩌다 가끔 읽는 존재로 바뀌어 있었다. 나의 생활은 일 중심으로 책도 일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좁혀져 있었다. 다만 여행을 좋아해 세계 여러 나라를 소개하고 여행 중 경험담과 느낀 점을 사진과 함께 게재하는 여행서,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역사책들을 조금 가까이했을 뿐이다. 어쨌든 책과는 그리 가깝게 지내지 못하고 있던 2007년 예상치 못한 출판 잡지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책과 가깝게 지내면서 드는 생각은 ‘참 고맙다.’였다.

내 삶이 일 중심으로 재편되고 일과 관계된 많은 사람을 만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나의 생활 패턴과 습관은 척박해져 갔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환경도 바뀌는데 나는 일에 지치고 스스로의 학습과 변혁은 더뎠다. 깊이 있는 내용과 넓은 시야, 특히 현상의 본질을 꽤 뚫는 안목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책을 꼼꼼히 읽어야 서서히 넓어지고 깊어지는 것임을 새삼 느낀다. 텔레비전 뉴스와 인터넷과 SNS의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만으로는 사고의 깊이와 넓이를 확장하는 데 한계가 분명함을 절감한다. 그래서 책과 함께 생활해야 하는 요즘, 책이 ‘참 고맙다.’

책 만드는 일을 하면서 원고를 보고 출간 여부를 결정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원고가 책으로 출판할 가치가 있는가이다. 원고 내용도 좋고 지금까지 이와 비슷한 책이 발간된 적이 없다면 출간 가능성은 매우 높다. 두 번째는 독자(대중)의 호응 예측이다. 원고 내용이 좋더라도 판매가 부진할 것으로 예상되면 출판사는 출간 여부를 고민하게 된다. 물론 출판사의 판단이 늘 적확한 것은 아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한 원고들이 베스트셀러가 된 사례도 많다.

그런데 문제는 분명 좋은 원고이고 책으로 발간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데 못 나온다면 어떨까? 누구의 손해일까? 내 생각에는 우리 모두의 손해라고 본다. 좋은 책이 나오고 독자들이 그 책을 사랑할 때 좋은 책은 계속 발간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은 꼭 많이 팔려야만 그 책이 좋은 책은 아니다. 적게 팔려도 좋은 책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출판을 하는 입장에서 원고에 대한 안목과 기획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자 한다. 그리고 원고가 좋다는 판단이 든다면 비록 판매가 저조할 것으로 예상되어도 그 원고를 꼭 책으로 발간하고 싶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생계가 달려 있고 지속 가능한 출판을 위해서는 출판사 전체적으로 망하면서까지 낼 수는 없다. 몇 권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책을 내겠지만, 독자가 있어야 좋은 책을 계속 낼 수 있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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