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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앞에서 / 염창권
[61호] 2015년 03월 01일 (일) 염창권 광주교대 교수

봄이 오기 전에 하늘에는 바람꽃이 피었다. 바람꽃은 봄의 어지럼증처럼 부옇게 하늘을 덮었다. 이러한 현상은 수증기나 먼지가 대기에 섞이면서 생겨난 것이다. 계절이, 세월이 아득하게 지나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것이 바람꽃이다. 차가운 바람이 헐거운 옷을 뚫고 싸늘하게 물들여오는 봄의 길목에서 땅에서는 물이 오르는지 거뭇거뭇한 줄기에 싹눈이 돋는다. 20대의 젊은 날, 나의 하루하루는 아득하고 아득하였다. 존재도 거처도 없는 것 같았다. 희붐한 봄의 문턱에서 바라보는 아득한 풍경은 절간으로 들어가는 일주문이었다. 봄의 어지럼증 같은 바람꽃은 일주문을 빠져나와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부옇게 물든 그 바람꽃은 나에게 닿기도 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가족에게 붙들려 있는 형국이니 자유나 일탈은 불가한 것이었다. 농가부채로 고생하는 부모님과 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이 있었다. 그것이 나의 인연이었으므로 또한 소중한 것이었다.

문을 본다. 나는 문의 찬미자이다. 저 문으로 사람이 가축이 들짐승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땅 위를 기어가는 뭇 생명들, 그리고 날짐승까지도 드나들 수 있는 문은 평등하다.

보름 동안 인도를 여행한 적이 있다. 문의 감상자이자 예찬자인 나는 여러 형태의 문을 카메라로 찍고 다녔다. 때가 묻은 채 쓰레기더미를 뒤지며 거리를 배회하는 흰 소와 창문을 엿보는 침범자 원숭이, 힌두인과 모슬렘, 그리고 들것에 실린 비쩍 마른 시신들이 모두 문의 주인이었다. 문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이자 소통의 통로이다. 경계만 강화되어 있는 것은 방어적 장치이지 소통을 위한 문이라 할 수 없다.

절간에서 말하는 ‘산문(山門)’은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을 통칭하는데, 이 가운데 맨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이 일주문이다. 일주문이 없는 암자도 있으나 대가람의 경우에는 예외 없이 일주문을 지나 산사로 진입한다. 일주문은 속계(俗界)와 진계(眞界)의 경계를 표시하는 하나의 상징적 기호이자 열려 있는 문이다. 지붕이 있는 문! 지붕은 그 아래 거주 공간이 있다는 표상이다. 그러나 일주문은 외기둥의 건축물에 문(門)이라는 표식이 새겨져 있을 뿐, 머무를 곳은 없다. 나그네가 잠시 비를 그어갈 만한 곳이다. 이를 통해 몸으로 생(生)하는 것 자체가 한 순간의 지나침임을 나타낸다. 격벽이 없는 기호로서 문은 현생이 어디에도 머무를 곳이 없음을 뜻한다.

허공에 걸려 있는 문, 그 문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걸쳐 있다. 닫아걸어 둘 문짝을 갖지 않은 문이다. 우리는 이 문을 상상으로, 관념으로 가끔씩 드나든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누구든 이 문을 비켜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 문을 지나치는 것이 ‘나’인가? 나의 육신인가 아니면 영혼인가? 더구나 나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바슐라르는 물질적 상상력의 기본 요소로 물, 불, 공기, 흙의 4원소를 제시하고 이를 시적 상상력의 기원에 연결시킨 바 있다. 일찍이 불교에서는 인간의 육신을 비롯하여 우주의 모든 물질이 지수화풍(地水火風)의 이합(離合)이나 집산(集散)으로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즉 이들 네 가지의 원소적 기운이 허공[空]에서 이합집산 되는 것[色]을 인식[識]하는 과정이 물질적 상상력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우주적 원소로 이들의 4원소를 제시하면서, 사랑이 이들을 결합시키는 힘이고 싸움이 이들을 분해시키는 힘이라고 하였다. 엠페도클레스는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져 완전히 원소화되는 죽음을 실현하였는데, 이러한 정신적 원형을 불어로 앙페도클 콤플렉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원소적인 죽음은 석가의 다비식에서 그 선례를 찾아볼 수 있다.

무릇 변화에 기초한 움직이는 상상력은 공기의 파장을 타고 나비처럼 넘나든다. 시인의 상상력도 지수화풍의 물질적 원소들에 스며드는 무형의 인식적 심리적 과정인바, 현상계 속에서 바람결에 풀잎처럼 나부끼는 어떤 상태에 있다. 즉 상상력은 어떤 고정된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사물을 향해 달려가는 하나의 움직임이자 경향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질적 상상력은 자기 마음에 드는 원소가 모든 것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그 원소가 세계의 실체이기를 바란다.”고 바슐라르는 이야기한다. 즉, 꿈꾸는 인간은 사물들의 한가운데로, 물질 그 자체의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살고 싶은 것이다.

인도의 바라나시 화장터에서는 하루에도 수십 구의 시신이 들려와 값을 치른 후에 마른 장작더미에 올려졌는데, 한 구의 시신이 연소되기까지는 두 시간 남짓 걸렸다. 해가 지고 나서는 8명의 젊은 남자들이 향불을 들고 푸자(Pooja) 의식을 하였다. 이 제의의 목적은 윤회에서 벗어나 우주적 원소로 환원되는 것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한다.

겨울 들판에서 불타오르는 여름의 잔해들은 ‘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근원에 대한 관념을 불러일으킨다. 메마른 가지를 타오르는 불의 뜨거운 열기와 요동치는 공기의 파장을 느끼며 우리는 축축한 몸을 말린다. 이 ‘말린다’는 말에는 물의 냉기를 거두고 몸이 가진 흙의 견고한 성질을 회복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즉 불을 쬐는 것은 다는 아닐지라도 일정 부분 몸을 태우는 일과 같다. 이윽고 얼마지 않아 검은 흙만을 남긴 채, 여름날의 젊은 기억들은 사라지고 형체를 알 수도 없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공(空)한 상태일 뿐이다. 우주적 원소로 떠돌다가 누군가의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날 것이다.

봄이 되면 산문에 들어서는 여행객이나 등산객들의 수가 부쩍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들의 어깨 위를 떠도는 안개, 흙먼지, 하다못해 짐승의 울음소리까지도 삼라만상이 원소적으로 출렁거리면서 진계와 속계가 하나의 길로 이어질 것이다. 대합실을 드나드는 수많은 발자국들, 허공의 문을 들어서는 사람들은 육신의 문 앞에서 쪼그려 앉는다. 그러나 진계와 속계,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알아차린 사람들의 눈앞에는 스스로가 매달아둔 문이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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