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와서 살아야 했던 1966년. 단장(斷腸)의 애끓는 느낌은 절대로 느껴지지 않던 미아리고개 너머의 서라벌예술대학에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10년이면 확실하게 강산이 바뀔 때였으니, 전쟁이 휴전으로 멈춘 지 13년이 지나 뒤라 당연히 유행가의 미아리고개는 자취가 바뀌었을 터.

소설이나 시 등을 쓰려는 희망을 품은 청춘들의 집단이던 문예창작과엔 학생들이 백 명도 넘었다. 하지만 처음 보는 동기들끼리 출신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의 고향 ‘양양’을 아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열등감이 나를 짓이기곤 했는데 나를 구원한 것이 바로 ‘낙산사’였다. 혹시 낙산사를 아느냐고 주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물으면 대강 고개를 끄덕여줬다. 낙산사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적지가 아닌가!

돌아보면 낙산사는 내 성장의 발길이 고스란히 스민 곳이다. 유치원을 졸업하고 요즘엔 이름이 초등학교지만 당시엔 ‘국민학교’였던 데를 일곱 살에 들어간 뒤로 봄, 가을 소풍은 무턱대고 낙산사로 갔었다. 고추장에 김치만 싸는 도시락이 아니라 삶은 달걀도 한두 개 넣고, 김으로 둘둘 말아 만든 구수한 김밥이나 참기름에 깨소금을 비벼 뭉친 주먹밥이 든 도시락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양양 읍내에서 시오리 떨어진 그곳까지 걸어갔다. 지금도 눈에 선한 홍예문 근처에 닿으면 벌써 분위기가 달라졌다. 전혀 다른 세상에 들어온, 뭐랄까, 사뭇 경건한 느낌에 휩싸이곤 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떠들었고 걸음은 서로 뒤엉키듯 들떴어도 홍예문을 경계로 전혀 다른 ‘나’로 변화시키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모든 소리와 빛깔은 물론 공기도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콩 볶듯 떠들던 우리는 사천왕문 앞에서 갑자기 얼어붙거나 뒷걸음질 치거나 눈을 감고 고요해지곤 했다. 용을 허리에 두른 왕, 큰 칼과 삼지창을 든 왕, 비파를 든 왕도 큰 눈을 부릅뜨긴 마찬가지였다. 선생님은 사천왕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람은 나쁜 짓을 많이 해서 그런 거라고 딱 잘라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도 사천왕 못지않게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하여튼 동무의 등에 얼굴을 박거나 손을 잡고 눈을 감은 채 지나가거나 해서 사천왕문을 통과해야 우리는 마침내 관음보살이 계신 원통보전 뜰로 갈 수 있었다.

사천왕문을 통과하면 갑자기 극락에 온 듯, 따뜻하고 고즈넉하고 편안했던 곳. 스님들이 머물던 방은 양편으로 겸손하게 앉은 듯 보였고 이름을 모르던 나무들이 심어진 뜰은 언제나 소박한 느낌에 다정함이 넘실대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마침내 원통보전 마당에 들어서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다른 세상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한 번도 배워 본 적 없고 어디서 들어본 적도 없어서 알지도 못하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자비……는, 아마 어린 내가 원통보전 마당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게 되었었던 ‘어떤 감동’ 혹은 ‘적멸’의 본능적 감회가 아니었을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그 감회가 생물의 느낌으로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 중에 특히 겁 많은 나는 자주 오줌이 마려워 해우소로 가야 하는데 아, 그 깊은 변소의 아득함이란! 오줌 줄기는 한참을 내려가는 것 같았고 우리에겐 해우소가 큰 이야깃거리였다.

그러고 나면 거의 한낮이어서 우리는 공터(지금은 보타전과 지장전이 세워진 터)에서 단체로 점심을 먹었다. 그 후 장기자랑과 보물찾기 순서가 기다렸다. 의상대로 이어진 흙길을 걸어가는 건 그런 일정이 끝난 뒤였다. 의상대에선 단체로 사진을 찍었다. 상급학년이 되면 반드시 의상대에서 찍은 사진이 앨범에 실렸다.

의상대를 본 뒤에 우리는 홍련암으로 가야 했다. 무서워서 가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다. 지금과는 달리 예전의 비좁은 절벽 길을 따라 걸으면 자꾸만 몸이 낭떠러지로 기우는 것 같아 지레 오금이 저렸다. 손을 잡고 눈을 감고 바다의 반대편만 보면서 걷기도 했다. 홍련암은 무서운 곳이었다. 벼랑의 험한 바위에 세워진 집. 홍련암에 들어가면 마루에 손바닥만 한 구멍이 뚫려 있어서 구멍으로 들여다보면, 높이 치솟고 비좁게 마주한 바위 사이로 검푸른 바닷물이 출렁거리는 모습이며 바위를 때리는 파도소리가 확장되어 들려왔다. 그 바닷물 속에는 천 년 묵은 문어가 산다고 했다. 문어는 사람이 빠지면 굵고 긴 다리로 휘감아 바다 깊은 곳으로 데려가 잡아먹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절대로 그 좁은 구멍으로 내 몸이 빠져나갈 리 없건만 늘 조마조마했다.

이런 낙산사로 혼자 간 적이 있었다. 어지러운 성장기, 파란만장한 사춘기 시절, 죽을까 살까, 늘 변덕에 시달리던 때였다.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사천왕문을 지나 스님들이 계시는 방 앞으로 기웃거리며 들어갈 때였다. 장삼에 주황색인가 짙은 갈색인가, 그런 색깔의 가사를 걸친 아주 잘생긴 스님 한 분이 나를 바라보고 계셨다. 아마 무어라고 말을 했을지 몰랐다. 스님이 당신의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스님은 당신이 앉으신 뒤편에서 잣과 호두를 꺼내 주셨던 것 같았다. 집에 호두나무가 있어도 먹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그때 스님께서는 내 얼굴에 드러난 혼란과 갈피 잡지 못하는 욕망들을 보셨을지 몰랐다.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지도, 아니면 집이 싫다고…….

스님은 표정만으로 내 혼란을 어루만져 주셨던 것 같다. 내 성장기의 한 시절, 화인(火印)으로 남은 낙산사……는, 이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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