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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인생은 깨달음을 향해 걸어가는 여정 / 신중일
-애니메이션 속에 투영된 불교
[60호] 2014년 12월 01일 (월) 신중일 motp79@naver.com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고은 《순간의 꽃》 중에서

일반적으로 인생을 긴 여정에 비유한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라는 미지의 시공간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인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특별한 모험을 꿈꿔왔다. 역사 속에서 모험은 인간의 상상력을 통해 신화로도, 동화로도 구현됐다. 굳이 오토 랑크의 ‘영웅탄생의 신화’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인류 서사문학의 주인공들은 시련과 도전 끝에 자신을 성찰하고 종국에는 큰 보상을 얻는 것으로 귀결된다.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에서는 상상 속 모험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세상에 선보이고 있다. 애니메이션도 그중 하나이다. 낯선 세계 혹은 기이한 세계로의 탐험은 동화적 상상력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는 사람들에게 동경과 두려움이라는 양가감정을 선사하는 매력적인 탐구 영역이기 때문이다.
        
# 소녀여, ‘삼계화택’에서 벗어나라!

호기심이 솟구친 앨리스는 토끼의 뒤를 쫓아 들판을 가로질러 뛰기 시작했다. 다행히 토끼가 울타리 아래로 난 커다란 굴 안으로 쏙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앨리스는 바깥으로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따윈 아예 없이 토끼를 따라 무작정 굴로 뛰어들었다.

터널같이 길게 쭉 이어지던 토끼 굴이 어느 순간 느닷없이 아래로 푹 꺼졌다. 앨리스는 어떻게 멈출 틈도 없이 깊고 깊은 굴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 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도입부이다. 토끼 굴로 들어간 앨리스는 말 그대로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기 시작한다. ‘이상한 나라’에는 현실 세계와 같은 일정한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 토끼가 말을 하고 트럼프 카드가 병정이 되어 있다. 음식을 잘못 먹으면 앨리스 자신이 거인이 되기도 손톱만큼 작아지기도 한다.

현대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동양적 감수성으로 새롭게 재현한 또 다른 변주곡이다.
시작부터 비슷하다. 주인공 치히로의 가족들은 지방 도시로 이사한다. 하지만 치히로는 친구들과 헤어져 부아가 난 상황이다. 거기에 길까지 잘못 들어 이름 모를 산으로 들어간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멈춘 곳에는 터널을 보게 되고 그곳을 넘어가자 새로운 세상이 나온다. 낯선 세계에서 부모는 아무도 없는 가게의 음식을 먹고 돼지로 변해버리고 치히로만 홀로 남게 된다. 여기서부터 현실은 판타지로 변한다.

이야기는 치히로가 마녀 유바바가 운영하는 ‘유옥(油屋)’이라는 온천장에서 일하면서 본격화된다. 치히로는 유바바에게 자신의 이름을 빼앗기고 ‘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또한 수수께끼 미소년 하쿠의 도움을 받아 낯선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운다.

온천장 ‘유옥’은 기본적으로 일본의 신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이는 일본 고유 정화의식인 ‘시욕(施浴)’을 떠올리게 한다. 고온다습한 기후로 인해 일본인들은 오래전부터 목욕을 즐겼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씻어주는 것을 공덕을 쌓는 행위로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유옥은 신들이 쉬어가는 성소처럼 그려지지 않고 있다. 어느 동네 목욕탕에서든 볼 수 있는 남루한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게다가 신들에게 이용요금까지 받는다. 유옥은 성(聖)과 속(俗), 물과 불, 삶과 죽음, 더러움과 정화 등 모든 대칭적 경계 선상에 있다. 뜨거운 물을 끓이기 위해 끊임없이 불을 피워야 하는 까닭에 유옥은 ‘불타고 있는 집[火宅]’이라고 할 수 있다.

《법화경(法華經)》에서는 ‘화택’을 “삼계라는 불타는 집에서 동쪽으로 서쪽으로 뛰어다니면서 비록 큰 고통을 당하더라도 이를 근심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정의하고 있다. 삼계는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우비고뇌(憂悲苦惱)로 점철된 세계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윤회의 겁화(劫火)를 피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게다가 유옥은 치히로 같은 종업원들의 노동을 착취해 재화를 생산하는 곳이다. 그곳의 노동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본래 자신의 이름을 헌납해야 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이름도 없는 돼지가 된다.

그래서 ‘유옥’은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환락의 공간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유옥의 군상들은 대부분 탐·진·치 삼독심(三毒心)에 물들어 있다. 종업원들은 도마뱀 고기에 침을 흘리고, 사금 주위로 개미 떼처럼 모여든다. 유옥의 사장 격인 마녀 유바바는 종업원들의 노동을 착취해 모은 돈을 세기에 바쁘다. 삼계화택인 유옥이라는 공간을 묘사함으로써 미야자키 하야오는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후기 자본사회의 단면을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유옥의 콘티를 “일본 환락가의 정점, 화려하고 현란한 양식, 뒤범벅된 동아시아 스타일”이라고 메모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 속에서 유옥이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속에서는 불은 ‘파괴’를, 물은 ‘정화’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앞서 설명했다시피 유옥은 물과 불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게다가 주인공인 치히로가 화택인 유옥에서 맡은 임무는 목욕탕을 청소하고 약수를 얻어오는 일이다.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항상 치히로의 손에는 물이 묻어 있는 것이다. ‘오물신’을 ‘강의 신’으로 정화하는 역할을 한 것은 치히로였다. 정화라는 성스러운 임무의 대가로 치히로는 ‘영약’ 한 알을 얻는다.

무수히 사금을 쏟아내며 원하는 것을 주겠다는 괴물 ‘가오나시’에게 치히로는 “너는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없다”고 소신 있게 말한다.  

결국, 사방에서 불길이 타오르는 삼계화택에서 벗어나는 방편은 치히로의 행위처럼 스스로 공덕을 쌓아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이다.

작품에서 치히로가 비로소 진아(眞我) 찾기라는 여정의 궤도에 진입하는 것은 바다 위를 달리는 전차에 오르면서부터다. 삼계화택인 유옥과 마을 사이를 잇는 전차의 이름은 다름 아닌 ‘중도(中道)’다. 흥미로운 것은 중도라는 이름의 열차는 편도 열차이다. 마을로 갈 수는 있지만 유옥으로 돌아올 수는 없다. 그렇다면 회선이 불가능한데도 계속해서 중도라는 이름의 열차는 운영이 되고 있다. 작품 속에서 그 수많은 열차가 어떻게 조달되는지 구체적으로 묘사돼 있지 않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용수의 《중론》 귀경게를 떠올리게 된다.

不生亦不滅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不常亦不斷   항상 있지도 끊어지지도 않으며
不一亦不異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며
不來亦不出   오지도 가지도 않았다

‘팔불중도(八不中道)’라고도 알려진 이 게송은 《중론》의 근본이며 극단에 서 있는 모든 경계를 멸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중도라는 이름의 열차를 타고 치히로가 도착한 곳은 ‘늪의 밑바닥’이다. 따지자면, 화택을 벗어나자 진흙 구덩이에 빠진 꼴이다. 그럼에도 늪의 밑바닥 풍경은 화택인 유옥과 달리 매우 평화롭다. 늪의 밑바닥에 사는 유일한 인물인 유바바의 쌍둥이 언니 제니바는 긍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제니바는 자급자족하는 농경사회의 전형적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유옥이라는 공간이 잉여쾌락과 노동착취라는 양극화를 낳는 후기 산업사회의 병폐를 묘사한 것이라면, 늪의 밑바닥이라는 공간은 지족할 줄 알기에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목가적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유옥과 늪의 밑바닥이라는 대칭적 공간 역시 ‘불=파괴’ ‘물=정화’라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미지 공식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치히로가 제니바와 앉아 차담을 나누는 장면은 인상 깊다. 고민하는 치히로에게 제니바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 만난 것은 잊지 못하는 법이지. 다만 기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야.”

치히로는 돼지로 변한 부모님이 걱정된다면서 유옥으로 빨리 돌아가겠다고 말한다. 제니바의 집을 나서는 순간 유옥에서 만나 우정을 쌓은 하쿠가 백룡으로 변해서 날아와 있다. 치히로는 하쿠의 뿔을 잡고 등에 붙어 ‘유옥’으로 돌아간다. 그 과정에서 치히로는 어릴 적 기억을 되살린다. 구두를 줍다가 물에 빠져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기억이다. 치히로는 용으로 변한 하쿠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강의 이름은 코하쿠가와야.”

강의 이름을 들은 하쿠 용의 비늘이 일어서면서 낙하한다. 하쿠는 다시 인간으로 모습으로 변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작품에서 치히로와 하쿠의 비상 장면은 단연 ‘백미(白眉)’이다. 하강 끝에 다시 비상하는 과정에서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허물면서 서사 속의 모든 갈등이 해결되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특유의 속도감 있는 공중 활극이 아니라 매우 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어서 주제의식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용에서 떨어진 비늘들은 마치 벚꽃 잎처럼 하르르 흩날린다. 그리고 그 화사한 밤하늘을 두 주인공이 유영하듯이 날아오른다. 그 장면에서 마음을 옥죄는 굴레에서 벗어난 치히로와 하쿠의 심리를 읽을 수 있다.
화택인 유옥에 돌아왔지만 치히로와 하쿠는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행동한다. 유바바는 “12마리의 돼지 중 부모를 찾으라”고 말한다. 치히로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뗀다. “할머니, 여기에는 없어요.”

유바바가 재차 묻지만 치히로의 태도에는 흔들림이 없다. 돼지들은 유옥의 구성원이 변한 것이었고, 치히로의 진짜 부모는 이미 터널 입구에 가 있었던 것이다.

얼핏 보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열 살 소녀의 모험담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하지만 유념해서 보면 불교적 상징으로 충만한 성인을 위한 동화라고 볼 수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여정은 귀환을 전제로 한 출발인 까닭에 ‘인지적 순환’이라고 명명할 수 있다.

급진적 구성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인식이란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파악한 세계에 대한 인식일 뿐이다. H. 하이네의 ‘선한 사람은 세상에서 그의 천국을 경험하고, 악한 사람은 그의 지옥을 경험한다’는 주장이나 베네딕트 스피노자의 ‘우리는 도덕적이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고 행복하기 때문에 도덕적일 수 있다’는 주장이 ‘인지적 순환’을 대변하는 명제이다.

이러한 일원론적 사고는 불교사상의 바탕이기도 하다. 사바세계는 붓다가 교화해야 하는 경토(境土)를 일컫는다.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는 삼독의 번뇌를 겪어야 하고 오온으로 비롯되는 고통도 참아야 한다. 그 진흙 같은 세상에서 연꽃은 피어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치히로가 진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의 이행 과정을 겪었기 때문이 아니다.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마주 보고 넘어섰기 때문이다.

# ‘은하철도 999’를 탄 선재동자

차안이 곧 피안임을 일깨워주는 여정을 그린 불교적 서사의 모티브는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立法界品)〉에서 찾을 수 있다. 《화엄경》 〈입법계품〉은 선재 동자가 53선지식을 찾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입법계품〉은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서, 귀하고 천하고를 떠나서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입법계품〉에 등장하는 53선지식의 직업을 살펴보면 실로 다채롭다. 도량신, 주야신, 천(天) 등 신의 지위에 놓인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라문, 선인 비구, 비구니 등 수행자들도 있고 왕, 부자, 현자 등 사회 지도층들도 있다. 심지어 선지식에는 뱃사공, 매춘부 등 사회 밑바닥 계층들도 포함돼 있다.

이에 대해서 법정 스님은 《스승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아래와 같이 풀이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마하 가섭이나 사리불 또는 목건련 같은 뛰어난 제자들을 제쳐놓고, 한낱 이름 없는 뱃사공에 이교도, 창녀 같은 사람들을 선지식으로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유의해야 한다. 이는 결국 진리를 탐구하고 구현하는 구도의 길에서는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위를 물을 것 없이, 자신이 업(業)으로 하고 있는 그 길에 통달한 사람이면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선지식은 앉은 자리에서 그저 만나지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몸소 보리심을 발해 찾아 나설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선지식은 메아리와 같아서,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선재 동자가 53선지식을 만나 지혜를 구함으로써 보살이 되었듯이 수많은 인간군상을 만나 다양한 경험을 겪음으로써 소년에서 성인이 되는 여정을 그린 애니메이션이 있다. 30·40대라면 누구나 익숙한 “기차가 어둠을 헤치고 은하수를 건너면 우주 정거장엔 별빛이 쏟아지네.”라는 가사의 오프닝 곡을 지닌 〈은하철도 999〉다.

〈은하철도 999〉는 일본 만화가 마쓰모토 레이지의 원작을 1970년대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붐을 일으켰던 린타로가 감독한 작품이다. 일본에서는 1978년 9월부터 1981년 3월까지 2년 6개월간 총 1백13회 TV 시리즈로 방영됐고, 이후 〈안녕, 은하철도 999〉 〈은하철도 999-이터널 환타지〉 등이 극장판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작품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철이(일본 원작명, 호시노 테츠로)라는 소년과 메텔이라는 미모의 여인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안드로메다에 가는 우주여행 모험기이다.

매회 한 행성에 도착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종착지인 영원한 생명을 주는 별을 향해 가는 게 〈은하철도 999〉의 주된 플롯이다.

진리를 얻기 위해 선지식을 찾아가는 선재 동자와 여정을 답습이라도 하듯 철이는 기나긴 우주 여정을 통해 존재에 대한 성찰을 이뤄간다.

1백여 회에 달하는 TV 시리즈의 내용은 곳곳에 불교적 상상력으로 채워져 있다. 가장 눈에 띄는 주제의식은 무상(無常)이다. 작품의 한 대목을 일례로 들어보자.

“원래 이 우주에는 물체에 모양이 없는 것이 옳은지도 모른다. 사람이든 별이든 모양 그 자체는 모두 덧없는 것이다. 잠시 동안 가짜 탈을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거울을 보고 탄식할 필요가 전혀 없지 않은가!” 

— ‘모양이 없는 혹성 누르바’ 중에서

이는 ‘모든 것은 공하기 때문에 어떤 실체이든 하나로 고정된 것은 없다’는 중관사상과 합일하는 것이다.
고정불변한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주제는 〈은하철도 999〉의 전편에 걸쳐 관통한다. 철이는 우주의 별만큼이나 많고 다양한 인간군상들과 만나고 헤어지면서 ‘무상함’을 깨닫는 것이다.

메텔의 어머니 프로메슘과 아버지 닥터 반은 영원의 세계인 ‘기계 제국’을 건설해 인간의 불사 욕구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인간이 사라진 기계제국이 만들어지자 닥터 반은 깊은 회의에 빠지고, 우주 최고의 전사였던 파우스트(철이의 아버지)는 기계제국의 전사가 된다. 기계제국에 도착한 철이는 기계인간이 되기 직전 스스로 인간이기를 선택한다. 기계제국은 유한할 수밖에 없는 삶의 속성을 거부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은 또 다른 생명을 앗아가면서 유지될 수밖에 없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이라고 믿었던 기계인간도 인간의 영혼이 담긴 캡슐을 섭취하지 않으면 정지하고 마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기계 몸을 얻어 영원을 소유하려 했던 철이는 인간의 욕망이 빚어낸 현실 앞에 분노하고 스스로 레지스탕스가 돼서 기계제국과 싸워 나간다. 결국 철이는 자진해서 기계인간이 된 아버지 파우스트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고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정작 기계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그곳이 가지는 강한 에너지에 이끌려온 소리 없는 마녀 ‘사이렌’(블랙홀이라고 보면 된다. 애니메이션 안에서는 강한 에너지원을 찾아 이동하며 별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우주의 무덤으로 상징된다.)이다. 애초 기계인간이든 인간이든 영원한 존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반증해주는 대목이다.

작가 마쓰모토 레이지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해 왔다. 인간은 유한적이나 시간은 영원하다. 결국 원작자인 마쓰모토 레이지가 〈은하철도 999〉를 통해 관객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은 “유한적인 인간이 시간 속을 여행하며 얻을 것이 있다면 ‘지극히 인간적이라는 게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고 영원히 남기는 것”이라는 작품 내 대사처럼 〈은하철도 999〉는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은하의 별들이 그런 것처럼 제 존재를 다해 반짝거리면서 숨결을 전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철이가 여정의 종착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아버지에게서 자식으로, 자식에게서 그다음 자식으로 이어지는 계승적인 유대가 바로 영원으로 이어진다는 진리였다. 이를 깨닫게 되는 순간 철이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어른이 되었고, 아버지의 친구였던 캡틴 하록은 그를 전사로 인정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여행의 동반자 메텔도 철이를 ‘남자’로 인정하고 홀연히 떠나간다. 철이를 999호에 태워 보내며 메텔이 “젊은이에게만 보이는 시간의 흐름 속을 여행하는 여자야.”라고 되뇌는 말은 청춘의 환영인 메텔은 이제 남자가 되어버린 철이에게는 더 이상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도 된다.

메텔은 소년에게 사랑과 모성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 여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메텔은 철이에게 ‘청춘의 환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녀와의 작별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언젠가는 꼭 거쳐야 할 성장통이면서도 모든 인연도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메텔이 탄 777호와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999호에서 “메텔”을 부르짖다 이내 눈물을 거두는 철이를 비추면서 작품은 끝이 난다.

소년은 그렇게 어른이 됐다. 철이가 소년에서 성인이 되는 데 가장 역할을 한 것은 메텔일 것이다. 그런 까닭에 메텔은 선재 동자에게 지혜를 일깨워준 바시라 뱃사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소용돌이치는 곳과 물이 얕고 깊은 곳, 파도가 멀고 가까운 것, 물빛이 좋고 나쁜 것을 잘 안다. 해와 달과 별이 운행하는 도수와 밤과 낮과 새벽 그 시각에 따라 조수가 늦고 빠름을 잘 안다. 배의 강하고 연함과 기관의 빡빡하고 연함, 물의 많고 적음, 바람의 순행과 역행에 대해 잘 안다. 이와 같이 안전하고 위태로운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갈 만하면 가고 가기 어려우면 가지 않는다. 나는 이와 같은 지혜를 성취해 이롭게 한다.”

바사라 뱃사공이 지혜로 향하는 강물을 건너게 해줬다면, 메텔은 지혜로 향하는 은하수를 건너게 해줬던 것이다.

# 태평가를 부르며 돌아오는 ‘목동’

《화엄경》 〈입법계품〉과 함께 가장 많이 쓰이는 불교서사의 여정은 〈심우도(혹은 십우도)〉이다.
다소 이견이 있으나 〈십우도(十牛圖)〉는 확암(廓庵) 지원(志遠)이 지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확암은 소를 찾는 과정으로 열 단계로 나눴다. ‘십우도’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기인한다. 〈심우도(혹은 십우도)〉는 말 그대로 소를 찾는 이야기다. 단순한 듯하지만, 이 안에는 수행자의 구도 여정을 그대로 담고 있다.
〈십우도〉는 심우(尋牛)로 시작한다. 동자가 망과 고삐를 들고 소를 찾기 위해 산속을 헤매는 내용이다. 이는 발심한 수행자가 본래면목을 찾으려고 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다음 단계는 견적(見跡)으로 동자가 소 발자국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 열의를 갖고 용맹정진하다 보면 본성을 어렴풋이나마 보게 된다는 뜻이다.

세 번째 단계는 견우(見牛)로 동자가 멀리서 소를 발견하는 내용이다. 본성을 찾는 것이 눈앞에 다다랐음을 뜻한다.

네 번째 단계는 득우(得牛)로 동자가 소를 붙잡아서 막 고삐를 잡아매는 내용이다. 흔히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見性)의 상태를 일컫는다. 

다섯 번째 단계는 목우(牧牛)로 거친 소를 길들이는 내용이다. 삼독심을 없애는 보임(保任)의 단계다.

여섯 번째는 기우귀가(騎牛歸家)로 동자가 소를 타고 구멍 없는 피리를 불면서 고향으로 돌아오는 내용이다. 이제 소는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아도 동자의 뜻대로 나아가게 된다.

일곱 번째 단계는 망우존인(忘牛存人)으로 집에 돌아와 보니 애써 찾은 소는 온데간데없고 동자만 남아 있다는 내용이다. 이는 소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이므로 목적지인 고향집[本鄕]에 돌아왔으면 소를 잊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덟 번째 단계는 인우구망(人牛俱忘)으로 동자가 자신마저도 잊어버리는 내용이다. 소를 잊었듯 동자도 자신을 잊어야 비로소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

아홉 번째 단계는 반본환원(返本還源)으로 일원상의 자연에 동자가 하나가 된다는 내용이다.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고 나면 자연과 합일돼 어떤 행동을 해도 자연에 거슬리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마지막 단계는 입전수수(入廛垂手)로 동자가 큰 포대를 메고 저잣거리로 가는 내용이다. 여기서 큰 포대는 중생에게 베풀어줄 복덕을 담은 포대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은 중생제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불교적 가르침으로 이뤄진 심우도를 모티브로 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중국 상하이 스튜디오 소장을 역임한 테 웨이(特偉) 감독의 1963년 작 〈피리 부는 목동〉이 바로 그것. 〈피리 부는 목동〉은 19분가량의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일반적인 셀 제작기법을 배제한 수묵기법을 이용해 발표 당시 많은 호평을 받았다.
우리나라에는 1990년대 초반부터 다양한 영화제를 통해 국내 애니메이션 관객들에게 꾸준히 소개됐다. 동양화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기법으로 승화시킨 이 작품은 깊은 주제의식으로 관객들에게 ‘말 없는 깨달음’을 전한다.

서양 애니메이션의 대표적 기법인 ‘셀 애니메이션’이 객관적인 대상의 형상을 재현하지만, 중국 수묵 애니메이션은 내재된 정신과 작가의 주관적인 정감 표현을 중시한다.

이런 부분은 당대(唐代) 서화론가 장언원(張彦遠, 815∼879)이 주장한 “의재필선 화진의재(意在筆先 畵盡意在, 정신이 붓보다 먼저 있어야 하며, 그림은 다해도 정신은 남아 있어야 한다)”는 미학적 개념과 그 궤를 같이한다.

만화평론가 임화인 씨가 “동양화의 넉넉한 여백미와 수묵화의 번짐 효과, 그리고 대사를 절제하고 그 자리에 자연의 온갖 소리를 채워 넣었다”고 극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여백의 미와 번짐의 미학은 테 웨이 감독의 유연한 상상력과 더불어 나름의 주제의식을 담아내고 있다.

내용은 지극히 간단하다. 피리를 잘 부는 소년이 숲에 왔다가 잠든 사이에 소를 잃어버렸는데 결국에는 찾는다는 내용이다.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적 특성 때문인지 아니면 여백의 미를 최대화하기 위해서인지 〈피리 부는 목동〉은 소를 찾아 집에 돌아간다는 ‘기우귀가’의 장면까지만 묘사하고 있다.

목동이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부르는 장면은 선적(禪的)인 흥취를 불러일으킨다. 피리 소리에 모든 금수가 귀를 기울이고 학들이 모여 연주를 듣는다. 모든 것이 하나가 되고 일체 장애가 없어진 것 같은 순간 소가 목동을 찾아온다. 이는 장애가 없는 삼매(三昧)의 순간에 진여(眞如)를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소를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은 작품의 백미(白眉)이면서도 불교적 이미지를 담뿍 담고 있다. 소를 몰고 돌아오는 전원의 노을 진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목동의 피리 독주는 관객의 마음속 속진을 맑게 씻어주기에 충분하다. 그래서인지 경허 선사의 〈심우도〉가 떠오르기도 한다.

忽聞人語無鼻孔   문득 콧구멍이 없다는 말을 들으매
頓覺三千是我家   온 우주가 나 자신의 집임을 깨달았네
六月燕巖山下路   유월 연암산 아래 길
野人無事太平歌   하릴없는 들녘의 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

작품 속에서 하릴없는 들녘의 사람은 누구인가? 다름 아닌 경허 선사 자신이다. 온 우주가 나 자신의 집임을 깨달아 태평가를 부르는 경허 선사와 피리 부는 목동이 겹쳐 보이는 까닭은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無鼻孔] 자유인만이 소요(逍遙)의 한때를 누릴 수 있다’는 진리를 담보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파랑새는 집 처마에 있다

이상 살펴본 세 편의 애니메이션에는 공통점이 있다.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이라는 구성을 취하고 있고, 그 여정의 끝으로 일상으로의 회귀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그 여정 속에서 주인공들은 진여 찾기라는 과제를 수행한다는 사실이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와 〈은하철도 999〉의 철이의 여정은 영웅 탄생 신화 중에서도 영적인 영웅의 행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일반적인 영웅 탄생 신화의 행적은 ‘출생의 비밀-주인공의 고난-복수’라는 도식을 따르고 있다. 일례로 사르곤, 모세, 퀴루스,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 등을 들 수 있다. 반면 영적인 영웅의 행적은 ‘출발, 시련, 성취, 귀환’이라는 공식으로 귀결된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석가모니와 예수이다. 예수는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유혹을 받았고, 석가모니는 보리수 아래에서 마군(魔軍)으로부터 시험을 받았다. 그 시험 끝에 두 성인은 깨달음을 성취하고 스승으로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김원익은 《신화, 인간을 말하다》에서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말을 인용하면서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고대의 소년들은 성인식을 통해 어린 시절의 생각이나 습관을 버리고 어른이 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얻었다. 영웅이 심리적인 미성숙 상태를 극복하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독립적인 삶의 현장으로 나오려면 반드시 ‘죽음과 재생’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화 속 영웅이 모험을 하는 가장 본질적인 속성이다.

치히로와 철이의 여정은 죽음과 재생이라는 가장 궁극적인 체험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한 뒤 귀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번 글에서 제재로 삼은 세 편의 애니메이션은 진아 찾기라는 주제의식을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각기 다른 방법을 차용하고 있다. 〈피리 부는 목동〉은 심우도의 여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고, 〈은하철도 999〉는 인간군상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통해서 발현되고 있으며,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센과 치히로라는 가명과 실명의 대비를 통해서 강조되고 있다.

치히로가 유옥에 매이게 되는 것은 ‘치히로(千尋)’라는 자신의 이름을 빼앗기고 일종의 노예계약을 했기 때문이다. 대신 ‘센(千)’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자신의 이름을 빼앗기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이다. 유옥의 구성원들은 치히로를 ‘센’으로 부른다. 오직 조력자인 하쿠만이 센이 아닌 ‘치히로’라고 호명할 따름이다. 그래서 하쿠는 자신을 센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치히로에게 현실의 옷과 신발을 주면서 이렇게 충고한다.

“유바바는 상대방의 이름을 빼앗아 지배해. 평소에는 센으로 지내고 진짜 이름은 확실히 숨겨두도록 해. 나 역시 이름을 빼앗겼어. 이름을 빼앗기면 돌아갈 길을 알 수 없게 돼. 나는 어떻게 해도 기억이 나지 않아. 신기하지? 치히로의 이름만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요 등장인물은 분열돼 있다. 센은 치히로이면서 치히로가 아니다. 치히로 역시 센이면서 센이 아니다. 하쿠 역시 본명은 따로 있다. 마녀 유바바에게도 똑같이 생긴 쌍둥이 언니 제니바가 있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들은 ‘데칼코마니’와 같은 존재이다. 그래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거울 속에 비친 인물처럼 느껴진다. 치히로가 센이라는 가명을 버리고 본명을 얻는다는 것은 진아 찾기에 성공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치히로가 진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차안이 곧 피안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치히로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서 타자로 인식한 게 아니라 자신의 본래면목을 마주한 것이다.  

영명연수(永明延壽) 스님은 《종경록(宗鏡錄)》에서 진아 찾기란 거울 속의 모습을 마주하는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범부와 성인에 대해 ‘다름’을 말하고 ‘같음’을 말하는 것은 이 모두가 거울 속의 영상에 대해 분별하는 것과 같다. 이 하나의 거울만이 원만하게 온 세상을 두루 담나니 ‘거울’ 밖에 법이 없고, ‘그’와 ‘나’는 하나이니라.

‘그와 내가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 세 편의 애니메이션 주인공들이 발길을 향하는 곳은 본처(本處)이다. 흡사 모리스 마테를링크의 동화 《파랑새》의 주인공들이 집으로 돌아온 뒤에야 파랑새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누구나 보물을 갖고 있다. 다만 그 사실을 모를 뿐이다.

身得家中如意宝   그대 몸 속에 있는 여의주를 얻게 되면
世世生生用無窮   세세생생 써도 끝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니
雖然物物明明現   물건마다 서로 밝게 감흥하고 있으나
覓則元來卽沒蹤   찾아보면 원래 흔적조차 없네.
— 나옹 선사


신중일 / 문화평론가. 한림대학교 사학과 졸업. 〈주간불교〉와 불교TV 기자를 역임했다. 현재 〈현대불교〉에서 만화와 애니메이션 속에 담긴 불교적 해석을 찾아보는 ‘BUDDHA in COMIC&ANI’를 연재 중이다. 현재 현대불교신문사 취재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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