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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종교영화의 폭력적 수사학 / 권성훈
-김기덕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피에타〉
[60호] 2014년 12월 01일 (월) 권성훈 poemksh@naver.com

1. 종교와 영화

종교와 영화 사이에 폭력이 있다. 종교영화의 폭력적 이미지는 문학적 수사학과 결합하여 사회적·종교적 진실을 폭로한다. 전자의 경우 사회에서 일어나는 병폐와 모순을 종교적 진리를 통해 발견해 주기도 하고, 후자의 경우 종교적 왜곡된 문제와 은폐된 진실을 현실로 재현하여 재해석해 내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종교와 폭력의 관계는 구조적으로 종교가 폭력과 연관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불교의 폭력 문제는 내부에서 출발하는 고통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외부에 의한 고통 또한 깨닫고 보면 내면의 무지로 인해서 외부의 폭력을 내부로 귀결시키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의 폭력 문제는 인간이 죄로 인한 결과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죄로 인하여 받아야 할 폭력적인 고통이며 징벌임을 말하고 있다.

불교나 기독교에서 보여주는 폭력은 종교사를 통해 알 수 있다. 불교의 붓다, 기독교의 예수가 보여주는 고통을 사유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붓다는 왕국의 왕자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스스로 고통과 마주하고 고통을 극복함으로써 폭력적인 세계에서 고통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붓다는 인간의 고통을 해탈로써 멸하려고 한다. 고통은 외형상 존재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는 것으로, 인간의 탐착과 욕망을 제거하는 무아의 방식으로 해탈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지향했다. 예수는 고통의 원인을 죄로 보았다. 인류의 죄를 예수가 십자가의 고통으로 대역함으로 구원이라는 이상적 목표에 가 닿으려고 했다. 이것은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이라는 실천적 노력이 작동하였기에 가능했던바, 이 지구적 사건은 종교적 진리 추구를 초월하고 시공간을 넘어 현대 사회의 평화 기반이 되는 ‘윤리적 연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자기 비움과 자기 부정은 고통을 전제로 한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고통은 필요적으로 폭력으로부터 오고 이 고통의 원천인 폭력을 차단하고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수행이라는 점이다. 수행은 자기를 자각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지만 불교와 기독교는 다르게 반응하는 듯하다. 불교는 고통을 해결하는 주체는 인간 자신이지만 기독교는 인간을 피동적 주체로 산정하고 신의 답보에 따른다. 이렇게 불교와 기독교뿐만 아니라 내·외적인 폭력에 의한 고통은 어느 시대에서든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고 종교는 이러한 고통을 자신의 교리와 제의 차원에서 방어하려고 한다.

현대에 이르러 종교는 영화라는 장르와 결합되면서 종교적 상상력을 영상적 이미지와 문학적 상징으로 형상화하였다. 종교영화는 거시적 분류법으로 종교의 교리와 사상을 옹호하고 전파하여 포교하는 ‘신앙적 영화’와 종교적 교리와 사상을 모티브화하여 사회의 문제의식을 리얼리즘으로 환원하는 ‘종교적 영화’로 구분될 수 있다. 종교영화는 종교 전통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종교적 영화는 전통적 종교 의식을 이탈하여 사회의 문제의식을 종교적 상상력을 통해 보여준다. 종교적 영화는 영화가 가진 상상력을 통해 종교적 진리로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이 아닌 ‘영상 언어’을 통해 내러티브하게 반응한다. 이때 스크린은 허구를 표상하지만 시공간을 넘어 말할 수 없는 실재에 다가서게 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진리함수’라는 이론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라고 하면서 종교적 진리에 대해 침묵을 선언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 진리에 대한 부정의식을 통해 종교를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모든 가능한 과학적 물음이 해답을 내놓아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즉 종교적 진리는 언표 불가능한 것이며 신비스러운 영역에 있는바, 종교영화는 종교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영상적 관점에서 회화해 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종교영화는 “일상적 한계를 설정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상상 방식’이라는 점에서 문학적 친연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친연성으로 인해 빚어지는 종교와 영화의 관계 양상은 다양하다.” 영화는 상상력을 통해 종교를 재창작하면서 종교를 문학적 질료로 독해하여 인간 내면을 프리즘에 담고 있다.

이 글은 불교와 기독교 영화에 나타난 폭력성을 통해 시각적 무의식 속에 있는 내러티브, 장면, 구성 등에 집중하여 수사학적인 측면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과 〈피에타〉(2012)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김기덕 영화와 종교 그리고 폭력성

김기덕의 종교영화를 폭력적 관점에서 조명하는 것은 그동안 그는 “1996년 〈악어〉로 데뷔한 이래 최근작 〈피에타〉(2012)에 이르기까지 총 22편의 작품의 각본과 감독을 했다. 그의 작업은 인간 내면의 욕망에 대한 원초적 속성을 드러내는 데 주력해 왔으며, 작품 속에서 공통적으로 신화적 상상력을 통한 욕망성, 환상성, 제의성 등이 폭력성과 함께 등장한다. 이것은 단순한 가학성과 피학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회, 권력, 역사, 종교, 문화 등 개인의 폭력에서부터 세계의 폭력까지 다양하고도 복잡하게 나타나는 것이 김기덕 영화의 특징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영화에 대하여 “위악과 독선과 혼재된 자신의 영화에서 불분명한 자신의 정체성을 길러내기 위해 영화를 만들어 왔고 자신은 늘 종교적이었다. 1996년의 〈악어〉부터 종교영화를 만들었다.”에 볼 수 있듯이 그의 영화는 상당 부분 종교적 상상력이 주입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파란대문〉(1998년), 〈섬〉(2000), 〈수취인불명〉(2001년), 〈나쁜 남자〉(2002), 〈해안선〉(2002),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년), 〈사마리아〉(2004년), 〈활〉(2005년), 〈아리랑〉(2011년) 〈피에타〉(2012) 등 영화에서 보여주는 것은 특정 종교에 봉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교, 불교, 기독교 등의 다양한 종교적 상상력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그는 무교도 불교도 기독교도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영화를 통해 나타나는 종교는 진리의 자리를 현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자리에 집중하는 듯하다.

그러나 진리를 표상하는 종교 매체나 사상은 그의 스크린에서 폭력성, 가학성 등으로 이미지화된다. 이러한 전달방식은 세계 안에 벌어지는 인간의 세계를 고립된 장소로 옮겨 놓는다. 영화 〈섬〉(2000)처럼 여기서 살피고자 하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과 〈피에타〉(2012) 역시 섬과 같은 단절된 장소를 선택함으로써 근원적인 외로움의 상태를 고조시킨다. 세계로부터 격리된 상태에서 느끼는 고립은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 존재 자체의 단절과 세계와 절연을 의미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사계절에 담긴 인생의 사계를 표현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호수 위 암자 한 공간에서 천진한 주인공 동자승이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를 거쳐 장년기에 이르기까지의 인생을 그리고 있다. 또한 〈피에타〉 역시 청계천의 도시개발에 밀려서 청계천 세입자와 노동자들이 집터와 일터를 잃어버리고 극한상황으로 내몰린 황폐한 한 공간에서 주인공 강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두 장소 모두 김기덕이 세계를 축소시킨 공간이면서 이 장소는 비극적인 현실의 세계로 소외된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곳이다. 이렇게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적인 삶을 집중 조명한다. 오히려 복잡하고 다양한 현실 속에서 실재와 허구를 구별하기 위해 한 공간에 집약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아의 상실을 경험하고 있는 현실의 한계와 인간의 근원적 물음을 찾게 한다. 여기서 고통과 고뇌, 폭력과 갈등이라는 심리적 기제가 발휘되고 있다.

지라르는 《폭력과 성스러움》에서 “폭력과 관련된 제의적 희생이라는 현상에 대해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이 제의는 인간이나 동물 같은 희생물을 바쳐 신의 노여움을 풀고 신의 자비를 기대하는 제의로 나타난다. 희생물로 모든 가능한 희생물을 대치시키며 동물로 인간을 대치시키는 경제적 기능뿐만 아니라 좋은 폭력으로 나쁜 폭력을 막는 종교적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하퍼(Ralph Harper)는 지라르의 폭력 이론에 대해 7가지로 말하고 있다. “첫째, 인간이 대면해야 하는 중심 문제는 폭력이다. 둘째, 폭력은 어떤 사람을 모방하려는 경쟁 상대에서 생겨난다. 셋째, 오래전부터 인간은 폭력이 모방 욕망처럼 끝이 없다는 것을 보아왔다. 넷째, 희생양이 발견되어 바쳐지면 폭력은 일시적으로 끝이 난다. 다섯째, 이 희생양이 성화된다. 여섯째, 그것이 종교적 제의의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재판은 그것의 연장이며 폭력만이 폭력을 끝장낼 수 있다.”고 했다. 이렇게 지라르에 따르면 종교적 폭력은 제의적 희생이 필요적으로 발생한다. 희생물은 정화적 기능을 수행하며, 정화적 수행은 사회 안정을 목표로 한다. 사회가 유지되려면 희생물이 필요하며, 그 방법은 폭력을 폭력이 아닌 것처럼 속이는 과정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지라르의 설명이다.

3. 불교와 기독교의 영화적 상징과 폭력의 구조

1) 불교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동물을 통해 영화가 보여주는 모방성, 제의성, 희생성 등은 신화적 성격이 강하다. 인간, 자연, 우주가 신화적 모티브로 존재한다는 귀에린의 〈모티브 상징〉은 우주, 자연, 인간이 어떻게 세계에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중심으로 화소를 창조의 원리, 영원불멸의 원리, 영웅의 원리 등 세 가지 원리로 설명한다. “신화적인 창조의 원리는 모든 원형적 모티프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모든 창작의 모태가 된다. 영원불멸의 원리는 인간 스스로 자연의 영원한 순환의 광활하고 신비로운 리듬에 종속함으로써 일종의 영원성을 이룬다는 것이다.” 융은 심리주의 입장에서 신화를 보았다. 개인의 무의식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을 집단 무의식으로 확대하여 “개인의 무의식 밑에는 모든 인간 종족의 정신 유산으로 분배받은 원시적 집단 무의식이 깔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 집단 무의식을 통하여 투사되는 원형을 그림자(shadow),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 페르소나(persona)로 설명한다. 그림자는 무의식적 자아의 어두운 측면을 말하며, 바람직하지 못한 요소들뿐만 아니라 열등한 부분을 나타낸다. 그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전체 민족, 공동체 그리고 집단들도 그림자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의 내면에는 무의식적 정체성을 탐구하는 데 작용하며 의식의 영역에서 용인된 세력들과 반대되는 힘들을 만난다고 했다. 즉 “남성은 여성적인 측면 즉 아니마를 지니고 있으며, 여성은 남성적인 측면인 아니무스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페르소나는 개인이 공적으로 보이는 겉보기이다. 즉 연극배우가 특정한 인물이 되어 연출하는 가면을 일컫는다.” 공통적으로 이것은 사회적 인격으로 진실한 자기 자신과 다른 인격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인데, 이 영화에서 신화적 상상력을 통해 보여주는 신화적 모티브는 “역사나 문학, 종교, 풍습 등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모티프나 테마”로 나타나는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물고기, 개구리, 뱀 등의 페르소나가 그것이다.

이 영화의 도입 부분 봄은 ‘업’을 나타낸다. 동자승은 만물이 생성하는 봄에 물고기, 개구리, 뱀 등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동자승은 계곡에서 물고기, 개구리, 뱀의 몸에 실을 묶고 돌을 달아놓는다. 그것을 지켜보던 노스님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고서 그날 밤 동자승이 자고 있던 틈을 타서 동자승의 몸에 무거운 돌을 묶어 놓는다. 아침에 일어난 동자승에게 노스님은 어제 돌을 묶어 놓았던 물고기와 개구리, 뱀을 찾아서 풀어주라고 이야기한다. 다만 그것들 중 하나라도 죽었으면 넌 마음속에 지금 몸에 달고 있는 무거운 돌을 지고 살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다. 안타깝게도 개구리를 제외하고 물고기와 뱀은 죽어 있는 상태로 발견되고, 동자승은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악업의 순환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봄은 생명의 시작으로 상징적 의미가 있다. 봄은 생명과 등치되지만 악업을 쌓는 서사적 의미를 지닌다. 불교에서 살생을 금한다는 규율은 모든 생명체에 불성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동자승의 폭력성을 통해 환유적으로 보여주는 동물들은 미물을 하찮게 보지 말라는 생명 사상과 윤회 사상을 일깨워준다. 노스님이 동자승의 허리춤에 매단 돌은 물고기 입에 물리거나, 개구리, 뱀의 몸에 묶어 놓은 것과 동일하다. 이 돌은 동자승이 해악으로 인해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업보라는 사실을 환유한다. 따라서 봄에 등장하는 동물들은 상징물로서 상생에 대한 업을 수사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봄에 죽은 뱀에 이어서 여름의 첫 장면에서 등장하는 뱀의 교미는 사춘기에 있는 주인공의 성장과 더불어 욕정과 욕망을 상징한다. 사춘기의 주인공은 요양을 위해 절을 찾아온 소녀와 잠자리를 하고 불현듯 소녀를 따라서 절을 떠난다.

가을에 주인공이 외도하는 애인을 살해하고 경찰에 수배되어 노스님을 찾아왔을 때, 노스님은 주인공에게 고양이의 꼬리로 《반야심경》을 쓰게 한다. “고양이의 꼬리는 역설적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축생(畜生)을 의미한다. 축생은 삼악도의 하나로서 중생이 죄를 지어 죽은 뒤에 짐승의 몸이 되어 괴로움을 받는다는 뜻이다. 양육되는 짐승의 무리이므로 축생이라고 하며, 축생은 고통이 많고 즐거움이 적으며, 식욕과 음욕만 강하고 무지하여 부자·형제에 대한 윤리가 없으며 서로 싸우고 잡아먹으므로 늘 공포 속에 산다. 축생에 빠지지 않는 방법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지만 청년은 이미 죄를 지은 상태다. 즉 청년은 축생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노스님은 분노를 마음에서 지우기 위한 방법으로 짐승인 고양이 꼬리로 《반야심경》을 새기게 한다.”

주인공이 경찰에 연행된 후 노스님은 배 위에 나무를 쌓고 폐(閉) 자를 쓴 종이로 코와 눈과 귀를 막고 소신공양으로 열반에 든다. 이후 돌아온 청년은 노스님과 같이 자살을 시도한다. 청년은 눈, 코, 입에 폐(閉) 자를 쓴 종이를 막지만 귀를 막지는 않는다. 이것은 “노스님의 죽음은 폐(閉) 자를 쓴 종이로 코와 눈과 귀를 막음으로써 속세와의 완전한 단절을 통해 구원에 이르고 있지만, 청년은 귀를 막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속세에 대한 욕망과 집착이 그를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노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청년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노스님이 죽을 때 뱀이 물가를 가로지르며 빠져나가는데 이것은 노스님에게 있던 속세에 대한 욕망이 사라지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겨울에 청년을 기다리며 사라지지 않는 뱀은 인간 욕망에 대한 원죄의식을 순환적 상징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영화 전체의 미장센이 되고 있는 물은 암자를 둘러싸고 있는데, 이것은 속세와 절을 육지와 물로 단절하는 효과를 주고 있다. 물 밖이 온갖 삼라만상에 대한 욕망의 세계라면 물 안의 세계는 그 세계를 축약해서 보여주는 세계의 무대라는 점이다. 이에 물 밖과 물 안을 연결해주는 나룻배는 번뇌와 도피, 욕망과 해탈 사이를 이어주는 중개자 역할을 한다. 이렇게 물 위를 부유하는 나룻배는 육지와 물, 현실과 이상 세계에서 자유로우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동자승과 소녀의 배 안의 정사는 자유로운 욕망을 표현하는 기호로 읽게 하지만 그로 인한 욕망은 부유하는 세계의 삶으로 연결되고 살인이라는 악업을 짓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개구리, 물고기, 뱀, 고양이, 애인 등은 상징적 폭력의 미장센으로서 ‘제2의 상징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으로 이어지며 이러한 존재가 등장할 때마다 미장센은 영화의 몽타주를 그려 내면서 단절과 연속, 욕망성과 초월성을 보이기도 한다. 업보와 순환이라는 불교적 상상력과 동물의 신화적 상징을 통해 폭력에 대한 죄와 업의 의미를 재탐색하게 한다.
 
2) 기독교와 〈피에타〉

상징적 언어는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상징이라는 애매모호한 언어 체계로서 소통하려고 한다. 이 도구는 “현실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상징화하는 것으로 다른 어떤 것을 의미화를 위해 은유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은유 양상은 너머의 초월적인 것을 지시할 수 있게 해 준다. 담론이 말하는바 뒤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상징적 언어는 그것이 말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것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연합된 의식의 지각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이 언어는 발신자의 의식을 수신자에게 알리기 위한 하나의 신호로서 작용한다. 즉 상징적 언어를 통해 관객들에게 영화의 의미를 지각 가능하고 영화 인식을 재구성한다. 따라서 영화의 상징적 언어는 전략적으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일부 또는 전체의 신호로서 존재하며 ‘인공적 지표’의 ‘상징적 지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피에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처럼 서울 한복판 청계천이라는 고립된 장소에서 펼쳐진다. 청계천은 1970년대를 기점으로 기계산업과 전자산업의 요람이라고 할 만큼 산업사회를 일으킨 곳이다. 그러나 도시개발에 밀려서 청계천 세입자 노동자들은 집터와 일터를 잃어버리고 극한상황으로 내몰린 황폐한 장소로서 자본주의 노동자들에 대한 극단적인 박해 속에서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박해는 주로 위기의 시기에 나타나는 박해다. 위기의 시기는 정규적인 제도가 약화된다.” 영화의 청계천이라는 시공간에서 위기의 시기를 만들어 내고, 위기의 시기는 박해로 이어지는데, 이에 노동자들은 제도권 밖에서 절대적으로 폭력에 대응하지 못한다.

이러한 현실을 순환적 상징으로 해석한 N. 프라이는 《비평의 해부》에서 뮈토스(mythos)의 세계를 4개의 주된 양상으로 나눈다. 1년의 주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며 하루의 주기는 아침, 정오, 저녁, 밤. 물의 주기는 비, 샘, 강, 바다(눈) 그리고 삶의 주기는 탄생, 청년, 노년, 죽음으로 분류한다. 여기서 N. 프라이는 문학의 네 범주를 봄은 희극, 여름은 로맨스, 가을은 비극, 겨울은 아이러니로 구분하는데, 영화에서 말하는 ‘겨울 뮈토스’는 ‘아이러니’와 ‘풍자’로서 어둠, 해체, 혼돈, 패배, 몰락, 사람을 잡아먹는 귀신, 악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강도’는 청계천을 무대로 어둠, 해체, 혼돈의 공간에서 악마적인 페르소나를 가진 존재다. 강도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동자승같이 태어나면서 엄마에게 버림받은 고아로 30년 동안을 불행한 삶을 살았다. ‘강도’라는 이름의 기표에서 보여주듯 그가 하는 일은 악덕 사채업자의 하수인으로 청계천 철강 노동자들에게 사채를 대여해 주고, 고리로 10배를 추심하는 일을 한다. 그래서 채무자에게 ‘강도’는 폭행이나 협박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도둑, ‘강도(强盜)’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아들을 위해 강도에게 복수하려고 찾아온 여자의 이름은 장미선이다. 이 장미선은 장미(가시)와 선(깨달음)을 가진 중의적 기표다. 이를테면 강도에게 고통을 주지만 깨달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표로서 존재한다. 반면 여자의 죽은 아들 ‘상구’는, 죽었지만 구원을 얻는자(上援)이고, 그가 일하던 가게의 상호도 ‘영성정밀’로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 상징적인 언어 구조물로 되어 있다.

강도는 능력 없는 노동자들이 사채를 사용할 때, 생명보험에 가입하게 하고 못 갚으면 생명을 담보로 사지를 골절시키거나 절단하는, 비열하고도 불법적인 방법으로 살아간다. 그렇지만 강도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잘못을 자신을 버린 엄마의 잘못이라고 치부한다. 이것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유기적 폭력을 모방하는 것으로 객관적 폭력으로 나타나고, 주관적 폭력으로는 벽에 가슴이 풍만한 여자 사진을 붙여 놓고 출퇴근을 하면서 사진 속 여자의 목에 단도를 꽂는 폭력적 상징으로 치환된다.

영화 도입부, 그의 방 창밖의 건물 벽면에는 “할렐루야는 영원하리로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 철거 직전에 청계천에서 분노와 증오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풍자적인 신의 메시지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상징하는 아이러니한 방법이 되며 신의 음성을 빌려 구조적 폭력성을 행사한다. 이러한 “풍자는 일반적으로 어리석음과 악덕, 부조리한 사회현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문학 형태이다. 또한 풍자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있어야 하는 현실의 차이를 날카롭게 의식하는 데서 비롯되지만, 그 풍자는 결코 초월적인 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풍자는 인간의 삶의 세계에 관한 모든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가장 세속적인 문학 형태이며, 인간과 세계를 날카롭게 인식하는 사실주의적 정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피에타〉에서 아이러니와 풍자를 행사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간판, 표시판, 시계, 스티커 등의 기호가 미장센으로 쓰인다. 여기에 부착되어 있는 기호는 일상적 언어가 아니라 그 지시어인 상징적 언어가 된다. 강도가 3,000만 원(원금 300만 원)을 추심하려고 김형수 부부에게 갔을 때, 지불 능력이 없던 김형수는 사지가 절단 나는 것이 겁나 명자와 성관계를 한다. 그 이유는 ‘무섭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관계 장면에는 유리창 밖으로 ‘용접전문’이라는 간판이 보이며 형수의 팔을 절단하고 나오는 강도의 뒤에서도 ‘용접전문’이라는 글자가 창문을 비춘다. 처음의 ‘용접’은 남성과 여성의 성기에 대한 접합으로서 욕망을 지시하고, 팔이 절단된 후에는, 평생을 용접공으로 살아왔으나 골절된 자신의 팔은 접합하지 못한다는 현실적 비애를 풍자한다. 그것은 노모를 모시고 사는 효자 아들이 노모의 머리카락을 손질할 때, 가게 앞 ‘부품가공’ ‘기어제작’이라는 간판이 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기계를 정비하거나 가공하는 일을 하는 효자 아들의 효심을 상징한 기호다.

이러한 상징적 기호들은 기호 또는 숫자로 겹치거나, 합일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강도가 찾아올 것을 알고 자살한 젊은 노동자의 사무실에는 ‘정지된 시계’가 ‘거꾸로 매달려 9시 23분을 표시’하고 있다. 한창 일해야 할 젊은 나이와 돌아가야 할 시계 사이에서 측정 불가능한 죽음의 시간을 인식하게 한다. 망인은 자신의 유서 봉투에 “서울시 중구 주교동 /S/번지”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주교동’을 빠르게 발음하게 되면 ‘죽여동’ 즉 자신을 죽인 ‘청계천’을 의미하는 것이고, /S/은 자살(suicide) 영문 첫 표기로 볼 수 있다. 또한 양쪽 부호(//)는 양쪽으로 가로막힌 현실의 공간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여기까지 강도의 폭력은 지라르의 주장처럼 주체의 폭력으로서 보험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욕망의 대상들을 산출하면서 폭력을 모방 욕망처럼 끊임없이 행사한다.

그러나 강도가 출산을 앞둔 예비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부터 내적 변화의 조짐을 보인다. 강도가 방문한 공장 ‘성광정밀’은, 간판이 암시하듯 ‘성광(星光, 반짝이는 빛)’ 즉 생명의 탄생과 더불어 어머니에 대한 용서를 예고하기도 한다. 예비 아버지는 “나 병신 돼도 좋아. 나 때문에 태어나는데 책임을 져야지!” “팔 한 쪽에 삼천 이쪽도 해줘. 육천 받아서 삼천 나 줘.”라고 하자, 강도는 “부럽다.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하면서 예비 아버지의 양손을 절단 내는 것을 포기하고 자신 어머니의 심경을 이해하고 화해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강도는 16세에 청계천에 와서 50년 동안 일을 하였으나, 빚만 남은 노인 노동자가 허무하게 자살하는 광경을 지켜본 후 자기 일을 그만둘 것을 결심한다. 이 장면에서 계단에 앉아 있지만 강도의 발은 대출 스티커를 밟고 있다. 대출 스티커에는 ‘미소자금 010-✽✽✽✽-8118’이라고 인쇄되어 있다. 그동안 강도를 청계천에서 살게 한 것은 빈민 노동자들이 대여한 대출이다. 대출은 10배의 이자로 불어나 빚이 되고, 강도는 빚 대신 미리 가입한 보험금을 받기 위해 채무자인 노동자들을 가학하여 생명보험과 신체를 교환하는 일을 해 왔다. 강도에게 대출은 그의 삶을 지속적으로 보장해오면서 지속시킨 고리다. 그러나 ‘대출 스티커’ ‘미소자금 010-✽✽✽✽-8118’은 강도가 일을 그만둘 것을 예고하는 동시에 현실을 비판하는 상징적 언어로 작용한다. 즉 ‘침울한 표정’으로 ‘미소자금’이라는 대출 스티커를 발로 밟고 있는 강도를 통해 제도적 폭력을 고발하는데, 이때 현실을 아이러니하게 풍자한다. 전화번호 ‘8118’은 숫자 18을 통해 폭력적인 자본주의 모순에 욕설로써 폭력을 가한다. 이것은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폭력적 현실을 폭력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4. 결론

불교적 성격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세계의 폭력을 사계의 미장센으로 이식하여 주인공 ―동물―사물의 몽타주 기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봄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폭력을 일깨워주기 위해 노스님은 주인공이 동물에게 했던 폭력을 그대로 모방한다. 여름, 가을, 겨울로 시간이 진행되면서 폭력은 살인, 가학, 피가학성으로 순환되고 재생되면서 인간의 욕망처럼 폭력은 끝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폭력의 희생양으로 바쳐진 물고기, 개구리, 뱀 등은 지라르의 주장처럼 일시적으로 폭력이 끝이 나는 듯하지만 성화되지 못하고 업보 연장선에 순환되다. 그렇지만 주인공의 수행을 통한 악업을 단절하려는 노력이 영화 후반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허물을 벗고 주기적으로 재생하는 뱀처럼 인간의 번뇌와 고통을 경험하고 재생되는 주인공의 삶을 치환하여 보여줄 뿐이다. 인간이 저지른 악업의 업보 허물을 벗기 위해서는 지난한 자기 성찰과 고뇌가 있어야 함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주인공이 수행을 통해 자기 구원에 성공하는 듯하지만, 주인공이 버려진 것처럼 보라색 머플러 여인이 남기고 간 아이를 통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듯 억압과 순환적 폭력이 반복되면서 악업으로 인한 악순환의 고리는 수사학적으로 사계의 상징성을 통해 해탈하지 못하고 완전하게 단절될 수 없다는 사실을 성찰하게 한다.

기독교적 성격의 영화 〈피에타〉는 상징적 언어로서 기호로 영화에서 현실을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상징적 언어로 작용한다. 기호를 통해 구조적 폭력성이 드러나며, 이때 현실의 폭력을 아이러니하게 풍자한다. 그것은 폭력적인 자본주의 모순에 대하여 기호적 욕설로써 폭력을 행사한다. 즉 상징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이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써 폭력적 현실을 폭력적으로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비탄’ ‘슬픔’이라는 의미다. 성베드로 성당에 있는 미켈란젤로 성모마리아 조각상 ‘피에타’는 ‘자비를 베푸소서’이며, 마리아는 슬픔에 가득 찬 표정으로 죽은 예수를 안고 속죄와 구원을 구하고 있다. 영화 제목과 포스터의 〈피에타〉 역시 조각상 ‘피에타’를 모방하고 있다. 여자가 자식을 죽게 한, 죽은 남자를 안고 비통하게 서 있는 장면을 통해 죄 없는 예수가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매고 인류의 죄를 지고 갔듯이 반대로 죄 많은 강도가 트럭 바퀴 밑에 자신의 몸을 묶고 죽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죄를 속죄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기호적 상징성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종교와 영화가 결합한 종교영화는 수사적 코드로서 폭력성을 보인다. 여기서 불교와 기독교의 교리와 사상은 영화가 의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상징과 은유를 통해 기능한다. 불교와 기독교는 공통적으로 상징적 폭력성이 드러나지만, 불교는 순환적 폭력으로, 기독교는 구조적 폭력으로 폭력적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폭력적 현실을 각기 다른 종교적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

 

권성훈 / 문학평론가. 한신대학교 종교학과, 경기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박사).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박사후 과정 수료. 시집 《유씨 목공소》 외 2권과 저서 《시치료의 이론과 실제》 등이 있다. 시치료 논문으로 〈트라우마 극복으로서의 치유적 글쓰기 연구〉 〈한국 선시에 나타난 치유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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