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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앞에서 종교를 다시 생각한다* / 오강남
-기독교, 불교, 영성을 중심으로
[60호] 2014년 12월 01일 (월) 오강남 soft103@hotmail.com

* * 이 글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한 ‘열린논단(2014년 10월 23일)’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들어가면서

《불교평론》 ‘열린논단’에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5년 전쯤 《도마복음》과 불교에 관해 이야기하라고 해서 왔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은 세월호 사건 앞에서 기독교와 불교가 각각 어떻게 반성해야 하고, 또 함께 무엇을 해야 할까 하는 문제로 몇 가지 이야기하라는 부탁을 받고 나서게 되었습니다. 물론 제가 하는 말이 기독교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불교인으로서 하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기독교와 불교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면서도 한 발짝 떨어져 서 있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몇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편리를 위해 제 이야기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기독교와 불교가 이런 일을 계기로 현 한국사회에서 어떤 일을 해야 마땅한가 생각해보는 문제입니다. 둘째, 통속적으로 받아들여진 기독교의 신관과 불교의 업/카르마 이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문제입니다. 셋째, 현재 기독교와 불교가 표층 종교의 형태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했는데, 일종의 종교적 발달장애에서 벗어나 심층 종교가 되도록 두 종교를 심화시키는 일에 협력할 수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제안하고 싶습니다.

1. 함께 행동하고-인간화의 길에서 협력한다
 
2009년 영국 BBC 방송국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욕망지수가 1등이라 합니다. 구태여 이런 연구결과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 침몰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 규명이 다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일차적으로 그 원인이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욕망, 욕심, 더 구체적으로 물질 제일주의, 배금주의, 성장 제일주의 같은 것이라고 하는 데에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입니다. 화물을 과적했다든가, 평형수를 뺐다든가, 점검이나 감독을 소홀히 하고 봐주었다든가 하는 등등도 결국 생명, 안전 같은 것에 대한 관심보다, 무리를 해서라도 수입을 극대화하려고 하는 욕심에서 나온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볼 때 한국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기독교와 불교는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든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을 받들고 있는 기독교, 그리고 욕심이 모든 괴로움(苦)의 근본 뿌리라고 가르치고 무욕(無慾), 무아(無我)의 진리를 가르치는 불교, 이 두 종교가 지금껏 한국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의 불교든 기독교든 몇몇 뜻있는 일부를 제외하면 거의 다가 지금까지 국민들의 정신 건강이라든가 안녕이라는 대의(大義)에 관심을 가지기보다 자기 교회, 자기 사찰의 성장에만 몰두해 오고, 개인적으로도 복을 많이 받아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매진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근본적으로 우리의 욕심에서 생겨난 이 엄청난 참사 앞에서 우리는 다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겠다고 옷깃을 여미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니, 맹자님 생각이 납니다. 맹자님은 우리가 태어날 때 모두 사지(四肢)를 가지고 태어나듯, 사단(四端)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입니다. 그러면서 맹자님은 우리가 이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하면 바로 “인간이 아니라(非人也)”고 했습니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런 인간 본연의 가능성이 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자기의 잘못을 부끄럽게 여기고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수오지심을 보더라도 청문회에 나와서 어떻게 하든 자기의 잘못을 감추고 변호하려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침저녁 자동차로 출퇴근하면서 조금이라도 양보하면 그것이 곧 죽임인 것처럼 운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서 우리가 과연 인간인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맹자의 말이지만 기독교인들이나 불교인들이 명심하고 함께 비인간화된 한국인들을 인간화(人間化)하는 작업에 동참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요인들 중 하나가 절대 빈곤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불교와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에 손을 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도와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런 가난이 생기는 정치․경제적 근본 원인을 찾아 그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기독교, 불교는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고사하고, 오히려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옹호하고 거기서 얻을 수 있는 부대 이익을 누리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한 가지 예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부회장 조광작 목사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되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을 빚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며 가난한 집 아이들과 그 부모들의 눈물은 아랑곳하지 않고 “박근혜 대통령이 눈물을 흘릴 때 함께 눈물 흘리지 않은 사람은 모두 다 백정이거나 용공분자다.”라고 하며 위정자의 눈물을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였습니다.
불교와 기독교가 직접 책임질 일은 아닐지 몰라도, 이런 일은 한국 교육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교육의 목표를 보통 ‘지덕체(智德體)’라고 합니다. 현재 한국에는 지혜 지의 지(智)보다는 알 지의 지(知)가 강조되고, 덕이나 체 부분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는 오로지 입시나 입사를 위한 시험 예비학교 같은 실정입니다. 《유진의 학교》 저자인 교육철학자 한석훈 교수의 말처럼 이제 한국 교육은 지덕체가 아니라 ‘지덕성(智德聖)’을 목표로 하여 지금 실종되고 있는 영성 교육을 되살려야 할 것입니다. ‘성(聖)’이란 조선 유학에서 목표로 삼던 최고의 덕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성학’이라고 하고, 퇴계 이황 선생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율곡 이이 선생은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은 것입니다. 오로지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월급을 위한 교육이라는 현실이 오늘의 배금주의, 출세지향주의를 낳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이런 문제는 교육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국 종교계도 힘을 합해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라 생각됩니다. 결국은 ‘성(聖)’이란 ‘영성(靈性)’의 함양에서 가능한 것으로 영성은 결국 엄격한 의미의 종교적 차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신체지수(PQ), 지능지수(IQ), 감성지수(EQ)를 지나서 영성지수(SQ)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OECD 국가 중 욕망지수에서 1등을 할 것이 아니라 영성지수에서 최고점을 딸 날이 오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영성지수의 계발과 관계되는 책으로는 최근에 나온 Cincy Wigglesworth 지음, 도승자 옮김, 《SQ 21》(신정, 2014) 참조)
물론 우리를 비인간화시키는 요인이 많지만 그중 중요한 요인 하나는 남북분단이라 생각합니다. 북한의 인권탄압은 논외로 하더라도, 남한 사회에서도 기득권의 이익에 저해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을 ‘종북’이라 낙인찍어 매장합니다. 남북 분단 현실을 자기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하면서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는 것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남북통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불교, 기독교는 이 일을 위해 협력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참된 인간이 못 되도록 하는 비인간화의 장본인, 탐욕이 세월호를 침몰시킨 암초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암초를 제거하는 데 앞장서야 할 책임이 불교, 기독교의 어깨 위에 놓여 있습니다. 두 종교가 함께 행동해야 할 이유입니다.
 

2. 함께 생각하고-새로운 해석을 시도한다

A. 기독교의 경우 : 신관(神觀)의 문제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먼저 기독교의 반응을 생각해 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경우 자연히 신을 찾게 됩니다. 신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시는가, 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침묵하시는가, 신이 정말 계시는가 하는 등의 물음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종래까지 기독교가 일반적으로 유지해온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에서 제공하는 신관(神觀)으로는 대답이 곤란해집니다. 이런 신관을 가지고서는 한국 대형 교회 중 하나인 명성교회의 김삼환 목사 정도의 대답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지난 6월 1일 설교에서 세월호 침몰을 두고 “하나님이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니다. 나라를 침몰하려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 그대로 안 되어 이 어린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약하면 전지전능하신 신이 모든 것을 아시고 나라를 구하려 어린아이들을 희생시켰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을 변호하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변호하는 것은 많은 이들의 빈축을 살 뿐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유신론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유대인들의 신관을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오래전 유대인들은 신이 자기 민족만을 사랑하고 지켜주는 신이라고 믿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출애굽 당시 유대인들은 야훼 신이 이집트 가정의 처음 난 아이들은 다 죽였지만, 문설주에 피를 묻힌 유대인 가정은 ‘건너 뛰어[逾越]’ 그들 집은 무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 후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자기들의 야훼 신이 자기들을 직접 진두지휘하며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야훼 신은 자기 민족, 자기편, 자기 사람들만 보호하고 인도한다고 믿었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던 이런 신은 이른바 ‘부족신관(部族神觀)’에 의한 신이었습니다. 《출애굽기》 혹은 《탈출기》에 나오는 신은 이런 신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6세기 유대인들은 이웃 나라 바빌론의 침략을 받아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들을 지켜주는 신이라 철석같이 믿었는데,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외국의 침입에 쓰러지도록 하다니, 우리가 받들던 신이 도대체 어떤 신이란 말인가. 우리가 받드는 신이 이방 신들보다 못하다는 말인가.’ 이런 참담한 현실 앞에서 이들이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부족신관이 도전을 받아 크게 바뀌었습니다. 자기들이 받들고 있던 신은 이제 자기 민족만을 위한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 함께 다스리는 우주적 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보편신관(普遍神觀)의 등장이었습니다. 《제2 이사야서》 등에 나타나는 신입니다.
그리고 또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부족신관에 입각한 신이 아니라 우주적인 신, 보편적인 신, 이 세상을 공평하게 다스리는 신, 그러면서 자기들을 선민으로 특별히 지켜주시는 신이라 믿어 믿어왔는데, 나치 치하에 유대인 6백만 명이 생명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비극 앞에서 그들은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신이 도대체 뭘 하고 있단 말인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신관은 다시 크게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1986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루마니아 태생의 엘리 위젤이라는 유대인 소설가가 쓴 《밤(The Night)》이라는 자전적 소설에 보면,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을 불태우는 연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보며, “나는 나의 믿음을 영원히 소멸해버린 그 불길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절규했습니다. 또 교수대에 달렸지만 몸이 가벼워 금방 죽지 못하고 대롱대롱 매달려있는 어린아이를 보며, 신도 “그 교수대에 매달려 처형되고 있다.”고 속으로 부르짖었습니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이후 많은 유대인은 자기들이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유신론적 신관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서양에서 불교를 비롯하여 동양 사상을 선호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유대교 배경을 가지고 있던 이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도 근본적으로 고대 유대교의 부족신관을 그대로 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인들 중에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자기를 믿고 교회에 잘 다니고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을 특별히 더 사랑하시고 복을 많이 주시고 여러 가지 어려움에서 지켜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제가 4월 2일 자 〈한겨레〉 칼럼에서 〈노아〉라는 영화를 두고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독교인들 중에는 그 영화가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잔뜩 기대했는데, 막상 그 영화가 개봉된 뒤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와 다르게 황당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여 관람 거부 운동을 펴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노아 이야기는 황당하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성경 《창세기》에 의하면 신이 인간을 만들고 나서 얼마를 지나자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신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사람들을 물로 지면에서 쓸어버리기로 했습니다. 오로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 노아와 그 가족만을 살리겠다고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1980년대 말 시작된 기업 경영 전략으로 ‘식스 시그마(six σ)’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전략에 의하면, 제품을 만들 때 불량품 수, 혹은 결함 발생 수를 제품 백만 개당 3.4개 이하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량품이 0.00034% 이하로 한다는 이야기이지요. 지금은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고 합니다만 아무리 후하게 잡아도 어느 제품 회사든 불량품이 10% 이상 나오는 것은 허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됩니까? 의인 노아의 식구 여덟 명만 살리고 그 당시 전 인류를 다 불량품으로 폐기처분을 한 셈입니다. 말하자면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이 만든 인간 중에 거의 다가 불량품이었다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는데 불량품이 0.01%가 아니라 거꾸로 99.99%일까요. 어찌하여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사람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 악하게 될 줄도 모르고 만들었을까요? 이런 경우 신은 ‘전지’도 아니고 ‘전능’도 아닌 것 아니겠습니까?
또 성경에 의하면, 세상이 끝날 때 신은 사람들을 심판해서 착한 사람은 하늘나라에 보내고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지금 세상 형편 돌아가는 것을 볼 때 틀림없이 지옥에 들어갈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 분명합니다. 말하자면 최후심판이란 최종 품질검사 단계인 셈인데, 이때도 합격품보다 불합격품이 절대적으로 많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신이 자기 실수 때문에 생긴 불량품들을 지옥불에 던지고 영영세세토록 그 속에서 타고 있으라고 한다니, 그런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요?
물론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렇게 인간적인 면모를 가진 인격체로서 신을 변호하는 ‘신정론(神正論, Theodicy)’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의 올바름을 변증하려는 노력입니다. 가장 많이 말하는 것 중 하나가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인간이 그것을 잘 못 써서 결국 이런 좋지 못한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신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준 자유의지가 왜 이런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해답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이것도 완전한 해답은 못 된다고 하는 것이 신학적 결론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인간의 변호를 받아야 그런 신을 참된 신으로 받들 수 있을까요? 인지가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이런 ‘신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고역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껏 가볍게 생각하고 받들어 오던 신은 이제 ‘실종된 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신의 실종은 어느 면에서 다행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런 유신론적 신관에서 묘사하는 신이 아니라 더욱 의미 있는 신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유신론적 신관의 한계에 대해서는 Richard Dawkins, Daniel Dennett, Sam Harris 등의 저술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류영모 선생은 15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20세에 오산학교에서 가르칠 때 수업 전에 기도도 하고 학과목 시간에도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는 등, 오산학교를 기독교 학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한 분입니다. 그러던 그가 2년 후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던 동생이 19세의 젊은 나이로 죽는 것을 보고, 그리고 《도덕경》과 톨스토이의 글을 대하면서, 기독교가 종래까지 무비판적으로 받들던 그런 신을 버렸습니다. 그의 신관이 바뀐 것입니다. 이제 그의 신은 이른바 “없이 계신 이”가 된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들이나 류영모 선생뿐 아닙니다. 현대 많은 그리스도인도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 그러면서 역사나 인간의 생사화복을 하나하나 관장하시는 하느님, 특히 선한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벌을 준다고 여겨지는 이른바 “간섭하는 신(interventionist God)”이라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뉴턴, 제퍼슨, 프랭클린, 볼테르, 루소 등이 주장하는 이신론(理神論, Deism)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신학자들, 심지어 상당수의 목회자 사이에서도 이런 초자연주의적이고 초월적이고 간섭주의적인 신이라는 신관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이런 신을 상정한다면 인간사에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마치 뉴턴의 역학을 가지고 상대성이론이나 양자역학에서 다루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 위에 계시는 초월적 신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트린 사람은 1963년에 《신에게 솔직히(Honest to God)》라는 책을 쓴 영국 성공회 신부 존 로빈슨(John A. T. Robinson)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미국 성공회 주교 존 셸비 스퐁(John Shelby Spong) 신부가 쓴 베스트셀러 《기독교, 변하지 않으면 죽는다(Why Christianity Must Change or Die)》(김준우 옮김)라는 책에서 ‘유신론의 종말(Demise of Theism)’을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심장(The Heart of Christianity)》(김준우 옮김)을 쓴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도 기독교를 둘로 나누어 지금까지의 기독교를 ‘재래 기독교(conventional Christianity)’ 혹은 ‘천당/지옥 기독교(Heaven/Hell Christianity)’라 하고 오늘 새롭게 등장하는 기독교를 ‘신흥 기독교(newly emerging Christianity)’라고 하였습니다. 저 위에 계시는 하느님을 찾는 기독교에서 인간의 내적 변화(transformation)를 강조하는 기독교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에 쓴 《예수는 없다》(현암사, 2001)도 같은 맥락에서 쓰인 것이고, 최근 출간된 이찬수 교수의 《유신론의 종말, 이제는 범재신론이다》(동연, 2014)라는 책도 종래까지 받들어오던 유신론적 신관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필 주커먼(Phil Zuckerman)이 쓴 《신 없는 사회(Society without God)》(마음산책, 2012)라는 책이 있습니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신이 없는 이런 세속 사회가 사회복지, 교육, 건강, 인권, 평등, 범죄율, 부패지수, 자살률, 행복지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신을 그래도 많이 믿는다고 하는 미국보다 더 잘 산다는 것이 그의 결론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미국의 경우 교회 출석률이 다른 어느 주보다 높은 루이지애나 주가 미국 전국 살인범죄 사건 평균수의 2배가 된다고 합니다. 교회 출석률이 비교적 낮은 동북부 버몬트 주나 서부 오레곤 주는 전국 평균치보다 낮다고 합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가 무신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교회 다니기를 그만해야 한다는 주장도 물론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어느 특정한 신관이나 교리나 설명 체계를 받아들이는 것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지적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마음을 다해 받들 수 있는 신은 어떤 신이어야 할까 진지하게 검토하고,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인습적인 신관, 초자연적 신으로서 신관을 심화시켜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초자연적, 초월적 신, 저 위에 계셔서 낮고 천한 저희 인생들을 굽어살피시는 하느님 대신, 우리 인간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는 그런 하느님, 그런 신관으로 업그레이드된 신관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최고의 신학자 폴 틸리히가 말한 것처럼 이제 우리의 눈은 ‘높이’가 아니라 ‘깊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합니다. 틸리히에 의하면, 우리가 신과 인격적 관계를 맺을 수는 있지만, 신을 하나의 인격체로 볼 수는 없습니다. 신은 ‘personal’ 하지만 ‘a person’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신을 모실 때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 17:27, 28)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B. 불교의 경우 : 카르마/업의 문제
이제 불교의 경우를 생각해봅니다. 세월호 같은 참사를 두고 불교에서 줄 수 있는 가장 쉬운 해답은 이를 업(業, karma)의 관점에서 보라는 것일 것입니다.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이해된 대로의 업이란 사람들이 몸[身], 입[口], 생각[意]으로 짓는 선악의 ‘행위’를 말합니다. 과거에 행한 행위로 현재에서 거기에 대응하는 응보를 받고, 다시 현재의 행위로 미래에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재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결국 과거에 행한 일의 업보입니다. 착한 행위는 즐거운 열매를 가져오고[善因樂果], 악한 행위는 괴로운 열매를 가져온다[惡因苦果]는 일종의 인과응보(因果應報) 사상입니다.
물론 업 사상도 심층적 뜻이 있고, 이를 영적으로나 더욱 복잡한 이론으로 풀어내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과응보 같은 상식적으로, 그리고 통속적으로, 심지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이런 업 사상이 과연 세월호에 희생된 어린 학생들의 비극을 설명하는 데 적절한 대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희생자의 가족이나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의문입니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업/카르마라는 것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통속적 태도를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 칸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선한 일을 한 사람이 잘살고 악한 사람이 잘못 사는 것을 보기보다 오히려 악한 사람이 더 잘살고 선한 사람이 잘못 사는 경우를 얼마든지 관찰할 수 있는 현실입니다. 개인적으로만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적용되는 ‘공업(共業)’도 마찬가지입니다. 북미에서 무자비하게 인종 말살을 획책한 백인들이 오늘 버젓하게 잘살고 있는 경우 같은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상식적 업/카르마 사상의 한계를 말하는 불교 지도자 세 사람을 예거하고자 합니다. 첫째, 달라이 라마; 둘째, 종밀; 셋째, 암베드카르입니다.
첫째, 달라이 라마입니다. 그는 최근에 낸 그의 책 《종교를 넘어서(Beyond Religion)》(김영사, 2013)에서 인과응보로서 카르마 사상이 윤회의 가르침과 함께 “불교 윤리와 내적 가치의 함양을 위해 힘 있는 기초”가 되기는 하지만, 이것 역시 “이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사후 생명에 대해서, 경험적으로 실증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어서 그는 이런 종교적 설명이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지극히 중요한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오늘같이 종교가 많은 이들에게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과학 시대에”는 더 이상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힘을 발휘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따라서 카르마 이론 같은 종교적 바탕에 근거하지 않는 내적 가치와 윤리체계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달라이 라마는 구체적으로 심리학, 신경과학, 임상과학 같은 분야의 연구 성과를 활용하여 새로운 윤리적 근거로 ‘영성(spirituality)’을 제시합니다. 그에게 영성이란 ‘종교와 관계없이 사랑과 자비와 애정으로 기울어지는 인간 내면에 깔린 성향’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행복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 한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 한 가지가 상호의존의 원칙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자연히 우리 자신의 안녕이 다른 이들의 안녕과 직결됨을 직시할 수 있게 되고, 이렇게 될 때 결국 윤리적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최후 심판이나 불교의 업보 사상과 관계없이 가능하게 되는 윤리를 그는 ‘세속적 윤리(secular ethics)’라 부르고 있습니다.(한국어 번역판에는 ‘현세적’이라 했습니다. secular는 종교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세속적’이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조언은 그가 “불교인이나 종교 신봉자로서가 아니라 거의 70억 인구 중 한 인간으로서, 인류의 운명을 걱정하고 인류의 미래를 보호하고 개선하기를 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하는 충언이라 밝히고 있습니다.(영문 pp.15~20 참조)
둘째, 한국 조계종의 창시자 지눌(知訥) 사상에 크게 영향을 준 당나라 승려 종밀(宗密, 780~841)입니다. 그는 그의 저술 《원인론(原人論)》에서 불교가 유교와 달리, 카르마의 가르침으로 윤리적 책임 문제를 거론한다는 점에서 카르마 교리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불교 내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가르침의 종류를 심천(深淺)의 순서에 따라 다섯 가지로 분류할 때 카르마에 입각한 가르침을 제일 하급으로 취급했습니다. 그 다섯 가지란 인천교(人天敎), 소승교(小乘敎), 대승법상교(大乘法相敎), 대승파상교(大乘破相敎), 일승현성교(一乘顯性敎)입니다. 인천교란 죽어서 사람으로 태어나느냐 천상에 태어나느냐 하는 업보를 궁극 관심으로 삼는 입장을 말합니다. 이런 인과응보적 태도는 ‘내 속에 불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는 제5단계 ‘일승현성교(一乘顯性敎)’의 가르침과 너무 먼 저급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카르마 교리의 방편적 효용성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최상의 가르침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셋째,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1891~ 1956)의 경우입니다. 그는 인도의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나 온갖 수모와 천대를 받으면서 인도에서 불가촉천민으로서는 두 번째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서 뭄바이대학에서 경제학과 정치학을 공부한 다음,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영국 런던대학으로 유학하여 경제학과 법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32세에 인도로 돌아가 변호사와 노동장관, 제헌국회의 제헌위원회 의장, 네루 내각의 법무장관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동시에 불가촉천민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나 힌두교로서는 이런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1935년 힌두교를 떠났습니다. 이슬람, 시크교 등을 알아본 다음 결국 만인평등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불교로 귀의했습니다. 1955년 인도불교협회를 조직하고 그다음 해 1956년 부처님 열반 2천5백 주년 기념일인 10월 14일 부인과 함께 삼귀의를 외우고 계를 받았습니다. 불가촉천민 50만 명이 그의 호소에 호응해 불교인이 되었습니다. 불행히 건강 악화로 그해 12월 65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5년 만에 불가촉천민 3백만 명이 불교로 개종했습니다. 1990년에는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라는 인도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암베드카르는 죽기 3일 전에 탈고한 그의 유작 《인도로 간 붓다(The Buddha and His Dharma)》에서 불교의 카르마 이론을 배격합니다. 불가촉천민은 과거의 업에 의한 결과로 불가촉천민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도의 사성(四姓) 카스트 제도를 교리적으로 뒷받침하는 《마누 법도론》을 불태워버린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습니다. 그는 사회 불평등이 생긴 것은 카르마 때문이 아니라 정치․경제적 요인이므로 이런 불합리한 현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카르마 이론에 순응하지 말고 정치․경제적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기독교의 신관을 이야기하면서 인간의 길흉화복을 모두 신의 소관으로 돌리는 태도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신을 믿지 않는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 오히려 재래의 신관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보다 훨씬 더 잘사는 복지국가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천박하게 이해된 대로의 업 사상이 인간을 무력한 숙명론자로 만들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주위에서 보는 경제적 불의나 인권유린 같은 사태에 접하더라도 그것이 개인이나 집단이 쌓은 업의 결과로 취급하고 그 정치적 혹은 사회·경제적 요인을 밝히는 데 등한히 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차라리 안이하게 피상적으로 이해된 대로의 업/카르마 사상이 없어지는 데서 참된 인간성 회복과 복지가 꽃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종교는 일단 인과응보와 같은 율법주의적 태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유교에서도 의(義)와 이(利)를 대조시키고, 의를 따르는 사람을 군자라 하고 이를 따르는 사람을 소인이라 합니다. 의를 따른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반드시 해야 할 옳은 일이기에 하는 것이지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 태도는 8세기 유명한 수피의 성녀 라비아의 기도에서 더욱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오, 주님.
제가 주님을 섬김이 지옥의 두려움 때문이라면 저를 지옥에서 불살라 주시고,
낙원의 소망 때문이라면 저를 낙원에서 쫓아내 주소서.
그러나 그것이 오로지 주님만을 위한 것이라면
주님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제게서 거두지 마소서.


3. 함께 깊어지고-영성의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저는 평소 어느 종교에나 표층이 있고 심층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교에도 표층과 심층이 있고, 기독교에도 표층과 심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번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한국 종교, 특히 불교와 기독교가 표층에서 심층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밟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표층종교와 심층종교의 차이가 무엇인가, 제 나름대로 몇 가지를 간략하게 열거해 봅니다. 첫째 표층종교는 지금의 나(現我), 이기적인 나, 불교 용어로 하면 탐·진·치로 찌든 나, 기독교 용어로 하면 죄인인 나를 위하여 애쓰는 종교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심층종교는 이런 나를 부인하거나 극복하고 비울 때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나, 참나, 큰 나, 온전한 나[全我]를 찾으려는 종교입니다. 불교 용어로 하면 내 속에 있는 불성(佛性)을, 기독교적 용어로 하면 내 속에 있는 신성(神性) 내지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갈 2:20)를 찾으려 노력하는 종교입니다.
다 같이 절에 다니거나 교회에 다녀도, 다 같이 시주를 하거나 헌금을 해도, 다 같이 기도를 해도 지금의 내가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되기만을 바라는 종교는 표층종교요, 그것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나의 욕심을 버리고 참된 나를 찾기 위한 수단이라 여기는 종교는 심층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심층 불교에서는 무아(無我, anātman)를 강조하고 심층 기독교에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마 16:24)고 합니다.
둘째, 표층종교가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한다면, 심층종교는 ‘이해’나 ‘깨달음’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표층종교는 자기 종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나 율법 조항을 무조건 그대로 따를 것을 요구하는 반면 심층종교는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을 벗고 새로운 눈뜸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새로운 눈뜸을 일반적인 용어로 고치면 새로운 의식, 의식의 전환, 혹은 ‘특수 인식능력의 활성화’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의 경우 심층 불교는 우리가 다 잘 아는 것처럼 ‘깨치신 분’이라는 뜻의 붓다가 가르치는 ‘깨침을 위한 가르침’을 앞세우는 종교입니다. 오로지 문자나 전통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말고 스스로 깨쳐서 그것으로 해탈의 경험을 하라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심층 기독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3:2)고 하는 예수의 명령을 따르는 종교입니다. 여기서 ‘회개’라는 말의 본래 뜻은 메타노이아(metanoia), 곧 ‘의식의 변화’입니다. 불교나 기독교의 심층은 이처럼 기복신앙이나 번영신학, 장례불교 같은 물질주의적이고 형식적이고 율법주의적이고 상업주의적인 표층종교에서 벗어나 인간 내면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첫째 특징과 관련된 것입니다만 약간 다른 각도에서 본 것입니다. 표층종교가 절대자와 나를 분리된 두 개의 독립된 개체로 보는 데 반해, 심층종교는 그 절대자를 신이라 상징적으로 의인화했을 경우 그 신이 내 속에 계신다고 합니다. 나아가 내 속에 계신 그 신이 바로 나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에 그 신과 나는 ‘하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그것을 “Tat tvam asi.(梵我一如)”라고 하고 우리나라 동학(東學)에서는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절대자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강조하는 ‘범재신론(panentheism)’적 입장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교의 경우 불성이 내 속에 있다는 가르침, 혹은 화엄의 이사무애(理事無礙)·사사무애(事事無礙), 상즉(相卽)·상입(相入)의 이론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기독교의 경우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요17:21)라는 말에 함축된 사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넷째, 표층종교는 그야말로 경전의 표층적인 뜻에 매달리는 종교라면 심층종교는 경전의 속내, 더 깊은 뜻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종교입니다. 심층종교가 문자주의를 배격하는 것은 종교적 깨달음의 경지, 우주 만물이 하나라는 체험 등은 말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불립문자(不立文字)로 강조하고 기독교에서는 “문자는 사람을 죽인다”(고후 2:6)고 한 바울이 이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다섯째, 표층종교는 대체로 자기 종교만이 오로지 유일한 진리라고 하는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심층종교는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합니다. 절대적 진리는 어느 누구의 독점물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군맹무상(群盲撫象)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코끼리를 만진 시각장애인들이 같이 앉아서 서로 대화하며 실재의 코끼리에 가까운 코끼리 상을 찾자는 것입니다.
저는 적어도 이런 다섯 가지 심층적 요소를 갖춘 종교를 영성적 종교라 부르고 싶습니다. 20세기 가톨릭 신학의 거장 카를 라너(Karl Rahner)는 21세기 종교가 심층적이고 영성적인 종교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한국 종교가 표층에서 심층으로 심화하여 진정으로 영적 길잡이가 되도록 하는 데 불교와 기독교가 함께 노력하는 것이 21세기 이 두 종교에 지워진 책무를 이행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나가면서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국가 최고 책임자는 ‘국가개조론’을 부르짖었습니다. 국가개조가 실행에 옮겨질 기미는 아직까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책임 소재와 사건의 진상을 묻는 일을 그만두고 국민 모두가 이번 일에 책임이 있는 것처럼 하여, 일종의 책임 회피, 사건 은폐를 조장하는 발언이 아닌가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아무튼, 국민 개조가 있으려면 우선 종교계, 특히 한국 종교 인구의 절반씩을 차지하는 기독교와 불교의 근본적 자기 성찰과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번 일을 계기로 인간의 탐욕과 어리석음과 불의 부정을 통회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며 서로 부둥켜안고 위로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종래까지 거의 무의미하게 되풀이하던 교리나 관행을 새 시대의 필요에 부응하여 철저히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에 표층적인 면이 필요할 경우도 있지만 이제 표층에만 머무는 종교적 발달장애에서 벗어나 종교의 진가를 발견할 수 있는 종교의 심층으로 심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종교 전체가 침몰하는 일이 없으려면 불교와 기독교가 손잡고 이 시대, 이 사회에 걸맞은 삶의 지침을 줄 수 있는 살아 있는 종교로 발돋움해야 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것이 결국 종교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오강남 / 캐나다 리자이나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종교학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의 법계연기 사상에 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길벗들의 대화》 《도덕경》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장자》 《예수는 없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또 다른 예수》 등과 번역서 《살아 계신 붓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예언자》 등이 있다. 현재 ‘경계너머 아하!’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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