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미사리 조정경기장 위례 강변길에 끝없이 펼쳐진 억새 숲을 거닐며 가까이는 태풍 봉풍을, 좀 멀리는 2010년에 수도권을 강타하며 100년 가까이 뿌리 내린 소나무와 참나무를 송두리째 뽑아버린 태풍 곤파스를 생각하였다. 그 위력이면 이 억새 숲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야 할 텐데…… 조금도 피해 없이 방긋 웃으며 오가는 사람을 즐겁게 맞이하고 있으니 저 저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2010년 곤파스 이후에 본 억새 숲이나 봉풍 이후의 억새 숲은 여전히 명랑하다.

마음이 약한 사람을 가리켜 갈대 또는 억새 같다고 쉽게 말하지만, 지금까지 잘 견디어 온 갈대와 억새를 보면 중국 천하를 지배하던 원 제국의 100년 역사나 찬란했던 그리스 문화, 로마 제국보다도 더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인류의 역사 발전 과정을 돌이켜보면 주어진 현실에 최적으로 순응하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진화하고 발전한 곳에는 찬란한 민족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지며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데 반해, 그렇지 못한 곳은 하루살이처럼 반짝하다가 국호도 없이 사라지는 단명을 면치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길고 짧음이 극명한 속에서 자기 또는 민족의 정체성을 잘 보존하며 대대손손 장구한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 있는 저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오래전부터 이 화두에 많은 호기심을 갖고 생각하여 보았는데 결론은 각각의 유연한 정체성의 확립에 이어 화합과 단결 그리고 끝없는 진화다. 원 제국이 멸망한 것도 중국의 주류인 한족을 멸시하여 3~4등급으로 분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게 하였으니 이 불평등이 결국은 한족 출신 주원장(朱元璋)으로 하여금 명나라를 건국하게 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가까이는 우리의 역사를 봐도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다시 고려의 건국과 조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권력의 정점에 있는 주류가 국민과 더불어 화합하지 못하고 극소수의 부귀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며 백성을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불교가 전래되어 1642년이 된 2014년의 나의 사랑, 우리 불교는 어떤가. 조심스러운 면도 있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국민의 눈높이와는 동떨어진 별천지의 세계를 원하고 또 그 길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점에서는 개개인의 시비곡직이 따르는 별업(別業)보다는 《능엄경》에서 설파하신 공업(共業)을 종종 생각한다. 지구상에 유일하게 분단된 조국을 가진 것도, 부처님의 말씀 하나하나가 금과옥조가 되어 우리의 가슴을 탁 트이게 하고 참된 삶의 지남을 열어주시는데도 많은 국민이 타 종교에 귀의하고 외면하고 있는 것도 결국 우리의 공업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공업을 더 많은 사람, 더 나아가서는 국민과 함께, 더 맑고 깨끗하게 하면서 끝없이 발전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끝없는 재발심(再發心)이 출·재가를 막론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원효 성사의 발심수행(發心修行)을 저녁에 거실을 오가며 큰소리로 봉송한다. 지금까지 2만여 송은 족히 넘을 것이다. 2남 1녀를 키울 때도 “부 제불제불(諸佛諸佛)이 장엄적멸궁(莊嚴寂滅宮)은……” 하고 자장가 대신 봉송하였더니, 잘 놀다가도 졸릴 때는 “아빠, 제불제불 해줘요.” 하며 잠을 자곤 하였다. 봉송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가슴에 닿는 것은 발심수행에는 간절하고 간절함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출·재가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일로 화합하고 단결하는 것이다. 세속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듯,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수봉행(信修奉行)하는 이념적 종교 공동체로서 출·재가 구분 없이 율장의 핵심 정신을 기본으로 하여 4부대중의 여여한 직분에 따라 수백만 물줄기가 하나의 바다를 통해 일미로 융합되듯, 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화합하고 단결하는 것이다. 근자 10여 년의 일을 보아도 외부에서 불교 교단을 폄훼하는 것 이상으로 내부의 싸움에 의한 불미한 일들이 세상에 전파되고 일반 국민은 물론 불자에게 많은 실망을 주고 있음을 간과하여서는 안 된다. 처음에 언급한 갈대와 억새의 저력이 태풍 곤파스도 이겨내며 봉풍 정도에는 오히려 비바람을 가볍게 즐기는 것도 화합과 단결의 아름다운 결과인 것이다.

끝으로는, 발심을 바탕으로 한 화합과 단결 속에서 보현보살님의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 하여도 멈춤이 없는 원행을 향하여 끊임없이 실천하는 유연한 진화다. 어떻게 하여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불자는 물론, 모든 사람에게 잔잔히 파고들어 귀의처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 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끝없는 제도의 개선과 조직 구성원 충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교황청에서 한국의 가톨릭 신자를 위해 49제를 유일하게 승낙하였듯이 제도는 과감하게 개선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의 인구 변화에 대해 연구를 한 서울대학교 조영태 교수에 의하면 모든 조건이 현재와 같다면 2800년, 지금부터 약 780년 후에는 한국인 1명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는 범정부 차원에서 연구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 불교의 전파를 위해서는 불교입문의 4부대중 충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극락정토를 먼 데서 찾지 말고 내 직장 내 가정에서 실현하겠다는 원력으로 유유자적하게 900리를 돌고 돌아 서해로 가는 한강처럼 출·재가의 법도는 여법하게 분한하되 한강의 물줄기처럼 하나가 되어 불법의 바다로 함께 가는 데는 모두가 도반이고 스승인 것이다.

인구 감소는 전지구적(全地球的)으로 보면 지구도 살아남기 위한 보정작용인지도 모른다. 자녀를 갖지 않겠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도 있지만, 핵심은 자녀 없이도 삶에 지장을 받지 않는 문화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가자가 많은 경우에 이루어진 제도와 관습을 과감히 개선하여 6개월~1년 정도의 단기 출가를 심화하여 인구 감소에 따른 재가 2부중을 교단의 중요 인재로 활용하는 방법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한다.

벌써 상강(霜降)이 지났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4계가 분명함을 확실히 알아서 다음을 준비하는 지혜가 넉넉함을 말하듯 우리 불교도 전래된 지 1642년, 이 긴긴 역사 속에서 역천겁이불고(歷千劫而不古)하고 긍만세이장금(亘萬世而長今)의 도도한 사자후를 전 세계에 하려면 오늘 하루가 가는 것도 정말 아깝다. 오늘 하루는 어제 고인이 되신 모든 분이 그렇게도 보고 싶었던 찬란한 하루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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