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이후,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일까? 학업이나 직장, 경제력 등등 이력서에 기재할 수 있는 사항 말고, 인간이면 누구나 겪게 마련인 그 ‘힘든 일’ 그게 과연 무엇일까? 병원에 접수하여 수술받거나 주삿바늘로 해결할 만한 것도 아니고, 어느 자리에서 떠벌릴 일도 아닌, 너무나 사소하지만 너무나도 불편한 일. 마음이라는 광장을 어지럽힐뿐더러 새 아침이 오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가느다란 끈. 그것을 일러 우리는 인연이라 한다.

인연의 폭은 참으로 넓어 혈육에서부터 우정과 사랑, 선후배와 동료, 사제지간, 이웃까지를 포괄한다. 그뿐일까. 한순간 지하철 옆자리에 앉았던 이까지도 개개인의 우주에 없어서는 안 될 별들이다. 깊이 모를 이 현실에 그들의 빛이 교차하는 사이, 느리게 혹은 잽싸게 시간이 흘러간다. 졸~졸~졸~ 얼마나 아름다운가. 철~철~철~ 얼마나 가파른가. 빙~빙~빙~ 얼마나 어지러운가. 별의별 체험을 선사하며 소용돌이치는 삶은 찬란한 한때를 향해 끝없이 출발한다.

오늘 나는 두어 달이나 미뤄온 일을 했다. 화장실 공기창 곁에 메모 하나를 걸어놓은 것이다. “치우지 말 것/ 고향집에/ 있던/ 이 거미줄// 2014.9.24-7:34” 방문자가 알아보기 쉽도록 윗부분에 ‘창틀’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찰칵! 모든 건 낡게 마련이므로, 이 일로 인해 가벼워진 내 마음까지도 기념하려는 것이다.

내용인즉, 어느 날 문득 70㎝×20㎝밖에 안 되는 창틀 한구석에 희스름한 거미줄 한 채가 눈에 띄었다. 깻잎보다도 작은 그 시스루 하우스(see through house) 너머로 나는 고향집 측간이며 탱자나무 울타리, 풀밭, 지금은 안 계신 부모님, 어린 시절까지도 매일매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깨알만큼 작은 거미의 아주아주 작고 약한 집.

청소를 안 한 게 아니라고, 불결의 상징이 아니라고, 이 거미줄은 우리 집에서 아낌을 받는 액자주택이라고……. 일부러 놔둔 줄 모르고 방문자의 눈에 ‘지저분함’으로 비칠까 봐 내어 건 ‘일러두기’ ― 이제 그가 누구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저 창틀 거미줄에서 드넓은 하늘과 바람, 새털구름과 들녘을 잠깐이라도 떠올려보지 않을까.

이 세상에서 제일 다치기 쉬운 게 사람의 마음이다. 피 터지지 않고 뼈마디 부서지지 않더라도 영원히 낫기 어려운 게 또한 상처 입은 사람의 마음. 쉽게 다치고 더디 낫는, 내 마음과 같지 않은 타인의 마음, 마음, 마음들! 긁을 수도, 밴드를 붙일 수도, 연고를 발라 달래볼 수도 없는 우리의 마음을 어찌 단속해야 할까. 언젠가 나는 나뭇가지에서 어렵사리 떨어지는 한 잎을 봤다. 낙엽은 그저 저절로 툭 떨어진다고 여겼기에, 아니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기에.

길을 가다가 우연히 하늘을 봤을 때, 거기서 벌새의 날갯짓보다도 빠르게―가냘프게 흔들리고 있던 그 한 잎. 섬유질 한 올이 끊어지지 않아 한참 동안이나 그렇게 바람을 타던 그 한 잎. 최후의 몸부림으로 마침내 한 오라기 인연을 끊고 어딘가로 날아가던 그 한 잎. 아하! 인연이란 저런 것이었구나. 나뭇잎 하나도 만나고 어우러지고 헤어지는 게 저토록 ‘힘든 일’이었구나.

하물며 뇌를 가진 인간임에랴. “내가 사람과 사귀면서 가끔 울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네. 하지만 울려고 해도 눈물이 나지 않는 까닭은 내가 이 나라를 떠돌아다닌 지 서른한 해나 되었지만 아직도 참다운 벗이 없기 때문이라네.”(연암 박지원 〈마장전(馬駔傳)〉) 연암 역시 몹시 힘들었던가 보다. 그의 신선에 대한 정의 역시 “신선, 그는 단지 세상에서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일 뿐”(〈김신선전(金神仙傳)〉)이라는 것이다. 탄식이 아닐 수 없다. 인연의 물결들이 이와 같으니, 태어난 사람 가운데 누군들 그 공허와 절망에서 면제될 수 있으리오. 한 영혼이 한 몸에 들어온 것도 인연이요, 그 영육이 내가 된 것도 인연이다. 타인과 얽히고설키며 일생을 건너가자면 형언 못 할 곤란을 겪는 건 당연한 일. 결국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길목에 당도하는데, 거기부터가 본격적인 수행이다.

최후의 적수 고독과도 맞닥뜨린다. 그러나 겁낼 것 없음. 잘 사귀기만 하면 최고의 벗이 될 수 있는 게 고독이므로. 고독이 바로 고요의 밑돌이므로.

무진장의 인내와 ‘힘든 일’을 내려놓고 소소한 사물을 사랑하는 일이란 얼마나 맑고 여유로운가. 인연도 생명력이다. 낙엽 하나가 나뭇가지를 떠남도 인연의 수명이 다한 까닭이요, 우애가 틀어짐도 인연의 끈이 닳았기 때문이다. 민들레는 날아간 씨앗을 걱정하지 않는다. “번뇌와 고통 없이는 해탈을 이룰 수 없다.”(틱낫한 《삶에서 깨어나기》)고 하지 않는가.

창틀 액자주택에 내 고향집 한 시절이 찾아와 빛을 건넨다. 고독이 아닌 고요의 빛을, 문득 깊어지는 무언의 빛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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