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들어가는 들녘을 본다. 행여 질세라 맹렬히 세력 다툼을 하던 넝쿨들이 기세를 잃고, 그 푸르렀던 싱싱함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있다. 온통 누런 빛깔투성이다. 바야흐로 주어진 삶을 마무리하는 짧은 순간이다. 수를 다하고 떠나는 마당에, 나 이렇게 살았습니다, 흔적을 남기려는 몸부림이다.

비단 들녘에 널린 여러 식물뿐 아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고희를 넘기고 어느덧 종심에 섰다. 돌아갈 차비를 해야 하는 허허로운 문턱 나이다. 눈 침침하고 기력 없음을 개탄하는 노년의 숨 가쁨이 오늘따라 더 절절하다.

그러나 노쇠하다는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비탄스럽기만 한 것일까. 그동안 간신히 지탱하면서도 안 그런 척 위세를 부렸던 것들을 느슨히 풀어버릴 수 있는 여유. 긴 호흡 내뱉으며 후유, 잘 왔다, 지게꾼 무거운 짐 부리듯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들을 홀가분하게 내려놓아도 되는, 아니 은근슬쩍 내던져도 아무도 흉보거나 탓하지 않는 연륜.

그동안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움켜쥐고 있던 것을 저만큼 던져 놓고, 마치 남의 흔적 구경하듯 흘끔거릴 수 있는 은밀한 능청. 그러나 무엇보다 옳고 그름에 대해, 밝고 어둠에 대해 큰소리로 지적하고 삿대질해야 했던 갑의 위치에서 어물쩍어물쩍 을의 자리로 옮겨온 이 홀가분한 자유를 어떻게 몇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만원 전철 안에서 앉으세요 하며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 줄 때, 못 이긴 척 자리할 수 있어서 좋고, 설사 잠자는 척 양보할 기미가 없을 때, 또한 아직 늙은이로 보이지 않는 게야, 스스로 위로받을 수 있어서 좋다.
어디 그뿐인가. 지공거사라고 해서 지하철을 얼마든지 공짜로 탈 수 있어서 좋고, 고궁을 내 집처럼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 수 있어서 좋다. 어디서 듣고 왔는지, 고등학교 다니는 손주 녀석이 월남전 파병이며, 사우디아라비아 기능공 파견이며, 할아버지 세대가 생명 바쳐 희생해 준 덕분에 대한민국이 이런 풍요를 누린다고, 마치 그 노고에 보답이라도 하듯 지극정성으로 누르곤 하는 어깨 부위의 느낌이 더없이 따뜻해서 좋다. 문득 떠올려 보는, 내 가문을 이어 줄 후손들과 함께 보낸 세월 역시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 아니라, 흑백영화의 영상처럼 마냥 아련하기만 하다.

껑껑 얼어붙은 대지 위로 겹겹이 쌓이는 눈보라의 계절이 그러하고, 앞이 안 보이는 안개 더미 때문에 목이 케케했던 지리한 봄 또한 그러하다. 지겨운 우렛소리와 함께 쏟아지던 폭우로 지천이 물바다가 되었던 시끄러운 여름까지 떠나보내고, 바람 한 점 불 때마다 우수수 벗겨지는 가을의 정점에 선 들판…….

아무리 붙잡고 발버둥 쳐도 잡히지 않고, 용납되지 않는 강물 같은 세월, 그냥 유유히 흘러갈 뿐인 삼라만상 불변의 진리가,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된다는 생자필멸(生者必滅)이던가.

중생이 네 겁이라고 했던가. 성립, 존속, 괴멸, 공무가 그것이다. 무릇 성하면 반드시 쇠함이 있고, 화합하여 모인 것은 이별을 거쳐, 괴멸되어 마침내 공무(空無)에 이른다는 대자연의 이치.

그렇게 보면 늙는다는 것이 절대로 슬픔이나 비통의 대상이 아니다. 도리어 클라이맥스라는 마지막 반전이 기다리고 있어서 더욱 가슴이 벅차는지도 모른다. 이름하여 대단원의 막이다. 아무리 아침이 신선하고 화려했어도 저녁노을의 장엄한 파노라마가 없다면 마침표를 찍지 못한 문장처럼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늙음도 대자연 앞에서는 축복이다. 중도에서 시지부지 소멸되지 않고 끝까지 수를 다한, 흡사 전 구간을 완주한 마라토너 같은 늠름함. 그 마지막 끝을 바르게 그리고 장엄하게 장식하기 위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몸부림. 생각해 보라. 늦가을 땡볕을 만나지 못했다면 알곡이 저처럼 탱탱하게 살찔 수 있으며, 과일의 과즙이 달콤한 당도를 머금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결정적인 결실은 노년기에 이뤄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을 들어 허공을 본다. 마지막까지 남아 더욱 빨갛게 물든 함박눈 속의 홍시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 어디 또 있던가. 늙어서도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분명 신의 은총임에 틀림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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