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녹색·생태주의적 시각의 통일

남북문제와 통일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녹색적 시각에서 남북문제를 주목하도록 요청하면 대부분 민둥산이 된 북한의 산림녹화를 이야기하고 북한의 수질오염과 쓰레기 등, 오염 문제의 해결을 지원하는 것으로 한정하여 이야기한다. 환경단체들이나 환경문제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인 경우가 있다. 사실 학자나 전문가들도 ‘지속가능한 발전(ESSD)’이라는 개념을 ‘이대로 발전을 지속적하고 싶다’는 정반대의 인식을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한국의 녹색이나 생태주의 논의가 20여 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환경과 공해문제 인식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정말 놀랍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다시 말하지만, 정치사상으로서 환경주의와 생태주의는 명확히 다르다. 아니 환경주의와 생태주의는 서로 적대적이기까지 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천운동으로서 환경운동, 생태주의운동, 녹색운동은 서로 친화성을 갖고 혼용해서 쓰고 있지만, 환경주의는 많은 사회적 현상과 문제 중에 오염과 훼손에 초점을 두고 이의 정화와 복원, 보호에만 한정되게 바라보는 시각이다. 그러나 녹색주의로 표현되는 생태주의는 자연에 대한 오염과 훼손뿐 아니라 그 같은 결과를 초래한 사상, 세계관과 더불어 정치와 경제, 문화, 국가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문제 삼는다. 또한, 생태주의운동은 이제껏 그동안 진보적 활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러나 기존의 진보와 타협할 수 없이 갈라서는 지점은 ‘생산력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환경주의는 연관된 전체적 관점의 결여로 인해, 결국 위기의 근본원인은 방치한 채 정화, 보존, 복원, 원상복구 등의 증상 치료에만 관심을 두어 위기를 초래한 산업사회의 구멍을 메워 주고 피해를 유예할 뿐, 극복해야 할 산업사회를 오히려 지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결국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기를 놓쳐 심각한 파국을 초래하기 때문에 ‘환경개량주의’로 비판받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녹색과 생태는 파괴된 산림의 복원이나 환경오염의 정화가 아니라, 문명 차원의 패러다임의 거대한 전환을 위한 메시지이자 신호(Signal)로 인식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통일된 국가를 상상하며 서술해보려고 한다. 지구상의 마지막 남은 분단국가의 통일이라는 과제에 녹색적 문명전환의 가치를 장착시켜 통일이 단순히 일국의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 문명전환의 시발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할 예정이다. 다시 말해 남북의 통일은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탈식민지 과제’의 극복에 머물지 않고, ‘탈근대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때 어떠한 미래사회를 구상하고 어떠한 국가를 상상할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2. 환경문제는 ‘전환’을 알리는 ‘메시지’

기후변화 문제와 생물 다양성 등 생태적 의제가 국제정치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이때, 통일된 미래의 평화국가를 설계하면서 생태적 의제는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일까? 심각해지는 기후변화와 각종 위기를 해결하는 일은 이제껏 인류가 알고 있는 사회변화의 폭과 깊이를 넘어서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전 지구적 ‘거대한 전환’을 강제당하고 있는 이때, 한반도의 통일문제는 이러한 전환의 메시지를 무시해도 되는가? 남한과 북한이 합쳐져 그저 정치 사회적 통일만 되면 과연 그 통일은 한반도의 장기적인 미래 희망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많은 이들이 환경문제가 인간의 생활양식과 그 사상적 토대에 대해 근본적인 전환을 강제하는 메시지라는 점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생태적 세계관은 본래 연결되어 있고 나눌 수 없는 세계를 쪼개고 갈라놓아, 낱낱이 분리해 온 근대적 패러다임의 미망을 벗어나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식물, 무생명들까지 서로 촘촘히 연결된 의존적인 관계임을 깨닫고, 이들 간의 통합적인 지혜로 새로운 의식변화를 도모해야 함을 주장하는 가치관이다. 또한 유한한 자원을 무한한 것으로 잘못 생각하여 GDP, GNP라는 생산(Product)과 소비를 기준으로 발전과 성장의 척도가 되어온 정치, 경제적 패러다임의 세계관에 대한 전환을 강제하는 메시지이다. 그리고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기독교의 직선적인 시간관, 수직 상승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하는 무한성장 논리, 생산력을 토대로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나아져야 한다’는 ‘진보’에 대한 강박, 생산, 소비, 폐기가 순환되는 순환사회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행복과 불행을 문화와 삶의 질, 사람들과의 관계성, 개인의 내면에서 찾지 않고 오로지 경제와 양적 재부의 축적으로 단일화하는 계량적 가치관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우쳐준다. 모든 것을 선과 악, 네 편과 내 편, 좌와 우, 진보와 보수로 구분하는 전형적인 흑백의 이분법이 사실이 아니며, 세계는 회색들의 집합이 아니고 실은 무지개의 다양한 컬러의 세계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생태적 세계관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생존경쟁이라고 규정한 다윈의 자연진화론을 사회에 잘못 적용한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이 결국 제국주의의 팽창논리와 산업주의 경쟁문화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현대의 생태학은 경쟁보다 상호의존, 상호보완, 다양성이 오히려 규정적 질서임을 깨닫게 해주고 그에 조응하는 사회변화를 도모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대립과 경쟁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승리를 위해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더 빨리, 더 많이’를 추구하는 목표지향적 속도사회, 그리고 그 속도사회를 위해 위계를 만들어온 근대적 세계관을 청산하고 개방과 참여, 과정과 관계지향적 사회, 느림과 단순한 생활양식과 서로를 돕는 호혜적 사회로 전환을 요구한다. 결국 자원무한주의라는 잘못된 인식을 토대로 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근대사회가 위기를 초래한 원인이기 때문에, 자원유한성을 토대로 양적이고 물질적인 성장이 아니라 내면 성숙의 사회, 경제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적 풍요, 자발적인 청빈의 사회로 나가지 않으면 인류의 미래가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 환경문제의 메시지이다.
신의 형상을 한 인간만이 자연계에 특별하고 유일한 지배자라는 ‘탈생물적 교만’은 결국 인간중심주의, 백인우월주의, 남성우월주의의 씨앗이었다. 인간에게 피조물을 지배하고 정복하라는 신의 가르침을 지고지순한 교의(Doctrine)로 생각해 온 바로 그 ‘지배’의 논리를 걷어내야 한다. 현재의 자기 세대, 자기 가족, 자기 국가의 이익이라는 ‘현세대주의’에서 벗어나, 과거 세대가 남겨준 자연유산 덕분에 누리고 있는 그 행복 그대로, 미래세대에게 전해주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현세대에 사는 인간들만의 합의에 기초한 민주주의이며, 결국 미래세대와 생명의 이익과 의사를 반영하지 않는 불안전한 민주주의임을 깨닫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진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본래 경계가 없는 토지와 물, 공기를 인위적으로 내 것과 네 것으로 구분하고 인간만이 배타적으로 독점하여 마음껏 채취, 수탈, 매매해 온 근대적 토지윤리를 패절하고 토지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미래세대와 생명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이고 물과 공기처럼 어느 누구도 ‘소유’라는 관념으로 독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나아가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거나 인간이 물건을 소유한다는 관념마저 없애야 한다.
오늘의 위기는 성과와 경쟁을 위해 규모의 경제를 지향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구조를 보편화하여 직접적인 민주적 의사수렴보다는 대의제 국민국가를 지향하는 사회가 된 데 따른 것이다. 따라서 생태위기의 극복은 지역 단위에서 생산, 소비, 폐기가 순환되고, 지역순환적 에너지와 주민의 능동적인 참여를 이루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중앙집중적 국가가 아니라 분권, 자치, 자립이 기반이 되는 풀뿌리 사회로 가야 한다. 또한 현대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필요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돈벌이와 이윤 추구를 위한 생산에 도착된 나머지, 식품의 경우 각종 착색제 발색제 등 유해물질을 함부로 사용해도 돈만 벌리면 된다는 논리가 지배해 왔고 결국 ‘차가운 시장’ ‘얼굴 없는 시장’을 만들어 왔다. 이러한 ‘탐욕(Greed)’의 시장을 바꿔 ‘필요(Needs)’에 근거하여 생산되는 사회가 되어 교환과정에서 끈끈한 공동체적 관계가 형성되는 ‘따뜻한 시장, 인간의 얼굴을 한 시장’으로 전환하여 시장을 성화(聖化)시켜야 한다.
돈과 욕망을 따라 이동하는 ‘떠돌이 주거 문화’에서는 더 이상 이웃 간의 공동체는 없으며, 주변의 자연을 지키고 책임지는 인식이 생길 수 없다. 생태주의는 ‘이웃 간의 공동체적 화합과, 주변 자연에 대한 책임의식’을 통해서만이 지켜질 수 있다는 ‘붙박이 정주문화’로의 전환을 요구한다. 노동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여 최대한 적게 일하면 좋다는 인식에서 벗어나, 노동은 임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실현하는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노동해방’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이와 함께 목표지향적이고 확대지향적이며, 가부장적인 남성성의 사회에서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과정지향적이며, 관계지향적인 여성성의 사회로 전환할 것을 강조한다.
에너지의 문제에서도 생태계는 오래전부터 인류를 향해 심각한 경고 신호를 보내왔다.
원자력발전소라는 거대한 플랜트의 유지는 강력한 중앙중심적 국가의 통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한계수명 30여 년밖에 안 되는 현세대만의 전력소비를 위해 이후 수만 년 동안 후세들에게 방사능 피해와 폐기에 대한 위험을 떠넘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원자력은 하루빨리 단계적으로 폐기되지 않으면 안 될 에너지라는 것을 1986년 체르노빌 사건과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통해 우리는 심각하게 깨닫게 되었다. 현세대가 발생시킨 문제는 현세대가 온전히 처리하고 그 과보를 받아야 하며, 절대 미래세대에게 넘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한 생태적 윤리 중 하나이다. 이렇게 볼 때 핵발전소는 더 이상 지속가능한 에너지가 아니고 태양력, 풍력, 지열, 파력, 조력 등의 대안에너지로 사회적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지역에너지는 결국 지역 분권화된 구조에서 더욱 잘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세계 인구의 5%에 불과한 미국이 세계석유의 23%를 소비하는 미국식 생활양식(American Life Style)을 모든 인류가 지고지순의 목표로 삼는 한, 인류의 절멸은 자명한 사실이며 그러한 발전 패러다임을 가난한 나라에 이식하려는 구호와 개발지원은 결과적으로 지역 고유의 전통적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들을 야수적인 시장경제에 편입시켜 경제식민지를 만들고 인류의 위기를 가속화시킨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의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자립적인 마을개발과 공동체를 토대로 ‘가난도 부정하지만, 풍요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개발지원과 구호활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환경문제는 잘못된 세계관을 토대로 만들어진 수많은 사회적 문제들이 가장 약한 고리인 ‘환경위기’라는 증상으로 드러난 것인 만큼, 환경 그 자체의 치유뿐 아니라 원인적 접근을 통해 근본 치유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인식에서 접근해야 한다.


3. 통일, 탈식민지와 탈근대의 과제를 함께 해결해야

분단국가였던 베트남이 통일을 이룩하고, 독일과 예멘이 통일했다. 이제 한반도는 마지막 남아 있는 분단국가이다. 한국의 분단은 미국과 일본을 한편으로 하고 중국과 소련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이해가 얽힌 식민지배의 현장이었다. 이제껏 통일논의는 이러한 식민지적 과제를 해소를 통해 남한과 북한이 통합되어 커다란 강성대국의 국민국가가 되는 것을 꿈꾸어 왔다.
그러나 1992년 브라질 리우환경회의는 이제까지의 근대적 개발과 발전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깃발을 내걸었다. ‘환경적으로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발전(ESSD, 약칭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언이었다. 현재의 발전, 성장, 진보는 미래를 유토피아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와 절멸로 가는 디스토피아의 ‘지속불(不)가능한 발전’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까지의 근대적 삶을 전복하여 ‘지속가능한 발전’ 사회가 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는 선언이었다. 이 ‘지속가능한 발전’은 명확히 ‘단절과 전환’을 강제한다. 근대적 세계관을 단절하고 탈근대적 사회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1980년대 초 독일의 녹색당이 내세운 녹색정치의 4가지 정책원칙(기둥)이 있다. 첫 번째는 ‘생태주의’이다. 모든 것을 연결된 전체로 인식하는 그물망적 사고, 관계망적 사고이다. 부분에 집착하거나 현장에 매이지 않고 통합적인 근원을 전체로 사고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풀뿌리 분권화’이다. 대부분의 녹색주의자는 현재의 거대한 국민국가 시스템으로 위기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풀뿌리 단위의 지방분권과 자치’를 강조한다. 세 번째는 ‘비폭력 사회’이다. 폭력적 방식을 지양하고 비폭력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네 번째는 ‘사회적 책임’이다. 인권, 복지, 여성, 청소년, 외국인 등의 연관된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다른 나라에도 녹색당이 활발하게 확장되면서 여기에 몇 가지가 추가된다. 그중 하나가 ‘생태적 민주주의’의 실현이다. 오늘날 민주주의는 ‘현세대 인간’에게만 국한된 불완전한 민주주의로, 앞으로 미래세대의 의사와 뭇 생명의 권리까지 수렴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분법을 부정하고 ‘다양성의 존중’을 기치로 내거는 경우가 많다.
남북의 통일문제는 ‘탈식민지 과제’와 ‘탈근대적 과제’를 통합하여 동시에 해결하려는 장기적 전망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상황은 어느 정도의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 반대로 남한은 탈근대화를 자신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긴 호흡으로 보면 양측 모두 탈근대화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통일은 남북에 국한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하고 더 나아가 인류 전체에 희망을 주는 출발점이 되도록 해야 한다.

4. 우리가 상상하는 한반도 녹색미래의 의제

1) 문명전환을 함께 도모하는 지속가능한 발전 사회
이제까지 근대사회는 지속‘불’가능한 발전 사회 모델이었다. 생산력이 높아지고 잘살게 되며, 고도성장을 구가하며 강성대국이 되는 것이 근대국가의 목표였다. 가장 현실성이 높은 생각이지만,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로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시대에 걸맞지 않은 낡은 모델이다. 모든 나라가 미국과 유럽, 남한과 같은 소비사회로 간다면 그것은 인류의 재앙을 앞당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생산력주의를 진보로 신봉해온 사람들은 이제껏 우리의 노력이 미래의 희망이 아니라 절망과 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충격적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는 성장 일변도의 지속‘불’가능한 발전 모델을 미래의 통일국가 목표로 삼아야 할까?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환경파괴적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추구해온 지속불가능한 발전방식을 패절하고, 경제적, 물질적 성장만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 생태, 문화가 골고루 조화를 이루는 발전방식을 채택하도록 한다. 또한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 자연이 평화로운 공동체로서 지속가능한 순환사회를 이루는 것이다. 미래세대에게 물려줄 지속가능한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 이제까지 GDP나 GNP처럼 생산성(Product)만을 생각하는 경제 중심적 발전이 아니라, ‘사회적 지속가능성,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통합적으로 고려한 발전방식으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남북의 통일 과정은 문명사적 전환을 함께 도모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우리는 통일이 어느 일방에 의해 흡수통합이 되는 것은 원치도 않으며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통합 과정에서 통일 한반도의 개발 방향과 지원은 남한이 주도할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인프라와 사회간접자본을 형성하는 데 남한사회의 많은 협력이 필요한데, 이때 무분별한 개발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또한 오염원과 혐오시설을 북으로 이전시키려는 한국이나 외국의 불량자본, 남한의 그릇된 문화를 북한에 이식하고자 하는 무분별한 정치 종교세력의 준동을 방지해야 한다. 남북한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자치적 힘에 의해 지속가능한 개발이 이루어지도록 협력해야 한다.

2) 지역분권과 자치를 기반으로 한 다연방 네트워크 국가
녹색적 비전은 중앙권력 중심의 사회가 아니라 풀뿌리 민주주의와 지역분권, 지방자치 중심의 사회가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실제 우리 사회도 지방자치가 더욱 강화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사고는 지구적으로, 실천은 지역적으로(Think Globally, Act Locally)” 하라는 말은 바로 지구적 시각의 중요성과 동시에 지역 단위의 행동을 강조한 것이다. 지방자치는 중앙에 집중된 권한을 지역 단위로 분산시켜 지역공동체에서 주민들의 참여와 자치를 통해 보편적인 국민주권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그동안 고려연방제든, 남북연합, 남북공동체 방안이든 대체로 중앙집중형 국민국가가 통일의 모델이었다. 그러나 이미 남북의 상황이 통일방안을 제기했던 당시와 달라졌기에, 이제는 새로운 시대적 과제에 걸맞은 진화된 비전으로서 제3의 모델이 필요하다. 이 모델은 더욱 발전된 민주적 시스템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환영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남한과 북한만의 2개의 연방이 아니라 지방자치라는 세계적 흐름에 맞게 분권화를 토대로 한 10여 개 또는 20여 개 이상의 연방 지역정부를 기조로 한 국가 모델이 더욱 민주주의적이고, 더욱 녹색적인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이라는 2개 체제의 통합이라는 사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대다(多對多)의 상호관계를 통해 서로 자립과 협력을 이루는 미래를 구상하는 것이다. 물론 각 연방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중앙정부는 이를 조정하는 여전히 큰 역할을 해야 한다.
성장과 생산력의 고도화 사회에서는 중앙권력 중심의 사회가 적절할 수 있지만, 이제 성숙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식민지가 된 지역을 주민들의 자기 결정권을 높이는 방향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지역민들의 자기 결정력이 높아지면 식량생산과 자원의 이용, 폐기물의 관리, 에너지의 사용 등을 지역 내에서 순환하고 자립하는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는데, 그 효율성은 중앙집중형 시스템보다 훨씬 높다.
진화된 민주주의 모델로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를 꼽고 있다. 스위스는 26개의 연방주(Kanton)로 구성되었는데, 이 연방은 스스로 세금을 징수하고 세출을 결정하며 재정주권을 행사하고, 독자적인 주 경찰과 법원을 보유한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교육에서 운전면허시험까지 일상생활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주 단위에서 결정하고 있다. 사실상 독립적인 미니국가들의 연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연방주 안에 모두 3천여 개의 지방자치단체가 있는데, 공공 업무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것은 주민투표를 통해 스스로 결정한다.
독일의 경우도 16개 작은 나라들의 구성체라고 할 수 있다. 16개의 주는 복지나 치안 등을 제외한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사항을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때문이다. 각 주는 기본법의 테두리에서 독자적인 주 헌법을 갖고 있고, 주의회 선거에서 직접투표로 선출된 다수당이 주정부를 구성한다. 선거 날짜도 주별로 다르고 임기조차 4~5년으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연방정부와 다른 이념과 성향의 연정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다. 독일의 지방자치단체로는 광역단체인 크라이스(Kreis)와 기초단위인 게마인데(Gemeinde)가 있다. 이러한 분권화된 사회가 독일통일에 큰 역할을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91년 통일 당시 동독은 경제력에서 서독의 33%에 불과했지만, 25년이 지난 2014년 현재 서독의 67%로 성장했는데, 지방자치와 분권화 사회의 효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 사회도 “지역이 희망이다.”라는 이야기가 빈번히 거론되며, 전국의 균형 발전과 더불어 분권화가 민주주의를 위한 방향임을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은 이러한 발전된 민주주의를 고려하여 설계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기존의 논의를 훌쩍 뛰어넘어 분권화를 토대로 한 ‘다연방 통일국가’ 또는 ‘다연방 네트워크 국가’를 구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방자치의 활성화는 주민자치의 충실, 강화라는 기본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주민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자치라면 진정한 자치라고 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주민자치의 정치적 실험은 남한이 먼저 시도하여 안정화하는 것이 통일을 대비하여 매우 중요하다.

3) 협동경제를 기반으로 한 남북 호혜사회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한반도의 현실로 존재하는 체제이지만 이 또한 근대체제의 하나일 뿐이다. 근대국가의 성장론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철학과 정치, 경제는 하나뿐인 행성 파괴와 자원소모적인 직선적 발전을 기조로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두 개의 상이한 경제 체제를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 없이 암묵적으로 자기 중심의 흡수통일을 구상하는 것으로 얼버무려왔다. 그러나 우리가 상상해야 할 시스템은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와 일란성 쌍둥이인 사회주의라는 근대국가의 틀까지도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 남한 경제의 절대적 우위 상황에서 북한의 붕괴로 흡수통합 되는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도 비극이지만, 남한사회도 재앙적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물론 소련과 중국이 이를 방관할 리는 없겠지만, 현재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평화체제로 만든 뒤에 한반도의 경제적 협력과 통합을 어느 방향으로 추구해 갈지는 큰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통일이 불행이 아니라 축복이 되기 위해, 통일국가가 퇴행된 사회가 아니라 진화된 사회가 되기 위해 경제적 모델에 대한 단계적 과정을 준비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남북 민초들의 평화경제에 대한 염원과 협력이 전제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어떤 경제 체제를 구상할 수 있을까?
사적 소유를 토대로 한 남한의 자본주의는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초래된 양극화 현상, 재벌에 편중된 부의 집중, 자연 파괴와 무분별한 개발로 지속불가능한 경제를 만들어왔다.
한편 북한은 급격한 사회주의 이행으로 인해 국가적 소유와 협동적 소유(협동농장)를 국가 주도로 추진함으로써 인민들의 자유와 자발성이 결여되었고, 중화학공업과 군수산업 중심으로 인해 주민들의 삶과 연관이 많은 경공업은 생산성이 낮은 경제 체제가 되었다. 1990년 중반의 각종 재난과 기근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고, 자율과 창의성, 집단적 생산성은 억압되었다.
통일시대의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민의 자율성을 회복하고 신장하는 것이다. 지나친 자본 주도의 경제와 부의 집중도 제한해야 하지만, 지나친 국가주도 경제와 권력집중도 제한되어야 한다. 중요 산업과 복지는 국가주도의 국유화로, 중화학공업 영역은 사적 소유에 기초한 사기업 영역으로 하되, 농업이나 생필품 등 민초들의 생활에 직접 영향이 있는 것은 협동적 소유나 공동체적 소유에 기초한 혼합경제가 되어야 한다. 이들 협동경제에 기초한 사회적 경제 등 민간자율경제의 비중을 3분의 1로 높이면서 사적 소유, 국가적 소유 등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혼합경제 형태를 구상해 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남한의 민(民)자율 경제진영과 북의 협동조합 및 협동기업 간의 인적·물적 교류를 통해 북의 민자율 경제가 발아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이렇게 한반도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높이고 경제, 사회, 문화적 격차를 줄이는 활동을 통해 민자율의 협동경제 진영을 더욱 확대하고, 이를 토대로 동아시아의 호혜적 협동경제와 민자율 경제 네트워크를 형성해 ‘동아시아 경제공동체’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
통일은 남북 모두에 필연적으로 경제 시스템의 엄청난 변화가 수반될 것이다. 유라시아철도와 천연가스 이동 등 중국과 러시아, 유럽 등 대륙과의 연관성이 높아지고 교류가 더욱 긴밀해지고 이로 인해 상상을 초월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과제를 안고 있다. 북쪽은 ‘성장’이, 남쪽은 ‘성숙’이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북은 개발과 발전이라는 근대화를 일정 수준까지 이룩해야 하며 남은 현재의 탈근대적 발전모델로 재구조화해야 한다.

4) 자연환경과 생명을 소중히 하는 미래세대의 사회
단지 푸른 숲과 맑은 하늘, 깨끗한 물의 보존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의 공존 공생이 더욱 중요하다. 환경문제는 자연 생태계의 비가역적 특성과 자연자원 매장량의 한계 외에 대량채취,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로 이어지는 현대사회의 경제구조와 생활양식 자체에 그 원인이 자리하고 있다. 환경에 대한 준비 없이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통일이 진행된다면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을 노정하게 될 것이다.
북한의 심각한 환경파괴는 남한사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 아니라 통일시대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이다. 북한은 석탄을 주요 에너지원으로 한 중화학공업을 기조로 하면서 산림생태계와 환경오염이 많이 발생했고, 낙후된 생산설비와 오염처리 기반시설의 미비, 군사국가의 경직된 체제로 인해 환경문제에 대한 대응이나 처리능력이 떨어져 1995년 대홍수와 1997년 대가뭄 등 자연재난에 치명적인 피해를 보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중국, 러시아의 지원 중단으로 석유공급이 끊기자, 국토의 80%인 북한의 산림생태계가 난방과 취사 목적의 광범위한 벌목이 진행되어 파괴는 참혹할 정도로 파괴되었다.
이후 개발협력 과정에서 사전환경영향평가 등의 제도적 기반이 미약한 상태에서 도로 항만 행정시스템의 건설 등 기반시설을 건립하는 경우 막대한 생태파괴가 수반되는 개발사업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남한은 물론 중국과 주변국의 오염시설들이 자국의 높은 환경규제를 피해 북한으로 대량 이전, 유입될 가능성도 있다. 나아가 북한 스스로 외화벌이의 일환으로 유해성 폐기물 수입에 적극 나설 가능성도 있고, GMO 농작물의 시험재배 등 선진국가 자본들의 신제품 개발을 위한 안전성 검증 시험장이 될 우려도 있다. 또한 공장식 축산, 화학형 집약농업 등 환경에 큰 피해를 주는 농축산 산업들이 생산성을 이유로 진출할 가능성도 있으며, 일회용 소비생활문화와 생활양식으로 폐기물 문제가 급속도로 심화될 수 있다.
생태학적 자립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이룬 경제성장은 이후 큰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된다. 성장제일주의, 생산력 중심주의, 목표달성주의, 속도주의, 결과 중심주의와 같은 개발국가의 관성으로 남한사회의 생태적 자립기반이 무너져, 현재 남한의 식량 자급률은 불과 22.6%(쌀을 빼면 3.7%)이며 에너지 자급률은 4%에 불과하다. 식량과 에너지 문제는 자립적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남한과 북한 공히 농업은 자립적 사회 기반의 중요한 근본으로 생각하여 안정화하는 것을 기본 틀로 해야 한다. 따라서 지속가능한 농업생산 기반구축과 식량 자급력 향상은 남북 공동의 주요 과제이다. 에너지 문제 또한 생태학적 분산과 자립의 원칙에 맞게 원전에 의존하지 않고, 신재생 에너지를 중심으로 저에너지 소비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 군비 축소와 탈핵 역시 중요한 과제이다.
따라서 생태 패러다임에 입각한 녹색 한반도를 만들기 위해선 무엇보다 환경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통일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초기에는 남북 주민들의 생존과 생계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방안을 찾되, 생태적 조건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경제와 생태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면서 협력을 통해 자립적 기반을 마련하도록 한다. 이를 위해 남북한 생태계와 환경오염에 대한 공동조사와 협력적 관리방안을 모색하고, 기상정보 공유 등 기후변화에 대한 공동 대응, 각종 생태학적 질병에 대한 공동 대응, DMZ 등 생태학적 자원보존지역의 공동 관리, 국립공원 관리, 생태계 서식지 관리, 어족자원, 멸종위기종, 생물 다양성 관리 등을 공동으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 또한, 중국의 황사, 스모그, 황해 오염 문제, 어족자원 남획 문제, 일본의 방사능 오염 등에 대해서도 공동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 이뿐 아니라 행정구역과 관리체계 개편에서는, 풀뿌리 차원의 생태적 순환시스템을 중층적으로 설계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미래세대와 생명위원회’를 두어 지속가능한 개발목표(SDGs)를 이루어 나가되 가난한 나라와 미래세대에게 진 환경 부채를 책임지며 이에 대한 차별적 책임을 갖고 협력하도록 한다.

5) 통합하고 협력하는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고려 말 기득권 권문세가들은 원나라에 의지하다 보니 떠오르는 명나라의 성장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신진사대부들은 그 변화를 읽고 고려왕조를 멸망시키고 조선왕조를 등장시켰다. 이후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는 아무도 그 정세 변화를 읽지 못하여 병자호란을 겪었다. 또한 주변 패권국가인 청나라에서 일본으로 세력이 교체되는 시기에도 그것을 제대로 읽지 못해 결국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현재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힘은 상대적을 줄어들어 간섭의 힘이 약화되고 있고, 중국은 부상하는 국가이지만 아직 간섭할 만한 상황은 아니다. 미국의 영향력이 남아 있고, 중국은 아직 강화되기 전인 현재 상황이 우리가 원하는 통일문제를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유럽의 화약고였던 자르, 루르 지역을 공동개발하고 관리했던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는 오늘날 유럽연합(EU)의 모태가 되었다. 통일국가로서 한반도는 미국 및 일본의 패권과 중국의 패권을 완충하면서 한 국가의 통일을 뛰어넘어 ‘동아시아 경제공동체이자 평화공동체’를 만드는 주도력을 발휘해야 한다.
세계적 군비축소의 기조에 역행하는 예외 지역이 바로 동아시아이다. 분단으로 인한 남북 간의 군사적 비용지출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로 인해 일본은 재무장하려 하고, 중국 또한 세계 2위의 군사비 지출국가가 되었다. 남북의 통일은 이렇게 최대의 군사비를 지출하는 분쟁과 대립의 격전지인 동아시아의 분쟁을 녹여 평화의 공동체로 만드는 거대한 전환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과거 안중근이 주장한 동양평화론처럼 통일 이후 한반도가 평화의 지도력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통일 미래는 ‘동아시아 평화 중심 국가건설’임을 내외에 천명하도록 한다. 또한 DMZ 세계평화공원건립 구상과 서해평화협력지대 구상 등을 실현하여, 분쟁지역의 평화협력지대 전환을 모델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를 통해 아시아 지역의 분쟁지인 독도, 조어도, 쿠릴열도 등의 해결에 좋은 전범을 만들어, 남북경협과 북·중 경협, 만주경제권의 공동개발, 유라시아대륙 평화경제권 형성 등에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다.
통합하고 서로 협력하는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건설을 통일의 목표로 삼는다면 한반도는 아시아 국가들과 중, 일, 미의 각축 속에서 “Between and Beyond” 정책을 통하여 하드 파워가 아니라 소프트 파워로 평화의 적극적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6) 남북 주민들의 문화적, 정서적 통합
남북은 60년간 서로 적대하면서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살아왔다. 더욱이 북한의 기아 문제로 인한 대량 탈북과 이들이 남한에 정착하여 느끼는 문화적 이질감과 갈등의 간극은 생각만큼 간단치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녹색적 통일 미래를 구상한다면 마땅히 적대시하던 남과 북을 서로 살리고 키워서 열린 관계를 만들어가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대립하고 증오했던 60년간의 상처를 가능한 짧은 시간 내에 치유하는 다양한 정치적 문화적 장치와 국민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남북 주민들의 문화적 정서적 통합을 고려하지 않는 정치·경제적인 남북통합은 “모래 위에 쌓은 성”이 될 가능성이 높다. 자본주의 북예멘과 사회주의 남예멘이 ‘합의에 의한 통일’을 했지만, 권력 분배과정의 갈등이 곧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문화적 통합이나 공감을 소홀히 해서 만들어낸 값비싼 대가인 것이다.
이런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통일을 고려한 새로운 시각의 역사관을 마주해야 한다. 그동안 북한은 김일성 부대를 중심으로 한 식민지 해방운동의 역사기술, 남한은 우익계열의 해방운동 기술을 중심에 두고 서로를 배제해왔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극복하여 통일이 되기 전에 역사와 문화적 통합을 만들어 나아가야 한다.
1천여 년 전, 신라와 백제, 고구려가 서로 싸울 당시에는 원수처럼 대립했을지 모르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겐 계백 장군이나 김유신, 광개토대왕 등을 모두 똑같이 존경하는 한국의 위인들로 생각한다. 지금 누구도 백제 편, 신라 편에 서서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현재의 이념적 정치적 갈등을 역사적 시간을 늘려놓으면 결국 모두 똑같이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적 인물이다. 이러한 장기적 안목에 따른 역사문화의 통합이 중요하다.
지금은 우리 모두 절실하게 통일을 염원하지만, 통일을 촉진하는 정서적 동력인 1세대 이산가족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통일을 위한 공통분모를 찾기가 어렵게 된다. 이분들이 돌아가시면 2세대들은 기회가 와도 서로 만나길 꺼리는 분위기가 되고, 이러한 문화적 거리감이 통일에 대한 무관심과 회의를 확산하게 된다. 효율을 강조하는 남한사회와 평등을 강조하는 북한은 서로 상생하는 문화적 결합을 통해 서로 장점을 교환하여 ‘새로운 통일 문화와 정서’를 만들어 가도록 해야 한다. 남과 북이 함께 스포츠팀을 구성하거나 합주단을 결성하고, 영화도 공동으로 제작하고, 남한의 동화작가가 글을 쓰고 북한의 화가가 삽화를 그리는 등 다양한 영역에서 함께 서로의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공동작업을 전개할 필요가 있다.

7) 750만 재외동포와 재외국민들의 참여와 협력

분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만, 특히 750만 재외동포들이 겪는 피해는 더욱 깊고 남다르다. 재외동포는 현재 중국에 270만, 미국에 218만, 일본에 90만, 러시아 등 구소련 지역에 53만명 정도로 한반도 주변 4대 강국에 대부분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해외에 살면서 교민들 간에 남쪽과 북쪽으로 갈려 서로 반복하며 살고 있다. 특히 일본은 민단과 조총련으로 갈등해 왔다. 또한 재중 교포나 재러시아 교포는 일제 식민지 시절 고국을 등질 수밖에 없는 고난의 세월과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겪었던 큰 고통의 이주 역사를 가진 동포임에도 가장 차별받고 홀대받고 있다. 40년 식민통치 기간과 70년간의 분단시대를 통해 내면화된 분열과 패배의 내상을 치유하고, 통일 과정에서 이들의 에너지와 힘을 활용하여 이상적인 평화국가 모델을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런데 한반도를 넘어 세계로 흩어진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힘을 모으는 것은 단순히 민족주의를 내세워 세력을 모으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동안 갈라진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인류의 희망을 창조하는 에너지를 모으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들을 우리 국민이냐 아니냐, 우리 민족이냐 아니냐, 우리 국경 안에 사는가 밖에 사는가로 가르는 시각은 잘못된 것이다. 이들 해외동포들을 고려하여 한 사람이 하나의 국적이 아니라 오히려 이중, 삼중의 다중국적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 통일한국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자신이 살고 있는 자리에서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도록 지원하고 협력해야 한다.

그래서 재외교포와 조선족, 고려인 등, 역사적으로 한국민이었던 사람들에게 통일한국은 본국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회복하게 하고, 선 자리에서 동아시아의 평화공동체의 창조적 촉매 역할을 하도록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750만 해외동포에게 통일은 세력과 조직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 잔재를 극복하고,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면서 협력하고 상호부조의 통합성을 높여나가는 것을 모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단일민족 신화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며 재외동포, 재외국민, 탈북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안정되게 살 수 있도록 차별을 금지하고 사회적 관용성을 높이는 사회문화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8) 문명전환기의 새로운 사회는 시민사회가 주도해야

지구촌의 단절과 한반도의 단절은 다르지 않으며, 인류의 단절과 한민족의 단절도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그동안 동서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로 나뉘고 갈라져, 인간과 인간의 단절로 공동체가 해체되고, 인간과 자연의 단절은 생태계 파괴를 초래했다. 민족의 단절은 이산가족을 양산했고 민족의 삶 전체를 이념의 노예로 만들었다. 이러한 단절의 근대문명 패러다임이 오늘날 분단을 초래한 근원이다. 따라서 통일은 이렇게 끊어지고 갈라진 단절을 잇고 봉합하고 교류하고 연결하는 관계 맺기 작업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통일국가’를 만드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통일문명’도 함께 만들어 가야 한다. 이러한 통일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다. 화일(和一)이거나 전일(全一)이다. 다중주체의 새로운 통일이다. 통일은 거대한 국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만들기의 과정이자, 새로운 문명의 창조과정이어야 하며, 생명평화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는 한반도 미래구상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 생태적 평화, 사회적 평화를 통일의 비전으로 삼아 한반도 생명평화공동체를 이룩해야 한다.

오늘날 산업문명은 번영의 극점에서 역설적이게도 지구적 생태위기와 경제위기, 그리고 사회위기라는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문명위기를 초래해, 인류를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한 우리에겐 ‘전환’만이 희망이다. 이 전환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특정 이데올로기가 아닌 문명적 전환이며 동학의 후천개벽이기도 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이며, 가치의 중심이동이다. 양의 시대에서 음의 시대로, 남성, 물질, 경쟁, 성장, 빠름, 큰 것에서 여성, 정신, 협력, 성숙, 느림, 작은 것으로의 중심이동이다. 그래서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적 생태문명으로, 근대국가에서 탈국가적 지구문명으로,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적 정신문명으로 전환을 의미하는 통일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새로운 하나 됨과 한반도 생명평화공동체는 ‘새로운 사람 되기’와 함께해야 한다. 남북 사람들의 변화 없이 사회 변화는 없다. 양쪽 주민들 마음의 통일과 남북의 정치적 통일은 뗄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은 정치인이나 경제인들이 할 수 없다. 결국 민의 자발성에 기초한 정신운동과 시민단체들의 조직적 실천운동이 결합하여야 한다. 그래서 시민단체들이 통일의 격렬한 과정에서 균형자, 감시자, 조정자, 대안제시와 실천가이자 여건 조성자가 되어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재외국민, 북한의 주민들과 탈북자, 해외교포 등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각별히 보호하는 역할도 시민사회가 해야 한다.

과거 〈3·1 기미 독립선언문〉의 내용은 선언문이면서 동시에 자기 약속의 시민협약이었다. 남북한주민들이 통일의 마음을 준비하고 대비하는 의미에서 통일사회를 위한 ‘시민협약’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통일의 열망과 에너지를 모으는 중요한 활동으로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5. 미래의 희망과 비전, 녹색 통일

‘통일이 밥 먹여 주나?’라고 비판하는 젊은이들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분단 1세대들에게 통일은 간절한 것이지만, 2세대들에겐 통일은 그저 부모님들의 과거 기억에 있을 뿐이다. 분단에 익숙한 그들에게 통일은 현재 안정의 교란을 뜻하며, 그다지 바라지 않는 변화이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사회의 양극화와 사회갈등과 비정규직의 확산, 세계 1위의 자살률과 교통사고 등 암울한 예측일 뿐 어느 것 하나도 미래의 비전을 꿈꾸고 희망이 될 만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젊은이들이 살아야 할 찬란한 미래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일까? 남북문제의 해소, 통일이 바로 그 찬란한 출구이다. 통일사회의 비전은 기존의 미래 희망과는 비견이 안 될 만큼 거대하다. 젊은이들에겐 통일이 당연히 밥을 먹여주고, 일자리를 제공하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경제적 사회적 활력소가 된다.

북한이라는 국가에 가로막혀 남한은 사실 대륙과 떨어진 섬에 불과했다. 그러나 통일은 이러한 섬을 대륙과 잇고,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여 우리 민족의 웅대한 상상력과 비전을 회복하는 기회가 된다. 통일을 위해 서로 지원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남한, 북한의 젊은이들에겐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 틀림없다. 통일이야말로 희망과 꿈이 없는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해주는 유일한 비전이 된다. 

통일은 우리에겐 운명이다. 남북한 국민들이 어차피 가까운 장래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지각변동의 변화이다. 분단된 나라에서 분단을 청산하자는 것이 과거의 통일론이라면 미래의 희망과 비전을 선택하자는 것이 새로운 통일론이다. 남북의 과제뿐 아니라 이를 뛰어넘어 전 인류적인 과제의 해결까지 포함한 고품위 해법을 마련해야 한다.

국가의 위상과 국격을 높이고 위기의 세계에 희망의 미래를 선물하는 통일의 길, 그것은 생태 패러다임에 따라 지속가능한 녹색 한반도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실현에 달려 있다. ■

 

유정길 /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 에코붓다 공동대표와 평화재단 기획실장을 역임했으며 국제개발협력기구인 한국JTS의 카불 팀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저서로 《생태사회와 녹색불교》 공저로 《불교의 생태적 지혜와 환경》 번역서로 《그린피스 이야기》 등이 있다. 현재 한살림 모심과 살림연구소, 전국귀농운동본부, 녹색교육센터 등의 이사,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중이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