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사들의 어록이나 게송들을 읽다 보면 모순과 황당한 어법의 언구들을 만나게 된다. 알 듯도 하나 확실한 감이 안 잡히는 것이다. 불가언설(不可言說)의 종지는 이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인가. 부득이 이런 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하지만 ‘의식의 진화’가 이뤄진 요즘 세상이다. 어떤 식으로든 요해가 필요한 것이다. 선의 언어체계 역시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함일 것이다. 가리키려는 그 ‘무언가’를 먼저 파악해두면, 게송을 해독함에서 심적 부담이 덜어질 거라 본다. 여기 옛 선사의 게송 한 편을 소개해본다. 아마 일반 상식에서 보자면 난해한 게송들 가운데 제일 난해한 게송으로 꼽힐 만하겠다.

海底泥牛含月走 바다 밑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아난다.
巖前石虎抱兒眠 바위 앞의 돌호랑이 아기 안고 졸고 있다.
鐵蛇鑽入金剛眼 쇠로 만든 독사가 금강 눈을 뚫고 들고
崑崙騎象鷺鷥牽 곤륜족 깜둥이가 코끼리 타고 해오라기 끈다.

이 게송은 중국 송 대의 선승이며 《선요(禪要)》의 저자로 잘 알려진 고봉원묘가 읊은 것이다.
첫눈에 말이 안 되는 구절들만 계속 이어져 당혹감만을 안겨준다. 일상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불가능한 시다. ‘진흙소’는 무엇이고, ‘돌호랑이’나 ‘쇠로 만든 독사’는 또 무엇인가.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혹여 ‘진리 당체’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인가. 너무도 해괴한 표현이어서 그 의미를 상상하거나 추측하기조차 어렵다.

더욱이 “바다 밑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아난다.”는 구절을 보면 환장할 노릇이다. 바다 밑을 달리는 진흙소라? 설령 바다 밑에서 진흙소가 달리고 있다고 가정한다 해도 진흙소가 온전하게 남아 있을 리 없다. 그 진흙소는 바닷물에 들어가자마자 바다 밑을 닿기도 전에 이미 흔적도 없이 녹아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 정황인데 그 소가 하늘에나 떠 있을 달을 물고 달린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머지 구절들도 다 그렇다. 얼토당토않은 구절들이다. 망상에 시달리는 중증 정신병 환자의 헛소리로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진흙소 같은 신조어는 정신병 환자의 일부 증상(neologism)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가에서는 널리 알려진 유명한 게송이다. 그렇긴 해도 아무리 궁구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펴 해독을 한다 하더라도 뒤끝이 개운치가 않다. 시간을 두고 이런 선리시를 구질구질하게 해명하려 들다가는 자못 자가당착에 빠져 더 혼돈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될지 모른다. 언어적 추리/추론에 매달리다가는 분별 망상만을 더욱 키울 소지가 다분해서다. 하지만 공사상에 대한 근본 입장을 떠나지 않았을 것 같으면, 해독에 그리 큰 무리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먼저 이 게송을 읽음에 있어 한 가지 ‘확실하게’ 알아차려야 할 일이 있다. 단어 개념에 대해서다. 도대체 무생물과 생물, 그러니까 무정물과 유정물을 결합해 만든 신조어가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인가. 그 ‘증상’의 유래와 더불어 그것의 함의를 어떻게까지 추측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물론 붓다께서 설하시던 법문 가운데 비유로 엉뚱한 관념을 빗대어, 토끼의 뿔이니 거북의 털이니 하는 신조어가 있었다. 아마 이런 신조어는 중국에 선불교가 정착되면서, 중국어의 표의문자적(表意文字的) 맥락, 노장사상의 영향하에서 배어난 ‘과대한 상징이나 은유적 표현들’의 차용 그리고 선사들의 창의적 발상에 힘입어 보다 널리 활용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는 이 게송에 나온 신조어의 함의가 대략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보다 역동적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라는 견해를 갖고 있다. 이런 이해의 바탕에서다. 물론 이 신조어의 함의를 논하기 전에, 그 배경으로 사전에 분명히 알아둬야 할 대목이 있다.

알다시피 먼저 색즉시공에 대해서다. 색은 이 몸은 물론 물질계, 혹은 형상을 갖춘 일체를 말한다. 물질에서는 일정한 성품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어떤 물질이든 그것은 여러 구성 요소/성분들이 화학적 작용이나 물리적 작용을 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고, 그것은 늘 변화를 할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 색계에서 오직 한 가지 변치 않는 진리가 있다면, 누군가 말했듯이 사물은 늘 변화를 하게 마련이라는 하나의 사실일 뿐이다.

생명체의 생로병사란 말도, 사물들의 성주괴공(成住壞空)이란 말도 일체가 오직 하나의 원리, 곧 변화/자연에 순응하며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일체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할 뿐이니, 어떤 사물이든, 어떤 생명체든 거기에서 일정한 성품/변치 않는 아이덴티티/변치 않는 고유한 가치 같은 게 있을 리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이덴티티니 민족성이니 개인의 자부심이니 가치관이니 하는 것들은 한때 지속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착각됐거나 학습됐지만, 사실은 시간에 따라 사회적 여건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가설물이요, 인공물이었음을 우리는 나중에 스스로 알게 된다.

어렸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같은가, 다른가. 일체가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엄밀히 말해 옛날의 ‘나’와 현재의 ‘나’는 한 몸에서 벌어진 일이니, 다만 ‘같은 것처럼’만 보일 뿐이라는 말이 정확한 말일 것이다. 옛날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른 것이다. 여러 면에서 확연히 다르다. 줄곧 변화에 변화를 거듭해 왔으니 분명 다른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나’라는 것은 없다는 진리에도 이른다.

‘나’라고 내세우는 일도, ‘나’라고 하는 생각 그 자체도 하나의 관념이요, 환이라 보는 것이 불교의 세계관이다. 색(몸)뿐만이 아니라 생각, 느낌, 의지, 인식도 다 수시로, 아니 순간순간 변화를 꾀하고 있다. ‘나’라고 간주했던 관념도 변한다. ‘나’라고 생각하는 이미지/아이덴티티/어떤 사회적 위치성/경계도 실상 여러 관념의 산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견해다.

알다시피 변하는 것은 몸이나 물질만이 아니다. 생각/느낌/의지/인식에서도 일정한 성품이나 고정불변의 의미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불교에서는 이런 뜻에서 일체 사물에는 스스로의 성품, 곧 자성(自性)이 없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보면, 예컨대 한 알의 사과를 놓고 그것의 모양과 맛이나 다른 과일과의 차이를 보고, ‘아, 사과는 이러저러한 성품이 있다.’고 단정하는 습성이 있다. 삼차원의 세계에서 오감을 지니고 사는 인간이다. 이런 사고 반응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런 사고의 반응에는 물론 우리의 기억 체계와 언어적 습관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통상 사과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서, 사과가 남다른 성질/성품이 있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사과의 이런 특질/특성을 두고 사과에는 나름의 자성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불가에서는 어떤 사물의 특성/특질을 두고, 그 사물에 자성(自性)이 있다는 말을 쓰지 않음을 유의해야 한다.
사과 또한 여러 원자들이 모여 있는 것이고, 또 여러 분자들이 시간을 두고 여러 조건과 나름의 조화를 이룬 끝에 생성된 결과물일 뿐이라는 인식이다. 한 알의 사과를 온전히 한 알의 사과로서 인지하고 인식하는 일이 성립되려면, 먼저 여기에 사과가 있어야 하고, 다음 그것이 우리의 오감과 ‘하나의 오케스트라’가 이뤄져, 그것의 있음과 성질이 ‘동시에 파악되어야’ 가능해질 것이다. 무슨 말인가. 인식도 하나의 연기(緣起)에 의해 생긴다는 논리다.

사과 역시 끊임없이 성주괴공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과의 특질도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만일 사과가 변치 않는 영원한 성품 같은 것을 품었을 것 같으면, 사과는 영원히 고정된 어떤 모습을 드러내 줘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과도 사과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과 마찬가지로 생로병사를 겪는 입장에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과의 어떤 특질을 보고 그것이 사과의 성품이라고 간주했던 것은 사과에 대한 ‘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념 형성은 사물을 고정화시키고 스스로 상주(常住)하고 싶어 하는 에고의 ‘버릇’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평소 그 ‘자성’이라 여겼던 것은 자성이 아닌 것이고, 사물/현상에는 자성이라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이해하게 된 셈이다. 그래서 일체는 무자성이라는 얘기다. 간단히 말해, 일체가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에 일체가 공하다는 소리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색즉시공이라 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일체는 동시에 공즉시색의 도리에 부합한다. 말 그대로 없는 곳에서 일체 사물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없는 곳에서 나와 있는 것이 생기고, 있는 것은 다시 없는 곳으로 돌아간다. 한마디로 이 우주는 ‘없고, 있고’에 대한 의식도 없이, 있음과 없음은 한 몸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돌아가는 일에는 다만 연기에 따라 인과의 법칙이 따를 뿐이다. 이렇게 봄에, 굳이 이 우주에 대한 실상을 현대 물리학이나 양자물리학적 소견으로 그 비유를 들지 않아도 능히 이해가 된다.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라는 말은 공과 색이 다르지 않다는 말을 강조한 말이다. 이 말을 의미론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삶에서 집착할 만한 사물/가치/현상/진리 같은 게 없다는 말이요, 일체가 공하지만 동시에 공은 색으로 ‘부활’해서 일체가 있는 것처럼 드러나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도리에 계합될 것 같으면, 본래 한 물건도 없지만 한 마음에서 일체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진다는 앎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일체는 오로지 ‘있고 없고’를 떠난 상태에서, 하나의 마음으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 불교적 우주관이다. 또 우리의 의식/마음이라는 것은 하드웨어로서 상존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사물에도 다 있다고 본다. 해서 일체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순수 의식/마음/불성이란 것은 이 우주에 편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이 순수 의식/불성이란 것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게 될 때, 나름대로 하나의 관념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관념적 사유는 통상 일차적으로 표면 의식에서의 사유다. 순수 의식/불성에 대한 자각에 바로 다가가지 못함은 사실 언어적 사유의 한계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도 순수 의식/불성에 대해 언어로 최대한의 표현을 해야 한다면, 순수 의식/불성이란 것은 의식까지도 의식하는, 생각/느낌/인식 이전에 있는 본래의 마음자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마음의 안팎에 두루 하는 보편적 의식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다시 말해 공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이 ‘현재적, 물질적 삶’이란 것은 이 우주에서 하나의 홀로그램 같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렇게 관조적인 자세로 이 삶과 뭇 생명/존재들의 온갖 모습/실상을, 빛 비추어 봄(illumination, 廻光返照)이 공도리라 말할 수 있겠다.

온 법계에 두루 하는 하나의 진리. 색즉시공이고, 공즉시색이다. 그러므로 이제 오온(五蘊: 색, 수, 상, 행, 식)이 공하다는 이치가 해득될 법하다. 오온이 공하다는 것은 우리의 에고(Ego)가 공하다는 말과 같다. 에고가 바로 오온이기 때문이다. 에고가 공하다. 에고가 공하므로 에고에 집착한다는 일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논리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불교는 이처럼 매우 과학적인 설득력을 담지하고 있다.

이제 앞으로 돌아가 다시 고봉원묘 스님의 게송을 읽어 보자.

바다 밑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아난다.
바위 앞의 돌호랑이 아기 안고 졸고 있다.
쇠로 만든 독사가 금강 눈을 뚫고 들고
곤륜족 깜둥이가 코끼리 타고 해오라기 끈다.

누구든 이 시를 처음 접하게 되면, 먼저 진흙소란 말에는 대체 어떤 함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함의를 추상하건대 먼저 에고가 공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겠다. 물론 에고가 공하다는 사실은 추론에서가 아니라 체험적으로 스스로 터득해 알아차려야 할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은 에고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노릇이다. 에고가 없다면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에고가 공하다는 말에는 에고가 좋다거나 나쁘다고 하는 분별의 뜻은 없다. 에고의 존재가 바로 현실이다. 현실은 개인적/집단적 에고에 의해 유지된다. 에고는 소중하게 다뤄야 할 법기(法器)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에고가 공하다고 해서 에고를 부정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인식이다. 그것은 망상이다.

그렇다면 깨침이란 무슨 말뜻인가. 깨친 자는 이 에고가 공함을 뼛속 깊이 이해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깨친 자는 에고를 마치 우리 순수 의식/존재가 입고 있는 옷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것이다. 에고를 허공 속의 꽃과 같은 것으로도 볼 것이다. 우리의 순수 의식/존재가 온전히 눈을 떴다면, 에고는 능히 우리의 ‘참나’가 다룰 수 있는 ‘그것’으로 남게 될 것이다. 에고에 끌려가는 삶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남김없이 또 조금의 모자람도 없이 이 에고를 임의적으로, 자유자재로 활용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는 입장에 섰을 것 같으면, 우리는 그런 존재를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 부를 수 있겠다.

‘진흙소’는 존재의 실상을 드러낸 상징이다. 다시 말해 진흙소에서 진흙은 에고[五蘊]를 표상하는 것이고 소란 생명체이니 우리의 근본 자성을 표상한 거라 내다보는 것이다. 사람이 그렇지 않은가. 환(幻)과 같은 에고를 걸치고 있지만 동시에 누구나 그 존재는 ‘참나’라는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 둘이 하나가 되어 돌아가는 존재란 말이다.

공의 입장에서 보면, 무릇 존재하는 것들은 제반 조건들의 화합이나 화학 작용에 의지에 ‘존재하는 것처럼’만 보인다. 자성이 없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다. 분명 ‘나’라는 시각을 떠나 보면, 존재의 실상이 그렇게 보일 것이다. 해서 불교에서는 존재하는 것들은 없지만 꼭 없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견해를 취한다. 그리고 에고가 있기에 우리는 존재를, ‘참나’의 현존을 알아차리게도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의 실상은 진흙소라고 하는 간결한 신조어 속에 다 드러낸 것이다, 공의 도리를 다 밝힌 것이다.

일체가 공하다는 마음 자세가 ‘굳건하게’ 갖춰진 자라면, 무슨 문젯거리를 만나든 걸림이 있을 리가 없을 것이다. 원융무애(圓融無碍)다. 원융무애란 자신의 내면에서 걸림이 없으므로, 밖의 경계에 대해서도 걸림이 없게 된 경지를 뜻한다. 온 법계가 하나의 마음에서 비롯되어 일어난 현상이니, 원융이란 말/관념을 그의 생각에서 동원시키지 않더라도 스스로 원융의 마음을 쓰게 될 것이다. 중생은 밖에도 있지만 이미 그의 마음 안에 온 중생들이 다 들어와 살기에 안과 밖을 따로 구분 지어 생각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진흙소는 실상 자신의 모습인 동시에 자신이 바라본 존재의 실상이기도 하다. 진흙으로 만들어진 소다. 진흙소란 에고와 ‘참나’가 함께 의지하며 돌아가는 물건이다. 이 진흙소는 자유자재하게 마음을 쓸 수 있다. 시공간 개념이 없다. 우리의 삼차원적 세계에서 고정화된 개념은 그의 무한한 시공간 세계에서 다만 하나의 환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달은 밖에 있는 것이지만 내면에서 제 마음대로 움직이게 하고 다룰 수 있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달 역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달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이 마음 안에서 나와 함께 놀 수도 있는 물건에 불과하다.

일체가 자성이 없으므로 인생도, 이 세계도 하나의 꿈이라는 견해가 사실이다. 삶 자체가 꿈이라면 우리가 밤에 꾸는 꿈 역시 별다른 꿈이 아니고, 같은 꿈일 것이다. 밤에 꾸는 꿈 내용을 보라. 거기 시공간의 개념이 있는가. 과거 일이 현재가 되고 미래가 현재로 와 닿는 내용이 수두룩하다. 어느 땐 순간에 달나라도 간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저승에서 잠깐 돌아와 만나게 되는 일도 벌어진다. 우주를 유영하는 꿈도 있다. 마치 유체이탈을 하는 듯한 내용의 꿈도 꾸게 된다. 하지만 꿈은 단지 꿈일 뿐임을 우리는 안다.
선사들은 이 삶을 꿈처럼 여긴다. 그러나 선사들의 꿈은 우리의 통상적인 밤 꿈처럼 수동적으로 꾸는 꿈이 아니다. 그 마음이 자유자재하여, 그 마음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꿈을 그리는 것이다. 요컨대 이 삶을 꿈같은 삶이라 보기에, 꿈같은 세상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그 마음을 쓰는가를 드러내려 한다는 것이다.

“바다 밑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아난다.”

바다 밑이라고 하는 것의 이미지는 이 마음, 이 세계의 깊은 곳에서다. 말하자면 제8 아뢰야식의 뿌리까지 모조리 뽑힌 텅 빈 공간이다. 시공간을 떠난 심층 의식의 경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무진 번뇌의 업장들이 끝도 없이 작용하는 바다이기도 하다. 그 바다 밑에서 그는 놀려고 한다. 그가, 그 존재의 실상이, 진흙소가 그 ‘동네’에서 달을 물고 기운차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기운 생동하는 삶이 되지 않는가.

보다 가까이 현실적 상상으로 수렴해 볼 것 같으면, 이 세계를 아무 걸림 없이 다니려 하는 자세로 비유가 된다. 일체가 자성이 없고, 붙들 만한 것이 없음이다. 오직 그가 알아차린 본분의 마음자리에 있을 것 같으면 그리고 허공처럼 한도 없는 마음을 갖고 있을 것 같으면, 그 마음에서 일체는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임을 알 것이다. 해서 그 마음은 써도 써도 다함이 없다는 사실도 알 것이다. 형상을 좇는 마음이 없기에, 형상 있음에 걸림이 없어서인 것이다. 그래서 스님은 “바다 밑 진흙소가 달을 물고 달아난다.”고 태연히, 아주 능청맞은 표현을 했던 것이리라. 그다음 구절도 역시 같은 맥락이다.

“바위 앞의 돌호랑이 아기 안고 졸고 있다.”

첫 줄은 진흙소가 바다 밑에서 놀고 있는데, 지상에서는 어느 바위 앞에서 돌로 만든 호랑이가 아기를 안고 졸고 있는 것이다. 돌 역시 자성이 없는 에고를 뜻한다. 호랑이는 순수 (생명) 의식이랄까, 아니면 자성, 곧 일체 사물에 본래부터 갖춰진 성품이거나 불성이라 봄이다. 하지만 이 둘은 따로 구분 지어 활동하는 일이 없다. 구분 짓는 순간 그것은 또 다른 관념을 만들어내는 일일 뿐이다. 생사와 유무를 따로 구분 지어 분별하는 망상에 빠지는 노릇과 같다. 모든 게 하나로 돌아감을 모르는 이치다. 돌호랑이 역시 존재의 실상이다. 너와 나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가 끊어진 자리에서 꿈틀대며 살아가는 생명체다. 그놈이 낳은 아이가 그놈의 품안에서 평화롭게 잠들고 있다. 현실적 비유로 상상하건대, 이것은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 속에 품고 잠을 재우는 평화로운 풍경으로 연상된다.

“쇠로 만든 독사가 금강 눈을 뚫고 들고”

이젠 셋째 줄도 능히 납득이 될 만할 것이다. 쇠로 만든 독사다. 진흙으로 만든 소가 있는가 하면, 돌로 만든 호랑이가 있고, 이젠 쇠로 만든 독사가 있다. 무엇으로 만들든 그의 자유다. 다만 각 연의 맥락에 따라 거기에 알맞게 분위기를 연출해 만든 것이다.

쇠로 만든 독사가 나쁜 의미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진흙소나 돌호랑이나 똑같은 생명 의식체다. 금강 눈이란 절대 지혜/실상 혹은 신성한 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봐도 될 것 같다. 불교 사전에는 금강(金剛)이란 말이 무명을 없애고 번뇌를 끊는 지혜의 비유란다. 쇠독사는 이 금강 눈을 뚫는다는 마음도 없이 어느 때라도 수시로 뚫고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한다. 현실적 비유로 상상을 하면 마치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는 일도 마음먹은 대로 자유자재다. 그만큼 지혜를 인연에 따라 자유롭게 쓴다는 뜻일 것이다. 지혜가 스스로 용솟음치기에 경계에 따라 마음대로 제 마음 안에서 꺼내 쓸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금강 반야의 지혜일 것이니, 그 지혜 역시 다함이 없는 지혜일 것이다.

“곤륜족 깜둥이가 코끼리 타고 해오라기 끈다.”

이 게송의 마지막 구절이다. 여기서 곤륜족 깜둥이라는 말은 티베트 지역에 사는 흑인 종족이라고 한다. 먼 나라 사람들이다. 앞서는 진흙소가 바다 밑에서 달을 물고 달렸고, 다음 지상에서 돌호랑이가 아이를 안고 졸았고, 그다음에는 쇠로 만든 독사가 금강 눈을 뚫더니, 이제는 먼 나라 사람들이 코끼리를 타고 하늘을 나는 해오라기를 이끈다고 했다.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동화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수사다. 먼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과 다른 세계에서 살 것이다. 그들은 코끼리를 타고 새들까지 이끌며 천하를 다스린다는 암시다. 코끼리는 상서로운 동물이다. 동물 가운데 으뜸으로 여기는 동물이다. 한데 그곳 사람들은 코끼리를 타고 다닌다.

여기서 곤륜족 사람이란 역시 우리 존재의 실상을 말한다. 그런 사람은 지금 여기 사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먼 나라 사람이라야, 이런 황당한 동화 같은 스토리에 어울리는 비유가 될 것이다.

이 구절 역시 통상의 인식이나 인지 반응을 상상적으로 역전시키거나 지나친 과장법에 의해 일반에게 충격을 줄 만한 표현이다. 해오라기도 자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자성이 없으므로 공하기는 코끼리와 마찬가지 입장이다. 경계/현상은 역시 자신의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실상 일체가 공하므로 주객(主客)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주객이 따로 없다. 그러니 곤륜족 사람들이 타고 가는 코끼리가 해오라기를 끈다고 말함은 우리의 통상적인 이분법적 사고를 와해시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코끼리와 해오라기가 ‘한 식구’라는 생각이라면, 형상적인 측면에서 보아 차별이 있게 보여도 의당 차별하는 마음이 없기에, 하늘을 헤매는 해오라기를 능히 이끌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위 없는 지혜를 상징하는 코끼리다. 코끼리를 타고 간다는 말이 와 닿는다. 그들은 그 마음을 마음껏 부리며 하늘을 헤매는 해오라기에게 길도 안내해주고 자비를 베푸는 모양이다.

이 게송을 다시 읽어 본다. 옛 선사의 시는 시가 아니다. 살아 있는 법문이다. 취모검(吹毛劒)이다. 언어를 빌려 쓰되, ‘세속의 논리’를 떠난 경지를 드러내고 싶었기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

신승철 / 시인·큰사랑노인전문병원장. 197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연세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역임. 시집으로 《개미들을 위하여》 《더 없이 평화로운 한때》 등과 저서로 《연변조선족 사회정신의학 연구》 《있는 그대로 사랑하라》 《나를 감상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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