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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종파로 보는 티베트불교* / 이종복
[59호] 2014년 09월 01일 (월) 이종복 svatantrika@gmail.com

 * 이 글은 불교평론과 경희대 비폭력연구소가 주관한 ‘열린논단(2014년 5월 22일)’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들어가는 말

이 글에서는 편의상 티베트불교란 지역적으로 볼 때, 인도로 부터 전파된 불교가 티베트 고원을 중심으로 발전해 몽골, 러시아, 부탄, 히말라야 산맥, 라다크, 시킴, 아쌈, 다르질링, 중국 등의 지역으로 전파된 불교라고 정의하겠다.

티베트불교를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겠지만, 본고에서는 티베트의 주요 종파들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종파를 통해 티베트불교를 소개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지만, 8세기 전부터 시작하여 현대에 이르는 티베트불교의 역사를 짧은 지면을 통해 소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종파의 형성과 관련된 사건들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본고에 소개하지 못하는 세부적인 역사적 사건들은 후에 기회가 된다면 소개하도록 하겠다.

인도불교의 전기전래(600-850 C.E.)와 닝마빠(rnying ma pa, 舊派)

티베트불교의 종파는 티베트에 불교가 정착하고 발전하는 과정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티베트불교의 종파를 나누는 가장 큰 기준은 구파(rnying ma, 舊派)와 신파(gsar ma, 新派)이다. 닝마빠(rny-ing ma pa)는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구파(舊派) 또는 고파(古派)로 번역되는데, 기원을 따진다면 티베트의 모든 불교 종파 가운데 가운데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후에 일어난 모든 티베트의 종파들은 신파(新派)에 속한다. 따라서 닝마빠 및 신파에 속하는 다른 제 종파를 소개하기 위해서는 인도불교의 티베트 전래를 설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인도불교는 티베트에 크게 두 번에 나누어 전래되었다. 티베트 역사가들은 그 두 번의 전래를 전기전래(前期 傳來, bstan pa snga dar, ca. 600~850)와 후기전래(後期傳來, bstan pa phyi dar, ca. 950~1250)으로 나눈다. 전기전래란 티베트에 불교가 유입되어 왕실에서 공식으로 채택되고 발전하다 왕조의 몰락과 함께 중앙집권적 후원이 끊어진 시기까지를 말한다. 초기 티베트불교의 발전은 티베트 왕조의 법왕(法王, chos rgyal, dharmarāja)의 후원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티베트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인도불교가 티베트에 자리를 잡는 데에는 세 가지 장애가 있었다. 광대한 평야와 험준한 산맥이 많은 티베트의 지리적 특성상 중앙 정부가 티베트 전역을 완전히 장악했다고는 보기 힘들다. 티베트는 정치적으로 볼 때 티베트의 중앙 정부와 지방의 귀족들, 그리고 사원들 사이의 역동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불교 역시 정치적 영향력하에 있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인도불교의 전기전래는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인 갈등과 대립 속에서 불교가 어떻게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초기 티베트불교가 처한 첫 번째 문제는 토속종교인 뵌교와의 대립이었다. 티베트의 초대 왕인 쏭쩬깜뽀(srong btsan sgam po, ca. 617~650)는 인도로 장관 퇸미삼보타(thon mi sambhoṭa, ca. 7세기)를 보내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를 배워 티베트의 문자와 문법을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전통에 따라 네팔과 중국으로부터 공주들을 왕비로 맞아들이면서 인도불교와 중국불교를 도입하며 티베트불교의 입지를 다졌다.

이후 송쩬감뽀 왕의 손자 티송데쩬 왕(khri srong lde’u btsan, ca. 742~796, 재위: 755~796)은 당시 네팔에 머물고 있던 인도 날란다 승원의 승려 샨따락쉬따(zhi ba ’tsho, śāntarakṣita, 寂護, 8세기)를 초청하여 인도불교를 도입하려 했다. 그러나 티베트의 토속 종교인 뵌교(bön)를 따르던 지방 귀족들의 극렬한 반대와 더불어 때마침 횡행했던 가뭄 및 전염병 때문에 티송데쩬 왕은 샨따락쉬따를 다시 네팔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티송데쩬 왕은 이후 뵌교와 뵌교를 따르는 귀족 세력들을 통제하에 두면서 불교를 도입할 토대를 만든 후 다시 샨따락쉬따를 초청한다. 샨따락쉬따가 티베트에 다시 들어갈 당시, 그는 밀교승인 빠드마삼바바(padma ’byung gnas, padmasambhāva, 蓮華生, 8세기)를 대동했다. 빠드마삼바바는 밀교행을 통해 뵌교도뿐만 아니라 티베트의 토속신들을 불교에 귀의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샨따락쉬따는 왕실의 후원하에 삼예사(bsam yas dgon pa)를 건립하고 티베트의 첫 승단을 만들었다. 닝마빠는 이때 샨따락쉬따가 대동했던 밀교승 빠드마삼바바와 그의 가르침을 그 중심으로 삼는다. 전설에 의하면 빠드마삼바바는 티베트에 남아 티베트의 강산 곳곳에 《티베트 사자의 서》를 포함한 여러 비장서(gter ma, 秘藏書)를 숨겨 놓고 불교를 홍포한 뒤에 열반에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빠드마삼바바는 뵌교를 물리치자마자 다시 네팔로 돌려보내졌다.

초기 티베트불교가 처한 두 번째 문제는 중국의 매우 급진적인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선종과 체계적인 수행 방법에 따른 깨달음을 주장하는 인도불교의 충돌이었다. 티송데쩬 왕이 육바라밀의 수행과 계율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중국의 돈오돈수적 수행을 금하자, 선종을 따르던 이들은 머리에 화로를 이고 자기들의 몸을 사르는 등 극단적인 저항을 했다. 샨따락쉬따의 제자들이 선종의 승려들과 삼예사에서 두 번의 어전 논쟁을 벌였으나 모두 패배했다. 그러자 샨따락쉬따의 유언을 따라 당시 날란다의 학장이던 까말라쉴라(kamalaśīla, 蓮花戒, 740~795)를 인도로 초청해 삼예사에서 중국의 승려 마하연(摩訶衍)과 어전 논쟁을 벌이도록 했으며, 까말라쉴라는 마하연을 논파하고 《수습차제(修習次第, dgom pa’i rim pa, bhāvanākrama)》 3권을 왕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어전 논쟁의 승리는 티베트불교가 인도불교의 맥을 잇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초기 티베트불교가 마주했던 세 번째 문제이며 인도불교의 전기전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은 티쏭데쩬 왕의 아들 랑달마 왕(glang dar ma, 재위 838~842)의 폐불정책이었다. 랑달마 왕은 뵌교에 의지해 모든 사원을 폐하고 승려들을 죽이거나 환속시켰다고 한다. 전래에 따르면 랑달마 왕은 842년 랄룽(lha lung) 지방의 승려 뻴기돌제(dpal gyi rdo rje)에 의해 암살당했다. 이 암살 사건은 랑달마 왕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싼 두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을 낳았고, 결국 티베트 왕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15세기 중반까지 티베트의 역사를 잘 담고 있는 괴 로짜와 쇤누뻴(gos lo tsā ba gzhon nu dpal, 1392~1481)의 《청사(靑史, deb th-er sngon po)》에 의하면 왕조의 몰락과 동시에 세 분의 스님들이 율장과 논장을 싣고 서티베트인 아리(nga ri), 몽골을 거쳐, 동티베트 암도 지방의 소구룽(sro gu lung)으로 피신, 후에 쫑카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티베트의 사가들은 이 시대를 “파편의 시대(sil bu’i dus, the period of fragmentation)”라고 부르는데, 중앙집권적 국가의 형태가 무너지고, 지방의 귀족 세력을 중심으로 티베트의 역사가 이어진 점을 고려한다면 적절한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왕실의 지원이 없는 이 시기에 이 파편의 시대에도 재가자를 중심으로 티베트불교의 전통이 지켜지고 있었다고 한다.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전폭적 지지를 잃은 티베트불교는 이후 지방 귀족들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기 시작했다. 지방 귀족의 후원에 의한 불교의 발전은 한편으로 볼 때는 티베트불교의 다양한 종파적 발전의 밑거름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분쟁의 씨앗을 만들기도 한다. 한편 로날드 데이비슨은 850~950년 사이의 근 100년간을 유럽의 르네상스 혁명 직전의 암흑기에 빗대어 설명한다.

인도불교의 후기전래(950~1250 C.E.)와 신파(新派, gsar ma) 그리고 신역(新譯, gsar ’gyur)

이 시기에 들어 중앙 아시아 지역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티베트의 서부 아리(nga ri)와 동부 암도(a mdo) 및 캄(khams) 지방이 활기를 띄기 시작했고, 그 여파가 중앙 티베트까지 이어졌다. 또한 인도불교가 쇄락기에 접어들면서 많은 스님들과 밀교 수행자들이 인도 본토의 사원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 또한 티베트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많은 수의 스님들과 밀교수행자들이 10세기 중반부터 티베트에 직접 들어오기 시작한다.

전통적인 사관에 의하면 이 시기가 인도불교의 후기전래(bstan pa phyi dar)에 해당한다. 로널드 데이비슨은 이 후기전래의 시대를 티베트불교의 르네상스 시기로 지칭하며 이 시기를 움직이는 여러 개의 힘을 나열한다. 그중에 티베트불교 종파의 역사적 발전에 맞추어 생각해 보아야 할 사건들은 앞서 간략하게 설명했던 전 시대의 계율과 수행 전통의 복귀이다.

파편의 시대 이전에 샨따락쉬따에 의해 전승된 설일체유부의 계단(戒亶)을 계승하는 스님들은 앞서 설명했듯이 동부 티베트의 암도 쫑카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교역이 활발해지던 이 시기에 “중앙 티베트 우, 짱 지방의 육인(dbu gtsang gi mi drug)”이 세 스님의 계승자들이 있는 쫑카 지방을 찾아가 계를 받아 중앙 티베트로 설일체유부의 계율을 다시 들여온다. 이후 교세가 확장되면서 암도 지방으로 피신했던 스님들의 계승자들은 중앙 티베트에 많은 사원들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큰 힘을 펼치며 잠시 뒤에 소개할 까담빠와 경쟁구도를 형성한다. 또한 중앙 티베트의 많은 티베트 인들이 인도와 네팔로 직접 가서 현교와 밀교를 배우고 다시 티베트로 돌아온다. 그리고 지방 귀족 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새로운 번역(gsar ’gyur, 新譯)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닝마빠가 전기전래 시기의 구역에 의지하여 전통을 이어온다면,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티베트불교의 종파들은 이 신역에 의지한다. 이러한 면에서 구역과 신역은 닝마빠와 이 시대의 모든 종파 사이를 나누는 큰 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구역과 신역의 두드러지는 차이점 중의 하나는 후원자가 누구인가이다. 구역의 경우 티베트의 법왕들이 정치·경제적으로 후원을 했다면, 신역은 지방의 귀족 세력들의 후원하에 인도에서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오는 인도의 스님들, 혹은 인도나 네팔에 직접 가서 배워온 티베트인들이 가져온 산스끄리뜨 문헌들을 티베트어로 번역한 경우이다. 따라서 번역은 해당 귀족 세력의 선호도에도 영향을 받았으며, 각 귀족 세력이 후원하는 스님 혹은 역경사(로짜와, lo tsā ba, locchāva)가 같은 문헌을 중복 번역하는 경우도 생겼다. 또한 번역의 대가로 받는 황금을 노린 사이비들에 의해 인도불교에는 없는 문헌들이 거짓으로 번역되는 일도 생겨난다.

티베트불교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가운데 한 명은 아띠(Atiśa Dīpaṃkaraśrījñāna, atiśa mar me mdzad dpal ye shes, 980~1054)이다. 아띠샤의 가르침을 따르는 까담빠의 성립은 이후 티베트불교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까담빠는 사꺄빠, 조낭빠에 이어 신까담빠(bka’ gdams gsar ba)라 불리는 겔룩빠(dge lugs pa)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지금까지도 까담빠의 저작들은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다. 까담빠의 성립에는 아띠샤의 티베트 입국이 시발점이었다. 《청사》에 의하면, 아리(nga ri)지방의 왕이었다가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고 전쟁에 나갔던 하라마 예셰외(lha bla ma ye shes ’od)가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자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몸무게만큼의 금을 아리 전역에서 모았다고 한다. 머리 무게의 금만 모으면 됐을 때 사촌 장춥외(byang chub ’od)가 그에게 가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자 예셰외는 그의 목숨을 구하는 대신에 인도에서 수승한 스님을 티베트로 초청하는 데 그 금을 써달라고 했다. 이에 장춥외는 라다크, 레 지방까지 사원을 건립하고 있던 역경사 린첸상뽀(rin chen bzang po, 958~1055)의 추천을 받아 당시 비끄라마쉴라(vikramaśīla) 밀교승원에 머물고 있던 아띠샤를 티베트로 초청한다.

아띠샤의 가르침을 따라 까담빠라는 종파를 이룩한 것은 아띠샤의 수제자인 재가신도 돔뙨빠(’brom ston pa rgyal ba’i ’byung gnas, 1004 혹은 1005~1064)였다. 돔뙨빠는 아띠샤가 입멸한 뒤에 라싸 북부의 레팅(rwa sgreng)에 레팅사원을 세웠으며, 이 사원을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다. 아띠샤 입멸 후 그의 사리는 아띠샤를 후원했던 몇몇 일족에게 나누어 주어졌는데, 일족 가운데 하나가 초기 겔룩빠와 사꺄빠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 쌍푸네우톡 사원(gsang phu sne’u thog)을 지은 옥(rngog) 일족이었다.

아띠샤의 직제자인 옥 일족의 옥 렉뻬쉐랍(rngog legs pa’i shes rab, date unknown, 11세기)은 1073년에 쌍푸네우톡 사원을 세운다. 옥 일족의 옥 로짜와 로덴쉐랍(ngog lo ts’a ba blo ldan shes rab, 1059~1109)은 인도 북부 카쉬미르 지방에서 17년간 아비달마와 중관 등을 배운 뒤 돌아와 쌍푸네우톡 사원에 자리를 잡고 가르침을 편다. 까담빠는 상푸네우톡 등의 사원 네트워크를 통해 많은 까담빠 스님들을 비롯해 차빠최끼셍게(phywa pa chos kyi seng ge, 1109~1169)의 활동으로 티베트 고지에 티베트인이 이해한 불교의 모습을 구현하는 티베트불교 철학의 중심지가 된다.

이 후기 불교 전파 시대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밀교의 활발한 전개이다. 랑달마 왕의 암살 후, 왕실의 지원을 받는 불교가 중앙 티베트에서 사라졌을 때, 중앙 티베트 지방에서 불교의 명맥을 유지한 것은 일족을 중심으로 한 재가신도였으며, 그들은 주로 밀교를 수행하고 있었다. 전기 불교 전래 시대에 티베트 최초의 승단을 건립한 샨따락쉬따는 밀교승 빠드마삼바바가 뵌교와 지역의 신들을 조복시키자마자 바로 네팔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는 밀교 경전의 수행을 티베트의 불교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행을 권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부흥기에 들어 많은 밀교 수행자들(tantrika)이 인도로부터 들어오고, 또한 많은 티베트인들이 인도와 네팔로 직접 가서 밀교를 배워왔다. 특히 티베트불교의 4대 종파 가운데 까규빠(bka’ rgyud pa)와 사꺄빠(sa bskya pa)의 경우가 그러하다.

이 가운데 ‘구전의 전통(口傳傳統)’이라는 뜻을 가진 까규빠의 경우, 그 시조를 인도의 밀행자 띨로빠(tilopa, 988~1069)로 삼는다. 띨로빠는 나로빠(nāropā, 1016~1100)를 가르쳤다. 티베트인 역경사 마르빠 로짜와(mar pa, 1012~1097)는 역경사 독미 로짜와 샤꺄예쉐(’brog mi lo tsā ba śākya ye shes, ca. 992~1072)에게서 17년간 수학한 뒤, 네팔로 가서 나로빠의 제자들로부터 배우고 다시 인도의 날란다 사원으로 옮겨 나로빠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마르빠의 가르침인 마하무드라(mahāmudrā, phyag rgya chen po)는 이후 밀라레빠(mi la ras pa, ca. 1052~1135)를 거쳐 까규빠로 성립된다.

까규빠와 마찬가지로 나로빠의 가르침 그 기원을 두고 또한 독미 로짜와라는 같은 스승으로부터 출발한 사꺄빠는 까규빠와 다른 특징들을 보인다. 앞서 말했듯이 후기 티베트불교는 여러 귀족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발전하는데, 사꺄빠의 경우 쾬(’khon) 일족 자체가 종파가 된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회색 땅을 뜻하는 사꺄(sa skya) 지방의 일족인 쾬 일족의 쾬 꾄촉겔뽀(’khon dkon mtshog rgyal po, 1034~1102)를 종조로 하는 사꺄빠 역시 밀교 전통에 근거한다. 사첸 꾄촉겔뽀는 인도에서 요기 나로빠와 밀교승원인 비끄라마쉴라(vikramaśīla)에서 공부했다고 하는 독미 로짜와로부터 헤바즈라 딴뜨라에 근거한 람데(lam ’bras, mārgaphala) 전통을 배운다. 독미 로짜와는 인도에서 온 빤디따 가야다라(gayādhara, ?~1103)로부터 11세기 중엽에 람데 전통을 배웠다고 하며, 헤바즈라 딴뜨라(hevajra tantra, kye’i rdo rje) 등의 많은 밀교 경전을 티베트어로 번역했다. 수행의 길과 그 결과 사이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밀교에 바탕을 두고 논하는 람데 전통은 사꺄빠의 핵을 이루는 중심 교리이다.

사꺄빠의 다른 특징으로는 불교 논리와 중관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사꺄빠의 2대 사첸 뀐가닝뽀(sa chen kun dga’ snying po, 1092~1158)는 그의 아들 소남쩨모(bsod nams rtse mo, 1142~1182)를 까담빠의 중심 사찰 가운데 하나이며 학문의 중심이었던 쌍푸네우톡 사원(gsang phu ne’u thog)에 보내 앞서 소개한 챠빠 최끼셍게(phywa pa chos kyi seng ge, 1109~1169)에게 불교 논리 및 중관학을 배우게 했으며 이 전통은 이후 사꺄 빤디따(sa skya paṇḍita kun dga’ rgyal mtshan, 1182~1251)에 이르러 꽃을 피웠다. 사꺄 빤디따는 특히 다섯 가지 주요 학문인 불교철학, 논리학, 문법, 의학, 그리고 산스크리트 문헌에 능해 티베트는 물론 중국, 그리고 몽골에까지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사꺄빠는 이후에도 딱짱 로짜와 쉐랍린첸(stag tshang lo tsA ba shes rab rin chen, b.1405) 및 샤꺄촉덴(Śākya mchog ldan gser mdog paṇ chen, 1428~1507) 등의 유명한 학승들이 배출하여 후에 설명할 겔룩빠와 경쟁구도를 형성한다.

사꺄빠는 티베트 정치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몽골의 불교 전통을 만드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친다. 1240년 몽골의 티베트 침략이 시작되었을 당시 몽골은 사꺄 빤디따에게 왕사가 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노후한 사꺄 빤디따는 나이를 이유로 조카 최겔팍빠(gro mgon chos rgyal ’phags pa, 1235~1280)를 보냈다. 최겔팍빠는 몽골의 문자를 만드는 등 몽골의 문화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후 사꺄빠는 까규빠의 팍모두 일족이 중앙 티베트를 점령하기 전까지 몽골의 후원하에 티베트를 통치한다.

이 시기에 발전한 또 하나의 종파는 조낭빠(jo nang pa)이다. 시가쩨 근처 조모낭 지역에서 번성한 조낭빠는 12세기 깔라차끄라 딴뜨라(dus kyi ’khor lo rgyud, kālachakra tantra) 전문 수행가인 유모 미꾜돌제(yu mo mi bskyod rdo rje)를 중심으로 시작한다. 유모 미꾜돌제는 카쉬미르의 빤디따 찬드라나타(candranatha)에게서 사사를 받았다. 후캄에 의하면 타공의 이해는 유모 미꾜돌제가 카일라쉬산(수미산)에서 깔라짜끄라 딴뜨라를 수행하는 도중 터득한 것이라고 한다. 사꺄빠에서 계를 받았던 돌뽀빠 쉐랍겔첸(dol po pa shes rab rgyal mtshan, 1292~1361) 대에 이르러 융성하게 된다.

이 조낭빠는 쉔똥(gzhan stong), 즉 타공(他空) 사상을 내세웠다. 타공이란 모든 속제를 비롯해 다른 것에 의존해 일어난 현상들, 자아와 같은 허상은 그 자성이 공(空, stong pa nyid)하지만, 그 모든 속제의 근간이 되는 법성(chos nyid), 일체지, 천연의 의식, 불성, 또는 청명한 빛의 마음은 공하지 않다는 사상이다. 즉, 만일에 속제가 공하다고 할 때, 그 공성까지도 공하다고 하면 단멸론과 상주론 양극단 사이에서 단멸론의 극단에 빠지기 때문에, 불법의 핵심인 중도(中道)를 따르지 않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자공(自空, rang stong)과 타공(他空, gzhan stong)의 분류법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네브라스카주 링컨대의 야로슬라브 코마로브스키 교수(Yaroslav Komarovski)에 의하면 겔룩빠의 사상 가운데에서도 현교를 제외한 밀교 및 모든 티베트 종파의 사상은 타공 사상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도 한다.

이후 조낭빠는 5대 달라이 라마 대에 이르러 이단으로 몰려 중앙 티베트 지방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종교적 박해를 자공과 타공의 사상적 대립으로 설명을 하지만, 사실상 이것은 조낭빠의 타라나타(Tāranātha, 1575~1634)가 겔룩빠를 정치적으로 박해한 깔마까규의 짱 지방의 왕 깔마 뗀꾱왕뽀(kar ma bstan skyong dbang po, 1606~1642)의 후원을 받아 사원을 세우고 조낭빠의 문헌들을 출판하는 등의 행보를 보인 것에 대한 보복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조낭빠는 5대 달라이 라마의 박해로 모두 사라진 것으로 믿었으나, 몽골과 암도 지방을 중심으로 번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근자에 밝혀졌다.

겔룩빠의 종조 쫑카빠 로상닥빠(tsong kha pa blo bzang grags pa, 1357~1419)는 동북 티베트 암도의 쫑카 지방에서 태어나서 깔마빠 및 여러 종파에서 공부했으며 특히 사꺄빠의 렌다와 쇤누로도(red mad’ ba gzhon nu blo gros, 1349~1412)를 주 스승으로 배웠다. 이후 까담빠의 전통을 따라 엄격한 계율의 수행을 강조하면서, 불교 철학을 바탕으로 단계적인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아띠샤의 《보리도등론(菩提道燈論, byang chub lam gyi sgron ma, Bodhipathapradīpa)》의 주석서인 쫑카빠의 《보리도차제광론(菩提道次第廣論, byang chub lam rim chen mo)》을 비롯한 많은 주석서 및 저서들은 그 당시까지의 철학과 수행 전통을 새롭게 해석해 내면서 티베트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로 까담빠의 전통은 점차로 겔룩빠의 영향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쫑카빠의 겔룩빠(dge lugs pa)는 신까담빠(bka’ gdams gsar ma)라고 불리기도 한다.

티베트불교의 황금시대(1250~1450)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사꺄빠의 중앙 티베트의 지배력은 급속도로 약해졌다. 이와 동시에 까규빠의 3대 분파 가운데 하나인 팍모두빠 까규(약칭 팍두까규, phag mo gru pa bka’ rgyud)가 싸꺄빠를 대신해 중앙 티베트에 세력을 넓히기 시작했다(1368~1434). 팍모두 일족은 까규빠의 한 분파인 팍모두빠 돌제겔뽀(phag mo gru pa rod rje rgyal po, 1110~1170)의 팍두까규(phag gru bka’ brgyd)에 근거한다. 팍모두빠 돌제겔뽀는 1대 사꺄빠 사첸 뀐가겔첸에게서 배운 뒤, 밀라레빠의 제자 감뽀빠에게서 마하무드라(phyag rgya chen po, 大印)의 맥을 전승받았다. 후에 돌제겔뽀는 쩨탕(rtse thang)의 팍모두(phag mo gru) 지역을 기부받고, 그 지역을 중심으로 교세를 넓혔고, 이에 그는 팍모두빠(phag mo gru pa)라고 불린다. 사꺄빠를 누르고 중앙 티베트를 지배했던 팍모두빠 왕조는 이 팍두 까규에 근거한다. 1253년 꾸빌라이한에게서 네우동 지역의 정치적 지배권을 보장받은 팍모두 왕조는 이후 1322년 장춥겔첸(byang chub rgyal mtshan, 1302~1364)이 원나라 쇠퇴기에 사꺄빠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1368년부터 1434년까지 티베트의 중심 세력이 된다.
쫑카빠와 그의 뛰어난 제자들에 의해 라싸를 중심으로 점차 영향력을 넓히고 있던 겔룩빠는 팍두까규의 극심한 견제를 받았다. 이러한 정치-종교적 박해 속에서 겔룩빠는 지속적으로 교세를 확장하여, 3대 달라이 라마 소남갸초(bsod nams rgya mtsho, 1543~1588)에 이르러 알탄한(altan khan, 1507~1582)과 정치적 후원을 받았는데, 이때 알탄한으로부터 달라이 라마라는 호칭을 부여받는다.

팍모두 왕조를 이어 중앙 티베트를 지배한 것은 깔마 까규빠를 지지하는 짱빠(tsang pa) 왕조였다. 밀라레빠의 직제자 감뽀빠의 제자인 뒤숨켄빠(dus gsum mkhyen pa, 1110~1193)를 시조로 하는 깔마 까규빠를 따르던 깔마 퓐촉남겔(kar ma phun tshogs rnam rgyal, 1587~1620)과 그의 아들 깔마뗀꾱왕뽀(kar ma bstan skyong dbang po, 1606~1642)은 대를 이어 라싸에 있던 데풍사원과 세라사원의 승려들과 지지자들을 학살 하는 등 혹독한 핍박을 가한다. 그러나 이들은 겔룩빠를 지지하던 몽골의 구시한(gushi khan, 1582~1655)에게 제압당했고, 이후 겔룩빠가 중앙 티베트의 주요 종교·정치의 거점이 된다.

종교·정치적인 혼돈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를 황금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각 종파가 상호 간의 교류 및 견제를 통해 자신의 확고한 교리 체계를 확립했고 이 시기 동안의 발전은 이후 티베트불교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파들의 역사적 발전을 살펴보면 종파의 형성과 발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구역, 인도불교의 전기전래(bstan pa snga dar, ca. 600~850): 닝마빠
파편의 시대(sil bu’i dus, ca. 850-950): 닝마빠 및 밀교
신역, 인도불교의 후기전래(bstan pa phyi dar, ca. 950~1250): 닝마빠, 까규빠, 사꺄빠, 까담빠, 조낭빠
황금기(ca. 1250~1450): 닝마빠, 까규빠, 사꺄빠, 조낭빠, 겔룩빠(신까담빠)

나오는 말: 티베트불교 종파의 이해

종파 간의 정치적 대립과 발전을 살펴보면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종파 간의 대립이 마치 종파 간의 교류 단절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각 종파의 정치적 대립에도 불구하고, 각 종파의 고승들은 종파를 막론하고 존경의 대상이었으며, 다른 종파의 학승이 자기 종파의 교리를 배우는 것을 막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데풍 사원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의 경우, 모든 스님이 겔룩빠의 스님들은 아니다. 뵌교 및 다른 종파의 학승들도 겔룩빠의 게쉐 학위를 받기 위해 공부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쌍푸네우톡의 경우, 일 년에 두 번에 걸쳐 겔룩빠와 사꺄빠 승려들 간의 교리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까규빠의 핵심 교리인 나로빠의 여섯 가지 수행법(나로육법)의 경우 까규빠만 수행하는 것이 아니어서 겔룩빠의 종조 쫑카빠 역시 나로육법에 대한 논서를 썼으며, 현 14대 달라이 라마도 나로빠의 여섯 수행법에 조예가 깊다. 또한 5대 달라이 라마는 닝마빠 출신이며, 현 14대 달라이 라마의 스승 가운데에도 닝마빠의 뒤좀 린뽀체가 있으며, 또한 딜고켄체 린뽀체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전수받기도 했다.

따라서 종파 간의 경쟁적 발전과 더불어 상호의 수행 전통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활발한 교류 및 대화가 티베트불교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근 이십 년 전에 대학교에 다닐 때 필자의 한 후배가 해인사로 출가를 했다. 이제 막 사미계를 받고 동아리에 찾아온 그분에게 “스님, 한국불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불교도 공부를 해보시지요. 정말 도움이 많이 될겁니다.”라고 하니 그 스님께서 말씀하시길 “싫어요. 우리 나라에도 높은 선지식이 많은데 뭣하러 다른 나라 불교를 공부하나요?”라고 했다. 기풍이 서슬 푸르러 역시 해인사 스님이다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어떻게 보면 한국불교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했다.

종교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막스 뮬러는 “하나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티베트불교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이나 학풍의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한국불교를 더 잘 알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한국불교는 그 기원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풍과 종파가 서로 경연을 벌이며 발전해 왔다. 물론 필자의 의견에 반대하시는 분도 많겠지만, 필자는 현재의 한국불교가 처해 있는 발전의 정체는 어떻게 보면 그러한 종파적 다양성의 결여와 배타적 태도 때문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

 

이종복 / 미국 뉴저지 리처드스톡턴대학 아시아철학 교수.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졸업(석사, 박사 수료). 버지니아주립대학교 종교학과 인도-티베트학 졸업(석사, 박사학위 취득). 주요 저서로 The Opposite of Emptiness in the Middle Way Autonomy School: Jam-yang-shay-pa’s Great Exposition of the Middle이 있고 번역서로 달라이라마의 《수행의 단계》 달라이라마·제프리 홉킨스의 《달라이라마 죽음을 말하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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