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

1. 머리말

불교와 자본주의의 만남이란 테마는 이미 많은 연구자에 의해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되어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생각해 보았음 직한 관심의 대상이다. 해서, 필자는 이 글의 고유성을 테마 자체보다는 만남의 성격을 한정하는 수식어, 즉 ‘합심주의적’에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이 무엇인가의 대상과 결합한다는 의미를 가진 말이라는 점, 마음이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는 정보를 소통시키고 그 에너지를 조율하는 주재자(主宰者)라는 점, 게다가 마음 개념 혹은 마음 문화가 특히 불교(혹은 불교문화권 사회)에서 가장 잘 발달해 왔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글은 ‘마음’ 논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굳이 마음[心] 개념의 기원을 갑골문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보지 않더라도 인간이 몸과 마음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고려하면 인간의 사회적 삶 속에 존재하는 마음 문화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변화시키는 행위는 물론 세계를 파악하는 인식활동에 작용하는 마음의 문제에 대한 치밀하고 본격적인 탐구는 이른바 기축시대(Axial Age)를 통과한 이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음 연구가 서양의 경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되었듯이, 기축시대에 탄생한 붓다는 연기법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통하여 약육강식의 고대적 질서에 대한 비판성과 사회적 행위 일반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윤리성을 담지한 사상 및 실천체계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는 이른바 ‘원형근대성(proto-modernity)’으로서 인류(특히 동양사회)의 역사성을 구성해 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교는 유교와 다소의 마찰을 겪기도 하였지만, 서로서로 창조적 영향을 주고받는 상생적 관계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신유학의 탄생이 실증하고 있듯이 마음 문화에 관한 한 불교와 유교 사이에는 전자보다 후자의 측면이 강했다.

이러한 마음 문화 지형은 19세기 이후 엄청난 지각변동을 경험한다. 서세동점과 함께 서구적 기원의 ‘본격 근대성’이 한반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강점기와 해방 이후 한국사회 전체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허물어져 가던 신분질서가 완전히 해체되었고 관료제에 기반한 근대국가 체제가 확립되었으며 자본주의적 산업발전이 본격화될 수 있는 정치·경제적 조건 및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었다. 그중에서도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신분 해체 변수나 근대국가 변수에 비해, 유교 및 불교를 통해 심화·발전되어 오던 전통적 마음 문화에 강력한 충격을 주는 변화의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제 불교는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본주의적 근대성과 동일한 사회적 공간 속에 공존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불가피하다. 싫든 좋든 오가며 자주 마주칠 수밖에 없다. 좋았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싫었다가 좋아지기도 하면서 공생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자본주의 근대성이 불교에 영향을 미쳐서 불교 변화를 유발하기도 했겠지만, 불교사상(혹은 동양사상) 및 문화가 서구적 기원의 자본주의에 영향을 미치기도 할 것이다. 결과론적 차원에서 평가해 보면 잘못된 만남도 있을 것이고, 처음 만남은 잘못되었어도 나중에 잘된 경우도 있을 것이며, 반대로 이제까지는 잘 만난 것처럼 보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잘못된 만남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라도 양자의 만남을 진지하게 따져 보는 일은 과거의 정리를 넘어서 현재의 삶과 미래의 전망(혹은 대안)을 위해서도 결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글은 양자의 합심주의적 만남을 사회학적 관점 즉 문화 영역(마음 문화)과 사회경제체제(자본주의)의 관계라는 경제사회학적 관점에서 정리해 보고, 그 다양한 만남의 특징과 결과를 정밀하게 따져 보고자 한다.

2. ‘beyond Weber’와 내재적 잣대로서 합심(合心) 개념

이 연구를 위해서는 비판의 잣대(여기서는 사회학적 관점)를 만드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작업마저도 다소의 우회로를 경유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회학의 학문적 현실이기에 일단 그 길로 들어서 보자.

굳이 브로델이나 마르크스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특정한 사회의 문화는 그 사회 고유의 사상적 토대와 장기지속의 역사적 축적의 산물이고 그러한 점에서 상대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당대의 토대와 정치체제에 조응하면서 변화(혹은 창조)되어 나간다. 마찬가지로 베버(Weber)나 파슨스(Parsons) 등과 같은 사회학자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사회는 사회적 삶의 다양한 영역들 사이의 상호작용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고 또 변화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와 자본주의의 만남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는 불교에 대한 교학적 차원이나 자본주의 경제현상에 대한 경제학적 분석이 아니라 불교의 종교적 윤리와 사회경제체제 사이의 조응(혹은 긴장) 관계에 주목한다.

불교와 자본주의 사이의 관계에 관한 가장 고전적 논의는 베버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자신의 저서 《힌두교와 불교》에서 불교가 비서구-불교문화권 사회의 자본주의 발흥에 걸림돌이 되었음을 자세하게 실증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베버의 주장은 ‘보편사적 근대성의 유일한 담지자는 오직 서구’라는 잣대에 의한 비서구사회의 측정, 그리고 그러한 점에서 비서구사회의 부재(不在) 요인에 의한 비서구사회의 평가 및 설명이란 오류를 범하고 있다. 마치 남성의 신체적 특징에서 추출한 측정의 잣대로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평가하는 것만큼 심각한 방법론적 타당성의 문제를 야기한 것이다. 매우 자연스럽게도, 이러한 베버의 한계는 그 후 베버의 비서구사회론을 극복하려는 학문적 시도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시도를 꼽는다면 단연 벨라(Bellah)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일본 막부시대의 종교(불교, 유교, 신도)가, 비록 정치적 합리화라는 우회로를 거치기는 하지만, 일본의 산업발전(자본주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실증한 바 있다. 이는 비서구사회의 종교(불교)도 자본주의와 친화성을 가질 수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벨라의 연구결과조차도, 비서구사회에서 유독 일본만이 예외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에 성공한 이유를 일본 종교들의 종교윤리 중에서 신교 윤리에 필적할 만한 것을 찾은 것이므로, 베버를 온전히 극복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최근 근대성 논의 중 다원근대성(multiple modernities) 및 중층근대성(김상준, 2011)은 보다 근원적으로 베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다원근대성론의 대표적 주자로 알려진 아이젠슈타트(Eisenstadt)는 근대성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임을 입증함으로써 비서구사회의 근대성이 독자적인 기원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바, 이는 기축시대의 원형근대성이 모두 독자적인 근대성의 독립변수로 작용함을 암시하고 있다. 아나손(J. P. Arnason)이 소련의 사회주의 근대성이 비잔틴 문화와 연결된다는 주장이나 북한식 사회주의 근대성이 ‘한국의 전통적 합심주의 마음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는 필자의 실증적 연구도 이와 맥이 닿는다. 또한 김상준의 중층근대성론(2011; 2014)은, ‘시대로서의 근대는 시간의 수평축에서의 개념(초기 근대-본격 근대-후기 근대)이고, 특징으로서 근대성은 시간의 수직축에 중층적으로 존재하는 개념(원형근대성-식민지 및 피식민지 근대성-지구적 근대성)’이라고 구분하고 자신의 독특한 중층근대성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한국사회의 특정한 시공간 속의 근대성이 지닌 복합적이고 구체적인 특성을 이해하는 데 좀 더 적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다원근대성론이나 중층근대성론은 원형근대성의 고유성을 실체화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사회구조와 만난 원형근대성의 변형(약화 혹은 강화)을 경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이론을 설명하는 거시 개념으로서 이론적 논증에는 성공하여 인식의 지평을 확장·심화시켜 주는 데는 대단히 유익하지만, 구체적인 국면이나 상황에서 특정한 종교윤리와 사회경제체제가 접합되는 현상을 실증하는 개념적 도구로서는 적합하지 않다는 한계를 지닌다.

특정한 사회의 원형근대성의 변화만이 아니라 그것과 사회경제 체계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그 내재적 종교성을 가장 잘 반영한 개념인 동시에 그 사회의 내재적 종교윤리와 특정한 사회경제 현상 사이의 관계를 실증할 수 있는 개념적 도구가 요구된다. 이러한 학문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 필자가 제시하고자 하는 개념이 합심(合心) 개념이다.

여기에서 ‘합리(부재(不在) 개념)’와 합심(내재 개념)의 관계는 물론 ‘마음’(철학적-심리학적 개념)과 ‘합심’ 개념(사회적 관계를 실증하기 위한 사회학적 개념)의 관계를 상론할 여유는 없지만, 합심 개념이 이 글의 중심 테마 즉 불교문화(마음)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실증하는 데 적합한 개념이란 학문적 판단을 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필자는 합심 개념이야말로 불교 및 유교의 종교윤리(마음 윤리)를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그러한 점에서 내재적 잣대일 뿐만 아니라) 그 역사성(장기지속성) 및 문화성(마음버릇, Habit of Heart)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현대 한국사회의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데 타당한 개념임을 각종 경험적 연구를 통해 입증해 나가는 중이다. 이 글도 그 일부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3. 이론적 논의: ‘합심주의적 상황대응방식’을 중심으로

베버에 따르면 서구에서 자본주의가 기원한 것은 ‘오직 서구’에서만 구원과 돈의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종교윤리(신교윤리)가 있었고 그것이 합리적 생활방식의 영위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반면에 인도를 비롯한 대승불교 문화권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발흥하지 못한 것은 니르바나(구원)에 이르는 길이 극소수의 종교 엘리트에게만 보장되어 있었고 평신도에게는 막혀 있어서 시민사회가 ‘마술의 정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베버는 자신의 저서 《유교와 도교》의 말미에서, 유교의 현세 지향적 특징을 전제로 중국인의 현세 적응능력이 모방의 귀재로 알려진 일본인들보다 높다고 평가함으로써, 향후 유교문화권 사회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할 가능성을 슬쩍 열어 두는 듯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를 근거로 오늘날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을 설명하는 일부 논자들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분화(혹은 삶의 영역 분화)와 그에 따른 가치분화 그리고 세속화를 고려하면 종교적 가치와 자본주의적 가치 사이의 긴장은 불가피하며 바로 이때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정당한 종교윤리를 모색하는 작업이 수반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이러한 종교적 정당화를 수반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가치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나 이들의 행위는 종교적 이해관심을 벗어난(종교윤리와 무관한) 경제적 행위일 뿐이며, 그러한 점에서 불교와 자본주의의 만남을 논의하고자 하는 이 연구의 범위를 벗어난다. 게다가 오늘날 한국사회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유교 및 불교문화권 사회가 비약적인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리고 서론에서 논의한 사회학적 논의를 고려하면, 거기에는 불교 내적인 종교윤리적 정당화가 전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를 논의하기 위한 개념적 장치가 바로 불교의 마음버릇과 그 합심주의적 상황대응 방식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불교의 ‘마음버릇’인가? 그 까닭은 마음의 버릇에 따라 다양한 합심 유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선 마음의 구성요소(이성, 감정, 의지력, 기억 및 이데올로기, 상상력)를 중심으로 이성 지향적 합심, 감성 지향적 합심, 의지(력) 지향적 합심, 기억 혹은 이데올로기 지향적 합심, 상상(력) 지향적 합심 등이 존재할 것이다. 또한 관계의 매개로서 마음 소통의 유형(정보적 소통, 설득적 소통, 맥락적 소통, 동조적 소통)으로서 합심뿐만 아니라 관계의 에너지를 조율하는 마음의 유형에 따른 합심(집합적 열광으로서 합심, 사회적 압력으로서 합심)도 존재하며, 나아가 합심 대상에 따른 합심 유형(본심과의 합심, 타자와의 합심, 집단-가족, 소속단체, 정당, 기업 등-과의 합심, 사회와의 합심, 우주와의 합심, 그리고 일탈과의 합심 및 변심 등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또 왜 상황대응방식인가? 우선 베버의 ‘현세’를 ‘상황’으로 전환한 이유는 한국사회가 유교뿐만 아니라 내세를 강조하는 민간신앙 및 불교를 포함한 다종교사회라면 굳이 ‘현세’만을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적응’을 ‘대응’으로 바꾼 까닭은 합심주의 문화의 경우 상황에 수동적으로 적응하는 측면만이 아니라 경우(특히 變心의 경우)에 따라서는 주어진 상황 그 자체를 바꾸는 적극적인 측면도 내포하는 개념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자원동원 차원에서, 특정의 정치적 국면에서 많은 행위자들이 ‘합심(合心)’을 한국사회 구성원들에게 요구하였고, 또 이것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 방식으로 국면전환을 성공적으로 진행한 사례가 흔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능력’을 방식으로 전환한 까닭은 관계론적 관점의 경우 행위자의 능력보다는 사회적 관계에 참여하는 요소들이 서로서로 관계를 맺어가는 방식이 더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상황대응방식’이란 개념이 베버의 현세 적응능력 개념에 비해 합심주의 문화를 가진 사회의 무상한 사회관계는 물론 그 변화를 설명하는 데 더 적합하다는 판단이다.

위의 두 가지 전제를 종합하면, 합심주의적 만남은, 마음의 구성요소 중 하나 혹은 다수를 활용하여, 동조적 소통 및 열광적 에너지의 조율을 통한 각종 합심의 대상에 결합하는 일종의 상황대응방식이다. 이를 자본주의적 상황에 대입하면 불교와 자본주의의 만남은 마음의 특정한 구성요소를 나름의 방식으로 활용하여 집합적 조율을 거쳐 그 대상인 자본주의적 상황 혹은 요소인 노동, 이윤추구, 금욕과 저축, 기업 등에 결합하려는 대응방식이다. 그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자본주의 발전으로 귀결될 수도 있고 자본주의 비판과 그 대안에 대한 모색의 길로 나가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여 굳이 도식화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표 1〉에서 (1)유형은 불교의 전통적인 마음버릇(마음의 습속: habit of heart)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적 상황을 맹목적으로 추수하는 사례가 여기에 속한다. 이 유형은 불교가 자본주의와 적극적으로 만나기보다는 ‘따로따로’ 공존할 가능성이 크다. 비록 ‘마지못해’ 만나기는 하지만 가치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다. (2)유형은 불교의 전통적인 마음 문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본주의 비판 혹은 그 대안의 자원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여기에 속한다. 미얀마의 경험을 토대로 《작은 것이 아름답다》(슈마허/김진욱 역, 범우사, 1992)를 저술하여 근대경제학 및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슈마허(E. F. Schumacher)의 주장이 이 사례에 속한다. (3)유형은 불교의 전통적 마음버릇을 고치거나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자본주의에 추수하는 사례로서, 19세기 일본의 심학운동가(心學運動家)인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의 사례나 현대 일본의 이나모리즘(팔정도의 정진을 근면한 노동의 에너지로 연결하여 기업경영에 성공한 사례)을 들 수 있다. (4)유형은 불교의 전통적 마음버릇을 고치거나 적극적으로 재해석해 자본주의 비판 및 대안을 모색하는 사례로서, 아시아 참여불교 운동의 사례가 여기에 속한다.

이에 아래에서는 이상의 이론적 논의에 기초하여 이러한 만남의 유형들이 각각 불교의 마음요소 혹은 마음버릇을 어떻게 활용하여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자본주의와 결합(혹은 합심)시켰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실증해 보고자 한다.

4. 두 가지 얼굴, 네 가지 만남: 경험적 사례를 중심으로

1) 불교의 전통적 마음버릇으로 자본주의를 만난 사례

<표 1〉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의 전통적 마음버릇으로 자본주의를 만난 경우는 다시 자본주의를 그대로 추수하는 만남(〈표 1〉의 (1)유형)과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는 만남(〈표 1〉의 (2)유형)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표 1〉의 (1)유형에 속하는 사례가 양적으로는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판단되지만, 만남의 강도는 높지 않고 ‘따로따로’ 공존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례에 속하는 불교는 자본주의와의 적극적인 만남 그 자체를 과제로 안고 있는 셈이고, 그러한 점에서 경험적 사례의 내용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연구대상으로는 부적합하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표 1〉의 (2)유형에 속하는 슈마허의 사례를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슈마허(E. F. Schumacher)는 자신의 저서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불교의 잣대로 경제발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심지어 그는 그 저작 중 한 장을 할애하여 ‘불교경제학’을 논의하고 있다. 거기에서 그는 팔정도 중에서도 특히 정명(바른 생활)의 개념으로 자본주의와는 다른 경제학(혹은 대안의 경제학)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해 보자. 그는 우선 근대경제학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첫째, 장기보다는 단기를 중시한다. 둘째 ‘비용’의 정의 속에 환경과 같은 ‘자유재’라 불리는 것이 들어 있지 않다. 셋째, 재화를 다룰 경우 시장가치를 문제 삼으며, 그 실질은 무시한다. “아무튼 경제학적 판단이 ‘부분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경제적 타산이라는 좁은 범위 안에서도, 이 판단은 불가피하게 그리고 ‘방법론으로서’ 일면적으로 되어 버리는 것이다.(슈마허/김진욱 역, 1992: 47)” 이렇듯 슈마허는 근대 주류 경제학이 부분적인 특성을 띠고 있음을 비판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초경제학적 연구가 보안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초경제학은 무엇일까? 경제학은 인간을 환경과 함께 다루는 학문이므로, 초경제학이란 두 가지 구성 부분 즉 인간을 다루는 부분과 환경을 다루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상게서: 51).” 결국 슈마허는 이러한 논의에 기초하여 일종의 초경제학으로서 ‘불교경제학’을 주창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규모의 경제에 대한 대안으로 불교경제학과 같은 소규모 경제의 장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인간에게 재능활용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노동소외(생산과정으로부터 소외)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 (2) 공동노동으로 인간의 이기심 극복이 가능하다는 점, (3) 생존에 필요한 정도의 재화와 용역을 생산한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러한 생산은 절용의 윤리에 터한 불교경제학의 핵심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2) 불교의 전통적 마음버릇을 고쳐서 자본주의를 만난 사례

〈표 1〉에서 보듯이, 불교의 전통적 마음버릇을 고치거나 현대에 맞게 적극적으로 재해석하여 자본주의와 만난 사례 역시도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가 자본주의를 추수하는 만남이라면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거나 적극적 대안을 모색하는 만남이다. 일본의 사례가 전자라면 아시아 각국의 참여불교 운동은 후자에 속한다.

(1) 일본의 사례

벨라(Robert N. Bellah)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인 Tokugawa Re-ligion(The Free Press, New York, 1969)에서, 왜 유독 일본이 비서구사회에서는 예외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했는지를 체계적으로 논증하고 실증함으로써 자신을 세계적인 학자로 알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베버와 파슨스의 이론 틀을 기초로 하여 종교(문화)와 경제발전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정립한 다음 일본의 독특한 근대화의 경로를 실증한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근대화 이전인 도쿠가와 시대의 종교(불교, 유교, 신도)가 일본인들의 ‘마음의 습속(Habit of Heart)’으로서 충(忠)의 가치를 내면화하게 하였고 그것이 정체(the polity)의 합리화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문화적 조건을 형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정체의 합리화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경제발전을 견인했다는 일본의 독특한 발전 경로를 실증하였다.

바로 이 연구에서 벨라는 본론의 마지막 장을 도쿠가와 시대에 유행한 심학(Shingaku, 心學)과 그 창시자이자 에도(江戶)시대의 대표적 사상가인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의 사상을 상업 및 산업적 가치와 적극적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실제로 그는 심학 속에 내포된 충의 가치를 분석하고 있는데, 이는 일본의 심학이 일본의 정치 및 경제생활(의 변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상인이 판매해서 얻은 이익은 무사의 녹(祿)과 같다’고 주장한 이시다 바이간의 사상 속에서 정직이나 절약의 가치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심학이 어떻게 기업가와 노동자의 가치에 녹아들어 갔는지를 실증하고 있다. 그는 장을 이렇게 맺고 있다: “심학이 세속에서의 일에 대한 기강 있고, 실제적이고, 지속적인 태도를 시민계급 사이에서 성장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고 보아야 하며, 이러한 태도는 경제가 산업화과정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기업가와 노동자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심학은 맹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극동지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종교전통 가운데 하나를 활용하였다. 이 전통을 당시 도시계급의 필요에 맞추어, 심학은 고통을 당하고 번민하고 있던 상인들의 삶에 의미를 가져다주었고, 그들 사회에 가장 심원한 결과를 낳게 될 방향으로 그들의 에너지를 돌렸다.”(Robert N. Bellah, 1969: 175-176)

현대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3대 기업가’ 혹은 ‘경영의 신’ 등으로 불리며 ‘이나모리즘’을 탄생시킨 ‘교세라’의 명예회장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는 정진(精進)이야말로 기업발전의 열쇠라고 주장한다. 슈마허가 정명 개념을 소비생활과 연관시켜 대안의 경제학을 제시하고 있다면, 이나모리는 자신의 기업경영 경험을 근거로 정진 개념을 근면하고 생산(노동) 활동에 적용하여 창조적인 기업 경영 및 발전을 설명하고 있다.

(2) 참여불교운동의 사례

불교 전통 속에서 해방은 모든 물질적·정신적·사회적 제약을 초월하여 열정과 집착이 사라진 평화의 상태, 즉 열반의 경지에 다다른 것을 의미하지만, 참여불교의 해방은 이러한 전통적 의미와는 달리 탐진치에 대한 제도적·정치적 차원의 성찰, 전쟁·불의·빈곤과 불관용 등에 대한 대응을 통한 개인의 내적 평화와 세상의 평화 등에 관심을 갖고 세간적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참여불교는 개인적이고 피안적인-그래서 베버로 하여금 불교를 내세적 종교로 규정하게끔 하였던- 해방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세속적 의미의 해방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아 각국의 참여불교 사례는 각 국가가 처한 사회구조적 조건 및 그로 인해 파생된 사회문제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유형으로 현상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참여불교 운동은 불교 교리 혹은 불교문화를 사회문제의 해결책에 동원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보자. 스리랑카의 아리야라트네는 사회적 관심과 세속적 관심을 결여한 불교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자유 사이에는 필연적이고도 의존적인 관계가 존재하므로 개인적 해방의 길은 사회적 해방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사르보다야 슈라마다나’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이 운동을 불교적 가치와 원리에 따라 스리랑카의 정신적·경제적 재건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발전시켰고 궁극적으로는 촌락의 깨달음 운동 등을 통해 경제개발이 물질적인 목적이 아니라 정신적인 목적을 바탕으로 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붓다다사는 태국 사회가 경험한 급격한 현대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불교의 현실 적합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으며, 현대사회 구조의 부도덕성과 이기주의에 대해 강도 높게 비판해 왔다. 무명과 탐욕, 집착과 아집에서 비롯된 고는 우리를 이기주의적 삶으로 이끌므로 이기심과 집착을 모두 벗는 것만이 고를 궁극적으로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 붓다다사의 기본 입장이었다. 한편 붓다다사는 자연에 대해 마음 깊이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 것을 주장하였고, 불교와 평화, 불교와 민주주의 등의 주제를 불교의 핵심교리를 이용해 설명하였다. 그의 제자인 술락 시바락사도 태국의 타락한 정치·사회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불교 오계(五戒)의 현대적, 사회적 의미를 재해석하며,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 가령 폭력이나 여성문제, 세계화, 소비자본주의, 개발, 발전 등의 현대사회 현상들에 대한 불교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통해 베트남의 정치적·사회적 투쟁에 적극 참여하게 된 틱낫한은 사성제와 공, 보살도와 자비 등의 불교 교리를 현실의 문화와 조건에 어울리게 함으로써 불교를 현대화하였다. 그리고 비폭력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과 마음과 타인들을 향한 온화함과 자비심과 기쁨과 평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세계 평화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도 마찬가지다. 국제분쟁과 인권문제, 지구적 환경문제의 해결과 평화 활동을 해온 달라이 라마는 관용과 상호존중을 바탕으로 세계 문제들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것을 주창해 오고 있다. 그에 따르면 증오, 분노, 질투, 극단주의, 탐욕 등의 부정적 감정을 줄이고 자비, 인정, 관용 등을 함양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데, 훈련과 교육을 통해 무지와 분노, 증오를 결국은 줄일 수 있고, 자비와 관용을 개발할 수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달라이 라마의 노력은 불교의 근본 교리를 평화와 비폭력이라는 인류 보편의 가르침으로 승화시켰다고 평가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시아 각국의 참여불교는 자국이 경험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병폐들을 사회적 고(苦)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불교의 전통적 ‘마음버릇’을 수정하고나 과감하게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그에 실천적으로 대응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이렇게 볼 때 참여불교는 불교와 근대적 기획이 창조적으로 만나서 탄생한 ‘새로운 불교 혹은 새로운 아시아적 근대기획’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5. 나오는 말: 문제는 한국불교다

매우 불행하게도 필자는 한국불교와 자본주의의 만남에 대한 실증적 연구를 수행하지 못했다. 그것이 〈표 1〉의 (1)유형에 속했기 때문이다. 물론 〈표 1〉의 (4)유형에 속한다고 생각되는 1980년대 민중불교운동의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되지도 못하였거니와 한국불교를 대표할 수 있는 대표성을 가진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히려 오늘날 한국불교는 자본주의에 관심을 갖고 추수적으로든 비판적으로든 적극적으로 만나는 것이 시급한 과제로 보인다. 불교자본주의든 불교사회주의든, 혹은 ‘또 다른’ 진보의 기획이든 다양한 실험을 과감하게 시도하고 또 지속해야 한다.

가능성은 열려 있다. 합심주의의 상황 유연성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활용할 마음 요소도 많다. 우선 팔정도의 모든 길이 깨달음으로 통하듯, 팔정도의 모든 교리가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현대적 의미를 실을 수만 있으면 추수적이든 비판적이든 자본주의와 만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례로 최근 ‘하트 스토밍(Heart Storming)’을 기업의 생산성 향상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팔정도의 정념(正念)을 조직 및 기업 활동과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원시적 형태의 소비공동체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승가의 원리는 자본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분배정의 및 소비윤리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불교의 다양한 교리가 또 다른 진보의 길과 만날 가능성도 열려 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 차원의 불교개혁이 아니라 불교의 전통적 ‘마음버릇’을 21세기의 시대정신에 부합도록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대승불교가 육바라밀과 같은 행위 윤리를 제시함으로써 평신도들에게도 성불의 길을 열었듯이 21세기 한국불교는 대중(혹은 다중)으로 하여금 자본주의가 초래한 고해의 바다에 빠져 있는 모든 중생을 다 건질 수 있는 ‘마음버릇’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The Second Birth)을 열어 주어야 한다. 불교의 존재 이유이자 그 정당성의 사회적 기반이기 때문이다. ‘21세기판’ 불교의 ‘마음 문화 혁명’을 고대하는 까닭이다. ■

유승무 / 중앙승가대학교 포교사회학과 교수. 한양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학위 취득. 주요 저서로 《불교사회학》과, 공저로 《현대사회와 베버 패러다임》 《한국민족주의의 종교적 기반》 《유교적 사회질서와 문화, 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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