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눈으로 자본주의를 말한다

1. 머리말

우리 현실은 절망적이다. ‘4·16 참사’로 불리는 ‘세월호’ 비극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우리의 무기력과 무책임은 부메랑처럼 우리 자신과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어 ‘이것도 나라인가.’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것일까.’ 같은 깊은 절망감이 스민 물음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더 절망적인 것은 그런 참사를 겪고 나서 보여주는 이른바 지도자들과 자신의 참담한 망각 증세이다. 어느새 조금씩 잊어가면서 우리는 또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일에 빠져들고 있다.

21세기 초반 한국사회의 상황은 물신주의와 그에 따른 불안, 분단과 그로 인한 지속적인 평화 위협 등의 징후로 규정될 수 있다. 일직선을 전제로 하는 서구화와 경제성장을 지상의 목표로 삼으면서 지니게 된 ‘빨리빨리’ 문화와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으로 상징되는 폭압적인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면서 얻어낸 민주화의 과정에서 지니게 된 ‘극단적인 이념 대립’은 상대를 ‘좌빨’과 ‘수구꼴통’으로 규정짓기를 서슴지 않는 야만적 적대문화 속으로 우리를 몰아가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경제 상황 또한 만만치 않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우경화, 북한의 고립 등으로 상징되는 이 상황은 우리의 판단과 선택의 폭을 넓혀줄 가능성과 좁힐 가능성의 공존으로 등장했다. 북한과 중국, 미국의 핵은 물론 북한과 남한의 핵발전소는 한반도를 핵전쟁의 소용돌이로 언제든지 몰고 갈 수 있는 요인이 되고 있고, 더 나아가 자연재해 등으로 인한 피폭의 공포 또한 일상적으로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핵발전소 증축과 수출을 통한 경제성장을 주요 업적으로 내세우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런 현실 상황을 어떻게 인식해야만 바람직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차원에서 모색될 수 있겠지만, 이 작은 논의의 장에서는 주로 이념(理念)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념은 우리 사회가 어떤 원칙과 방향을 가지고 움직여야 하는지를 묻는 사회적 차원의 모색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사회 구성원의 삶과 긴밀한 연계성을 지니면서도 일정한 독자성을 지니기도 한다. 한 사회를 움직이는 현실 속의 이념은 구성원의 의식 여부와는 관계없이 개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만, 역으로 구성원의 의식적인 노력을 통한 이념의 전환 가능성 또한 열려 있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이념의 피지배자이면서 동시에 이념의 지배자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 셋은 서로 긴밀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유민주주의나 민주자본주의 같은 정치·경제적 차원의 것으로 구현되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사회 안에는 특히 북한 및 중국과의 관계를 전제로 해서 논의해야만 하는 또 다른 이념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socialism)이다. 한때 공산주의(communism)와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던 이 사회주의는 그것보다 훨씬 더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는 개념으로 재정착했고, 우리 사회도 최소한 사회민주주의 같은 완화된 이념은 수용할 만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소련과 동유럽이라는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로 인해 한동안 논의의 장에서 소외되어 있던 사회주의가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 위기, 특히 금융자본주의의 위기와 함께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런데 이 사회주의는 개념 정의에 따라 그 외연(外延)은 물론 내포(內包)까지도 달라질 수 있는 애매성과 모호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개념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타자와의 연기성(緣起性)을 존재의 근본 요건으로 설정하고 있는 불교의 존재론과 가치론이 사회주의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지, 아니면 어떤 관계 설정이 가능한지 등의 문제는 불교의 자본주의와의 관계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념 프레임 속에 이 셋이 이미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 이념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이 셋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2. 지금 우리에게 사회주의란 무엇일까?

1) 사회주의(socialism)에 대한 정의

사회주의는 역사적인 개념임과 동시에 보편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역사적인 개념으로서 사회주의는 ‘중국 사회주의’ 같은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고, 보편적인 개념으로서 사회주의는 한 사회의 자원과 가치 배분 기준은 개인보다는 사회에 두는 이념으로 정의될 수 있다. 베른슈타인의 지적과 같이 사회주의는 ‘사회 내의 지배적인 계급 구분의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모든 노력의 총괄적 표현’으로 정의되기도 하는가 하면, ‘사적 소유를 공동 소유로 대체함으로써 경제생활을 전체의 계획적 규제 아래 두고자 하는 국민 경제 체제’라고 정의되기도 한다. 사회주의는 표현이기도 하고 체제이기도 하며, 때로는 상태로 묘사되기도 하는 복합적이고 불명료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의들에 따르면 북한이나 중국은 사회주의국가일까? 정의가 분명치 않기 때문에 그 정의에 따라 긍정적인 답변과 부정적인 답변 모두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이 두 나라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사회주의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상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두 나라가 공유하고 있는 사회주의로서 속성은 국가 또는 당 주도의 계획경제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점과 최소한 헌법 수준에서는 지배계급의 철폐를 목적으로 하는 점 등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사실은 그와 유사한 개념인 공산주의(코뮤니즘)와는 어떻게 차별화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구분하고자 했던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사회주의를 국가가 중심이 된 불완전한 평등사회로 규정하면서 그러한 불평등이 국가와 자본과 함께 제거된 가장 높은 수준의 공동체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공산주의를 정의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산주의는 진정한 사회주의(true socialism)이기도 하다. 그들에게서 사회주의는 광범위한 적용 범위를 갖는 개념인 데 비해 공산주의는 과학적 탐구와 예측에 근거한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한정된 의미를 가진 개념이었던 셈이다.

슘페터(J. Schumpeter)는 사회주의가 러시아적인 시각 정도를 예외로 한다면 공산주의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상황을 전제로 해서 사회주의가 자유주의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음을 말하면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차이가 크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또한 자본주의 질서가 자신을 붕괴시키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과 중앙집권적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질서의 추정상속자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붕괴될 방법에 관한 그의 진단에서 잘못을 범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결국은 붕괴할 것이라는 예측에서는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 정체주의자들은 자본주의 과정이 정체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진단하는 데서 잘못을 범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이 공적 부문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으면서 정체될 것이라고 예측하는 데서는 여전히 옳은 것으로 밝혀질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슘페터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유사성,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의 위기를 일정한 시기 동안 방어해주는 공적 부문, 즉 국가의 역할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대와는 달리 오늘날에는 주로 디플레이션과 금융 위기로 인한 자본주의 질서 붕괴 징후가 나타나고 있지만, 그 붕괴를 막아주는 공적 자본의 투입은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어찌 되었건 여기서 슘페터가 주목하고 있는 사회주의의 특성은 사회주의의 중앙집권성이고, 그것은 당시의 소련 정도를 예외로 하면 공산주의체제라기보다는 사회주의체제의 특성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을 종합하여 사회주의를 다시 정의해본다면, 그것은 ‘사적인 소유를 공적 소유로 대체하는 중앙집권적인 경제체제를 근간으로 삼아 평등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정치경제학적 이념 지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념 지향으로서 사회주의는 당연히 공산주의를 포괄하는 개념일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 존재하는 실재적 이념임과 동시에 미래사회에도 작동 가능하기를 기대할 수 있는 규범적 이념으로서 특징도 지닌다.

2) 현실 사회주의 문제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와 차이를 지닐 수밖에 없다. 사적인 소유를 공적 소유로 대체하는 점에서는 대체로 이 두 유형의 사회주의가 일치할 수 있지만, 지배계급의 철폐를 통한 평등사회의 구현이라는 차원으로 넘어오면 둘은 이상과 현실이라는 넘어설 수 없는 차이를 지니게 된다. 우리는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를 중국 사회주의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의 경우에도 유사한 특성을 지니고 있지만,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할 수 있는 과정과 방법의 제한으로 인해 접근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중국 사회주의가 현실적으로 어떤 유형의 것이고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정확한 예측과 분석이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는 변화의 핵심은 사적 소유의 영역이 확장되고 있다는 점과 여전히 공산당에 의한 계획과 통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모순적인 현상 기술이다. 현재의 중국사회를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라고 규정하고자 하는 추이즈위안은 현재의 중국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제도가 건설되는 상황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라는 이론적 시각으로 바라봐야 비로소 난마 속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사회주의가 노동자 계급을 영원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머무르도록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프티부르주아 계급의 보편화가 미래의 희망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의 경제적 목표는 개혁과 기존 금융시장 체제의 전환을 통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건설하는 것이고, 정치적 목표는 ‘경제적 민주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이다.

중국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다양하지만, 추이즈위안의 경우와 같이 계획경제와 시장의 공존이 가능한 사회로 바라보는 관점이 일반적이다. 그 기본 전제는 추이즈위안도 유념하고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구분이 가능하다는 브로델의 주장이다. 브로델은 경쟁에 기초하면서도 거의 투명한 유형의 실제적인 교환과 복잡하고 억압적인 고차원적 형태의 교환을 구분하면서 첫 번째 교환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장소로 읍내 장터를 들고 두 번째 교환이 이루어지는 형태로 원거리 무역 독점과 금융투기 같은 자본주의적 시장을 들었다.

이러한 브로델의 시장경제와 자본주의 구분이 오늘날 중국의 이른바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고 보는 추이즈위안은 지역정부가 토지투기를 금지하자 부동산시장이 이 지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된 헤이룽장 성 허강 시의 사례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토지시장에 투기하는 방식의 시장을 허용한 광시 성 베이하이 시의 사례를 대비시키면서 프티부르주아 사회주의는 첫 번째 시장 유형을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베른슈타인의 점진적인 진보를 지향하는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리쩌허우는 현재의 중국이 특색 있는 사회주의 사회라기보다는 오히려 ‘봉건적인 자본주의’라고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중국의 도덕주의 전통을 되살리면서 특색 있는 사회주의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라고 보고 있다. 경제성장이 어느 정도 되었지만, 왜곡된 형태의 봉건적 자본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중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와 같은 삶의 의미 물음을 다시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종교적인 사덕(私德)보다는 공공의 질서인 사회적 도덕이 다시 살아나야만 한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추이즈위안과 리쩌허우의 중국 사회주의론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중국이 일정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여전히 사회주의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면서 빚어지는 문제들과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문제로는 우선 농민을 포함하는 프롤레타리아들의 삶이 여전히 경제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인 평등에 심각하게 위배되는 정도의 불평둥이 자리하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문제와 연결되어 있는 다른 문제로는 봉건적 자본주의라는 말에서 암시되고 있는 부패와 공공질서 붕괴이다. 공산당과 가까운 사람이나 공산당원 스스로의 권한을 남용한 부의 축적과 그 부를 전제로 하는 과시형 소비, 그리고 특권의식에 젖은 고위층 자녀들의 안하무인식 행위 등이 중국으로 하여금 다시 도덕주의 전통에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중국 사회주의의 이러한 현실을 북한에 곧바로 대입시키는 일은 북한 고유의 상황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오류로 드러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북한의 경우 ‘인민공화국’이라는 명칭에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이익을 표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 프롤레타리아를 프티부르주아로 만들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럼에도 북한은 엄연히 정치와 경제를 중앙집권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점과 지주나 자본가 같은 부르주아 계급의 철폐를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주의 국가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더 중요한 문제는 그들이 표방하는 목표가 현실 속에서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가 하는 것인데, 대체로 그 목표 달성 정도가 낮다는 평가가 지배적임을 부인할 길도 없다.

3. 자본주의와 윤리 문제

1) 자본주의의 역사적 배경

사회주의와 대응되는 개념으로 널리 받아들여지는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에서 언제 어떻게 등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을 수 있다. 인류의 긴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는 ‘밤의 손님’이었다고 규정짓는 브로델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자본주의가 당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럽은 물론 중국과 일본, 이슬람 문명권까지 검토한 후에 내린 현재적 형태의 자본주의가 지니는 성격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규정하고자 한다. 첫째 자본주의가 여전히 국제적 차원의 자원과 기회를 활용하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고, 둘째 자본주의는 법률에 의한 것이든 관행에 의한 것이든 여전히 독점에 의존하고 있으며, 셋째 사람들이 늘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자본주의는 경제 전체와 사회적 노동 전체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 나름대로 천천히 영글게 된 생각을 말하면, 자본주의란 것은 본질적으로 가장 높은 곳의 경제활동에서 비롯된 것이고, 적어도 그처럼 높은 곳에 올라서려는 경제활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같은 자본주의는 그 밑에 물질생활과 촘촘한 시장경제라는 두터운 두 개의 층을 겹으로 깔고 앉아 높은 수익이 나는 영역에서 서식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유럽과 비유럽의 자본주의가 동일한 시기에 등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브로델의 관점과 같이 자본주의의 두 기반을 물질주의와 시장경제라고 본다면, 또 그 시장이 읍내 장터 같은 직접적 형태의 교환이 아니라 원거리 무역이나 금융 투기 같은 형태의 교환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의 등장은 유럽사에서 보다 뚜렷하게 전개되어 왔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기본적으로 ‘물질주의에 토대를 둔 완전 경쟁’이라는 이상을 견지해왔음을 감안해 본다거나 그 안에서 베버적인 합리성을 추구해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17, 8세기 조선과 중국의 사회경제 상황 속에서 일정하게 자본주의적 요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은 일이 된다.

물론 지구촌 전반에 자본주의가 확산되는 계기는 이러한 완전 경쟁과 합리성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닌 유럽 국가들의 비유럽권 침략의 역사 속에서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 바로 그 사실 때문에 피케티(T. Piketty)의 주장과 같이 현재의 21세기 세계 자본주의 논의에서 ‘부의 분배(the distribution of wealth)’ 문제가 핵심적인 쟁점으로 떠오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확산의 역사가 제국주의적 궤적을 지니고 있고 그 흔적이 여전히 ‘자유무역’이라는 외피를 쓰고 남아 있다는 사실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개인주의와 자본주의를 결합하여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 적실성을 옹호하고자 하는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먼저 진정한 개인주의를 ‘가족의 가치와 소규모 공동체와 집단의 모든 단결된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뿐만 아니라 지역자치와 자발적 결사를 신뢰한다. 그런 개인주의에 대한 옹호는 국가의 강제적 행동을 통상적으로 요구하는 대부분의 경우가 자발적 협력에 의해서 더 잘 행해질 수 있다는 주장에 대부분 의거한다고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다.’는 방식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는 이러한 개인주의를 19세기 영어권의 자유주의, 즉 권력집중과 국가주의,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만이 진정한 개인주의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덧붙이면서 그것을 시장에 적용한 ‘완전 경쟁’의 전제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동질적인 상품이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무수히 많은 판매자와 구매자에 의해서 제공되고 수요되며,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동이 가격에 현저하게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둘째, 시장으로의 자유로운 진입, 그리고 가격과 자원의 움직임에 대한 다른 제약의 부재.
셋째 관련된 요소에 대한 모든 시장참여자의 완전한 지식.

하이에크의 초점은 당연히 이러한 완전 경쟁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어떤 사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특별한 임무에 특히 적합한 지식을 보유한 미지의 사람들이 그 임무에 가장 충실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어떤 제도적 장치가 필요한가’에 맞춰져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완전 경쟁을 추구하는 자본주의라는 제도 자체에 신뢰를 보내고 있는 셈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기원하는 이러한 제도에 관한 낙관주의는 그러나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현실 사회주의의 역사 못지않게 현실 자본주의의 역사 또한 지속적인 경제침체의 위기를 순환적으로 맞는 경향을 보여주었고, 그 위기의 가장 최근 형태는 21세기 초반 미국을 중심으로 확산된 세계적인 금융 위기이다. 금융 파생상품의 무분별한 판매와 그것을 부추기는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무분별한 확산이 가져온 이 위기는 한편으로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삼는 전 세계 경제의 붕괴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자본주의 윤리성 논란을 불러오기도 했지만, 어느새 그 경고는 잊은 채 다시 그 흐름이 지속되는 무감각과 망각의 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2) 자본주의 체제와 윤리 문제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의 윤리를 문제 삼은 이후로 상당 기간 자본주의는 직접적으로 윤리 문제와 연결되지는 않지만, 그 거대한 생산력을 배경으로 삼아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수의 인간을 먹여 살리고 있는 이념이자 체제라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일정한 윤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평가가 가능하다. 실제로도 지구상에 가장 많은 인구가 살게 된 20세기 이후에 자본주의적 시장에 토대를 둔 세계 각국의 생산력은 평균적으로만 보면 모든 인간이 최소한의 생활수준을 유지하기에 충분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두 가지 반론과 직면하게 된다. 하나는 ‘성장의 한계’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분배’ 문제이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력과 그 생산력을 무한대로 증대시키고자 하는 생산관계는 먼저 세계 인구와 경제가 지구의 수용 능력을 초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불러왔다. 지금까지 30년이 넘도록 어떻게 하면 지속 가능한 세계로 갈 수 있을지에 대해 쓰고 말하고 연구해온 사람들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여전히 이 문제는 온전한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로 있다. 인류 최초의 두 혁명으로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을 꼽는 메도즈 등은 이제 지속가능성 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꿈꾸기와 네트워크 만들기, 진실 말하기, 배우기, 사랑하기 등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안하고 있다.

두 번째 문제인 분배 문제는 흔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빈부격차 문제로 구체화된다. 20세기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전개된 노동보다는 자본에 근거한 투자에 따른 불평등의 확산에 관심을 두고 있는 피케티는 다양한 자료들을 활용하면서 그 구체적인 양상을 보여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의 자료의 신빙성이나 분석 방법과 관점 자체에 대한 논란이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그런 논란들이 지구촌의 빈부격차 상황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는 없다는 점이다. 피케티의 주장과 같이 사회과학을 하는 방법이나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을 수 없고 다른 방법으로 비판이 가능하지만, 빈부격차의 확대라는 사실 자체의 왜곡까지 허용될 수는 없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보다 근원적인 다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적 시장의 끝없는 확장에 포함되어 있는 탈도덕화 문제이다. 자본주의적 시장은 읍내 장터와는 달리 익명성을 기반으로 삼아 원거리 무역과 금융 투기 자본에 대한 보장으로 지탱하는 시장이다. 이 시장은 그 자체로만 보면 도덕과는 관계없는 무도덕(nonmoral)의 세계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에 대한 도덕적인 판단은 그 시장 작동의 결과를 보고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만 판단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다. 대체로 자유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시장의 확장이 보다 많은 생산력과 함께 부의 총합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을 들어 도덕적으로도 정당하다는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하이에크의 논의를 한국에 정착시키고자 노력해온 민경국의 논의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는 소규모의 연대사회에서 거대한 사회로의 진화를 인류 역사의 발전으로 전제하고 연대사회에서는 연대모럴이 필요한 반면, 거대한 사회에서는 비인격적 교환에 기반한 새로운 제3의 질서, 즉 시장질서가 형성되었다는 하이에크의 주장을 그대로 추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시장질서가 추상적인 행동규칙들, 즉 도덕규칙들을 전제로 한다고 주장한다. 계약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나 타인들의 소유권을 존중하는 것, 타인에게 미친 피해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 자신의 행동 결과에 스스로 책임지는 것을 도덕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 등의 도덕규칙을 전제로 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민경국과 하이에크의 주장은 20세기 초반 미국 중심의 세계적인 금융 위기를 통해 극히 비현실적인 것임이 충분히 드러났다. 과연 당시 금융시장을 움직이던 핵심 인물들에게서 그런 책임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면 어느 누구도 긍정적으로 답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은커녕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것은 다시 그들을 길러내는 기관인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교육과정에서 윤리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강한 요구로 나타났다. 그런 윤리교육은 성공할 수 있을까? 윤리교육 전공자인 필자는 이 질문에 대해 부정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임과 동시에 자신의 이기성에 근거한 합리적 이익추구만으로 운영의 중심에 두는 자본주의적 시장체제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대안이 남아 있는 것일까? 하이에크나 민경국의 주장 중에서 우리가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미 우리 한국사회도 면대면으로만 이루어지는 소규모 연대사회를 넘어서서 거대한 익명의 사회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하이에크가 연대모럴이라고 부른 도덕에 속하는 불교윤리나 유교윤리는 더 이상 사회운영의 원리로서는 유효성을 상실했다고 판단해야 하는가?

4. 불교의 미래와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주의

자유지상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인용문의 주장을 역사발전 단계에 대한 무지, 또는 인간 삶의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의 혼돈 등을 이유로 들어 거부하고자 할 것으로 보인다. 서양 윤리학과 사회과학 방법론의 역사 속에서 20세기 초반 등장했던 이른바 ‘자연론적 오류’, 즉 사실의 세계에 기반을 두고 가치 주장을 끌어오고자 하는 시도에 포함된 오류에 관한 유의는 역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우선 그것은 자연과 자유 사이의 미구분으로 인한 논리적 혼돈이나 얽힘에 대한 경고로서 유효성을 지녔고, 더 나아가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 자체에 대한 분석을 해야 한다는 당위적 요구로서 유효성 또한 지니고 있었다.

다른 차원에서 개인윤리 논의와 차별화되는 사회윤리 개념 또한 일정한 유효성을 지니는 개념이다. 사회구조에서 상당 부분 비롯되는 윤리적 문제를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환원시키는 일은 문제 해결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더 나아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를 각 구성원의 성실과 인내의 의무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일제 강점기와 군부 독재 정권의 노예교육에서 구현된 역사적인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유교윤리에 기반한 성실(誠實)은 하늘의 도[天之道]를 나의 내면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지난한 열망과 노력으로서 인간의 도[人之道]이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의 도가 되기 위한 기본 요건은 그 하늘의 도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인데, 일제 식민지주의자들이나 독재자들은 그 하늘을 자신들이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성실을 가장 저열한 덕목으로 전락시켰다.

불교윤리에 기반한 자비(慈悲)는 내가 아닌 타자에 대한 눈길과 손길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사회윤리적 덕목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전통윤리의 기반 위에서 찾아낼 수 있는 핵심 덕목은 개인윤리로서 성실과 사회윤리로서 자비로 요약된다. 이 둘은 그러나 수기안인(修己安人)과 동체자비(同體慈悲) 또는 지혜(智慧)를 전제로 하는 자비라는 연결고리를 통해서 각각 사회윤리와 개인윤리로 확장된다. 여기서 확장은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심미적 개념이다.

이러한 논의의 기반 위에서 우리가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사적 영역의 연대도덕과 공적 영역의 시장질서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시도하는 하이에크류의 도덕관이다. 현대사회가 익명성을 상당 부분 도입하고 있다는 점과 그로 인해 전통적인 면대면의 윤리가 작동한 공간이 좁혀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지만,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는 근본적으로 구분될 수 없다. 오히려 이른바 제3의 질서로서 자본주의적 시장질서가 각 개인의 도덕적 영역, 특히 삶의 의미 물음에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가 사실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 21세기 초반 상황이다. 이런 국면을 애써 외면하면서 전가의 보도처럼 ‘보이지 않는 손’이나 ‘자생적인 질서’만을 되뇌는 일은 자칫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대한 환상’을 어떻게 해서든 각 개인의 삶의 영역과 사회 속에서 떨쳐버리는 일이다.

우리 삶에서 화폐가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면 할수록 공동체의 기반이 되는 정신적 유대감과 자연과의 균형 잡힌 관계 형성은 더욱더 설 자리를 잃어갔다. 정신적인 만족의 추구는 갈수록 자기파괴적이고 온 마음을 다 빼앗는 돈에 대한 집착, 다시 말해 유용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고 실체도 없는, 인위적인 산물인 부의 추구에 대한 집착으로 대체되어 갔다.

우리가 분석하기로는 살아 있는 지구와 지속 가능한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떨쳐내고 인생의 정신적인 의미를 회복해야 하며, 우리의 경제체제가 공동체 내에 제자리를 잡고 뿌리내려서 그것이 인간과 인간의 삶에 완전하게 결합되도록 해야 한다. 마침내 우리는 인간이 중심이 되는 개발의 과제는 모든 면에서 ‘삶이 중심이 된 사회’를 창조하는 것이야 하며 그 사회에서 경제는 인간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위한 도구 중 하나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불교는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떨쳐내는 데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불교는 사회주의 이념과 어떤 관계 설정을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남겨진 이 물음은 쉽게 그 답을 찾기 어려운 난제에 속한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우리 시대의 화두(話頭)들인 셈이다.

먼저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환상을 떨쳐내는 데 불교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자.

선남자여. 아집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십이인연을 관하게 하라. ……십이인연은 본래 인과(因果)로 일어나는 것이고, 인과가 일어나는 것은 마음과 행동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마음이 본래 있지 아니한 것인데 어찌 몸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있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사람게게는 존재한다는 견해, 즉 유견(有見)을 없애도록 해야 한다. 거꾸로 내가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그 없다는 견해, 즉 무견(無見)을 없애도록 해야 한다.

돈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환상은 돈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이기도 하고, 보다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는 돈만 많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처해 있는 실상은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돈으로 할 수 없는 것들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일정한 생멸의 수준에서 돈이 갖는 가치가 확대되고 확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실지견(如實之見)과 함께 그것을 넘어서는 수준에서는 더 이상 돈이 통하지 않는다는 엄연한 사실 또한 직할 수 있을 때에만 여여한 삶이 가능해진다. 돈을 애써 외면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필요 이상의 돈에 집착하지도 않는 걸림없음[無碍]의 지혜와 그것에 근거한 자비의 윤리가 불교가 자본주의에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묘약이다.

사회주의, 즉 개인 소유의 원칙과 지배계급의 독점을 견제하면서 새로운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는 이념으로서 사회주의는 불교와 어떤 관련성을 지닐 수 있을까? 붓다와 마르크스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유승무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공통점으로 인간 해방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계급차별이 없는 사회를 이상사회의 패러다임으로 간주하면서 각각 불국토와 사회주의사회를 구성원들의 공동체적 결속에 이루어지는 이상사회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유승무의 이러한 대비에 우리는 충분히 유념할 만하지만, 이때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진정한 사회주의’라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비록 한자리에 모여 공부를 하지는 못하더라도 항상 생각을 거두어 마음을 비추어 보기를 힘쓰면서 바른 인연을 같이 닦으면 경에서 ‘미친 마음을 쉬는 곳이 바로 보리이기 때문에 성품의 깨끗함과 맑음을 남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다.’고 한 것을 실현할 수 있다.

사회주의의 본래적 목표는 지눌이 말한 것과 같이 한자리에 모여 한 생각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일을 하면서도 최소한의 공유 지점을 확보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사회주의의 공유 지점은 계급에 따른 차별의 철폐와 그것을 통한 인간다운 삶의 조건 공유이다. 불교의 공유 지점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일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연기적 고리에 관한 관조를 통한 깨달음의 성취와 그 과정에서 자비의 눈길과 손길 나누기이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지닐 수 있는 전체주의 또는 집단주의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실천성과 유연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곡된 개인주의 문화와 물신주의 속에서 병적인 징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서구적 뿌리의 자본주의를 치유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물론 이 의미가 생명력 있게 살아나기 위해서는 승가공동체와 재가공동체를 포함하는 사부대중 공동체가 자본주의 또는 사회주의와 만남의 장에서 붓다적 건강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사실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 ■

 

박병기 / 한국교원대학교 윤리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 윤리교육과, 동 대학원 졸업(윤리학, 도덕교육학 석사·박사). 불교원전전문학림 삼학원에서 불교윤리를 수학했으며 전주교육대학교 교수,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 《동양 도덕교육론의 현대적 해석》 《의미의 시대와 불교윤리》 등이 있다. 현재 동양윤리교육학회 회장,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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