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유차 천지현격(毫釐有差 天地懸隔)’이라는 말이 있다.

 ‘털끝만큼이라도 어긋나면 하늘과 땅 사이처럼 멀어진다’는 뜻이다. 젊은 시절 화계사 선방에서 읽은 《신심명》에 나오는 구절이다. 필자는 늘 이 구절을 마음의 경계로 삼고 살아간다. 터럭과도 같은 한순간의 판단이 엄청난 결과를 불러온다는 말이다. 한순간의 마음이 생각을 낳고 그것이 하나의 행동을 낳는다. 그 행동이 쌓여 습관이 되고 그러한 습관이 결국은 성격이 되어 운명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가랑비에 속옷 젖는 줄 모른다.”는 우리 속담처럼, 하나하나의 행동이 오래 쌓여 이루어지는 습관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어떤 판단을 하게 하고 그 결과로 사람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통을 받기도 한다. 한순간의 오판이 씻을 수 없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사바세계의 비극과 고통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라는 삼학(三學)이 필요하다. 계율은 진흙탕을 지날 때 신는 장화와도 같은 것이다. 사바중생의 공업(共業)으로 우리 삶의 주변이 온통 향락의 진창이 되어 우리의 깨지기 쉬운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의 거대한 힘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형국이다. 확고한 도덕감각과 윤리의식을 지니지 않고서는 이 욕망의 진흙 구덩이에 함몰되기 쉽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 선인들이 왜 그토록 “입을 지키기를 병마개처럼 하라.”든가, “마음을 지키기를 성(城)처럼 하라.”고 당부하였던지 가슴 깊이 이해가 가는 요즈음이다.

옷은 원래 향기가 없는 것이지만, 향료와 의복을 함께 두면 그 옷에도 향기가 배게 된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의 성질이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을 가리켜 훈습(薰習)이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훈습이란 어떤 관념이 인상에 남는 습관성을 말한다. 이 경우 의복에 남아 있는 향기에 해당하는 것을 습기(習氣) 또는 종자(種子)라고 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향락주의라는 습기로 우리를 물들이려고 한다.

과거에는 질병이 보통 전염병이나 바이러스의 감염에 의해 발생하였지만, 현대의 질병들은 대부분 습관병이다. 잘못된 식습관이 비만을 불러오고, 나아가 각종 성인병을 부른다. 잘못된 소비습관은 신용불량을 불러오고, 잘못된 언어습관은 대인관계에서 불화를 불러온다. 또한 잘못된 마음의 습관은 도덕적 붕괴나 우울증, 혹은 자살을 불러오기도 한다. 이렇게 개인들의 잘못 형성된 습관들은 결국 국가적으로도 막대한 예산낭비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녀들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해 주는 것이 건강한 국가를 만드는 지름길이다. 물질적인 유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한 길이 된다.

불가에 전하는 우물가 등나무[井藤] 이야기가 있다. 한 나그네가 광야를 헤맨다. 갑자기 어디선가 들불이 일고 코끼리가 맹렬히 달려온다. 나그네는 도망치다가 우물 속으로 뻗은 등나무 뿌리를 발견하고 거기에 매달린다. 한숨을 돌리고 아래를 보니 거대한 독룡이 입을 벌리고 먹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 주위의 사방엔 독사들이 혀를 날름거린다. 위를 보니 흰쥐와 검은 쥐가 뿌리를 갉고 있다. 들불은 등나무를 태우고, 나무가 흔들릴 때마다 벌들이 내려와 쏜다. 문득 헤- 벌린 입속으로 꿀 다섯 방울이 떨어진다. 그는 그 달콤함에 절체절명의 상황을 잊는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있다. 우리 삶은 이 이야기에서처럼 미친 코끼리와 같은 시간에 쫓기고, 흰쥐와 검은 쥐가 우리 목숨을 야금야금 갉아오고 죽음이라는 거대한 독룡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권력욕, 식욕, 성욕, 재물욕, 수면욕 같은 오욕락에 젖어 이 모든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는 이기적인 마음은 오로지 자신만의 오욕락에 젖어 살아가게 하고, 그 결과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리거나 소중한 가치들의 상실을 초래하게 된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순간의 판단이 평생 씻기 어려운 상실의 고통을 초래한다는 ‘호리유차 천지현격’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된다.

고통의 윤회를 벗어나려면 우리는 늘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즉 ‘관찰하는 자아’가 ‘행동하는 자아’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최근에 건강심리학 분야에서 크게 적용되어 많은 임상적 효과를 얻고 있는 ‘마음챙김명상(MBSR)’의 요체이기도 하다. 순간순간 깨어 있어 나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옛 선비들이 그랬듯이 늘 경건함에 머물며 삶의 이치를 탐구하는 생활태도와 습관이라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사람 도리를 하며 평범하게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요즈음 생생하게 깨닫는다. 탈선의 여지가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이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장(場, field)이다. 매 순간을 참선하듯이 깨어서 살아가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마군이 침입하여 우리의 삶을 휘저어버릴지 모를 일이다. 그저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듯이 마음을 붙잡지 않으면 아차 하는 순간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스님들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 지극한 마음으로 예불을 올리듯이 그렇게 일상의 삶에 임해야 우리는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다. 한순간의 오판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지를 우리는 매일매일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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