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우리 사회는 스펙(spe-cification)이란 단어를 많이 쓴다.

취업 준비생들의 출신 학교, 학점, 토익 점수, 자격증 소지 여부 등을 뜻하는 말로, 외적 조건의 총체인 셈이다. 그런데 이 뜻이 원래 영어로는 사람에게 쓰는 단어가 아니라 기계의 설명서, 규격, 기준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구글에서 ‘car spec’을 입력하면 차의 길이, 무게, 엔진 속도는 얼마다, 라고 나온다. 이번에는 한글로 ‘자동차 스펙’을 검색하면 현대자동차 혹은 기아자동차의 입사 스펙이 나와서 실소를 하게 된다. 언제부터 사람에게 스펙을 사용하게 되었는지 씁쓸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점수 매기고 일렬로 줄을 세워, 여기까지는 가능하고, 그다음은 안 된다고 명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펙을 마냥 무시할 수 없다. 가령 격투기를 할 때 팔이 긴 선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된다. 상대보다 먼저 사정권 안으로 주먹을 날리기에 용이하다. 그러나 평발인 박지성 선수는 남보다 더 피나는 노력을 했고, 양궁선수들의 턱에 생긴 선은 고된 훈련의 결과이므로 스펙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수많은 경쟁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을 표식의 잣대는 경쟁력 확보라는 면에서 이해가 간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표면에 너무 매달리는 점은 지양해야 한다. 스펙이 속속들이 내실을 증명하지는 못하는 연유이다.

방송으로 맛집의 유명세를 탔으나 막상 가보면 이름값을 못하는 광고도 있고, 고급 브랜드에 현혹하여 값비싼 제품을 주문했다가 몸에 잘 맞지 않기도 한다. 사람도 이렇게 겉포장만 보고 평가를 하면 인간 됨됨이는 사라지고 조건만 남는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외모지상주의가 넘친다. 의학과 돈과 유행이 합세하여 예뻐지는 것은 좋으나 성형 유형이 비슷해 개성을 잃는 점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더 나아가 인간군상의 진실과 내면의 가치를 다루는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산 좋고 물 좋고 정자까지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문단 역시 작품의 내용을 보고 작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등단지, 수상 경력 혹은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냈는지가 대변한다면 본말이 전도되는 것이다. 그 무엇보다 좋은 글이 갑이다.

우리 사회의 스펙 우선주의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양과 안목을 길러 주체적 인간이 되는 것이 먼저이다. 이렇게 보면 스펙의 노예가 되기 전에 꿈이 우선이며, 세상의 선입견과 편견의 낙인으로부터 의연할 필요가 있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하여 실력을 키우는 것이다. 열정이 있다면 회갑도 청춘이며, 빙판길에 미끄러져도 다시 일어나는 숨결은 뜨겁다.

꼬리표 때문에 나 역시 마음이 많이 아팠다. 지적 호기심으로 뒤늦게 공부했고 등단을 소박하게 하며 높이에 대해 열망했었다. 애면글면 그것에 다가가는 듯했다. 그러나 높이는 피라미드 구조여서 오를수록 설 자리는 좁고 비바람이 몰아쳤다. 높은 곳에 서면 시야가 넓어질 줄 알았지만 천만에, 내 발밑을 보지 못했다. 높이에 여러 번 좌절하며 고립무원이었다.

오래 답답했던 어느 날, 내 재적사찰의 직원이 날마다 기도 다니는 나에게 “일손 좀 도와주세요.” 했다. 그래서 종무소를 청소하는 일에서부터 행사진행을 보조했다. 사실 절에 기도하러 오는 이들은 여러 관계 속에서 고통받고 힘든 일로 찾는다. 그러다 보니 신도들이 묻는 이런저런 일들에 그들의 입장이 되어 배려해야 했고, 아집의 나를 차츰 내려놓아야 했다. 걸레질은 열패감에 빠진 나를, 초조하고 긴장상태였던 나를 닦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뭔가에 쫓겨 사느라 진정 중요한 것을 놓친 내 안팎의 모습이 타인의 창을 통해 반추되었다.

욕망을 비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다 비웠다고 말할 수 없으며 훈련 중이다. 삶의 지혜는 내가 무언가를 쟁취하며 얻는 것이 아니고 수행의 과정이 쌓여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진리를 나는 납작납작 엎드려 무릎이 다 닳도록 절하는 연세 지긋한 보살님들에게서 배운다.

어느 보살님이 절하면서 깔아놓은 천에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에는 막히는 데서 도리어 통하는 촌철살인이 담겨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나는 이 말씀을 귀감 삼는다. 누구나 살면서 장애가 있기 마련이고 결핍의 내 설움을 대신 울어줄 수 없다. 나의 경우, 기질 탓인지 글 쪽으로 기운다. 울다가 훌쩍이며 몇 자 적고, 터벅터벅 걷다가도 휴대전화 메모장을 연다. 세상사의 이면을 관찰하고 우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이고, 글을 쓰는 일이 내 길 같다. 외형에 연연하지 않고 나의 빛깔을 사랑하며 오늘도 가다듬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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