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대부터 숭불참배로 맥을 이어 온 가문에서 자랐다. 덕분에 대학 시절에 통도사 극락암 삼소굴에서 경봉(鏡峰) 스님의 법문을 들었고, 범어사에서 동산(東山) 스님을 뵙고 점심공양도 함께했다. 나는 이러한 기억을 큰 자랑으로 알고 살아왔다. 대학을 마치고는 50여 년 가까이 교직 생활을 했다. 그 사이 어른들이 하던 대로 원근의 사찰을 찾아 법문을 듣거나 참배하였다. 때로는 나름대로 독경과 교학 연찬 그리고 참선수도도 했다. 또한 보시와 보살행의 실천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이와 같은 재가불자로서 생활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렇게 평생을 불자로 살아온 사람이지만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를 생각하면 늘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우리 주변에는 거개가 절에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내 나이쯤 되는 사람치고 어머니 손잡고 절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그 사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큰스님을 친견하고 법문도 듣고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배웠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변에는 절에 나오는 사람이 현저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좀 과장하면 하루가 멀다고 불교를 떠나는 사람을 볼 정도였다. 불교는 천몇백 년을 이어 온 전통의 종교인데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이렇게 날이 갈수록 신자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니 실로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여러 분야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기독교 인구는 증가하는 반면 불교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의 통계로 기억하는데 전체 인구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22.8%에 불과했다. 이제 10년이 지났으니 상황은 더 나빠졌을 것이다. 더 고약한 것은 신자 수가 줄어드는 것 못지않게 불교 신자의 구성비다. 기독교 신자는 청장년층과 고학력, 도시 거주자가 다수인 데 비해, 불교인은 노령층과 저학력 및 농어촌 등에 많은 분포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저런 자료를 들출 것도 없이 우선 내 가족 중에, 그리고 독실한 신자로 알고 있던 일가친척이나 동료들이 날이 갈수록 하나둘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기독교나 천주교로 개종해가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을 보면 평생 불교를 믿어온 신자들은 참담한 기분이 든다. 여기에는 나를 비롯한 재가자들, 특히 오래된 불자들이 바른 신행으로 모범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한 원인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적할 것은 우리 교단이 포교 문제에 너무 안일하게 대처해온 것이 아닌가 싶다. 알다시피 불교의 여러 경전은 전법과 포교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내세운다. 불자들이 자주 접하는 《금강경》만 해도 보시 가운데 법보시(法布施) 즉 이웃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제일공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탐진치(貪瞋痴)를 적게 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펴고 실천하면 모든 사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 참다운 행복과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포교에 소홀한 것은 곧 이웃과 중생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 어찌 불자로서 송구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한국불교가 쇠잔해가고 불교 신자 수가 현격하게 줄어들어 가는 현상은 한마디로 우리가 불자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더해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불교와 점점 멀어져가는 것도 큰 문제다. 우리 사회를 조금씩 고쳐 가는데 불교적 생각을 가진 사람의 참여가 적다 보면 이상한 가치관이 판을 치게 된다. 말하기가 좀 민망하지만 ‘서울시를 하나님에게 봉헌하겠다’든가 ‘우리 민족의 불행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사회갈등을 유발하는 것이 그 한 예일 것이다.

이런저런 문제를 극복하려면 답은 포교밖에 없다. 부처님도 교단을 처음 세우고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여러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한 길로 두 사람이 가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의 부촉은 널리 법을 전해서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불교가 하는 모양을 보면 이 말씀은 그야말로 우이독경(牛耳讀經)과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온 세상이 외도의 사법(邪法)으로 물들고 있는데 그저 오불관언이다. 특히 포교에 일차적 책임이 있는 스님들을 보면 매일 가사 장삼만 펄럭이고 절이나 받을 뿐, 교화활동에 열성을 안 보인다. 이는 이타행(利他行)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자리적(自利的)인 행동도 못 된다. 왜냐하면 불교가 쇠망하면 결과적으로 출가자가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조선시대 스님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면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으나 이슬람의 침입으로 인도불교가 망해가던 전철을 한국불교가 답습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하는 말이다.

근대 이래 불교의 모든 문제는 포교에 귀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찍이 이영재 스님 같은 선각자도 지적했듯이 민중과 교섭해서 한국불교가 한국문화의 원동력이 되도록 모든 교단 활동을 포교에 기울여야 한다. 스님은 종단의 모든 행정기구를 포교를 위한 것에 맞추고 포교당의 확장, 포교사의 양성과 배치, 외국에의 선교, 문서포교 등을 역설하였다. 이런 주장이 지금부터 90여 년 전에 나왔는데 아직도 같은 타령을 반복해야 한다면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교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두 바퀴로 굴러가는 종교다. 다른 말로 바꾸면 지혜와 자비의 실천이요 자기수행과 사회봉사의 실천이다. 불교는 이 목표를 놓치면 천 길 절벽으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엉뚱한 곳에서 힘쓰지 말고 오직 포교의 길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불교가 사는 길이요 우리 불자가 할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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