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학자이자 독실한 불자인 김종서 박사님이 돌아가셨음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마음속으로 존경하는 선생님이셨는데 신문을 보고 알았다니, 자주 찾아뵙지 못한 죄송스러움이 가슴을 채웠다. 그러면서 참 훌륭한 선생님이셨는데 이제 뵐 수 없게 되었구나 하는 허전함이 엄습해 와, 나는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었다.

김종서 박사님은 훌륭한 교육자셨다. 훌륭한 가장이셨다. 그리고 훌륭한 구도자셨다. 한 사람의 생에서 훌륭한 사회인으로, 훌륭한 가족의 구성원으로 그리고 훌륭한 구도자로 살기란 쉽지가 않다. 쉽지 않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쪽배를 타고 살다 보면 누구나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서 박사님은 가장 성공한 삶을 살다 가신 분이다.

내가 박사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 교양과목에서 교육학을 들으면서였다. 그때도 선생님은 학생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가 있으셨는데,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못했던 나는 선생님과 별다른 인연을 만들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냈다. 그러다가 내가, 그때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 나이쯤 돼서 다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우리는 선우’라는 불교 단체를 만들면서였다. 나는 ‘우리는 선우’의 공동대표였고, 선생님은 그 단체의 고문이셨다.

학교에서 정년퇴직하신 선생님은 당시 EBS 사장으로 계셨는데 선생님 모습은 외유내강(外柔內剛) 그 자체이셨다. 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계시지만 내면으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소신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후배들이 그릇된 판단을 하면 미소 속에서 바로 잡아 주시곤 하셨다.

‘우리는 선우’에서 선생님을 자주 뵙게 된 어느 날, 우린 회의를 끝내고 식사를 함께했다. 그때 선생님이 들려주시던 말씀을 나는 지금도 큰 감동과 함께 기억하고 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서른 살쯤 돼서부터 나는 아침마다 한 시간씩 뛰면서 예불문을 낭송하고 이어 《금강경》 독송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일은 지금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하고 있어요. 외국을 나가도 마찬가진데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눈이 오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뛰어요. 나는 집이 구반포이기 때문에 집에 있을 때는 매일 아침 현충원에 가서 예불문을 낭송하고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뛰다 보면 한 시간이 돼요.”

그때 선생님 연세가 70 가까이 되셨는데 30세에 시작한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셨다니, 나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자신의 몸과 마음을 조복 받을 수 있을까 하고 경이로운 눈으로 쳐다봤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선생님은 시력이 나빠지셔서 거의 사물을 분간해서 볼 수 없게 되셨다. 그리고 허리에 혁대 크기만큼의 대상포진이 생겨서 몹시 고통스럽다고 하셨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그 일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해 하신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을 뵈러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를 갔다. 길상사 안에 있는 작은 방에서 선생님을 뵈었을 때 선생님은 스님처럼 회색 동방을 입고 계셨다. 선생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즈음도 《금강경》 독송을 하시느냐고 여쭈어 봤더니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답하셨다.

“그럼 하지. 현충원에 가서 1시간 뛰고 와서 아침을 먹고 이리로 출근하는데, 우리 집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전철을 두 번 갈아타야 해. 그때 《금강경》 독송을 한 번 하지. 그리고 9시부터 5시까지 여기서 근무하다가 집에 돌아갈 때도 똑같이 《금강경》 독송을 한 번 하지. 그게 요즈음 내 일과야.”

모든 공직에서 떠나 자유롭게 되시자 선생님은 길상사로 출근하셨다. 선생님 말씀대로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참선하시는 것으로 근무를 서다가 5시가 되면 《금강경》 한 편을 독송하면서 집으로 퇴근하시는 게 일과라고 하셨더랬다. 그 당시 선생님의 시력은 더욱 나빠지셔서, 전철을 타실 때는 어디에 몇 번 출입구가 있다고 기억 속에 입력해 놓으시고 감으로 하신다고 했다. 그런 불편함 속에서도 선생님의 길상사 출근은 20년 넘게 이어졌다.

선생님이 이 세상을 떠나신 지금, 나는 선생님을 회상하면서 참 훌륭한 스승이셨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몸과 마음을 조복 받으신 분, 거짓 없이 진실하신 분, 가족과 친지와 제자들과 그리고 사회로부터 존경받으신 분. 선생님은 훌륭한 생을 살고 가신 참으로 귀한 분이셨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인연 지었던 사람과 장례식장에서 영정사진을 놓고 이별의식을 치른다. 영정사진을 보면서 사람들은 대개 이런 말을 할 것이다.

‘이렇게 떠날 걸 뭘 그렇게까지 살 게 있담. 쯧쯧.’

‘참 반듯한 사람이었는데 아깝군, 좀 더 살았으면 좋았을 텐데.’

‘훌륭한 스승이셨는데 더 많은 가르침을 받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어디서 다시 선생님과 같은 훌륭한 스승을 만날 수 있을지 가슴 한 자락이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참 위대한 분이셨는데 다시는 모습을 뵐 수 없게 되었네요. 꼭 한 번 더 우리 곁으로 오셔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당신은 정말 성자 같은 분이셨습니다. 당신과 같이 거룩한 분을 가까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제 삶은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살아서 망자의 영정사진 앞에 섰다면, 내 입에서 위에 열거한 말 중 하나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망자가 됐다면, 내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이 내 영정사진 앞에서 위에 열거한 말 중 한 가지를 하게 될 것이다. 필경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 말을 하게 될 것인데 제발 첫 번째 말만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친지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는 자리에서 쯧쯧 혀 차는 소리를 듣고 떠난다면 망자인 내 뒷모습이 너무 슬플 것 같아서다.

70 고개를 넘고서도 이렇게 자신이 없으니 반듯하게 살기도 참 어려운 것 같다. 생에 집착하고 죽음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도 자신 없게 산 자신의 삶 때문이 아닐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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