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서는 안 될 일들이 계속되고 있어 아침에 눈 뜨기가 겁난다. 꿈을 피워보지도 못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된 세월호 참사, 육군 사병의 총기난사 사건, 병영 내 폭력에 의한 병사의 안타까운 죽음, 김해 여고생 및 포천 빌라 살인사건 등 차마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일들이 그것이다. 본질에 앞서 기성세대로서 막중한 책임감과 한없는 부끄러움이 밀려드는 하루하루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 말레이시아 항공기 격추, 중국 윈난 성 대지진, 에볼라 바이러스 공포, 일본의 독도 영유권 생트집, 북한의 미사일 위협 등 외부 상황도 다를 바 없어 숨쉬기조차 답답한 현실이 폭염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건 중 상당수는 사람들의 오만과 탐욕, 인간성 결핍에서 기인한 것이기에 더 안타깝고 자책이 들기까지 하다. 이미 벌어진 일이기에 원인은 차치하더라도 이를 해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조차 아집과 무아량으로 점철되어 출구를 찾기가 요원해 보인다. 책임질 자는 없고 대안은 찾지 못한 채 정쟁에만 몰두하며, 반성보다는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형국이다. 이에 더해 가벼운 언사로 근거 없는 괴담까지 떠돌고 있어 흉흉하기까지 하다.

희망은 없는가? 이럴 때-깜깜한 동굴 속같이 한 줄기 빛조차 찾기 어려울 때, 간혹 옛것은 단비와 같은 실마리를 던져주곤 한다.

육바라밀(六波羅蜜) 수행은 예부터 절집에서는 속세의 중생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방편으로 자리 잡아 왔다. 육바라밀에서 ‘바라밀’은 산스크리트어 paramita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것으로 ‘저 언덕에 이른 상태’ 즉 ‘완성`이라는 뜻이다.

중생들의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생기는 괴로움의 세계를 ‘이 언덕’이라고 한다면, 지혜와 자비로 가득 찬 깨달음의 세계는 ‘저 언덕’이다. 따라서 보살이 실천하는 육바라밀은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배’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깊은 의미를 내포하는 육바라밀은 대승불교에서 보살이 열반에 이르기 위하여 실천해야 하는 여섯 가지 덕목을 말해준다. 도(度)로 한역될 수 있는 바라밀은 피안(彼岸)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육바라밀 중 첫 번째는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이다. 보시는 남에게 준다는 뜻이다. 가난한 자에게는 재물을 주고[財施], 무지한 사람에게는 법을 베풀고[法施], 무서움에 떨고 있는 사람에게는 위안과 용기를 주는 것[無畏施]이다. 그러나 베풀되 조건을 전제로 하거나 결코 보답을 바라서는 안 되며, 베푼 것은 잊어버리는 게 좋다[施人愼勿念]. 이는 수시신물망(受施愼勿忘: 은혜받은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과 함께 필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다음은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로 지계란 계율을 지킨다는 의미이다. 살생과 음란한 짓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이나 이간질도, 남을 괴롭히는 나쁜 말도 해서는 안 된다. 화를 내거나 탐욕을 부리지 않으며,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은 인내하고 용서하며, 좌절하지 않는 태도이다. 이는 외부의 환경에도 굳건하게 나를 바로 잡는 무심(無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인욕은 욕된 일을 당해도 참아내는 것을 말한다.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은 끊임없이 노력하여 정진하는 것이다. 잡스러운 번뇌를 끊고 범인들을 피안으로 인도하는 데 힘써야 함이다.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은 심성을 평온하게 하고 한 방향으로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켜 정신을 집중하는 것이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에 내향을 지향한다. 따라서 내관(內觀)이 곧 선정(禪定)인 것이다.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은 진(眞)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지혜는 산스크리트어 prajna를 들리는 대로 적은 반야(般若)라고 표기한다. 따라서 반야는 진리보다 높은 경지인 깨달음의 지혜이다.

이렇듯 불교에서는 지혜의 보시로부터 선정에 이르는 다섯 바라밀을 행하여 중생을 구제했다. 또한 《대반야경》에서는 지혜를 얻어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해 집착을 버리고 마음을 완전히 비우는 육바라밀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며칠 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다녀가셨다. 교황께서 방한한 목적도 지구촌 유일의 분단국으로 세월호 참사까지 겹쳐 상처가 큰 우리에게 육바라밀과 같은 수행적 가치로 정서적 위안과 인간 존엄을 재인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종교의 지향점이 결국에는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행은 ‘행실을 닦는 행위’이다. 현대인은 바쁘며 치열하고 번잡하여 거칠게 살고 있다. 지나친 경쟁과 물질만능 기조는 사람의 참가치를 상실하게 했다. 또한 인문적 체계마저 무너져 작금의 살벌한 사건들이 지속되고 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되돌아보는 것이다. 마치 수행자의 자세로 말이다. 육바라밀의 경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성찰하고 반성하여 나를 바로잡고 무심하게 하여 지혜를 얻도록 힘써야 한다. 개개인의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 하루속히 우리 사회가 배려하고 포용하는 따뜻한 인간의 참가치로 회복되었으면 한다.

절실하고도 절박한 심정이다. 이때 금과옥조와 같은 육바라밀의 가치를 새삼 되돌아보게 되는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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