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심이 강했던 어머니는 절이나 집에서 오직 부처님만을 입에 달고 사셨다. ‘나무아미타불……’ 같은 말이 입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나무를 봐도, 봄날 새 나물이 나와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부처님, 부처님’ 하고 어머니 입속에서 부처님이 떠나지 않았다.

무엇을 그렇게 애타게 빌었을까. 그것은 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오직 아들 하나를 얻고 싶은 그 마음이었다. 어머니께 아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아들 아래로 딸이 연거푸 여섯이나 있었다.

장손 며느리로서 그것은 가당치 않다고 시할머니가 며느리 자격 운운하셨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1943년 다시 아이 하나를 낳았다. 또 딸이었다. 어머니는 그 딸을 낳자마자 발길로 걷어찼다고 했다. 어머니의 위치도 흔들렸다. 집 밖에 이미 아버지의 또 하나의 아들이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는 위급했고 불안했고, 해서 늘 부처님께 빌었던 것이다. 그렇게 빌어도 어머니의 불심이 부처님께 닿지 못했는지 그렇게 다시 딸을 낳은 것이다.

바로 그 딸의 탄생일이 사월 초파일 사시, 부처님 생일과 태어난 시간이 동일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이 다시 근심이었다. 하잘 것 없는 여자아이가 너무 큰 날에 태어났으니 저것이 순조롭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이 떠나지 못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그 딸이 열 살 때까지 생일날 절에서 아침을 먹이는 일이었다. 그때는 바가지에 밥을 담아 나물과 비벼 먹는 것이었는데, 어머니는 주변 어른들에게 자랑스럽게 “야가 오늘 생일인기라요.” 했다. 그러면 옆 할머니들이 “우째 이리 좋은 날 태어나노?” 하시며 밥을 한 숟가락씩 더 주어서 배가 부르곤 했다. 부처님 앞에서 절도 시켰다. 한 번을 해도 공들여 한다고 어머니는 절하는 것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렇게 전쟁 때 빼고는 열 살 때까지 절에서 생일밥을 먹었다.

그 덕분일까. 어머니는 발로 걷어찬 그 딸 아래로 아들을 얻었다. 터를 잘 팔았다고 그 딸을 다른 딸보다는 고기 한 조각을 더 주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운명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거의 생명으로 생각하던 큰아들을 전쟁의 거리에서 잃고 만다. 대학 1학년, 가슴이 답답하다며 자진 입대한 군인의 모습으로 적의 총에 맞아 쓰러졌다.

다 죽어도 그 아들만은 절대로 안 되는 일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군에 입대 후 절에서 살다시피 하셨다. 절을 너무 많이 해 허리도 다리도 거의 마비상태였을 때다. 아들의 죽음을 전해 들었다. 어머니는 부처님 앞에 소리소리 지르고 쓰러졌다가는 다시 부처님 앞에서 흑흑 울다가는 실신 상태가 되기를 백 번도 더 했다.

그러고는 어머니는 그 아들의 무덤 앞에서 한 달 열흘을 살았다. 큰딸이 밥을 무덤으로 날랐다. 한 열흘은 밥을 무덤 주변에 뿌리며 살았는데, 이상하게도 열흘이 지나면서부터는 밥을 조금씩 드셨다고 했다. 그러나 무덤에서 내려오지는 않았다.

미친 여자가 되었다고 동네에서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지, 온전한 정신으로 어찌 살낀가.” 동네에서 어머니 실성한 모습에 모두 동의했다. 아들의 죽음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한 달 열흘이 지난 어느 밤에 어머니가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오셨다고 했다. 듣기로는 어느 밤에 까마귀가 하늘을 덮으면서 내려와 어머니를 쪼아 그 순간 무서워 집으로 달려왔단다. 사람들은 아들이 정을 떼느라 그러했노라 말했다. 그로부터 아들 이야기는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잃은 후에 입을 잃었다. 참으로 오랫동안 입을 닫고 아무 말을 안 하시는 것이다. 그러던 어머니는 절에서 살았다. 절이 무엇이었고 누구였을까. 아마도 집보다는 절에서 아들의 혼을 만나는 것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 아들을 절에 모셨으므로 어머니는 그 아들의 사진 앞에서 그냥 누워 있거나 앉아 있거나 했다.

사람들은 실성한 여자 취급을 했다. 아니 실성하였다. 어떻게 온전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다섯 달을 넘어서야 어머니는 다시 작은아들을 안기 시작했다. “아, 여기 아들이 있었지.” 작은아들이 보이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어머니를 보는 일은 아프고 슬픈 일이었다. 세상사 잊지 못할 일은 없는 것이다. 어머니는 서서히 울음을 그치고 눈앞에 보이는 자식들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그것도 너무 열심히…… 그리고 아들뿐 아니라 딸들까지 인간답게 키워야 한다고 작심을 했다.

고통은 새로운 의지를 선물 받는다. 어머니는 더 강해졌고 무섭도록 감정절제를 했고 회초리를 자주 들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린 적이 없다. 어머니에게 드릴 웃음은 늘 미루었고 어머니에게 드릴 사랑도 늘 미루었다. 대신 근심만은 미루지 않고 덥석덥석 안겨드렸다. 그렇게 미루기만 했던 탓에 어머니는 내게 억장 무너지는 가슴 말고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가 떠난 후 나는 생각했다. 내가 오늘 먹는 밥 한 그릇 물 한 잔도 어머니가 절에서 그토록 애타게 절을 한 덕분이라고 이제야 깨닫는다. 열 살 때까지 절에서 먹었던 그 밥들이 지금 내가 맞는 빛나는 아침이라는 것을. 그래서 나는 사월 초파일 내 생일이 되면 반드시 어머니를 위해 초 하나에 불을 켠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어른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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