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萬海)의 시, 이렇게 본다

초판본이 1920년대 중반기에 나온 만해(萬海)의 《님의 침묵》은 초창기 우리 근대 시단의 물굽이를 바꾸어낸 사화집이다. 그러나 발간 직후부터 오랫동안 이 시집에 대한 우리 문단 안팎의 반응은 미미했다. 난해한 것이 그 소외현상의 중요 요인이었는데 이런 외면 상태가 어느 정도 극복된 것이 1960년경이었다. 이때 만해 시 재발견의 선진을 담당한 비평가 가운데 한 분이 고(故) 송욱(宋稶) 교수였다. 당시 그는 서울대학교의 영문과 교수였고 전공은 현대 영시였다. 평소 한국문학에 읽을 것이 없다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던 그가 《님의 침묵》을 접하고 나서는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그는 만해의 시에서 영시의 한 갈래를 이룬 형이상 시의 세계를 읽은 것 같다. 그리고 그 형이상성을 불교사상과 상관관계를 가진 것으로 파악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님의 침묵 전편 해설》이라는 연구서를 냈다. 이때 송욱 교수는 만해 시가 가지는 특성을 정의하여 ‘사랑의 증도가(證道歌)’라고 했다.

여기서 문제 되는 ‘증도(證道)’는 증득(證得)과 같은 범주에 드는 말로 불교에서 한마음 수행과정을 거친 다음 돈오대각(頓悟大覺), 진리를 깨친 차원에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만해가 당대의 고승대덕(高僧大德)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의 깨달음이 불교에서 말하는 정각(正覺), 견성(見性)의 경지를 가리킴은 달리 군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송욱 교수는 몇몇 작품에 대해 명백히 논리의 앞뒤가 맞지 않은 발언을 했다. 만해의 〈심은 버들〉을 송욱 교수는 “공(空)을 존재의 면에서 붙잡으려 한 것”(상게서, 209면)이라고 읽었다. 두루 알려진 대로 〈심은 버들〉의 표면적 제재는 ‘말’과 ‘버들’이다.

뜰앞에 버들을 심어/ 님의 말을 매렸더니/ 님은 가실 때에/버들을 꺾어 말채찍을 하였습니다// 버들마다 채찍이 되야서/ 님을 따르는 나의 말도 채칠까 하얐드니/ 남은 가지 천만사(千萬絲)는/ 해마다 해마다 보낸 한(恨)을 접어 맵니다
— 〈심은 버들〉 전문

여기서 ‘말’과 ‘버들’이 불교식 형이상의 차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그들이 해탈과 지견(知見)의 길목을 차지하는 제재 구실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 소재가 물리적 차원을 벗어나 형이상의 차원에 이르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심은 버들〉의 행간 어디에도 그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시적의장(詩的意匠)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와 아울러 시집 《님의 침묵》에는 〈논개(論介)의 애인이 되야서 그의 묘(廟)에〉 〈계월향(桂月香)에게〉 등과 같이 불교식 해탈, 지견(知見)의 경지를 노래하기에 앞서 탈식민지(脫植民地), 반제(反帝), 민족의식을 바닥에 깐 작품도 있다. 이들 두 작품의 주인공은 다 같이 임진왜란을 당하여 적의 장수를 찌르고 순국한 한국의 여인들이다. 그 행동 궤적에 민족의식의 자취가 뚜렷한 점은 넉넉히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불교식 세계인식의 구경인 해탈, 지견의 경지와 무슨 유대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이렇게 제기되는 의문에 대해서 송욱 교수는 〈논개……〉의 마지막 줄에 나오는 “용서하여요”를 ‘인(忍)’이라고 해석했다.

불교에서 인(忍), 또는 인욕(忍辱)은 사바세상의 온갖 번뇌와 고통을 견디고 이겨낸 다음 이를 수 있는 정신의 차원이다. 이런 인(忍)을 송욱 교수는 중간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자비’와 등식관계로 보았다. 그것으로 인(忍)이 식민지적 질곡에서 신음하는 우리 동포를 아끼는 감정으로 해석된 것이다. 그런데 본래 인(忍)은 법보론에 속하는 절목(節目)일 뿐 그 자체가 직접 반제 역사의식이나 민족적 자아추구와 같은 맥락으로 쓰일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런 인(忍)이 어떻게 실제 행동의 특수 형태인 척살(刺殺), 순국에 직결될 수 있는지가 문제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것이 있다. 《님의 침묵》의 일부 작품이 불교식 형이상의 노래가 아니라고 하여 송욱 교수의 ‘사랑의 증도가’론이 전면적으로 배제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만해 시의 대표작으로 손꼽힐 수 있는 작품에 〈나룻배와 행인(行人)〉 〈알 수 없어요〉 등이 있다. 〈나룻배와 행인(行人)〉의 바탕이 된 것은 분명히 보살행에 그 끈이 닿은 제도중생(濟度衆生)의 감각이다. ‘제도중생’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제일 목표가 되는 것이므로 물리적 세계와는 범주를 달리하는 형이상의 차원이다. 그런가 하면 〈알 수 없어요〉의 마지막 한 줄에는 법보론의 중심축을 이루는 인연 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대승불교의 경전 어느 대목에는 우주의 생성 원리를 인연이라고 설파한 말이 나온다. 인연 사상에 따르면 불국토(佛國土)의 삼라만상은 수(水), 화(火), 풍(風), 토(土) 등 사대가 모여서 이루어진다. 그 계기를 짓는 것을 인연이라고 하는데, 인연이 있어 사대(四大)가 모이면 있음, 곧 유(有)가 된다. 그와 달리 사대가 흩어지면 삼라만상은 소멸하여 무(無)가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인연으로 하여 삼라만상은 서로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며 태어났다가는 무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유무상생(有無相生),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보며 그 연장 선상에서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는 연기설의 중심 개념을 만해가 그 나름의 가락에 실어 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명백하게 확인해 두어야 한다. 그것은 《님의 침묵》의 세계가 단선적이 아니라 복합적이며 통섭적인 점이다.

우리가 만해 시 해독을 위해서 제대로 된 좌표를 마련하려는 경우 다시 한 번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 있다. 다음과 같은 허두로 시작되는 만해의 〈군말〉이 그것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薇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여기 나타나는 만해의 사랑은 “긔룬 것” 곧 마음속으로 살뜰하게 생각하는 차원의 개념이다. 이것으로 명백해지는바, 만해가 사랑하는 대상은 특정 사상, 특정 계파에 얽매여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만해가 사랑한 것은 바로 시공을 초월해 있으며 범주도 사상의 경계도 없는 ‘있음’으로서 삼라만상 그 자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해 시의 기능적인 이해를 위해 일차적으로 유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군말〉의 다음 자리에서 만해는 무변중생과 삼라만상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랑 자체도 지양, 극복의 과제로 삼아야 할 것임을 에둘러 말했다.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자유(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받지 않너냐.”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해 두어야 한다. 만해에게 시는 검토, 분석의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작품 〈님의 침묵〉의 마지막에 나오는 바와 같이 그에게 노래, 곧 시는 초공(超空)과 무아(無我)의 경지에 이른 다음 스스로 빚어지는 것인데 그것이 곧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였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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