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종민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명예교수

한 생각이 있음에 한 세계가 있고 한 생각이 없음에 그 세계는 없다.

마음의 입장으로 비추어 본 세계는 스크린에 나타난 환영이나 홀로그램 같아서 실상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세간에 사는 우리는 실로 생각으로 한 세계를 만들어 살며 그 세계 속에 각가지 문화를 꽃피웠다.

오늘날은 문화의 범주가 넓어져서 각가지 생각의 꽃도 백화난만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나 과연 이 문화의 기저에 자리 잡고 있는 원형(原形; urbild)은 바람직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회광반조는 그 원형을 비추어 보는 훌륭한 성찰의 방법이며 한 단계 더 높은 문화의 상승을 위하여 우리 생각을 가다듬어야 할 거울이라 생각된다. 필자의 입장에서는 형태를 다루는 조형의 세계에서 생각을 가다듬고 근원을 들여다봐야 하겠지만 그 표현이 시각의 세계로 나타나든 시의 문자로 나타나든 한 생각의 현현이므로 문제는 무엇을 생각했느냐에 초점이 돌아갈 것이다.

생각의 원형이 무엇이냐는, 마치 생각이라는 주형에 찍어내는 대로 사물이 나타나듯 그 주형은 그 사람이 가고 있는 길의 지표이기도 한 것이다. 조각을 하며 시를 쓰고 부처님의 세계를 엿보면서 그 말씀에 감히 주석을 다는 일이 다른 것 같지마는 실은 한 원형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기세간에서 하는 유위의 모든 것을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하는 부처님 말씀이 《금강경》 마지막 사구게에 나오지만 오늘날 문화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부처님께서는 이 유위의 문화를 한 괄호로 묶어 표현하신 듯한 착각이 든다.

사진을 찍는 이가 범소유상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 약견 제상비상즉견여래(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임을 깨달아 사진을 찍는 일이 즐겁다는 역설을 하듯, 형상 있는 모든 느낌을 그 원형에서 깨달아 무위의 뿌리로 꽃피운다면 그 문화는 과연 어떤 것이 될 것인가. 다중 우주 속에는 그러한 차원의 문화도 분명 있겠지만 인간의 사색과 성찰도 점점 이 원형에 다가가고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우리는 감각기관의 센서를 무위로 활용하고 있는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아직도 에너지의 입장에서는 원시의 원형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그것도 이기적 욕심을 버리고 요익중생의 보살심으로 무주상이 된다면 무한대의 에너지를 무위로 활용할 수 있는 시점이 올 것이다. 그때 만일 무위의 조형과 무위의 생각을 소통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 될까?

무위세계의 아름다움은 《원각경》의 말씀대로 환영이 다 떨어져 나간 원형의 세계임으로 그것을 형용하는 방법도 다를 것이다. 인지되고 지각된 모든 때가 채로 걸러져서 순일한 곳에는 생각이나 사색이란 말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이 정화된 세계는 정화된 세계를 만들 것이고 그 생각이 혼탁한 세계는 혼탁한 세계를 만들 뿐이다.

원칙은 유위가 아니라 무위다.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재앙을 맛볼 것이고 원칙에 순응하면 자유로울 것이다. 인간이 유위로 원칙을 만들지만 그것은 유위의 원칙이고 우리의 문화가 더욱 더 상승하려면 무위의 원칙을 깨달아야 한다. 부처님이 조견하신 법계의 정할 수 없는 법칙, 무유정법(無有定法) 이곳에서만 진정한 자유를 구사할 수 있다.

예술의 자유를 무유정법에서 찾는다면 그가 빚어내는 모든 형태와 색과 빛이 원형과 다르지 않음으로 그는 그 세계의 일부이며 그 세계 자체일 뿐이다. 우리의 감각기관이 한계의 차원을 넘으면 우리는 초월의 자유를 맛볼 수 있다. 색과 형태는 빛이 있으므로 육안으로 인지된다. 봄의 색깔의 오묘함은 생명의 시작이 발산하는 오묘함이며 그것이 여름을 마음껏 뽐내고 가을에 소멸하는 색깔도 오묘해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일광이 명조하여 종종색을 다 비출 때 우리 육안은 무상의 환희를 느낀다.

육안이 천안에 이어지고 혜안, 법안, 불안에 이어지는데 우리는 이제 문화의 이기로 안방과 거리를 오가면서도 천안의 혜택을 만끽하게 되었다. 모두가 손바닥만 한 천안통에 의지하면서 온 시간을 보내니 더 진화해야 할 혜안은 멈추고 더욱이 그 원인과 결과를 통투해 볼 수 있는 법안은 생각하기 어렵게 되었다.
창조의 힘인 직관과 통찰 예지력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계발되어야 한다. 기술문명의 테크놀로지가 펼치는 놀라운 세계가 부처님이 깨달으신 아뇩다라 삼먁삼보리 속에 있음을 조견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인본주의적인 입장에서 이 기술세계가 조명되지 않을 때의 위험을 이미 많은 경우에서 우리는 체험하고 있다.

가장 바람직한 테크놀로지의 범례를 화약을 무기로 쓰지 않고 밤하늘을 꽃피운 폭죽놀이로 국한했던 고대 중국의 선례를 들었듯 그것은 시, 신비, 인간정신의 긍정적 환희에 활용되어야 한다. 예술이 다가올 문화의 장에서 중요한 몫을 담당할 원형은 이런 것이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고도의 테크놀로지를 비추지 않는 한 인류는 스스로 만든 재앙을 멈추기 어렵다. 생명을 존중하고 하늘과 땅이 준 은혜를 존중하고 우주와 자연의 조화로운 일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부처님의 자비와 마찬가지로 홍익인간의 이념(요익중생)이 있고 제세이화(在世理化)와 성통광명(性通光明)의 높고 밝은 정신적 원형이 있다. 부처님이 깨치신 원형에 아뇩다라 삼먁삼보리가 발현되듯 우리의 성품 속엔 광명이 있다.

아사(아침)의 땅, 광명의 문화, 광명의 예술, 빛과 아름다운 원형으로 충만한 세계가 우리의 본 모습이다. 순일하고 밝은 서기가 충만한 땅, 백두대간의 기운이 그곳에 태어난 생명을 광명화하여 인류의 앞날을 비추기를 발원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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