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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석굴 조영의 지배 이데올로기적 성격
문무왕 위덕대 강사
[30호] 2007년 03월 10일 (토) 문무왕 moon1014@chol.com
중국사에 있어서 지배층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중국의 왕조교체의 과정에 항상 정통론의 시비가 등장한다. 이러한 시비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왕조가 북위(北魏)라고 할 수 있다. 북위는 전통적인 한족(漢族) 중심의 국가가 아닌 이민족이라고 일컬어지는 호족(胡族)에 의해 성립된 국가다.

국가 성립 당시 중국은 이민족 출신이 중국의 북방을 지배하던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은 한족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또한 중국 안에 북위를 세운 선비족들에게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러한 정통성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작용을 한 것이 불교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불교의 발전과 석굴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북위시대에 집중적으로 석굴 조영이 시작된 것은 북위 황실의 성격과 사회적 여건의 성장 속에서 가능했으며, 이러한 석굴 조영의 양상은 북위불교를 대표하는 하나의 성격으로 볼 수 있다. 돈황석굴, 병령사석굴, 맥적산석굴, 운강석굴, 용문석굴 등의 대형 석굴들의 초기 석굴군들이 본격적으로 북위시대에 시작되었다. 이러한 석굴은 국가불교와 석굴의 관련성에 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북위(386∼534)는 이민족 출신의 왕조로 출발했지만 화북(華北)의 오호십육국 시대를 마감하고 화북의 지배자로 자리 잡았다. 선비족(鮮卑族) 계통인 탁발부(拓跋部)에서 시작된 왕조인 북위는 첫 황제인 태조 도무제 탁발규(拓跋珪)가 386년 나라를 세웠다.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3대인 세조 태무제 때 화북지방을 통일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이르러 북위는 선비족 특유의 지배질서와 새로이 받아들인 한족 지배질서를 융합하여 새로운 지배질서를 구축하려 하였다.

새로운 지배질서의 확립은 북위를 중국사회에 주류로 편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호한지배체제(胡漢支配體制)’의 구축 시도는 북위의 성격을 보여주는 중요한 연구논점이기도 하다. 정치사적 입장에서 호한 지배체제에 관한 연구와는 달리 필자는 문화사적 입장에서 호한지배체제의 중요한 연결고리를 불교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급격한 변화와 성장을 보인 북위문화는 한족문화만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당시 새롭게 유행하던 불교문화라는 새로운 흐름을 수용해 북위 특유의 문화를 이끌어 내었다고 할 수 있다.

북위불교의 특징을 흔히 ‘국가불교(國家佛敎)’라고 한다. 이것은 강력한 황제권 아래에서 불교가 국가 권력과 밀착된 것을 뜻한다. 북위불교의 국가불교적 성격과 석굴 조성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이러한 연관관계를 살피기 위해서는 북위불교의 전개과정과 석굴 조영과정을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가불교화 과정과 한족화 과정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유기적인 관계로서 불교의 중요한 매개체가 되었다.

북위가 화북을 지배하던 시기 동안 수많은 석굴과 불교사원이 건립되었으며 이러한 활발한 불교문화의 업적 이면에는 앞서 언급한 북위의 독특한 시대상황도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급격한 불교의 팽창 이면을 학자들은 북위 황실의 정통성 문제를 가지고 언급하기도 하지만, 단순히 정통성의 문제를 불교를 통해서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불교수용을 통한 문화축적과 한족문화와의 결합, 그리고 새로운 북위문화를 창출해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북위는 일반적으로 낙양(洛陽) 천도를 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전기와 후기는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매우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는 북위 전기를 중심으로 석굴 조영의 시작 시기와 이를 매개로 한 호한지배체제 구축에 관해 논구해 보도록 하겠다.

1. 북위의 건국과 국가불교와의 관계

북위 건국 이전의 불교에 관한 기사는 매우 적다. 이러한 이유는 북위의 건국세력의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위의 건국 주체는 이동 생활을 하는 유목민족으로 선비족의 일족인 탁발부(拓拔部)이다. 본래 탁발부의 본거지는 현재 《위서》 〈예지(禮志)〉의 기사와 1980년 7월의 고고학적 발굴을 기초로 해서 대흥안령(大興安嶺) 부근의 몽고자치구 악륜춘 자치기 아리하진(顎倫春 自治旗 阿里河鎭) 서북지역으로 추정하고 있다.1) 이들은 유목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구조를 자지고 있었다. 유목민족의 특성상 고유문화를 형성한다거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북위가 본격적으로 건국하기 이전에 불교와 관계한 기사는 〈석노지(釋老志)〉를 통해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석노지〉 상(上)에는 이 당시의 상황을

위의 선조가 북쪽에 나라를 세웠으나 풍속이 순박하여 무위로서 스스로를 지켰고, 서역과는 왕래할 수 없어 그런 까닭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듣지도 못하였다. 혹 들었을지라도 믿지 않았다. 신원황제 때 위·진이 서로 교류하자 문제(文帝)가 낙양에 머물고 소성제(昭成帝)가 양국(襄國)에 가니 이에 남쪽 중국의 불법을 자세히 연구하였다.2)

〈석노지〉에서는 사막한(沙漠汗)과 관련된 기사에서 불교와의 연관 관계를 찾으려 하고 있다. 사막한이나 십익건이 낙양과 양국에 체제하고 있을 때 불교와의 연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만약 이러한 기사가 사실이라면 서진 당시 낙양지역의 불교나, 십익건 당시라면 후조(後趙)의 석륵 치하의 불교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사를 남하불법(南夏佛法)이라고 하는데, ‘문제의 낙양체제를 통한 불교의 전래 사실은 북위불교의 흥륭을 시조와 소급해서 결부시키고자 했던 바람에 대한 기사일지도 모른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3)

물론 문제가 낙양에서 불교를 가지고 와서 북위에 전파를 할 수는 없었다. 문제(沙漠汗)은 귀국 도중 피살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불교를 가지고 오려고 했더라도 탁발부에 전해질 수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4) 이 시기에 사막한이 불교를 접할 수 있는 단서를 추정해 볼 수도 있지만 이 시기 이후로 60~70년 정도의 시기 동안 불교가 북위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도 츠카모토 젠류(塚本善隆)의 주장은 당연한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불교가 등장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후에 전개될 북위불교의 ‘국가불교’적인 성격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문화적 접촉일 뿐이다. 하지만 북위 건국 이전의 지배자들도 석륵과의 교류 속에서 불교가 국가 통치를 위해 필요한 사상이라는 점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리라고 추론할 수 있다.

1) 북위의 건국과 불교

북위의 첫 번째 수도는 현재 산시성(山西省) 다퉁시(大同市) 지역인 평성(平城)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북위는 왕조를 건국하였으며, 마침내 화북지방의 패자가 되었던 것이다. 북위는 평성에 도읍을 정하고 부족국가적인 정체성에서 벗어나 비로소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이 시기를 통해 북위는 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한족과의 융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중국사에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폐불(廢佛) 이전까지 북위불교 수용기인 도무제와 명원제 시기의 불교를 살펴보면 북위 초기의 불교전개 양상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전개 양상은 북위불교의 중요한 성격으로 살피고자 하는 ‘국가불교’적 틀을 이해하는 중요한 관점이 될 것이다.

최초의 불사(佛事)에 관한 기록은 천흥 원년 칙령에 나타나는데

천흥 원년 조칙을 내리기를 ‘불법이 일어난 역사가 오래되었고 널리 이롭게 하는 공이 망자는 물론 산 자에게도 미치니 신령한 자취를 좇아보니 가히 믿을 만하다. 이에 유사에게 조칙을 내려 경성(京城)에 불상을 만들고 절을 지어 믿는 무리로 하여금 머물게 하라.’ 하였다. 이 해에 5층탑과 기사굴산(耆?堀山)과 수미산전(須彌山殿)을 짓기 시작하고 따로 강당, 선당, 사문좌를 갖추게 했다.5)

는 기록이 있다. 태조가 수도 건립에 있어서 불교를 안착시키는 데 얼마나 주력했는지 알 수 있다.

화북에서 북위는 세력을 굳히고 있었으며, 중원지역의 중심부 중 하나인 낙양을 점령한 후 한족과 호족이 교차하는 호한(胡漢)체제를 해결할 방법이 요구되었다. 츠카모토 젠류는 이러한 이유에서 당시 승려들의 민간포교와 서민불교의 확장을 태종대 불교의 특징으로 삼고 있다.6)

하지만 태종 또한 불교에 그리 해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도교적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태종이 광종(廣宗) 지방에 행차했을 때 사문 담증이 있었는데 나이가 100세나 되었다. 길까지 나와 과일을 바쳤다. 황제가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지력이 쇠하지 않음을 존경하여 수노장군(壽老將軍)의 호를 내렸다.7)

이와 같은 기사로 보아도 ‘수노장군’이라는 호를 사문이었던 법과(法果)나 담증에게 내리는 태도를 볼 때 그는 도교와 불교를 잘 구분하지 않은 듯하다. 또한 도교적인 이상상인 장수의 열망이 이러한 기사를 통해 표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태종의 기록 속에서 당시 불교의 발전 과정을 살필 수 있다.

태종은 자리를 물려받고 태조의 업적을 존중하였다. 역시 황노(黃老)를 좋아하고 불법을 숭상했다. 수도 사방에 불상을 세우고 사문들로 하여금 민간풍속을 교화하였다.8)

이러한 기사를 통해 북위 초기부터 국가가 불교에 대해 취했던 입장을 살필 수 있다.

2) 북위 초기에 나타난 국가불교적 성격

그런데 이 시기의 대표적 승려인 법과(法果)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북위 불교의 기본적인 성향을 파악할 수 있다.

태조는 명철하고 불도를 좋아하므로 바로 현재의 여래다. 사문은 당연히 예를 다하여야 한다. 도를 전하는 사람은 인주(人主)다. 나는 천자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부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9)

법과는 태조를 ‘현재의 여래’라 하고, 사문은 반드시 예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다. 불교를 펴는 천자는 단순한 천자가 아닌 인간세상의 주인이며 부처님과 동일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천자와 여래를 동일시함으로써 지상의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일체화하려는 시도로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북위불교의 국가불교로서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북위 황제의 경우는 그 성격에 관해 유목형 군주라는 특성을 부여할 수 있다.10) 유목형 군주의 특징은 전쟁에서부터 모든 것을 관장하는 구도이다. 유목사회는 기본적으로 약탈을 중심으로 한다. 즉 그 수장의 친정→약탈→반사행위의 과정을 거치는데, 그 정점에는 지도자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구조적으로 수장의 지위가 강할 수밖에 없다. 북위 건국 이후에도 황제들의 친정이 많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유목형 군주의 성격에 기인한 것이다. 이러한 지배체제 하에서 황권은 그 어떤 시대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불교의 생사여탈권도 황제의 손에 놓이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황제가 여래라는 사상은 북위불교의 국가불교의 중요한 단서로서 후대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면에서 태조의 불교통제 정책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물론 법과의 발언의 진위는 의심되는 점이 있기도 하지만, 법과의 이러한 발언의 맥락은 북위불교 성격의 축이 될 것이며, 운강석굴의 개착에 있어서 국가불교와의 고리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일 것이다.

또한 북위는 이러한 ‘황제가 여래’라는 사상과 더불어 승관제(僧官制)를 통해 불교를 통제하였다. 이것은 태조 이래 북위불교에 있어서 지속된 일이다. 승관제가 북위불교에서 처음 나타난 것은 아니었지만, 북위의 승관제는 후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체계화되어 나타났기에 북위불교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승관제는 물론 태무제의 폐불 시기에는 잠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북위불교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실시된 정책이다.

승관제에 관한 최초의 기사도 북위불교의 초기 성격을 대변하는 법과와 연관이 있다.

황시(皇始) 연간에 조군(趙郡)에 사문 법과가 있었는데 계행(戒行)이 지극하여 승려가 되었다. 태조가 그 이름을 듣고 조칙을 내려 예를 다해 경사(京師)로 모시니 후에 도인통(道人統)이 되어 승도를 총괄하였다.11)

황시 연간(396~397)에 법과를 평성으로 초청했으며, 후에 도인통이 되어 승려를 관리하는 자리에 올랐다는 기사이다. 이 〈석노지〉의 기사만으로는 최초의 승관 임용의 연대를 찾을 수 없다. 《불조통기》에서는 비교적 명확하게 도인통에 임명된 연대를 기술하고 있다.

황시(皇始) 2년 조군 사문 법과가 사문통(沙門統)이 되었다.12)

법과가 북위에서 받은 사문을 통괄하는 자리에 해당되는 명칭은 도인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불조통기》의 기사에 사용된 사문통은 담요(曇曜) 시기에 바뀐 승관의 명칭이다. 물론 《불조통기》의 기사 출처가 불분명하기에 황시 2년(398)의 기사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하지만 법과가 황시 연간에 북위의 수도였던 평성에 오게 되었으며, 평성에 온 이후에 가까운 시일 안에 도인통이 되었다는 점은 충분히 추론이 가능하다.

남북조시기의 북조 최초의 국가인 북위는 승관제를 중심으로 불교가 발전될 수 있었다. 이러한 강력한 승관제의 도움 없이는 운강석굴과 같은 거대한 불사를 단기간 내에 전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승관제는 국가의 강력한 비호 아래에서 불교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하지만 반대로 불교가 국가에 예속될 수밖에 없는 치명적인 요인을 갖추고 있다. 다음에는 이러한 요인을 중심으로 북위불교가 전개되는 과정을 살피고자 한다.

2. 북위 초기의 불교 양상의 변화

북위의 건국에서부터 석굴을 조영하던 시기까지 북위불교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이른바 폐불(廢佛)이라고 불리는 중국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국가불교로서의 성격은 더욱 공고해졌다. 이러한 공고한 국가불교적인 틀 안에서 새로운 북위불교의 불사운동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석굴의 조영이다.

1) 북위의 폐불

북위불교는 정착 과정 속에서 ‘폐불’이라고 하는 사건을 거치고 있으며, 이러한 폐불의 과정을 통해 불교의 국가관과 불교의 존립이라는 양쪽의 측면에 대해 새롭게 보는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폐불 뒤 북위불교는 황실과 공고한 관계를 구축하고 북위 황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정통성 부분을 불교를 통하여 마련해 주었으며, 불교는 황실의 물적·제도적 후원 아래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부분은 좀 더 확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최호(崔浩)와 구겸지(寇謙之)에 의한 폐불은 단순한 불교탄압이라고 보기 어렵다. 폐불은 불교가 중국사회에서 정착하는 시점에서 중국 전통사상과 불교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폐불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민족 왕조의 중국사회 정착에 대한 시사점이 있다. 중국 북방에 남아서 이민족 지배 하에서 숨죽이고 있던 한족 중심의 사고를 가진 지식인 집단이 최호와 구겸지를 통해 이민족 왕조의 지배질서를 중국적 틀로 재구성하려 하는 일련의 과정에서 폐불이라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고 만다. 폐불 뒤 북위의 지배층은 불교와 손잡음으로써 북위가 중국에 정착하는 사상적 기반을 불교를 통해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폐불이 끝난 뒤 북위의 불교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2) 문성제의 불교 부흥

446년 폐불 조칙이 시작된 이후 448년 구겸지가 죽고 450년에는 최호가 실각했다. 승평 원년(452년) 태무제가 죽고 고종 문성제가 즉위하면서, 연호를 흥안(興安)이라고 고치고 11월에 불교를 부흥한다는 조칙을 내렸다.

고종이 제위에 올라 조칙을 내리기를 ,
“제왕이 된 자는 반드시 신령을 받들고 인도를 현창해야 한다. 백성들에게 인혜를 베풀고 생류를 구제하고 이익되게 하는 자는 그 옛날부터 그 것을 기록했다. ……불교는 왕정의 금률을 돕고, 인지의 선성을 이익되게 하며, 모든 삿된 것을 배척하고 올바른 깨달음을 얻게 한다. 그러므로 전대부터 숭상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항상 존경하는바 되었다.

세조 태무제 황제는 변경을 개척하여 넓혔고 은덕은 멀리까지 미쳤다. 사문도사는 선행이 순수하고 진실하였으니, 혜시와 같은 사람이 멀리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풍채에 감동하여 언제나 숲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산속 깊은 곳에 괴물이 살듯이 간사한 무리들이 불교의 이름을 빌려 장안에 강사에 흉당을 이루고 있었던 듯하다. 이에 선조는 불교를 사칭한 자들을 살육하였으나 역인이 그 본래의 뜻을 잃고 모든 불교를 금단하였다. 경목황제는 항상 개탄하였으나 군사다망할 때라 수복할 틈이 없었다. 짐은 황위를 계승하여 만방에 군림하므로 선대의 뜻을 조술하여 불도를 부흥시키고 싶다.”13)

문성제의 불교부흥 선언으로 불교는 한동안 움츠렸던 모습을 벗어나 북위의 주류 사상으로 뿌리 내린다.

그리고 상세한 시행 규정으로

지금까지 여러 군현에 조칙을 내려 많은 사람들이 사는 곳은 각각 불도(佛圖) 1구(區)를 세우는 것을 허락하고, 그 재용은 임의에 맡겨서 회한을 두지 않는다. 저 도법을 호락하여 사문이 되고자 하는 자가 있으면 장유를 불문하고 양가 출신으로 성행이 원래 독실하고 아무런 혐오할 점이 없으며 향리를 밝히는 자는 출가를 허락한다. 대략 대주(大州)는 50명, 소주는 40명으로 하고 군(郡)·대(臺)에서 먼 곳은 10명으로 한다. 각 국분에 소속되면 모두 악을 교화하여 선으로 돌리고, 불교를 전파함에 힘쓰라.14)

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에 따라 불교는 이전 탄압시대의 굴레를 벗고 새로운 불교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있는 토대를 구축했으며, 이러한 토대에 따라 불교의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조칙에 따라 북위의 불교는 발전했다.

천하에 승풍이 아침저녁으로 달라 훼손된 불사를 찾아갈 때마다 이내 고쳐졌고 불상과 경론이 다시 나타났다.15)

이러한 기사를 통해 보아도 북위불교의 성격이 황실과 연관이 많은지를 살필 수 있다. 당시 남조의 혜원(慧遠)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을 통해 사문집단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유지하려고 했다. 실제로 남조에 있어서 불교는 어느 정도 이러한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북조의 왕조인 북위에 있어서는 이러한 남조의 특징과는 다른 국가불교의 전형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3) 불교발전과 불사의 확대

《위서》 〈석노지〉에는

흥안 원년(452)에 불교부흥의 조칙이 내려지자 곧바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문성제와 같은 신장의 석상을 만들게 하였다. 석상이 완성되자 얼굴 위와 발아래에는 각각 흑석이 있었는데, 그것은 문성제 신체의 아래위에 있는 검은 점과 모르는 사이에 일치하고 있었다. 논자는 순수함과 지성심이 부처님에게서 감응된 것이라고 말했다.16)

흥광 원년(454년) 가을에 칙명으로 5급대사(五級大寺) 안에 태조 이하 오제(五帝)를 위해 석가입상(釋迦立像) 5체가 주조되었다. 이 상의 높이는 일장육척으로 적금(赤金) 2만 5천근이 사용되었다.17)

불교 부흥정책이 시작되면서 북위의 불사가 얼마나 국가적인 틀 안에서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사다. 불교 부흥 초기에 나타난 불상의 조상에 있어서 황제의 모습을 본뜬 불상이 등장한다. 불상의 조상에 있어서 순수한 신앙적 차원이 아닌, 북위 초기이래로 견지되어 온 황제가 현재의 여래라는 신앙적 기반이 불교부흥 뒤에도 고스란히 투영되고 있으며, 오히려 한층 더 강화된 차원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불교교단 통제의 핵심은 불교부흥 이후 사문통에 임명된 사현과 담요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국가불교화의 경향과 운강석굴과의 유기적 관계를 고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사찰의 건립에 있어서도 국가가 관장하도록 함으로써 무분별한 사찰의 건립을 통한 통제권을 잃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사찰 건립비용에 제한을 두지 않고 국가에서 재원을 지원함으로써 국가적 통제권의 한도에서 사찰을 통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중앙의 사찰과 지방의 사찰을 구성함으로써 국가 중앙에서 통제하는 형태의 사찰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당대(唐代) 국분사(國分寺)와 같은 형식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18)

또한 문성제가 불교 부흥의 조칙에서 출가자의 숫자를 제한한 점도 이러한 정책적인 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 승려 숫자의 제한과 각 지역에 승려의 배분은 불교교단의 지나친 확장을 경계하는 의미를 지닌다. 불교교단의 지나친 확대는 중앙통제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노동력의 유출문제도 심각해질 수 있으므로 불교교단에 대한 강한 통제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북위의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는 북위 초반부터 시작된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의 새로운 적용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문통 제도를 통해 불교교단을 통제하고 이러한 교단통제를 바탕으로 각지의 불교를 관장하려고 한 시도는 지속적으로 이어졌으며, 문성제는 복불의 조칙과 함께 승려 숫자를 통한 교단의 규모 및 승려의 질적 발전을 도모코자 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불교의 성장과 함께 여러 가지 점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 국가 중앙에서는 승관제를 새로이 확립하여 중앙통제기능을 활성화시켰으며, 국가주도의 사원 건립과 출가 승려의 숫자통제를 통한 중앙집권적인 불교교단의 구축과 유지를 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평성시대 후기의 북위불교는 452년에 불교부흥의 조칙이 발표된 이후부터 주로 사문통 담요의 활약으로 급속히 발전되었다. 《위서》 〈석로지〉에 의하면, 흥광(454) 이후 태화 원년(477)에 이르기까지 경성 내의 사찰은 신구 100곳에 달했고 승려의 수는 2천여 명이나 되었으며, 지방의 여러 사찰은 6,478곳으로 늘어나고 승려의 수는 77,258명이나 되었다고 한다.19) 남조에서 불교가 가장 융성했던 양대(梁代)에도 사찰이 2,846곳, 승려의 수가 82,700여 명이었다고 하는 것과 비교하면, 사찰의 수가 두 배 이상이고 승려의 수는 양대와 비교도 안 된다.

또 황흥 원년(467년) 헌문제는 영녕사(永寧寺)를 건립하였다. 영녕사는 북위 국가불교의 상징으로 낙양천도 시에도 낙양에 영녕사를 건립을 한 사실에서 보이듯 국가사찰로 자리 잡았다. 영녕사에는 7층의 불탑이 있었는데 높이는 300여 척이나 되었다.20) 또 천궁사에는 높이 43척의 석가입상을 조성하였는데 동이 10만근 황금이 600근이나 사용되었다.21) 황흥 연간에 3층의 석조탑을 건립하였는데 높이가 10장으로 목탑의 형식을 흉내 낸 석탑이 만들어졌다.22) 《수경주》 권 13에 당시 평성에 불법이 융성하여 불탑이 높이 솟아 서로 바라보고 있으며 동방으로 전해진 법륜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기술하고 있다.23)

이것은 북위의 평성시대 후기, 더구나 겨우 24년간의 추세였다. 양대 약 50년간의 절반에 지나지 않는 기간에 비정상적인 불교교단의 팽창과 사탑의 증가는 주목할 만하다. 이는 북위불교의 급격한 성장을 의미한다.

3. 운강석굴의 건립과 북위 석굴의 성격

폐불의 상처를 입은 불교계는 운강석굴의 조성이라는 거대한 불사를 통해서 불교와 황실의 관계를 공고히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불교부흥 이후 평성지역에서 실시한 불사에서 5급대사(五級大寺)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다섯 황제의 얼굴로 불상을 조성하였다는 기사를 살펴보아도 북위불교의 주도자들이 얼마나 황실과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운강석굴도 이러한 전개과정 속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볼 때 북위불교의 주도층은 황실과의 관계를 통해 안정적인 후원세력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북위의 지배층들은 석굴 조영을 통하여 그들의 정통성 확립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과정이 앞서 언급한 5급대사의 건립으로부터 담요5굴(曇曜五窟)의 건립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통하여 보인다.

담요 5굴은 북위불교의 국가불교화의 단면은 물론 불교문화의 발전과 연관이 되어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국가사원의 성립과 더불어 국가불교의 전개양상이 석굴 조영 속에 투영된 양상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1) 운강석굴과 담요

운강석굴은 담요에 의해 개착되었다. 운강석굴의 조성 배경을 살피기 위해서는 담요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담요의 사상적 배경이 이 석굴 조영에 투영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담요는 폐불 이후 불교부흥의 선두로 파악할 수 있다. 담요의 전기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고승전》 권11로서 〈현고전(玄高傳)〉에 덧붙여 있다.

당시 하서국(河西國)의 저거무건(沮渠茂虔)이 있었고 사문 담요가 있었는데 선업(禪業)으로 유명했다. 위태부(僞太傅) 담(潭)은 엎드려 사례(師禮)했다.24)

담요에 대한 초기 기록은 이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사료를 통해볼 수 있는 담요는 양주지방의 승려로 파악할 수 있다. 도선의 《속고승전》 권1의 〈위북태석굴사항안사문담요전(魏北台石窟寺恒安沙門曇曜傳)〉을 보면 북위의 화평연간 소현통(昭玄統)에 임명되기 전의 담요에 관해

석담요는 아직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어릴 때 출가하여 섭행(攝行)이 견정(堅貞)하고 풍감(風鑒)은 한약(閑約)하였다.25)

라 간단히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아마 《고승전》이나 《위서》〈석노지〉에 별다른 정보가 없었던 때문인 것 같다. 담요의 본관이나 출신은 잘 알 수 없지만, 어릴 때 출가하여 계율을 견고히 지켰으며, 인품이 조용하고 식견이 올바른 사람이었다고 《속고승전》은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담요는 태무제의 북량 정벌 이후에 양주 지방이 점령되면서 이주해 온 3000여 명의 승려의 무리들에 끼어 있었던 듯하다. 북량 정벌 이후 급격한 양주 지방 승려의 유입은 당시 북위 불교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담요가 다시금 등장하는 것은 폐불 당시의 일로서 《위서》 〈석노지〉에는

담요는 절개가 굳어 공종(恭宗)의 신임을 받았다고 한다. 폐불을 단행하였을 때 많은 사문들이 환속하여 의술이나 다른 재능을 사용했으며, 불교신자인 공종을 만나 임용해 주기를 청하였다. 하지만 담요는 사문의 생활을 고수하려고 했다. 공종은 폐불이 강력히 추진되고 있으므로 사문으로 계속 있는 것은 위험하고 판단하여 담요를 만나 환속할 것을 권하였다. 하지만 담요는 뜻을 굽히지 않고 언제나 은밀히 법복을 입고 기물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것을 들은 사람들은 담요의 행위에 감탄하고 존경했다.26)

라고 기술하고 있다.

담요는 공종의 아들인 문성제가 등극하면서 양주 불교계의 인물들과 함께 불교 부흥 사업에 뛰어들었다. 담요가 사문통이 된 것은 460여 년 경의 일이다. 담요는 약 20년간을 사문통이 되어 북위불교를 총괄하였는데 뒤에서 언급될 운강석굴의 개착만이 아니라, 경제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승지호·불도호를 확립하였다.

양주 출신의 승려라면 석굴 수행에는 매우 익숙했을 것이다. 양주 즉 돈황 출신 승려로서 양주 지방에 있었던 석굴 수행에 익숙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속고승전》 〈담요전〉의 제목에서 보이듯 그는 석굴을 중심으로 그의 수행의 이력을 펼쳤을 것이고, 이런 그가 석굴 조성을 북위불교 회복의 신호로 삼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담요는 폐불이라는 시기를 겪으면서 북위불교가 국가체제 안에 공고히 정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을 것이며, 운강석굴의 개착이나 승관제의 확립, 승지호·불도호 등은 그 모색의 결과였을 것이다.

2) 운강석굴의 개착

앞서 언급된 불교 부흥정책 이후 시작된 불사에서 나타난 다섯 구의 석가금동불은 북위의 오제(五帝)를 대표하는 것으로, 오제에 대한 추선공양(追善供養)의 의미로 수도에 거대한 불상을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군주에 대한 불교의 정책적 협조와 제실(帝室)의 종묘(宗廟)의 형태가 5급대사 안에 결합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의 기사를 놓고 볼 때 담요가 운강석굴을 개착하던 시기의 북위불교는 황제를 불교 존상의 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는 법과 이래로 지속되어 온 ‘황제가 현재의 여래’라는 사상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오제에 추선공양의 문제가 담요가 개착한 담요5굴의 성격에 있어서, 담요5굴 역시 북위 황실에 대한 추선공양적 의미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담요가 운강석굴을 개착하는 것에 관한 기사는

담요는 황제에게 아뢰어, 경성 서쪽 무주새(武州塞)의 산 석벽을 개착하여 다섯 개의 굴을 여니, 각각 불상 1구씩을 새겼다. 높은 것은 70척이나 되고 다음은 60척이며 조각의 기위(奇偉)함은 일세에 으뜸이라 하였다.27)

라고 기술되어 있다. 대체적으로 운강석굴이 개착되는 시기는 460년 이후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담요가 사문통에 임명된 뒤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석굴 조영에 착수한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석굴은 양식상으로 세 시기를 나누어 구분하고 있다. 이 세 시기로 나눈 방법은 학자들 간에 견해를 달리하는데 이것은 시기와 양식상 구분법에 따른 것이다.28)

대표적인 구분법은 중국학자인 쑤바이(宿白)와 일본의 미즈노 세이치(水野淸一), 나가히로 도시오(長廣敏雄)에 의한 구분법이 있다. 쑤바이는 운강석굴을 구분함에 있어 1기를 담요5굴이 개착된 460~470년까지로, 2기를 470~494년, 3기를 494~526년으로 구분하고 있다. 미즈노 세이치, 나가히로 도시오는 7·8굴의 개착 또한 1기로 구분하여 1기를 475년까지, 2기를 490년, 3기를 505년까지로 파악하고 있다. 문명대는 1기를 460~465, 2기를 465~494, 3기를 524년으로 보고 있다. 이 분류법은 1기 석굴을 담요5굴을 중심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와 2기를 북위의 낙양천도 이전까지냐 하는 두 가지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아 시기 구분을 해본 것이다.29)

운강석굴은 북위불교의 폐불이 단행되었던 446년에서 불과 14년 뒤인 460년경에 개착되는데30) 이러한 기사를 중심으로 추론을 해보면 담요5굴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다. 대체적으로 담요5굴은 제일 좌측의 굴이 20굴부터 개착되기 시작하여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개착되어졌다.

도키와 다이조(常盤大定)과 세키노 다다스(關野貞)는 태조 이하 5제를 위해 석가주금상(釋迦鑄金像)을 만들었다는 〈석노지〉의 내용에서 태조를 태조 도무제의 증조인 태조 평문제로 보았다. 그래서 5제가 태조의 선대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하여 20굴을 평문제의 굴로 19굴을 도무제, 18굴을 명원제, 17동을 태무제, 16동을 공종 경목제의 굴로 파악하고 있다.31)

츠카모토 젠류(塚本善隆)32)도 이러한 추론을 중심으로 담요5굴에 조성된 불상들이 태조 이하의 5제를 상징한다고 파악한다. 태조란 평문제가 아닌 실질적인 북위의 개조인 태조 도무제를 지칭한다고 보고 있다. 츠카모토 젠류의 이러한 주장은 현재 별다른 반대 의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츠카모토 젠류은 18굴이 당시황제인 문성제를 지칭한다고 보았다. 요시무라(吉村怜)도 〈담요오굴론(曇曜五窟論)〉에서 18굴을 중심으로 신위소목(神位昭穆)의 배열로 가운데 18동을 태조 도무제 굴로 나머지를 19굴을 명원제, 17동을 태무제, 20동을 경목제, 16동을 문성제의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33) 미술사학계에서도 이러한 학설을 거의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나가히로도시오는 이러한 견해를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수용하고 있다.34)

그러나 아직 이러한 결론은 무리가 따른다. 운강석굴의 개착과정에 이러한 5급대사의 전례를 따라 태조 이하 오제의 상을 새길 수 있다는 츠카모토 젠류의 추론은 가능하지만, 이러한 전례가 반드시 이러한 불사를 일으킬 원동력이 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이러한 오제의 상을 새길 의도로 담요가 불사를 기획했다면 이것은 단순한 북위 황실에 대한 굴복의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담요나 사현 등의 불교부흥 초기의 인물들은 양주를 중심으로 한 서역에서 유입된 인물이었다.

그들의 수행방식도 서역적인 석굴에서 선수행을 중심으로 하는 방식이었다. 불교부흥을 맞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서역적인 자유로운 수행의 기풍은 국가적인 통제의 틀 안에만 머물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불교를 영구히 보존하는 방법으로 황제의 권력을 이용했던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즉 5급대사의 불상과 운강석굴의 담요5굴이 다섯 황제를 위해 조성되었다면 이것은 황실의 권위를 빌어 불교의 폐불을 막아보려는 의도로 파악해 볼 수 있다. 황제를 본뜬 불상이라면 황실의 권위가 지속되는 한 폐불의 시기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강석굴을 개착하던 시기 북위의 불교는 폐불의 공포에서 벗어나 새로운 불교로 발전과정 속에 있었으며, 이러한 거대한 불사의 시작은 북위불교의 새로운 태동을 보여주고 있다고 파악된다.

쑤바이는 평성에서 운강석굴이 개착될 수 있었던 가능성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 번째는 도무제의 천도 이래로 물자와 인적 자원이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평성지역에서 태무제 말기 폐불 이전까지 불교가 급격하게 발전하였다는 점이다. 세 번째는 서역제국과의 교류 및 복속을 통해 불교문화가 유입되었다는 점이다.

이 세 가지 조건으로 인해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해 공예 기술자를 비롯한 각종 인재들이 집중되어 있던 평성에서는 조상과 건립에 필요한 기초가 충실했으며, 서역제국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조상이나 화상(畵像)의 전래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북위 황실은 중국의 입장에서 신흥민족 세력이었던 관계로, 동서문화를 융합 새로운 석굴양식을 창조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주장이다.35)

이 급속한 불교부흥을 직접적으로 지휘한 것은 담요였으나, 그 배후에는 문명황태후의 힘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문통 담요를 중심으로 불교부흥이 착착 실행되고 있을 때, 문명황태후의 친정(親政)과 이를 돕는 사대부의 봉불행위가 서로 맞물려 북위의 평성시대 후기에는 조정을 중심으로 한 불교의 전성기가 출현하였다. 도성 주변에 운강석굴이 조성된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으며, 문명황태후와 고조의 능이 있는 방산(方山)에는 북위 조정의 보리사(菩提寺)의 성격을 가진 사원사(思遠寺)가 건립되어 현란한 불교문화가 개화하였다.

3) 운강석굴의 변화와 사회 변화

또한 운강석굴의 변천에는 북위불교의 변화가 투영되어 있다. 담요에 의해 개착되기 시작한 운강석굴이 2기, 3기로 넘어가면서 양식적 변화를 일으킨 것은 단순한 양식적 변화가 아닌 북위불교 및 북위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운강석굴 제1기의 형식은 평면이 타원형에 가까운 마체형(馬締形)이고, 천정은 궁륭형이었다.

그것이 2기로 넘어가면 평면은 직사각형의 전(前)·본실(本室)에, 탑주를 중심에 위치시키면서, 쌍굴을 대칭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3기에는 탑굴·천불굴·사벽삼감식(四壁三龕式)·사벽중감식(四壁重龕式) 등 4종류로 다양해진다.36) 초기에는 간다라나 서역풍의 불상이 중국으로 수용되고 있으며, 5세기 말에 시작되는 2기 형식은 1기 불상의 양식이 한화(漢化)정책과 맞물려 중국풍의 불상양식으로 바뀌어 간다.

담요가 사문통에서 물러나는 479년 경 이후 새로운 석굴 조성자들의 의도가 담요5굴 이후에 새로운 양식을 발생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담요가 처음 시작한 이 불사는 담요 이후에는 새로운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바로 북위의 변천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원위청(溫玉成)은 1기의 담요5굴을 해석하면서 담요가 설계한 5굴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는 5불(五佛)이 불법이 멸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조성하였던 것이라고 할 수 있고, 폐불에 대한 하나의 반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보고 ‘5불(五佛)은 마땅히 과거삼불, 석가, 미륵이 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37)

법현(法顯)은 일찍이 승가시국(僧伽施國)에서 ‘과거삼불병석가문불좌처(過去三佛幷釋迦文佛坐處)’의 기념탑을 참배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38) 18호굴 주존의 가사 위에 부조된 천불은 아마 현겁천불을 표현한 듯하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미 이 시대에 구마라집에 의해 《천불인연경》39)이 번역이 되었으니 이러한 추측은 가능할 것이다. 18굴, 19굴, 20굴은 삼세불이며 17굴은 미륵보살, 16굴을 석가불에 배대한다면 원위청이 제기한 문제와 더불어 츠카모토 젠류가 제기하고 있는 북위 사상의 변천사와도 많은 연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불상의 변화가 나타나는 2기는 한화정책과 연관이 있다. 한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는 연흥 원년(471)부터이다. 효문제 즉위 후 지속적인 한화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문명황태후가 한족 출신이라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태화 10년(486)에 실시한 황제의 곤면복(袞冕服) 착용을 시작40)으로 태화 18년(494) 실시한 일반인들의 호복착용금지41)의 배경이 운강석굴 2기 조영의 배경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불상은 《법화경》이나 《유마경》 같은 불경에서 전거한 것인데,42) 가늘고 긴 몸과 얼굴과 우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부처님의 옷은 포의박대식(褒衣博帶式)의 특징43)을 보여주고 있다. 화하양식이 현저히 진행된 것이 바로 북위불교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인 효문제(孝文帝)의 낙양천도 이전에 해당된다는 점은 이 시기 불상의 조성배경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 나타난 쌍굴의 형식은 황제와 황후를 위하여 조성하는 것이다. 쌍굴에 대하여 〈석노지〉에 기술된 기사를 중심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명 초(500)에 대장추경인 백정(白整)에게 조칙을 내려, 대동의 영엄사 석굴에 준해서 낙양의 남쪽 이관산(伊關山)에 효문제와 그 황후 문소황태후를 위해 석굴 2곳을 조영하게 했다.44)

이 기사에서 추정할 수 있듯이 운강석굴의 쌍굴 형식은 황제와 황후를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1기의 석굴이 황제를 위하여 새겨놓았다면 2기의 석굴들은 황제와 황후 양자를 위해 새겼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황후의 권력이 강해지는 북위 중기 이후의 상황과도 연관이 있다.

본래 유목민족의 기질을 지니고 있던 북위 황실은 당연히 모계의 권한이 강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북위 황실의 특성이 쌍굴의 조성과정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북위 황실의 권력이 2기 석굴 조영 시기부터 황후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간다는 증거가 석굴 조영에 투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 착의법의 변화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당시 황제였던 효문제가 한화정책을 일관하며 태화 10년(486)을 중심으로 여러 번 공포하였던 호복금지령도 역시 큰 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호복금지령이 북위 전역에 걸쳐 실시되었기 때문에 황제 자신도 몽골계 탁발족의 호복을 벗어 버리고 한민족의 복장을 했다고 한다. 불상의 옷도 또한 맨살의 노출을 기피하는 한민족의 미의식에 따라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3기의 석굴은 낙양 천도 이후에 만들어진 굴이다. 3기 불상의 형태는 2기보다 한층 더 청수(淸秀)해지고 온화하고 우아해진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고졸한 미소나 반안(半眼)의 명상적인 표현도 이와 관련되어 주목된다. 또한 장식화가 더욱 진행되어 번잡해질 정도로 형식화되기도 한다. 특희 군의(裙衣)나 대의(大衣) 끝단 주름의 복잡성과 상현좌(裳縣座)의 복잡하고 정연한 주름 따위는 이 시기 불상의 성격을 잘 보여 주고 있다.45) 이러한 양상은 북위가 낙양에 천도한 이후 나타나는 급격한 한족화의 증거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북위불교는 시작부터 국가불교적 특징을 지니고 출발했었다. 이러한 북위불교의 국가 통제 하에서의 발전은 북위불교가 이전 시대에서 보지 못한 대규모의 불사를 일으킬 수 있는 동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동력의 배경에는 강력한 북위 황실의 후원이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석굴 조영에 있어서도 이러한 북위 황실의 영향이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던 한화정책이 석굴 조영의 흐름을 바꾸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위는 불교가 극도로 번성한 국가였다. 또한 그들의 화려한 불교문화는 지금 까지도 석굴을 통해 전하고 있다. 당시의 시대상황과 불교의 변화는 서로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며 찬란한 불교를 꽃피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문화사적인 시각에서 접근하여 북위불교의 변화와 석굴조성의 변천을 통해 북위불교의 전반적인 성격을 살펴보았다.

북위의 사회적 성격은 ‘호한사회(胡漢社會)’였으며, 이민족과 한족이 얽혀 있는 사회적 특성상 북위는 한화정책을 통해 중국사회에 안착하려는 시도를 했다. 이러한 정착과정에서 초기부터 불교를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사상적인 안정을 추구하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 과정에서 법과에 의해 ‘황제즉여래’의 사상과 같은 ‘국가불교화’의 전형적인 양상이 나타난다. 이러한 현실적인 불교사상은 사상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불교 및 사회문화 전반에도 투영된다.

불상의 조각 내용에 있어서도 석가모니불과 미륵불이 중심에 놓이는 점을 보아도 현세적이며 실질적인 그들의 사상의 단면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정착의 특징이 석굴의 개착과정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태무제 시기에 ‘폐불’이라는 극단적인 정책을 통해서 ‘한화정책’을 안착하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내부적인 반발과 진통 속에 무산되었다. 이후 북위는 불교를 통한 중국사회 정착과정을 밟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교를 통한 정착과정 중 중요한 점은 불교교단을 정비하고, 많은 승려들을 끌어들이고, 기념비적인 불사를 실시함으로 해서 이러한 북위의 한화정책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운강석굴은 북위의 이러한 변화를 담고 개착이 이루어졌으며 이 석굴의 개착은 국가불교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운강석굴의 2기 불상부터는 이러한 한화정책의 성공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화화양식(華化樣式) 불상이 주류를 이루며 불교를 통한 한족화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민족 왕조였던 북위의 불교를 통한 한족화 과정은 북위사회를 넘어 중국사회에 불교가 정착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상호간의 필요에 의해 시작된 불교와 황실과의 관계는 국가불교라는 거대한 연결고리를 창조해내었다. 이러한 정착 과정이 선명히 나타난 북위의 석굴이야말로 북위불교를 넘어 중국에 있어서 불교 정착 과정을 엄밀히 살필 수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동시에 불교 혹은 불교문화가 어떻게 한 국가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구현되는 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실례일 것이다. ■

문무왕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현재 한국불교연구원 전임연구원 및 위덕대 강사. 논문으로 <북위불교와 석굴 조영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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