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신발과 새 신발’ 혹은 ‘진아(眞我)와 가아(假我)’

나보고 명절날 신으라고 아버지가 사다 주신 내 신발을 나는 먼 바다로 흘러내리는 개울물에서 장난하고 놀다가 그만 떠내려 보내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마 내 이 신발은 벌써 변산 콧등 밑의 개 안을 벗어나서 이 세상의 온갖 바닷가를 내 대신 굽이치며 놀아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이어서 그것 대신의 신발을 또 한 켤레 사다가 신겨주시긴 했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용품일 뿐, 그 대용품을 신고 명절을 맞이해야 했었습니다.
그래, 내가 스스로 내 신발을 사 신게 된 뒤에도 예순이 다 된 지금까지 나는 아직 대용품으로 사 신는 습관을 고치지 못한 그대로 있습니다.

— 미당 서정주 〈신발〉 전문

미당 서정주의 《질마재 신화》에 실려 있는 시편이다. 시편에서 시인에게는 두 종류의 신발이 있다. 하나는 원본인 잃어버린 신발이고, 다른 하나는 복사본인 새 신발이다. 잃어버린 신발인 원본인 까닭에 한 켤레이지만 새 신발은 복사본인 까닭에 여러 켤레이다. 이 시편은 원본과 복사본이 대비를 이룬다는 점에서는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의 ‘시뮬라크르(Simulacre)와 시뮬라시옹(simulation)’을 떠올리게 한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이고,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를 하는 행위 즉, 모사행위이다. 다시 말해 시인에게 새 신발은 시뮬라크르이고, 새 신발을 사서 신는 행위는 시뮬라시옹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원본은 사라지고 복사본들만 남았다는 점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아우라(Aura)의 붕괴’를 떠올리게 한다. 아우라는 물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어도 일회적으로 나타나는 까닭에 심리적으로는 먼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복제 기술은 일회적인 나타남을 특징으로 하는 아우라의 붕괴를 초래했다. 일회적인 출현이 반복적인 출현으로 바뀌게 됨에 따라 먼 것은 가까운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실례로 그림에는 일회성과 지속성이, 복제 사진에는 일시성과 반복성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불교사상에 입각해보면 주객(主客)의 전도몽상(顚倒夢想)을 일컫는다는 점에서 보드리야르와 벤야민의 이론은 일치한다.

시 내용만으로는 잃어버린 신발이 시인에게 최초의 신발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시인이 잃어버린 신발 이후의 신발들을 대용품으로 여기는 것으로 봐서는 시인에게 잃어버린 신발이 기억 속에서 최초로 각인된 신발인 것만은 분명한 듯싶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잃어버린 신발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잃어버린 신발을 원본이라고 정의하는 것일까? 그 결정적 단서를 ‘명절날’이라는 시어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인이 말한 ‘명절날’은 설날이거나 한가위일 것이다. 설날은 한 해를 시작하는 명절이고, 한가위는 한 해를 정리하는 명절이다. “대용품을 신고 명절을 맞이해야 했었습니다”라는 표현에서 시인이 원본의 신발을 잃어버림으로써 느낀 상실감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아마 내 이 신발은 벌써 변산 콧등 밑의 개 안을 벗어나서 이 세상의 온갖 바닷가를 내 대신 굽이치며 놀아 다니고 있을 것입니다.”라는 대목에서는 시인이 잃어버린 신발을 유체이탈한 자신의 자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무문관(無門關)》에서 오조법연(五祖(法演) 스님이 “천녀(倩女)의 혼이 떠났다는데, 어느 쪽이 진짜인가?”라고 묻는 대목이 떠오르기도 한다.

‘천녀이혼(倩女離魂)’은 중국의 설화집 《유설이혼기(類說離魂記)》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선어이다. 그 내용인즉슨 아래와 같다.

형량이라는 곳에 장감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에게는 천녀라는 딸이 있었는데 절세의 미인이었다. 장감은 외조카인 왕주에게 천녀를 데리고 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로 부임한 현령이 마을을 지나다가 천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였다. 현령이 천녀에게 청혼을 하니 장감은 왕주에게 했던 약속을 잊고 이를 승낙했다. 상심한 왕주가 마을을 떠나려고 하는데, 천녀가 그 뒤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이웃 나라로 가서 오손도손 몇 년을 행복하게 살았다. 몰래 집을 떠난 것이 죄스럽고 부모님이 잘 사는지 걱정이 되어서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 왕주는 장인에게 그간의 일들을 아뢰고 용서해달라고 했다. 왕주의 이야기를 듣고 장감이 놀랐다. 천녀는 지난 몇 년간 앓고 있었다는 게 장감의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오조법연 스님이 물은 것은 “누워 있는 천녀, 즉, 육체뿐인 천녀가 진짜냐, 아니면 왕주를 따라간 천녀 즉, 영혼뿐인 천녀가 진짜냐” 하는 것이다.

천녀의 혼이 진짜일까? 천녀의 몸이 진짜일까? 둘 다 진짜일까? 아니면 둘 다 가짜일까? 하지만 이런 의문이 드는 순간 이미 오조 법연 스님의 덫에 걸려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교리에 조예가 깊었던 미당 서정주도 오조법연 스님과 마찬가지로 천연덕스럽게 독자들에게 덫을 던졌다. 그 덫은 잃어버린 신발과 새 신발의 대비를 통한 진아(眞我)와 가아(假我)라는 화두이다.

진아와 가아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진각혜심(眞覺慧心) 스님의 선시에서 찾을 수 있다. 진각혜심 스님은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아래와 같이 읊었다.

池邊獨自座   못가에 홀로 앉아
地底偶逢僧   물 밑의 그대를 우연히 만나
默默笑相視   묵묵히 웃음으로 서로 바라볼 뿐
知君語不應   그대를 안다고 말하지 않네

진각혜심은 연못가에 홀로 앉았다가 물비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런데 스님은 수면에 비친 자신에게 그저 묵묵히 웃을 뿐이다. 진각혜심 스님은 주객(主客)이라는 양변을 여의고 불이(不二)의 경계에 든 것이다.

흔히 불법을 우주 만물을 비추는 거울로 비유하곤 한다. 이 거울은 안과 밖의 경계가 따로 있지 않을 것이다. 우주 만물의 형상은 그 대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마음 상태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분별심을 갖지 않는다면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경계에 들 것이다.

하지만 미당 서정주가 〈신발〉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진아와 가아의 경계가 없는 깨달음이 아니다. 시인은 진아로서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남아 있는 잃어버린 신발과 가아로서 새 신발을 신고 살아가야 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발〉은 인간의 본향인 노스탤지어를 노래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외짝 신의 달마, 맨발의 붓다

이윤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 신화를 이해하는 12가지 열쇠》에서 모노산달로스(Monosandalos) 즉, ‘외짝 신 사나이’로 불린 이아손의 이야기와 아버지에게서 신표(信標)로 가죽신을 받은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잃어버린 신발을 찾는 것이 영웅의 운명을 개척하는 길임을 강조한 바 있다.

불가에도 신발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달마 대사의 이야기다. 달마 대사는 중국의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도를 닦으며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528년 열반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제자들은 달마 대사를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그런데 달마 대사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후 인도의 월씨국을 다녀온 사신이 달마 대사를 봤다고 주장했다. 송운이라는 중국 사신은 “월씨국을 다녀오는 길에 대사를 뵈었는데, 대사는 신발 한 짝만을 들고 조국인 향지국으로 가셨다”고 회고했다.

송운의 말을 듣고서 황제는 웅이산에 있는 달마 대사의 무덤을 파보았다. 무덤에는 신발 한 짝만 남아 있었다. 따지자면, 달마 대사도 모노산달로스인 것이다. 다만, 신화 속 영웅들과 차이가 있다면 달마 대사는 열반한 뒤 모노산달로스가 되었다는 것이다. 달마 대사의 일화를 듣고 나면 ‘잃어버린 신발’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다 명징해진다. 이력(履歷)의 사전적 의미는 ‘신발이 겪은 일’이다. 이력의 뜻에서 알 수 있듯 신발은 한 개인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달마 대사가 신발 한 짝을 중국의 무덤에 남겨두고 신발 한 짝을 들고 인도로 돌아갔다는 것은 인도불교의 28대 조사인 동시에 중국 선불교(禪佛敎)의 초조인 달마 대사의 이력을 말하는 것이리라. 수행자에게 이력은 전법교화를 위해 걸어온 길일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것은 달마 대사가 인도로 돌아갈 때 신발 한 짝을 들고 있는 상태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달마 대사는 맨발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달마 대사는 왜 맨발로 고국으로 돌아간 것일까? 향지국에서 중국 소림사까지 전법교화의 길을 걷는 내내 달마 대사의 발에는 아마도 짚신이 신겨져 있을 것이다. 달마 대사가 맨발로 돌아갔다는 것은 달마 대사가 열반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지와 인류의 육신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 바로 신발이다. 대지는 인류가 나온 곳이자 장차 돌아가야 할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달마 대사의 일화는 곽시쌍부(槨示雙趺)를 떠올리게 한다. 곽시쌍부는 석가모니가 마하 가섭 존자에게 전한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마지막이다. 내용인즉슨, 세존께서 사라쌍수에 계시어 열반에 드신 지 7일 만에 가섭 존자가 이르렀고, 가섭 존자가 관을 세 바퀴 도니 세존께서 관에서 두 발을 내어 보이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곽시쌍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붓다의 일대기를 그린 한승원의 장편소설 《사람의 맨발》(불광출판사)은 에필로그와 프롤로그가 곽시쌍부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내용 또한 대동소이하다. 소설의 주제라고 봐도 무방한 일부 내용을 인용해보자.

관의 한쪽 면이 터지면서, 싯다르타의 두 맨발이 나란히 나온 그 사건이 말해주는 심오한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맨발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있는 카샤파만이 알고 있었다.

싯다르타의 두 발은 모든 것을 버리고 집을 떠난 출가자의 슬픈 표상이었다. 평생 대중 교화를 위해, 온 세상의 험난한 길을 밟고 다닌 맨발이었다. 발가락과 발톱들은 돌부리에 차이고 삐죽한 자갈과 가시에 찔리고 긁히는 상처를 입었다가 아물고, 또 상처를 입었다가 아물기를 거듭한 까닭으로 곳곳에 암갈색 옹이들이 박히었고, 짐승의 낡은 가죽을 덮어씌운 것처럼 두껍고 너덜너덜 보풀이 일어나 있었다.

왕자인 싯다르타는 궁중에서 출가를 하기 전, 물소 가죽으로 만들어 금장식 은장식을 한 신을 신고 살았었다. 신은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고, 삐죽한 돌부리와 가시들과 독충을 막아주는 것이었다. 출가를 하여 삭발을 하면서 그 신을 버리고 맨발이 된 것이었다. 고행 끝에 부처가 되어 고향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 슈도다나 왕은 아들인 싯다르타의 맨발이 안타깝고 짠하고 민망하여 가죽신을 신기려고 들었고, 마가다 왕국의 빔비사라 왕은 싯다르타의 발에 금장식이 된 신을 신기려고 들었지만, 싯다르타는 정중히 사양을 하고, 그 가죽신 살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었다.

이후 여든 살이 넘어 열반에 들 때까지 만천하의 인민들에게 올바른 길을 가르치기 위하여 내내 험한 길을 걸어 다닌 그 맨발을, 싯다르타는 지금 수제자 카샤파에게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 이것은, 죽는 날까지 영원히 이 맨발의 뜻을 잊지 말라는 당부이다.

한승원은 곽시쌍부의 의미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맨발’에서 찾고 있다. 출가자의 슬픈 표상인 ‘맨발’은 모든 것을 버린(혹은 내려놓은) 끝에 얻은 깨달음의 산물인 것이다. 한승원은 〈작가의 말〉에서 “나는 성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고, 출가에 맞추어 이 소설을 썼다”고 밝혔는데, 실제로 이 소설은 싯다르타가 출가하기까지 이야기가 전체 분량의 3분의 2가량을 차지한다. 그러다 보니 《사람의 맨발》의 상당 부분은 한 나라의 태자인 싯다르타가 금장식 은장식을 한 신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뜨거운 사막을 걸어간 까닭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필자가 《사람의 맨발》에서 주목한 것은 싯다르타가 출가 전 당시 사회에 퍼져 있던 다르마(Dharma, 法)와 싯다르타가 출가 후 몸소 체득한 다르마의 대비였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장에서 싯다르타의 스승 비슈바미트라는 인생의 네 가지 목표에 대해 설명한다. 인생의 네 가지 목표는 아르타(Arhta), 카마(Kama), 다르마((Dharma), 모크샤(Moksha)이다. 간단히 말해, 아르타는 소유욕, 카마는 애욕, 다르마는 종교적 혹은 도덕적 의무, 모크샤는 영적인 해탈을 일컫는다. 이중 다르마에 대해 비슈바미트라가 설명하는 대목을 인용해보자.

신이 내려준 네 계급 ……숭엄하게 사제로서의 성직을 수행하는 브라만, 나라를 다스리는 왕족과 귀족인 크샤트리아, 상인과 농업인인 바이샤, 노예로서 상전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수드라들은 창조주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들이 해야 할 구실이 있습니다.

싯다르타에게 베다를 가르치는 스승인 비슈바미트라는 다르마가 성스러운 율법이라고 강조한다.

발터 벤야민은 논문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에서 법에는 ‘법보존적 폭력’과 ‘법정립적 폭력’이 도사리고 있다고 역설했다. 말 그대로 법보존적 폭력은 법을 보존하기 위해 행사되는 폭력이고, 법정립적 폭력은 법을 개혁하기 위해 행사되는 폭력이다. 법은 법이라는 이유 때문에 법이 제정되는 순간 법을 보존해야 하는 의무와 함께 법을 개혁해야 하는 의무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베다의 다르마는 ‘신의 뜻’이라는 미명 아래 행사되는 전형적인 법보존적 폭력에 해당한다. 그것을 잘 알기에 싯다르타는 금장식 은장식을 한 신을 신은 채 말을 탄 전륜성왕의 길이 아닌 맨발로 사막을 걸으며 전법교화를 하는 부처의 길을 택하는 것이다.

《사람의 맨발》에는 경전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하여 작가가 창작한 것으로 여겨지는 내용이 눈에 띈다. 특히, 싯다르타가 불가촉천민의 마을을 개간(開墾)하여 7년 만에 명주도시를 만드는 대목이나, 이 명주도시를 장인인 다리나 재정대신이 딸들의 명의를 내세워 차지하는 대목이나, 이 일로 싯다르타가 다리나 재정대신의 세력에 의해 연금을 당하는 대목은 소설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한다. 개혁을 실천하려는 주인공의 의지를 지배세력이 방해한다는 점에서 《사람의 맨발》은 작가의 전작 《원효 1, 2, 3》(김영사)과 유사하다. 붓다와 원효는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수행자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런 까닭에 두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은 어쩔 수 없이 역사소설이나 구도소설에 방점을 찍을 수밖에 없다. 굳이 분류하자면 한승원의 《사람의 맨발》과 《원효》는 구도소설보다는 역사소설에 비중이 실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리나 제정대신의 세력에 의해 연금당하면서 싯다르타는 전륜성왕의 길을 걸어서는 계급의식을 타파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절대고독에 휩싸인 싯다르타가 출가의 원력을 세우게 된 것은 늙은 망고나무 아래서 결가부좌를 한 채 명상을 하고 있는 사문을 보고서이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나무를 닮아간다는 것 아닐까. 땅에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를 통해 기운을 받은 몸통과 머리로 하늘을 떠받치고 사는 저 나무의 의젓하고 성스러운 삶이 부처의 모습 아닐까.

이런 생각 끝에 싯다르타는 스승 비슈바미트라가 말한 만다라를 떠올린다.

만다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동그라미, 말하자면 핵이 오른쪽으로 돌면서 부챗살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데, 그 힘을 가장자리의 동그란 테가 눌러주고 있는 수레바퀴 같은 것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돌고 돕니다. 우리들의 삶의 결과 무늬는 오른쪽으로 돌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세속적인 세상은 한 전륜성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굴러가는 것이고, 초월적인 세상은 부처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굴러가는 것인데, 그것은 신의 뜻입니다. 해와 달이 동편에서 떠서 서편으로 지고, 별들이 휘도는 것이 다 만다라의 원리입니다.

만다라의 원리를 떠올리고 나서 싯다르타는 사고의 전환을 꾀할 수 있었다. 싯다르타의 눈에 비친 자연은 “지렁이를 물총새가 쪼아 먹고, 그 물총새를 매가 낚아채가는” 농경제전에서 보았던 약육강식의 광경이 아니라 “새들은 가지들 속에 동그란 둥지를 틀고, 멀리 날아가 먹이를 물고 와서 새끼들을 키우고, 새끼들은 자라서 떠나갔다가 다시 둥지로 돌아오고, 나무는 땅속에 뻗은 뿌리로 물기를 빨아올려 마시고, 그것을 기자와 잎사귀를 통해 하늘 쪽으로 뿜으며 숨을 쉬고, 그 습한 숨결은 구름이 되어 떠돌다가 비를 뿌리고, 그 비를 수목들이 빨아먹고 살고, 대지 위의 수목들이 빨아 먹고 남은 빗물은 강물이 되어 바다로 가고, 바다의 물은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구름은 다시 대지 위로 날아와 비를 뿌려주는” 상생과 순환의 광경이 되는 것이다. 하여, 싯다르타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정할 수 있게 된다. 그 길은 부처가 되어 세상 모든 사람의 탐욕을 없애주는 것이다.

흔히 싯다르타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 계기를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보고 있다. 사문유관은 싯다르타가 가비라성(迦毗羅城)의 밖으로 놀러 나갔다가 동문 밖에서는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든 사람을, 서문 밖에서는 죽은 사람을, 북문 밖에서는 승려를 만남으로써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인생의 괴로움을 몸소 경험한 뒤 출가를 결심했던 것을 일컫는다. 그런 까닭에 계급사회를 타파하기 위해 출가했다는 작가의 설정이 일부 독자에게는 다소 작위적이거나 낯설게 느껴지는 게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삶과 죽음이라는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연기사상이라는 관계론을 주목한 것을 봤을 때 작가의 설정은 제법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출가하면서 싯다르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금장식 은장식을 한 신을 벗어던지고 맨발이 된 것이다. 싯다르타는 고행주의자인 마하 바르가바와 선정주의자인 마하 우드라카 라마푸트라에게 찾아가 깨달음을 구하지만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다. 마하 바르가바의 고행은 천상의 세계에서 태어나 영원히 성스럽고 화려한 삶을 살기 위한 데 목적이 있었다. 싯다르타가 그토록 경계했던 ‘신의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마하 우드라카의 선정은 “생각 자체를 떠나서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그윽하고 고고한 지상(至上)의 경지”이긴 했으나, 이 역시 자기 혼자서만 세상의 고통을 초월하고 그 경지를 즐기는 것이어서 일종의 개인적인 쾌락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돼 있지는 않지만 마하 우드라카의 선정은 비슈바미트라가 싯다르타에게 가르친 모크샤의 내용과도 다르지 않다. 비슈바미트라에 따르면 “모크샤라는 네 번째 목표도 다르마라는 준엄한 법칙으로 인해 차갑고 딱딱해진 인성을 부드럽고 깨끗하게 풀어주기 위해 신이 만든 것”이다. 선정삼매에 빠져 안락하게 삶을 영위하는 것이 싯다르타에게는 중생들을 외면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중생제도를 위한 자신의 출가 본뜻에 미치지 못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출가를 결심하면서 느낀 만다라의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만사가 인연 따라 생멸한다는 것, 태어난 자리에는 죽음이 있고, 죽음의 자리에는 반드시 태어남이 있다는 것을 동녘 하늘에 떠서 반짝거리는 샛별을 보면서 깨닫게 된다. 깨달은 뒤 싯다르타는 전법교화의 길을 나선다. 그중 목갈라나와 사리푸트라를 제자로 받아들이는 장면은 인상 깊다. 가죽신 한 켤레를 갖고 와서 내미는 목갈라나와 사리푸트라에게 싯다르타는 아래와 같이 설한다.  

출가자에게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이 가죽으로 만든 신이오. 이 땅을 맨발로 밟고 다닌다는 것은 중생들과 더불어 기쁨과 슬픔과 괴로움과 아픔을 함께 나눈다는 것이오. 그대들이 신겨주려고 하는 이 신은 한 고귀한 생명을 도살하고 그것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오. 나는 그 생명체의 가죽을 발바닥에 붙이고 다닐 수 없소.

한승원의 《사람의 맨발》을 읽고 나서 필자는 인도의 신 비슈누를 떠올렸다. 인도인들은 비슈누가 붓다로 화현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비슈누의 화신 중 하나인 바마나는 발리라는 악마의 왕을 굴복시켰다. 난쟁이인 바마나가 세 걸음을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자 발리는 난쟁이가 얼마나 걷겠는가 싶어 이를 허락했다. 발리는 첫 번째 걸음에 세상의 끝에, 두 번째 걸음에 우주의 끝에 닿았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발걸음이 떨어진 곳은 발리의 머리였다.

싯다르타의 무기는 칼과 창이 아니라 맨발과 진리였다. 그런 까닭에 싯다르타의 전법교화의 길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감으로써 가장 높은 곳은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싯다르타의 작디작은 맨발과 바마나의 크디큰 맨발이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맨발의 삶, 인욕(忍辱)의 삶

한승원의 《사람의 맨발》에서 싯다르타의 깨달음은 인위적이지 않은 무위적이고 자연적인 것으로 묘사돼 있다.

곽시쌍부를 모티브로 하고 있고, 자연적인 삶을 주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태준 시인의 시 〈맨발〉은 한승원의 《사람의 맨발》과 매우 유사하다.

어물전 개조개 한 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 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문태준 〈맨발〉

문태준은 개조개 한 마리를 보고서 곽시쌍부(槨示雙趺)를 떠올린다. 그리고 붓다의 맨발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난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가장의 맨발로 환치된다.

〈맨발〉에는 시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깃들어 있다. 시인이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 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하여 시인은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라고 유추한다.

시 속에서 ‘맨발’은 신발을 신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발이다. 맨발은 자연에, 신발은 문명(文明)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연의 구성원들은 인간 말고는 모두 맨발이다. 문명의 이기(利己)를 경험하지 못한 존재들은 온몸으로 자연을 견뎌야 한다. 맨발의 사람에게는 인생의 시간이 참으로 더디게 흐를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는 비바람과 불, 산과 바다, 식물과 동물마저도 두려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보행(步行)은 인류의 특징적인 행동이다. 걸을 수 있기에 인류는 양손으로 도구를 만들 수 있었다. 인간은 신과 동물의 중간자적 존재이다. 손이 신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라면 발은 동물의 영역에 가깝다. 인류는 신발을 신으면서 문명의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아스팔트 도로가 깔렸고 그 도로 위로 차들이 질주했다. 차의 속력을 올리듯 인류는 문명의 발전 속도를 높였다. 모든 게 신속해졌다. 하지만 문명의 가속도가 붙으면서 인류는 자연이라는 본향(本鄕)을 잃어가고 있다.

밀란 쿤데라는 《느림》에서 빠름과 느림의 차이를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이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 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 자신의 나이를 느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했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고 그는 비신체적, 비물질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또한 밀란 쿤데라는 《느림》에서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어떤 내밀한 관계가 있다. 지극히 평범한 상황 하나를 상기해 보자. 웬 사내가 거리를 걸어가고 있다. 문득, 그가 뭔가를 회상하고자 하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순간, 기계적으로 그는 자신의 발걸음을 늦춘다. 반면, 자신이 방금 겪은 어떤 끔찍한 사고를 잊어버리고자 하는 자는, 시간상 아직도 자기와 너무나 가까운, 자신의 현재 위치로부터 어서 빨리 멀어지고 싶다는 듯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한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정도에,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정도에,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는 밀란 쿤데라의 정의는 문명의 가속도가 잊고자 하는 것이 바로 자연임을 일깨워준다.

불교사상에 입각해보면 ‘빠름은 탐욕(貪慾)의 정도에, 느림은 인욕(忍辱)의 정도에 정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문태준의 〈맨발〉이 뛰어난 이유는 맨발을 통해 자연의 삶을 환치시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문태준은 자연을 절대 선(善)으로 간주하는, 기형도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책임한 자연에의 비유’를 남용하지 않는다. 문태준이 바라보는 자연의 삶은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문태준이 바라보는 자연의 삶은 가난하여서 외려 숭고하다. 문태준에게는 탁발하는 수도승과 가난한 집의 가장이 다르지 않은데, 그 이유는 그 둘 다 인고(忍苦)의 삶을 견뎌야 하는 자연의 구성원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라는 대목에서는 삶이 곧 수행임을 일깨워주기까지 한다. 앞뒤로 호응하는 “아−”라는 울음에 대한 의성어가 독자들에게는 어떤 자각의 의성어로 다가오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승원의 《사람의 맨발》과 마찬가지로 문태준의 〈맨발〉은 ‘인생’이라는 길에 대한 아프면서도 숭엄한 붓다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맨발은 신발을 신지 않은 발이다. 문명이 아닌 자연의 발이고, 인위적이지 않은 무위(無爲)의 발인 것이다. 삶을 수행으로 비유한다면, 그 수행의 기록은 맨발의 발바닥에 새겨진 무늬일 수밖에 없다.

뜨거운 모래밭 구멍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 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 송수권 〈아내의 맨발−갑골문(甲骨文)〉


송수권은 2003년 백혈병으로 투병 중인 아내 김연엽을 위해 〈연엽(蓮葉)에게〉라는 시를 써서 바쳤다. 김연엽이 과다출혈로 서울의 병원으로 이송되었을 때 의경들이 피를 나눠줬다. 의경들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아내가 간신히 목숨을 건진 것을 감사하면서 송수권은 서울지방경찰청장에게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썼다.

저의 아내 연잎새 같은 이 여자는, 똥장군을 져서 저를 시인 만들고 교수를 만들어낸 여인입니다. 수박구덩이에 똥장군을 지고 날라서 저는 수박밭을 지키고 아내는 여름 해수욕장이 있는 30리 길을 걸어서 그 수박을 이고 날라 그 수박 팔아 시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가 했더니 보험회사 28년을 빌붙어 하늘에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교수까지 만들어 냈습니다. 박사학위는커녕 석사학위도 없이 전문학교(서라벌 예술대학 문창과)만 나온 저를 오로지 시(詩)만 쓰게 하여 교수 만들고 자기는 쓰러졌습니다.

첫 월급을 받아놓고 “시 쓰면 돈이 나와요, 밥이 나와요, 라고 평생 타박했더니 시도 밥 먹여 줄 때가 있군요!”라며 울었습니다.
(중략)

그러고는 자기는 이렇게 할 일 다 했다는 듯이 쓰러졌습니다.
친구나 친척들에게서 ‘골수이식’ 받아야 한다고 말해도 “2년 후면 송 시인도 정년퇴직인데, 송 시인 거지 되는 꼴 어떻게 봐요, 그게 1억이 넘는다는데……”라며 생떼를 씁니다.
지난주 금요일이었습니다. 병간호를 하는 시집간 딸 은경이의 친구가 2003년 9월 고등학교 1학년 학력평가 문제지(수능 대비 전국 모의고사)를 들고 왔습니다. 언어영역 문제지에는 저의 시 〈산문(山門)에 기대어〉가 출제되어 있었습니다. 은경이의 친구가 자랑처럼 말하자 아내는 “너는 이제 알았니? 은경이 아빠의 시(詩), 〈지리산 뻐꾹새〉와 〈여승〉도 진작 수능시험에 출제되어 나갔어야!”라고 설명해주고는 눈물을 보였습니다. “난 이제 죽어도 한은 없단다.”라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중략)
그러나 저는 압니다. 몹쓸 ‘짐승의 피’를 타고난 저는 저의 아내가 어떻게 살아온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청장님께 말씀드리지만 저의 아내가 죽으면 저는 다시는 시를 쓰지 않겠습니다. 시란 피 한 방울보다 값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AB형! 그 의경들이 달려와서 주고 간 피! 그것이 언어로 하는 말장난보다 ‘진실’이라는 것−그 진실이란 단어 이상이라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송수권은 2억 5천여만 원에 달하는 수술비가 부담스러워 골수이식을 거부하는 아내에게 “당신이 숨을 거두면 시를 쓰지 않겠다”며 간절하게 설득했고, 결국 김연엽은 골수를 이식받았다고 한다.

이런 사연 때문인지 송수권의 〈아내의 맨발−갑골문〉은 비장미(悲壯美)가 돋보인다.

송수권의 〈아내의 맨발〉에는 유난히 길어서 슬퍼 보이는 두 발을 지닌 존재가 둘이 등장한다. 하나는 바다거북이고 다른 하나는 시인의 아내이다. 모래에 몇 개의 알을 낳은 뒤 다시 바다로 돌아가다가 죽은 바다거북의 두 발과 아마도 수술을 앞둔 모양인지 마취실을 향해 가는 침대차에 누운 아내의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두 발에는 갑골문자가 새겨져 있다.

필자는 시를 다 읽고 나서 “거북이처럼 괴로운 세월이 바다에서 올라온다”는 박인환 시인의 시구가 떠올랐다. 아마도 이 세상의 모든 숨을 탄 존재는 삶이라는 고투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리라. 두 발에 새겨진 “궤적의 무늬” 그 “갑골문자”만큼 도저하고 웅숭깊은 오도송(悟道頌)이 어디 있겠는가?

기실, 곽시쌍부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로 정의되는 선불교의 가르침이 붓다에게서 가섭 존자에게로 계승됐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일 텐데, 삶이라는 수행에서도 승계는 말 없는 말로 이뤄진다. 절대고독을 해결하는 것은 아프게 걸어온 타인의 두 발을 바로 보는 것이리라. ■

 

유응오 / 소설가.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석사). 2001년 〈불교신문〉 200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 저서로 《10·27법난의 진실》 《이번 생은 망했다》 《벽안출가》 《영화, 불교와 만나다》 등이 있음. 〈주간불교신문〉 〈불교투데이〉 편집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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