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와 정치참여

1. 머리말

흔히 불교를 고답적인 종교라고 한다. 과연 불교는 요하네스 브롱코스트(Johannes Bronkhorst)가 Buddhism in the Shadow of Br-ahmanism에서 지적한 것처럼 정치라든지 국가의 통치와 관련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던 것일까?

인도에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적 비전의 경향이 강했던 브라만 사상과 공존해왔다. 브라만들은 사회적 분업에 기초한 계급체제인 카스트 제도를 확립하고 스스로를 사제계급(Brahman)으로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시킨 후 제식을 행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회적 의무로 부여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사회 지배층에 무사계급(kshatria)을 부여하여 자신들의 바로 아래에 위치시킨 후 국가의 통치와 관련하여 살생과 폭력을 사회적 의무이자 일종의 특권으로 부여하여 용인해 주었다. 또한 브라만들은 무사계급에게 국가를 경영하고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지식들을 가르쳤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해당하는 《아르타샤스뜨라(Arthaśāstra)》와 인도적 사회질서를 포괄하는 《마누법전(Manusmṛti)》을 통해서 브라만들은 인도의 수많은 군주들에게 다양하고 효과적인 정치적 조언들을 해왔다.

이와 반대로 불교는 인도에서 브라만 사상과 같이 일종의 사회적 비전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불교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속한 사회를 떠나갈 것을 조언했고 이렇게 사회를 떠나간 사람들을 중심으로 승단(sangha)이란 이름의 종교적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발전한 종교였다. 따라서 불교는 원칙적으로 정치에 참여한다든지 국가를 경영한다든지 하는 것에 아무런 생각이 없었으며, 국가의 경영에 관련된 거의 모든 부분을 브라만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불교는 스스로가 속한 사회를 떠나는 것을 전제로 괴로움으로 가득한 윤회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출세간의 길을 가르치는 것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잡았다. 불교의 이러한 고답적인 측면은 중국에서도 한국에서도 계속되었으며, 주로 유학자들에게 정치참여와 국가경영의 자리를 내어주고 스스로를 출세간적인 부분에 안주시켰다.

따라서 불교는 기본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무관심한 종교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불교가 국가적인 종교로 발전하고 사회에서 불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불교는 비록 한정적이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개입할 방법을 찾게 된다.

2. 《자따까(Jātakas)》

불교가 기본적으로 출세간적인 이상을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불교에 뛰어든 사람들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회적인 문제보다는 열반과 같은 고차원적인 구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승원 중심의 주류 인도불교 전통에서 불교에 심취하고 불교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의미했고 자신이 속한 사회로부터 떠나가는 것을 또한 의미했다. 이때 재가신도들의 역할은 이렇게 출세간을 지향하는 승단을 지원하는 것에 한정되었으며 일종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은 붓다의 전생 이야기로 구성된 《자따까(Jā-takas)》 문헌들이 출현하면서 서서히 바뀌게 된다. 《자따까》에서 붓다는 원숭이와 같은 동물로 태어나기도 하고 재가신자 또는 전륜성왕으로 태어나기도 하며 인드라와 같은 신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수없이 많은 과거 생에서 붓다는 다양한 삶을 살았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쌓았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공덕이 붓다가 마지막에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32가지의 성인상을 갖추고 태어나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붓다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한 번의 생에서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는 것과 차원이 다른 것으로서, 수없이 많은 전생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쌓아야만 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리고 점차 자신의 목표를 아라한이 되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되는 것으로 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붓다가 되기 위해서 거쳐 가야만 하는 수많은 삶이 보살도(bodhisattva-yāna)란 이름으로 체계화되면서 대승불교(Mahāyāna)가 본격화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승단을 후원하는 보조적인 역할에만 머물렀던 재가신자들의 위상에 큰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비록 재가신자이지만 자신의 목표가 붓다가 되는 것이라면 이들은 한 번의 생에서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존 승단 승려들보다 훨씬 더 크고 원대한 목표를 가지는 것이 된다. 《유마경》과 같은 대승불교 경전에서 재가신자인 유마 거사가 승단 전통의 아라한들을 신랄하게 나무랄 수 있었던 배경에 바로 이러한 흐름이 있었다. 따라서 불교에 심취하고 불교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더 이상 승려가 되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떠나가야만 하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 비록 재가신자라 할지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 많은 공덕을 쌓는다면 그것은 후에 자신이 붓다가 되기 위해서 걸어가는 길고 긴 과정의 일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완전하고 충실한 불교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것은 승려로서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나가르주나(Nāgārjuna)의 제자로 알려진 마드리쩨따(Māt-ṛceṭa)가 수없이 많은 정복전쟁을 벌여온 쿠샨왕조의 까니시까(Ka-niṣika) 왕에게 보낸 편지는 승려로서 국가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지니는 한계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생과 사가 교차하는 전쟁터를 오가는 왕에게 동물의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반복해서 조언하고 있다. 물론 동물의 생명을 구하라는 조언이 지극히 불교적이기는 하지만, 전쟁과 정치로 바쁜 왕에게 어떻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이지 못하고 실용적이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승려의 신분으로 왕에게 적들을 무참하게 죽여 버리라고 조언하기란 더더욱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재가신도로서 스스로를 충실한 불교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정치 일선에 나선 사람들은 주저하지 않고 《아르타샤스뜨라》와 《마누법전》을 공부했으며 이를 통해서 실질적으로 국가경영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려고 노력했다. 브라만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극히 미미했던 스리랑카에서 기본적으로 불교도였던 왕과 재상들이 직접 이러한 문헌들을 공부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아마도 10세기 후반 크메르 왕국의 제상으로서 자야와르만(Jayavarman) 5세를 보좌했던 끼르띠빤디따(Kīrtipaṇḍita)는 국가통치의 일선에서 정치에 깊이 참여하면서도 충실한 불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왕과 함께 보살(bodhisattva)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의무를 백성들이 천국에 태어나도록 돕고 승려들이 해탈을 성취하도록 이끄는 것으로 규정하고 이를 통치이념으로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러한 맥락에서 밀교를 숭배했던 동인도 빨라(Pāla) 왕조의 왕들과 크메르 왕국의 몇몇 대승불교 군주들은 스스로를 보살(bodhisattva) 또는 살아 있는 붓다(buddha)로 자리매김하려 했던 것 같다.

따라서 불교는 대승불교의 보살도를 통해서 일반 불교신자들이 충실한 불교인으로서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정치적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을 바탕으로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 노력한다는 불교적 이념이 이들을 통해 정치 일선에서 다양하게 시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불교교단과 왕가

브라만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했던 스리랑카에서 불교는 사실상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발전했다. 불교를 진흥하고 불교를 보호하는 왕은 법왕(dharma-raja)으로 불렸으며 스스로를 신과 같이 생각하고 신과 같이 행동했던 힌두교적 신왕(deva-raja)과 대비되었다.

스리랑카 불교교단은 기본적으로 왕가의 후원하에 발전했다. 일반 백성들은 자신들의 왕이 충실한 불교신자이기를 원했고, 왕은 붓다의 사리의 보호자이자 보살(bodhisattva)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면서 왕권을 유지했다. 따라서 불교교단은 왕가로부터 교단을 유지하기 위한 보시를 받으면서 왕권을 인정했고 왕은 붓다의 치아 등과 같은 중요한 유물의 보호자를 자처하면서 스스로를 불교적 군주로 자리매김했다. 불교교단의 번영은 왕의 평화적인 통치와 외부로부터 침입을 잘 대처하는 것에 의해 유지되었다. 왕가에서는 불교교단에 땅뿐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노동력을 함께 기증했다. 따라서 불교교단은 점차로 부유해졌으며 승려들은 사회적 경제적 활동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스리랑카의 왕들은 불교교단의 정화와 관련된 아쇼까 왕의 예를 따라서 승단 내부의 일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많은 경우에 정화란 이름으로 부패한 승려들이나 이단을 믿는 승려들을 교단에서 몰아내는 일을 왕가의 이름으로 실행했다. 스리랑카의 승려들 또한 종종 왕권을 통해서 교단 내의 부적절한 승려들을 축출하거나 자신들을 정적을 축출하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했다. 따라서 스리랑카를 통치할 수 있는 도덕성이 승단에 의해 뒷받침되었고, 승단은 왕의 공덕을 칭송하고 왕가의 보시를 받는 것을 통해서 왕의 가치를 인정했다.

이러한 구조에서 불교교단이 직접적으로 세세한 정치인 문제에 참여하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불교교단에서 왕가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되고 불교교단의 불만이 정점에 이르게 되면 불교교단에도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한 가지 수단을 가지게 되었다. 승려들이 자신들의 바루를 뒤집어엎는 것으로서 왕가로부터 보시를 받는 것을 거부하여 왕가의 도덕성을 부정하고 기존의 왕이 더 이상 불교를 진흥하고 불교를 보호하는 왕은 법왕(dharmaraja)이 아니란 점을 선포하는 일이었다. 2007년 미얀마에서 있었던 민주화 시위에 참여한 불교승려들이 거리를 행진하면서 바루를 뒤집어엎은 것이 여기에 해당하며, 이를 통해서 당시 미얀마의 집권 군부세력이 국가를 통치할 도덕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불교교단의 뒷받침 속에서 법왕(dharmaraja)의 모습이 가장 이상적인 불교적 군주로 상정되었지만,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불교는 끊임없는 정치적 민족적 분쟁에 휩싸이게 된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불교가 힌두교도인 왕들에 의해서 박해를 받은 적은 있지만 불교도인 왕이 다른 종교를 박해한 경우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불교도인 왕이 자신의 왕국을 침략한 적의 군사들에 대해서 무력을 사용하기를 주저한 적도 거의 없었다. 불교교단은 불교국가에서 자신들의 독점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비불교도들의 침입에 맞서 싸울 것을 교리적으로 뒷받침해야만 했다.

남인도로부터 비불교도인 타밀족을 이끌고 세일론을 침입한 엘라라(Eḷāra)에 맞서 싸워서 승리한 싱할라족 둣타가마니(Duṭṭ-hagāmaṇi) 왕은 마치 칼링가 전쟁 후 아쇼까 왕처럼 전쟁으로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깊은 고민과 번민에 빠졌다. 이때 여덟 명의 아라한들이 나타나 “당신은 딱 한 사람 반만을 죽였을 뿐입니다.”라며 왕을 위로했다는 기록이 스리랑카의 역사서인 《마하밤사(Mahāvaṃsa)》에 나타난다. 이들의 계산에 의하면 왕은 전쟁에서 죽은 엘라라 휘하의 수많은 군사들 중에서 딱 한 명의 불교도와 죽기 직전에 오계를 받은 다른 한 명의 죽음에만 책임이 있으며, 후자의 경우에는 아직 완전한 불교도가 아니기 때문에 절반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적군은 비불교도로서 마치 야수와 같이 죽어갔기 때문에 왕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했다. 이것은 사실상 불교를 수호하기 위한 전쟁에서 이교도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시켜주는 것으로서 근대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불교 싱할라족과 힌두 타밀족의 오랜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교적 가치관이 지배적이었던 동남아시아의 경우에도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 많은 경우에 이러한 분쟁은 불교에 의해서 유발되기도 했는데, 불교경전을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고, 전륜성왕의 일곱 가지 보물 중의 하나인 흰 코끼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상대방의 불교를 정화한다는 명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고, 유명하고 영험한 불상을 획득할 목적으로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수많은 전쟁에서 불교교단의 승려들은 일종의 부적으로 군대에 함께 머물렀으며, 많은 승려들이 승복을 벗고 군인이 되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물론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교단에서 승려가 군대의 전쟁을 보는 것도 군대에 함께 머무는 것도 모두 금지되어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비록 붓다가 샤끼야(Sākiya) 족과 꼴리야(Koliya) 족의 전쟁을 막은 이야기가 불교경전에 보이기도 하지만, 붓다 자신이 속한 샤끼야 족이 꼬살라에 의해서 몰살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불교적 군주라고 해서 무작정 불교적 가치만을 내세우고 불교적 가치를 통해서만 국가를 통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다. 적이 침략했을 때 상대와 싸워서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왕국을 원하지 않는다며 성문을 열고 자신의 왕국을 적에게 내어준 왕의 이야기가 불교에도 전해지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에서 침략한 왕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결국 왕국을 되돌려 주는 것으로 되지만, 현실에서 이렇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일 어떤 왕이 불교의 불살생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왕국을 적에게 내어 주었다면, 자신의 믿고 따랐던 백성들은 침략군에 의해서 수없이 많은 고통을 당할 것이다. 즉 한 개인의 지극히 불교적인 행동인 국가와 민족에는 수많은 고통을 주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용수(Nāgārjuna)는 〈라뜨나왈리(Latnāvalī)〉에서 차라리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라며 “그러나 만일 그릇됨으로 가득한 세계에서 올바르게 통치하기가 도저히 어렵다면, 그때가 바로 당신이 스스로의 수행과 인격을 위해 승단의 일원이 될 때이다.”라는 게송을 남기고 있다.

4. 왕으로서 붓다

앙코르 사원을 남기고 한때 동남아시아의 많은 부분을 지배했던 크메르 왕국은 힌두 왕국이었다. 몇몇 크메르 왕국의 군주들이 불교도이기는 했지만 이들이 믿었던 불교는 지금 현재의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볼 수 있는 남방불교가 아니라 대승불교였다. 1200년대 후반 원나라의 사신으로서 크메르 왕국의 수도인 야소다라푸라를 방문하여 1년간 머물렀던 주달관은 크메르 왕국의 풍습을 기록한 《진랍풍토기》에서 국가의 주요한 직책들을 브라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크메르 왕국의 유산은 동남아시아 전역에 영향을 미쳤으며 불교국가임을 자부하는 태국의 왕들도 크메르 왕가의 힌두교적 관습에 둘러싸여 있었다. 태국 왕가는 지속적으로 왕실에 필요한 브라만들을 크메르 지역에서 필요에 따라 보충해 왔으며, 이 브라만들은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적 법률적 부분에 대해서 전문가로서 왕가에 자문했다. 이들은 달력을 만들어서 농업을 관장했고, 점성술로 중요한 국가적인 일이 있을 때 점을 쳤으며, 스윙축제 쟁기축제 기우제 등과 같은 주요한 행사를 주관하면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려 왔다.

아마도 동남아시아의 불교도들은 점차 브라만들이 정치적인 분야에서 누려왔던 독점적 지위에 대항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남방 테라와다(Theravāda) 불교에서 앞에서 언급한 대승불교의 보살도(bodhisattvayāna)를 활용한 불교적 사회참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남방에서 불교에 심취하고 불교를 온몸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전히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승려로서 출세간적인 부분보다 세간적인 부분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면 계를 반납하고 환속하여 일반인으로 되돌아가면 그만이었고, 이들은 비록 횟수의 제한은 있지만 언제든지 다시 출가하여 승려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출가와 재가, 세간과 출세간의 구분은 명확했으며 진정한 불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승려가 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따라서 동남아시아 불교는 불타관의 획기적인 변화를 통해서 불교가 국가를 통치할 수 있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했다. 태국과 미얀마의 불교사원에서 촉지인을 하고 있지만 수행자가 아니라 왕의 복장을 하고 있는 불상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태국 아유타야의 나프라멘 사원(Wat Na Phra Men)의 유명한 불상에서 붓다는 전형적인 태국 왕의 복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붓다를 인도 문화권에서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받아들여지는 전륜성왕과 동일시한 것으로서 붓다야말로 출세간적으로 열반을 성취한 붓다가 세간적으로는 전륜성왕과 같이 위대한 군주가 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상 동남아시아에서는 붓다야말로 최고의 군주이고 국가를 가장 뛰어나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란 점을 부각하기 위해서 독자적으로 경전의 제작에 나서기까지 했다.

《잠부빠띠숫따(Jambupati Sutta)》는 이러한 배경에서 탄생한 경전으로 동남아시아 전역에 폭넓게 회자되었으며 많은 사원에서 벽화로 장식되어 있다. 이 이야기에서 붓다는 신통력을 통해서 스스로를 전륜성왕의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제타와나 사원을 전륜성왕의 거대한 왕궁으로 변화시키며 사리뿟따 목갈라나와 같은 제자들을 제상으로 변화시킨다. 스스로를 전륜성왕이라고 믿고 자신의 군대와 신통력을 통해 빔비사라 왕을 괴롭혔던 잠부빠띠 왕은 전륜성왕으로 변화한 붓다에 어떤 방법으로도 이길 수 없었으며 결국 불교에 깊이 귀의하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고 있다.

이 이야기는 왕관을 쓰고 왕의 복장으로 근엄하게 앉아있는 불상들이 동남아시아 전역에 나타날 수 있는 근거가 되었으며 이를 통해서 붓다야 말로 최고의 군주이며 불교야말로 국가 경영에서 최고의 조언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불교는 고답적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 문제에 참여하는 방법들을 모색해 왔다. 현대 사회는 불교에 좀 더 적극적인 목소리를 요구하고 있다. 불교가 뛰어난 가르침과 훌륭한 수행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이것이 고통받는 사회의 일반인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면 불교는 현대사회에서조차도 고답적인 이미지 속에 파묻혀서 고립되어 버릴 것이다.

대승불교는 기존 승원 중심의 불교교단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역할도 할 수 없었을 때 보살도를 통해서 재가자이면서도 충실한 불교인으로서 정치 일선에 나서서 불교적 이념을 실천할 수 있는 틀을 만들었다. 남방불교는 불타관의 변혁을 통해서 붓다야말로 최고의 군주인 전륜성왕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국가경영에서 불교적인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모습은 민주화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될 수 있으며 현대사회에 맞게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다가설 수 있어야 한다. ■

황순일 /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동국대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철학과, 영국 옥스포드대 졸업(박사). 저서로 Metaphor and Literalism in Buddhism, The Doctrinal History of nirvana, Sermon of One Hundred Days: Part One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무기설을 통해본 무여열반의 의미〉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에서 개념과 명칭〉 〈근대 돈황학의 성립과 오리엔탈리즘〉 등이 있다. 불이상(연구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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