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평론 학술상 수상 기념 강연

신규탁
연세대 교수

‘법성종’이란, 그 이름에 비록 ‘종(宗)’이란 명칭을 띠고 있기는 하지만, 사회·종교 조직으로서 ‘종단’ 또는 ‘교단’과는 여러 면에서 거리가 멀다. ‘법성종’에서 ‘종’은 교상(敎相)의 판별이나 해석상에서 나온 것이다. 종밀은 ‘종(宗)’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종(宗)이란 각 부파가 숭상하는 핵심적 주장”이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에서 ‘교단(敎團)’의 명칭에 사용하는 소위 조계종이니 진각종이니 천태종이니 하는 그런 의미의 ‘종(宗)’과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좁은 의미로 한정시켜서 말하면, ‘법성종’은 《화엄경》을 중심으로 연구하던 당대(唐代)의 두순(杜順, 557~640)−지엄(智儼, 600~668)−법장(法藏, 643~712)−징관(澄觀, 737~839)−종밀(宗密, 780~841)과 송대(宋大)의 자선(子璇, 965~1038)−정원(淨源, 1011~1088) 등으로 이어지는 교학자들의 근본적 행상(行相)을 지칭한다. 
이들 법성종 내에 속하는 스님들 사이에 근본이 되는 경전은 《화엄경》 《능엄경》 《원각경》 《금강경》 등이고, 논서로는 《대승기신론》 등이다. 그리고 율장으로는 《범망경(梵網經)》이다. 이 중에서도 《대승기신론》은 법성교학의 체계 수립에 결정적인 정초(定礎)가 된다.

종밀은 법성종의 입장에서 파상종과 법상종을 ‘회통’하고 있다. 물론 이렇게 ‘회통’하기까지는 ‘요간’의 절차를 거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법성종을 현양한다. 이하에서는 이런 법성종의 현양이 ‘철학적’으로 무슨 의의가 있는지를 평론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철학적이란 말뜻이 무엇인가를 규정해야겠는데, 이 또한 만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여기서 필자가 사용하는 ‘철학적’이란 의미를, 전통적 서양 철학사에서 철학이라는 범주 내에서 다루어왔던 형이상학(혹은 존재론), 인식론(혹은 지식론), 윤리학(혹은 가치론)을 포함하는 학적 활동에 한정하기로 한다.

1. 형이상학적 측면

인간의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 문제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중요한 논제였다. 법성종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일심(一心)’ 또는 ‘진여(眞如)’ 또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라는 용어로 표기하기도 한다. 이 본질은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것으로, ‘지각’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당자가 체험할 수 있다.

‘지각’에는 ‘감관지’ ‘마음의 지각’ ‘자증(自證)’ ‘직관’ 등 네 종류가 있다. 이 네 종류 중에서 ‘자성청정심’을 지각하는 것은 셋째와 넷째의 방법이다. 인식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에 나오는 ‘2. 지식론적 측면’에서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본원(本源)’에는 ‘지혜롭고 (스스로를) 정화하는 기능[智淨相]’과 ‘불가사의한 업의 기능[不可思議業相]’이 있다. 바로 이와 같은 ‘본원(本源)’을 법성교학에서는 ‘법성(法性)’이라고도 부른다. 신앙적으로 그것을 법신불(法身佛), 줄여서 ‘부처’ 또는 ‘부처님’이라고도 한다. 이 ‘법성(法性)’이라는 용어는 다양한 문맥 속에서 사용되는데, 생명체[衆生]들이 사는 공간을 설명하는 문맥에서는 ‘법계(法界)’로 표기하고, 생명체[衆生] 그 자체를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문맥에서는 ‘진여(眞如)’로 표기하고, 생명체[衆生] 중에서도 특별히 인간을 설명하는 문맥에서는 ‘일심(一心)’으로 표기하며, 한편 구어체(口語體) 속에서는 ‘주인공’ 또는 ‘부모가 낳아주기 이전의 본 면목’ 등으로 말해지기도 한다. 긴 불교의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지만, 지시하는 내용은 동일하다. 비록 이렇게 언어적 명칭은 붙이지만, 그 언어에 상응하는 ‘실체성[實]’이나 ‘형상[相]’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일심(一心)’이라 표현하는데, ‘일심’ 위에서 소위 12지(支) 연기(緣起)가 펼쳐진다. 12연기의 각 지(支) 하나하나는 모두 공(空)하고 무상(無常)하지만, ‘일심’은 본바탕이므로 상주불변한다. 《원각경》에서는 그것을 ‘원각(圓覺)’으로 표기한다. 이것이 다양한 갖가지 중생들의 근본이며, 또 중생들이 사는 온갖 세계의 근본이며, 깨달음의 근본이다. 소위 3종(種) 세간(世間)이 모두 ‘일심’ 또는 ‘원각’ 위에서 펼쳐진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것을 중생들의 마음속에서 작동하는 ‘진여(眞如)’라고 했다. 이 ‘진여의 마음[眞如心]’에 ‘생성소멸하는 마음[生滅心]’이 수반(隨伴)되어, 인간들의 다양한 생각을 지어내고, 또 우리에게 행동하고 말하게 한다.

법성종의 학승들은 《대승기신론》의 교설을 수용하여, ‘일심’ 속에는 ‘불생불멸하는 진여의 속성[心眞如門]’과, ‘진여에 의존하여 생·주·이·멸하는 속성[心生滅門]’이 있어서, 이 두 속성이 ‘각각 모든 법(法)을 포섭한다[各攝]’고 한다. ‘불생불멸(不生不滅)하는 진여(眞如)적 속성[心眞如門]’에는 윤회의 인과에 저촉을 받지 않는 소위 ‘무루(無漏)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는데, 이것은 당사자가 체험해야 비로소 그것 자체와 하나 될 수 있다.

2. 지식론적 측면 
 
그러면 인간의 본질인 ‘일심’ 또는 ‘진여’ 또는 ‘자성청정심’을 어떤 ‘방법’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지식론 내지는 인식론의 영역이다. 법성종에서 말하는 진망화합식인 아뢰야식의 작용 속에는 천부적으로 ‘깨닫는 속성[覺義]’이 있다고 한다. 이런 입장은 《기신론》 사상에 기초한 것임은 두말할 것 없다.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깨닫는 속성[覺義]’이란 ‘일심’ 위에 있는 또는 ‘일심’의 본바탕에서 생·주·이·멸의 4상으로 연기(緣起)하는 그런 마음을 떨쳐버리는(=소멸시키는) 속성을 말한다. 이것은 ‘일심’에 본래적으로 소속되어 있는 기능이다. 이 기능을 발동시켜 ‘연기에 의해 만들어진 즉 실체가 없는 허망한 마음[妄心]’을 떨쳐버리기만 하면 ‘법계일상(法界一相)’이 드러난다. 이것은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 기능을 발동시킬 수 있을까? 법성종의 형이상학에서 ‘법계일상(法界一相)’은 본래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구해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위에서 말한 ‘망심(妄心)’만 떨쳐버리면 된다. 어떻게 ‘망심’을 떨치는가? 《기신론》의 다음 구절을 보자.

(1) 범부들은 한순간이 이전의 마음[前念]에 악을 일으켰음을 알아차리기 때문에 그 뒤를 이어서 일어나는 마음[後念]을 그쳐서 악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 비록 ‘깨달음’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하지만 이는 아직 깨친 게 아니어서 (범부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2) 성문승단이나 연각에 해당하는 승려들이 수행하는 ‘관(觀)하는 지혜’와, 보살승단에는 소속했지만 이제 막 발심한 보살들은 ‘마음이 변질되어 달라지는 것’을 자각하여 변질되어 달라지는 마음이 공한 줄 아는 것, 이런 깨달음은 분별함이 심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기능은 사라졌기 때문에 유사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3) 법신(法身) 보살 등은 생주이멸하는 마음이 생성되어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를테면 전식(轉識)과 현식(現識), 지상(智相)과 상속상(相續相))을 자각한다. 그러나 생・주・이・멸하는 마음에는 일정하게 유지되는 기능이 없다. 그 까닭은 거칠게 분별하는 마음의 기능이 사라졌기 때문에 각자 수행의 분수에 따르는 깨달음이라고 한다.

(4) 보살의 수행단계를 다 마친 10지(地) 보살은 모든 방편을 잘 활용하여 한순간에 단박에 자기 전체의 법신을 돈오한다. 생・주・이・멸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첫 순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도 알아차렸다는 마음조차 없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미세한 망념조차 전혀 없기 때문에 심성(心性)을 보게 되어 심성이 상주불변하기 때문이다. 이를 궁극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상은 (1)범부각 (2)상사각 (3)수분각, (4)구경각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중 (4)구경각을 설명하는 부분에 나오는 다음의 구절, 즉 “생·주·이·멸하는 마음 일어나는 첫 순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서도 알아차렸다는 마음조차 없다.”를 주목하자. 법성종에서는 ‘4상동시설(四相同時說)’을 취하고 있음은 위에서 보았다. 따라서 법성종에는 ‘한 법[一法]’이 생(生)하는 순간, 그것의 무상성을 관(觀)하는 방법으로 즉 ‘지각(知覺, pratyakśa)’이라는 방법을 통해 ‘일심’을 ‘체험[見得]’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 이렇게 체험된 ‘일심’의 진위(眞僞) 판별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는 지식의 진위 판단과 관련된 지식론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인도의 전통적인 철학가들에 의해 흔히 말해지듯이, ‘지각’에는, ‘바른 지각’과 ‘틀린 지각’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바름과 틀림을 나누는가? 또, 지각의 진위를 ‘어떻게’ 판정할 수 있겠는가? 이 두 문제는 결국 ‘체험[見得]’의 타당성(또는 정당성)의 문제와 연관된다. ‘체험[見得]한 내용’의 ‘효과성(effectiveness) 여부’로 ‘체험[見得]한 내용’의 진위를 판별할 수 있다. 즉, 종래대로 대상과의 일치성이 아니라, 체험한 내용의 ‘효과성’을 여부로 진위 판별의 기준으로 삼고자 한다. 

먼저 ‘지각’에 대한 타당성의 ‘성립’ 문제를 보자. ‘바른 지각[正現量]’이기 위해서는 지각을 생기시키는 ‘결함 없는 원인들’이 모두 갖추어져야 한다. 그 요인이란 예를 들면 감각기관의 건전성, 대상과의 접근성, 햇빛의 밝기, 감각소여와 감각기관과의 충분한 결합 등등 말이다.

그런데 무엇에 대한 지각이 생겼는데, 시간적으로 뒤에 이상에 말한 것 중의 어느 하나 또는 다수의 ‘원인에 결함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이전에 생긴 그 지각의 타당성은 부정된다. 예를 들면 어둠 속에서 발에 밟히는 길고 물렁한 그 무엇을 뱀으로 지각했다가, 날이 밝아 다시 보니 짧은 새끼줄임을 알았다. 또는 어둠 속에 흔들리는 어떤 물체를 귀신으로 알았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하나는 타당성의 ‘성립 근거’에 관한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타당성의 ‘판단 근거’의 문제이다.

먼저 (1) ‘지각’의 타당성이, ‘지각’ 자체가 아닌, 외적인 ‘결함 없는 원인’에 의해서 그 ‘성립 근거’가 마련된다면, ‘결함 없음’에 대한 판단은 매우 주관적일 수밖에 없어서, 그 결과 ‘지각’의 타당성은 항상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둘째는 (2) 타당하다는 ‘판단 근거’가 어떻게 확보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보자. 나의 눈에 보이는 흰 가루가 있다. 그것을 보고 내가 소금이라는 지각이 생겼다. 이 지각의 진위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 먹어보면 된다. 즉 체험해보면 된다. 소박한 경험주의자들의 답일 것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결국 타당성의 ‘성립’이든 아니면 ‘판단’이든 둘 다 외적인 실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면, 이를 ‘타립타당성설(他立妥當性說)’이라 하는데, 이렇게 되면 결국 타당성의 문제는 ‘끝없는 타자(他者) 의존성의 미궁’으로 빠져든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 눈에 보인 저 흰 것이 소금인 줄 알았지만, 먹어보니 ‘달더라’ 그러니 소금이라는 지식은 잘못된 지식이라고 한다면, 즉 이렇게 지식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을 타자(他者)에서 구한다면, 그 ‘달더라’라는 지식의 타당성도 또 다른 타자(他者)에 의해서 판단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끝없는 미궁’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후기 대승 논사의 한 사람이었던 다르마키르티는 ‘바른 지각[正現量]’은 두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정의(定義)한다. 첫째는 당착(撞着)하지 않아야 한다. 둘째는 미지(未知)의 실재를 밝혀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정의에 관한 설명은 ‘지각’과 ‘추론’ 두 측면에서 모두 가능하지만, 여기에서는 ‘지각’에 한정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또 미지의 실재를 밝히지 못하고 기왕의 지식을 다시 확인하는 것은 추론에 해당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

첫째, ‘지각’의 무당착성(無撞着性)에 대해 보자. 이 말을 좀 더 분명하게 주어와 술부를 갖추어서 말하면, ‘지각’의 내용이 실재(實在)와 당착하지 않아야 한다.

①먼저, ‘실재(實在)’라는 말을 보자. 즉 지각의 당착 여부의 기준이 ‘실재(實在)’라는 것이다. 불의 지각은 불이라는 실재(實在)에 의해서 생긴다. 그렇다면 (외계)실재론을 지지한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찰나멸론(刹那滅論)의 입장을 견지한다. 때문에 ‘지각’의 타당성이 나중의 ‘지각’에 의해서 확정된다고 할 경우, 현 찰나의 의식에 소여(所與)되고 있는 현 찰나의 대상이, 다음 찰나에도 ‘거의 차이가 없다’는 ‘현실적 너그러움’이 있어야 한다. ‘현실적 너그러움’이란 그런 정도의 섬세한 차이는 현실적 실제 생활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현실을 말한다.

②다음으로 ‘당착하지 않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사자 본인이 기대하고 있는 효과성(effectiveness)의 실현이다. 예를 들면 지금 무엇을 ‘태우려’고 했던 사람의 눈에 불이 ‘지각’되었을 때, 그 불에 대한 ‘지각’이 과연 타당한가? 이 물음에 대해, 그 사람에게 ‘지각’된 지식의 내용은 그 사람이 ‘태운다’라는 유효한 작용을 경험하는 것에 의해서 확인된다. 때문에 ‘지각’의 무당착성은 ‘지각’의 생김과 동시에 그 자신에게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타립(他立)의 미궁에 빠지지 않는다. 결국 지각의 정당성은 (현재적인 것은 물론 가능성으로서) 효과성(effectiveness)에서 확인된다.

이상의 논의를 다시 법성교학의 지식론에 대비해 보자. 위에서 필자는 이미 ‘지각’의 내용이 실재(實在)와 당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법성 교학에서 보면 ‘지각’의 내용, 즉 당사자가 ‘체험[見得]한 내용’이란 ‘일심’에 대한 지각이다. ‘일심’은 상주불변하게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동일성의 문제’를 논할 필요는 없다. 논의해야 할 문제는 오직 ‘당착하지 않음’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이미 위에서 ‘효과성(effectiveness)의 실현’으로 대치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일심’의 ‘효과성’이란 무엇인가? 법성종에서는 부처님의 화신 그대로가 상주신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상주(常住) 법신(法身)은 상·락·아·정의 네 가지 덕상(德相)을 구비하고, 10신(身), 10지(智), 18불공법(不共法) 등 중중무진한 덕상(德相)을 갖추신다고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일심’을 ‘체험[見得]’했다고 말하면, 그 사람이 한 체험 내용의 진위 판별은 그 사람에게서 법신에 구비된 무량한 덕상의 ‘효과성’이 발휘되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결정할 수 있다. 부처님과 같은 행동이 나오는가를 가지고 그 사람의 수행 정도를 판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법성종의 이런 지식이론은 소위 ‘한소식 했다’는 사람들의 진실성을 ‘요간(料揀)’하는 검증 방법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3. 윤리학적 측면 

법성종의 형이상학에 의하면 ‘일심’이 있고, 그 ‘일심’ 위에서 다양한 ‘업(業) 현상’이 인연 조화에 따라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사라졌다가는 또 생기는 일이 쉼 없이 계속된다. 법성종의 교학에서는 바로 이런 연기의 소산인 ‘업 현상’에 휘둘리지 말고 ‘일심’을 몸소 체험하여, 그 ‘일심’에 갖추어진 ‘불가사의한 기능’과 ‘지혜롭고 정화하는 기능’을 꾸밈없이 사용하면서, 태어나는 세상마다 형편껏 자신의 ‘업 현상’을 소멸시키고, 더 나아가 ‘긴 생명의 길’ 속에서 마침내는 한 점의 ‘업 현상’조차도 소멸시켜, 마침내 ‘일심’ 그 자체와 하나가 되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윤회에 들지 않고,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것이다. 법성종에서는 이런 형이상학적 근거를 기반으로, 인간 행위의 당위성을 추론한다. 

화엄의 초조로 추앙되는 두순 법사가 종교적인 실천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은 여러 연구들에 의해서 밝혀졌다. 《법계관문(法界觀門)》을 두순 법사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알았던 당나라의 화엄조사들은 《법계관문》에 각종 주석을 내어 ‘수행의 방법’과 ‘교상(敎相)의 해석(解釋)’에 관한 이론을 정비했고, 다른 한편으로 《40 화엄경》의 끝 부분에 붙어 있는 〈보현행원품〉의 주석 및 그에 따르는 수행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두순 법사가 제시한 화엄의 ‘관행(觀行)’과 ‘보현행(普賢行)’은 역대의 화엄조사들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그들의 교학과 수행의 근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역대 화엄조사들의 수행은 그 후 각종 법요의식(法要儀式)과 결합되어 구체적인 수행법으로 정착한다.

그렇게 한 대표적인 화엄 조사 중의 한 분이 진수 사문(晉水 沙門) 정원(淨源, 1011~1088년) 법사이다. 고려의 대각 국사 의천 법사가 스승으로 섬긴 분이 바로 이 분이다. 정원 법사는 《화엄보현행원수증의(華嚴普賢行願修證儀)(No.1472本)》(1권)에서 ‘단좌사유(端坐思惟)’ 개념을 빌어서 법성철학의 수행론을 둘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오비로법계(悟毘盧法界, 비로법계를 깨닫는 것)’이고, 둘째는 ‘수보현행해(修普賢行海,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제 순서대로 2종의 수행법을 살펴보기로 한다.

정원 법사에 의하면, ‘비로법계’란 《화엄경》에서 설하고 있는 ‘일진무애법계(一眞無碍法界)’ 혹은 ‘일심(一心)’이라고 한다. 이 ‘일심’은 성인과 법부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진심(眞心)’이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듯이 ‘진심’은 경전마다 다른 용어나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내용에는 전혀 차별이 없다. 그러면 ‘비로법계(毘盧法界)를 깨닫다.’라는 말에서 ‘깨닫다’의 말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수순(隨順)한다’ 또는 ‘하나가 된다’는 뜻이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무심(無心)’해야 한다. ‘무심’해야 ‘일심’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모든 생명체[衆生]가 항상 ‘일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상한 ‘업 현상’에 휘둘리는 이유는 인간 지식의 원초적인 순환 구조에 기인한다. 이런 원초적인 구조를 자각하지 못하고, 또 그런 원초적인 구조에 휘말리는 현상을 ‘무명(無明)’이라 한다. 법성종에서는, 인간들에게 저마다 시간을 한정하지 말고 쉼 없이 무명을 제거할 것을 요구한다. 설사 금생에 안 되면 내생에, 그렇게 하기를 세세생생에 하라는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필자의 다른 논문에서 논증했듯이, 종밀은 ‘돈오점수’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위의 말대로 ‘비로법계(毘盧法界)’를 깨치기만 하면, 그 속에 무수한 지혜와 공덕이 들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무시이래로 윤회하면서 쌓여온 어리석음에 물들어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을 사용할 줄 모른다는 데에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이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저들은 이렇게 답한다. 자기에게 본래 간직되어 있는 ‘비로법계’와 하나가 되어[稱合], 자기 속에 본래부터 바다처럼 무량하게 구비되어 있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라고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보현의 행원을 실천하는가? 정원 법사에 따르면 ‘관행(觀行)’을 하라고 한다. ‘관행’이란 ‘관(觀)을 행하는 수행’을 말하는데, 그 구체적인 조목으로 정원 법사는 ‘제망무진관(帝網無盡觀)’과 ‘무장애법계관(無障碍法界觀)’을 수행법을 제안하고 있다.

첫째, ‘제망무진관(帝網無盡觀)’의 수행 방법으로 정원 법사는 〈보현행원품〉의 열 가지 행원(行願)을 들고 있다. 즉, (1)첫째는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경하라. (2)둘째는 부처님을 찬탄하라. (3)셋째는 부처님께 공양하라. (4)넷째는 자신의 업장 참회하라. (5)다섯째는 남의 공덕을 덩달아 기뻐하라. (6)여섯째는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라. (7)일곱째는 부처님이 오래 계시기를 간청하라. (8)여덟째는 부처님을 기준 삼아 배워라. (9)아홉째는 중생을 섬겨라. (10)열째는 중생에게 되돌려줘라.

이 10종의 행원을 정원 법사는 다섯 영역으로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다섯이란 첫째 예경문(禮敬門), 둘째 공양문(供養門), 셋째 참회문(懺悔門), 넷째 발원문(發願門), 다섯째 지송문(持誦門)이다. 이것이 법성종의 윤리학적 측면이다.

둘째, ‘무장애법계관(無障碍法界觀)’에 대해서 정원 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무장애법계관’이란 이를테면 일체의 염법(染法)과 정법(正法) 자체가 모두 ‘무장애법계’의 마음이라고 묵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능히 관하는 지혜도 역시 모두 법계의 마음이라고 묵상하는 것이다.

‘무장애법계관’을 수행함이란, ‘일심’이 원인이 되어서 관찰하는 주체도 생기고, ‘일심’이 원인이 되어서 관찰되는 대상인 법(法)도 생긴다고, 그렇게 ‘관(觀)’하는 수행이다. ‘의식 주체’는 물론 의식의 재료거리가 되고 있는 ‘법(法)’도 모두가 ‘진심(眞心)’이 운동하는 무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관(觀)’하고, 또 마음속으로 묵상하되 무수하게 많은 3보 앞에 내 한 몸을 무수하게 분신하여 그들 앞에 앞앞이 나아간다고 ‘관(觀)’ 하면서, 그들에게 예배하고 공양 올리고 참회하고 발원하고 명호를 염송하라는 것이다.

이상이 ‘보현행해(普賢行海); 바다처럼 무한한 공덕이 갖추어진 보현보살의 수행’을 실천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자기에게 본래 간직되어 있는 ‘비로법계(毘盧法界)’와 하나가 되어[稱合], 자기 속에 본래부터 바다처럼 무량하게 구비되어 있는 보현보살의 행원을 실천하는 것이다. ■

 

 

신규탁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연세대학교 철학과 졸업. 일본 동경대학 박사학위 취득(화엄사상과 선사상 연구). 주요 논저로 《선학사전》 《벽암록》 《선과 문학》 《화엄과 선》 《한국근현대 불교사상 탐구》 등이 있다. 2013년 불교평론학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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