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불교의 몸, 몸의 불교

―초기불교와 체험주의의 비교를 중심으로

1. 시작하는 말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

지난 2천 년에 걸친 서양철학의 역사에서 이성(reason)은 인간만이 지니는 고유의 특성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대두되기 시작한 몸(body)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그간의 전통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과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성은 더 이상 몸으로부터 독립된 실재로 간주되지 않으며 두뇌, 몸, 그리고 신체적 경험의 본성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성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인간 자신에 관한 이해의 잣대가 달라짐을 의미한다. 몸에 대한 경험적·과학적 연구의 축적은 인간의 합리성이 서구의 철학적 전통에서 주장해 온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몸 담론을 선도하는 체험주의(experientialism)에 따르면 이성은 동물에게도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하는 지각적·근육운동적 추론에 근거한다. 따라서 이성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연속선상에 배치시킨다. 이 점에서 이성은 초월적이거나 선험적이지 않으며 다만 경험적 차원에서 공유되는 능력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모든 인간에게서 정확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존재한다고 주장되어 온 이성이란 상상에 불과하다. 요컨대 데카르트적 이원론에 부합하는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전통적인 이성에 대한 거부는 삶의 불투성에 굴복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는 ‘불가지론’ 혹은 ‘상대주의’라는 낙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한 낙인찍기는 이성 중심의 절대적 사고가 지닌 경직성을 치유하는 데 앞장섰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의 기획은 ‘전체성’ 혹은 ‘보편성’이라는 이념에 가려져 있던 개별자에 대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통 가능한 보편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무력한 모습을 노출한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보여준 그간의 모습은 ‘확실성’ 혹은 ‘객관성’에 대한 추구라는 거부하기 힘든 해묵은 욕구를 새롭게 자극하는 경향마저 없지 않다.

체험주의에 따르면 몸으로부터 분리된 채 마음을 이끌어 가는 순수한 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체험주의가 의존하는 인지과학적 증거들은 마음이 독립적인 실체가 아니라 신체적 활동의 정교한 확장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체험주의는 바로 여기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구분되는 자신만의 분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그것은 경험의 신체적·물리적 층위에서 드러나는 ‘공공성(commonality)’이다. 인간의 경험은 신체적·물리적 층위에서 현저한 공공성을 드러내며, 점차 정신적·추상적 층위로 확장되면서 증가하는 다양한 변이들을 제약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렇게 해서 몸은 객관주의적 열망을 거부하는 동시에 허무주의적 상대주의로의 전락을 막아 주는 장치가 된다.

체험주의의 몸 담론은 고대 인도에서 다양한 사변적 경향들에 맞섰던 붓다의 가르침과 유사하다. 《브라흐마잘라숫따(Br-ahmajālasutta)》에는 객관주의로 분류될 수 있는 여러 부류의 견해들이 등장한다. 영혼의 불멸을 주장하는 상주론(常住論),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소멸하여 없어진다는 단멸론(斷滅論), 조물주에 의해 세상이 창조·유지된다는 일분상주론(一分常住論)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들은 각기 자신이 주장하는 교리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하면서 서로를 논박하였다. 그러나 붓다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지지하거나 혹은 새로운 유형의 절대적 진리를 내세우는 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논변들 이면에서 꿈틀대는 심리적 기제인 탐욕과 집착에 주목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증폭되는 괴로움의 보편적 성격을 밝히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한편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적 태도 역시 붓다 당시의 사상계에 낯설지 않다. 산자야벨랏띠뿟따(Sañjaya-Belaṭṭhiputta)로 대변되는 회의주의(vikkhepika)와 자이나교(Jainism)의 상대주의(Syādvāda)가 그것이다. 그들은 어떤 질문이 주어지면 불확정적이고 애매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하거나 혹은 인식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그들의 입장에는 인식 자체의 불확실성과 논리학에 대한 반성이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는 그들에 대해서도 ‘직접 체험할 수 있는(sandiṭṭhikam)’ ‘수행의 결실(sāmañña-phala)’을 외면한다고 비판한다.

붓다는 영원한 존재와 허무적 비존재, 엄격한 결정론과 혼란스러운 비결정론이라는 관념적 양단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 如如)’의 실재와 마주하라고 가르쳤다. 그는 이것을 통해서만 괴로움의 실존을 규명할 수 있고, 나아가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또한 그렇게 해서 드러나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四聖諦)에 대해 절대적 진리가 아닌 ‘고귀한 진리(聖諦, ariyasacca)’라는 의미심장한 표현을 사용한다. 이 점에서 그는 경험적 사실에 우선성을 부여하면서 객관주의와 상대주의 모두를 거부하는 체험주의와 공통의 입장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필자에게 체험주의는 아직 낯설다. 그러나 현재까지 이해한 내용에 비춰 볼 때 서로의 유사점은 충분한 비교의 가치를 지닌다. 먼저 체험주의의 시각은 붓다의 교설에 내재한 몸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데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변적인 방식으로 그의 가르침을 추종하려는 경향들에 대해서도 적절히 제동을 걸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 글의 논의가 체험주의의 일방적 기여에서 그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붓다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보라고 했으며, 또한 “몸으로(kāyena) 최상의 진리를 실현한다(paramasaccaṁ sacchikaroti)”라고 하였다. 나아가 그렇게 할 때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고양된 마음의 평화를 향유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메시지는 체험주의의 논의가 구체적인 삶의 측면으로까지 확대·적용돼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듯하다.

2. 초기불교에서 몸

몸을 정신 혹은 이성과 구분하는 사고는 서양철학사를 관통하는 주류적 경향이었다. 거기에는 경험적 차원을 넘어선 절대적이고 순수한 정신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순수정신이 주재하는 이데아의 세계라든가, 연장되지 않는 데카르트적 마음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인도철학에서도 흡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자이나교에서 주장한 영혼(jīva)이라든가, 상키야(Sāṇkhya)에서 내세운 순수 정신으로서 뿌루샤(puruṣa), 바라문교에서 언급했던 아뜨만(Atman)이나 브라흐만(Brahman)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비본질적인 육체적 욕망 혹은 감각적 충동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 실재들로 여겨졌다.

각각의 전통들에서는 이러한 초월적 개념을 통해 경험세계의 불확실성에 지배되지 않는 순수한 영적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였다. 이렇듯 정신성에 대한 추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도되었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정신은 몸에 비해 우월하다고 생각되었으며, 정신성을 개발하거나 회복하기 위해서는 몸을 억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인도철학의 무대에서는 고행주의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대부분의 전통들에서 고행(tapas)은 내면의 정화를 위한 실천적 수단으로 권장되었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붓다는 몸과 정신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이 둘 모두가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보았다. 그가 제시한 연기(緣起, paṭiccasamuppāda)의 교리에 따르면 정신[名, nāma]과 물질현상[色, rūpa]은 서로 의존하여 기능하면서, 의식(識, viññāṇa)을 발생시키거나 혹은 눈·귀·코 따위의 여섯 감각 장소(六入, saḷāyatana)를 통해 구체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붓다는 몸에 대한 일방적 억제를 통해 정신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방식의 교설을 펼치지 않았다. 그는 몸과 정신 모두를 인정했으며, 이 둘 다에 대해 집착 없이 살아갈 것을 가르쳤다.

또한 붓다는 경험세계 일반을 물질현상(色)·느낌(受)·지각(想)·지음(行)·의식(識) 따위의 5가지 부류로 갈래짓고서, 이들 오온(五蘊, khandhā)에 대해 무상(無常)·괴로움(苦)·무아(無我)라는 동일한 패턴으로 통찰할 것을 가르쳤다. 즉 ‘물질현상이 아닌 것(非色蘊)들’에 대해서도 물질현상과 똑같이 취급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이것이 물질주의로의 전향을 의미한다거나 고양된 삶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붓다의 가르침은 항상 열반(涅槃, nibbāna)의 경지를 지향하였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동요되지 않는 능력으로서 열반은 붓다에게서 포기될 수 없는 궁극의 가치였다.

몸에 대한 정신의 우월적 지위를 포기하고 나면 ‘몸의 중심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것은 물질현상·느낌·지각·지음·의식이라는 오온의 배열 순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몸에 해당하는 물질현상은 최초로 등장하는 반면에 맨 마지막의 의식은 느낌이나 지각 따위의 정서적 과정을 걸친 연후에 분명해진다. 즉 의식은 단순한 감각적 의식에서부터 물질현상·느낌·지각·지음 따위를 기반으로 성장하고 숙성된 의식으로 나뉜다. 체험주의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인지의 발생적 측면과 연관된 몸의 ‘우선성’으로 설명한다. 정신적 활동은 몸과 몸의 활동으로 형성되는 신체적 층위의 경험으로부터 확장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몸의 우선성은 일체(一切)를 6가지 감관에 배대하여 설명하는 십이처(十二處)의 교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눈(眼)과 시각대상(色), 귀(耳)와 소리(聲), 코(鼻)와 냄새(香), 혀(舌)와 맛(味), 살갗(身)과 감촉(觸) 등은 신체적 경험의 토대이다. 반면에 마음(意)과 마음현상(法)은 이들 다섯 쌍의 토대들에 의해 제공된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바로 이들에 이르러 정서적 상태에 대한 인지에서부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종합적인 인식과 앎이 가능해진다. 붓다는 십이처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앎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붓다의 실천적 교설은 몸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제자들에게 유훈으로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를 닦을 것을 권한다. 사념처는 몸(身, kāya)으로부터 시작하여 느낌(受, vedanā)·마음(心, citta)·법(法, dhamma)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일련의 지속적인 관찰(隨觀, anupassin)을 내용으로 한다. 몸이나 느낌 따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다 보면 마침내 사성제라는 ‘고귀한 진리’를 실현하여 궁극의 완성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사념처 수행의 골자이다.

사념처의 실천이 몸에 대한 관찰(身念處)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몸(身)은 무엇보다도 현실 자체이다. 인간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숨을 쉰다. 숨을 쉰다는 사실은 너무나 당연하여 그것을 의식한다는 자체가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구부리거나 펴거나 걷는 따위의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몸에 대한 관찰은 몸에 수반되는 이러한 현상들과 더불어 ‘지금 여기에’ 머물게 해준다. 물론 이 와중에도 지각(想, saññā)이나 생각(尋, vitakka) 따위는 끊임없이 끼어들곤 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며 다만 알아차려야 할 부차적 현상으로 존재할 뿐이다.

몸에 대한 지속적인 관찰은 불필요한 마음의 방황을 가라앉힌다. 사실 지각이나 생각 혹은 그들에 근거한 갖가지 희론(戱論, papañcā)은 부주의와 일탈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사념처에 숙달하게 되면 그러한 잡생각들에 휩쓸리지 않게 된다. 혹은 느낌(受)이나 마음(心)에 대해서도 동요 없이 관조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으로 믿어왔던 내용들마저 자기 자신을 의미하지 않으며 잠시 스쳐 가는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통찰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몸이나 느낌 혹은 마음에 대한 관찰은 머릿속 관념에 의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수단이 된다. 바로 이것이 앞에서 언급했던 오온에 대한 무상·괴로움·무아로의 통찰의 실제이며, 또한 사념처의 마지막 과정인 법에 대한 관찰(法念處)에 해당한다.

 3. 인식과 희론의 발생

몸은 우리 자신의 일차적인 존재 양식이다. 우리가 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체험주의에서는 바로 이것을 인식의 발생과 세계관의 문제로 끌고 들어간다. 즉 신체적 체험의 문제와 연계하여 인식론과 세계관에 해당하는 제반의 주장들을 검토한다. 이 방법론에 따르면 서양철학을 지배해 온 그간의 사변적 전통은 인지적 조건에 대한 그릇된 가정들에 근거한다. 체험주의가 의존하는 ‘제2세대 인지과학’은 경험적 지식과 상충하는 관념들이 그간의 사변적 전통을 이끌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체험주의의 비판적 시각은 탈신체화된 실재론에 일단의 초점을 모은다. 몸을 도외시한 이론들은 순수정신으로서 주체와 그것에 의해 인식되는 대상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존재론적 간격을 조장해 왔다. 일단 주체와 대상의 분리가 일어나면 ‘객관성’이 ‘사물 그 자체’에 의해 확보된다거나 혹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상호 주관적 의식구조’에 의해 주어진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러나 ‘사물 그 자체’로 존재하면서 서술화와 범주화를 포함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편 상호 주관성이 사회적·공동체적 합의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러한 상호 주관성은 이 세계와의 접촉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 된다.

체험주의의 독특한 시각은 인식의 확실성 문제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체험주의는 인지적 무의식이 사고와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이 옳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사고와 행위에 대해서마저 확실한 지식에 이를 수 없다. 생각이나 행동이 무의식에 지배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타인의 사고와 행위에 대해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은 더욱 분명하다. 결국 사변적 방식으로 인식의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 자체가 인지적으로 그릇된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체험주의에서는 확실성의 탐구로 특징지어지는 인식론적 기획이 적어도 인지적으로는 무망한 기획이라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철학적 이론의 본성에 관한 체험주의 자체의 입장은 어떠한가.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추상적 층위에서 구성되는 개념이나 이론은 본성상 결코 객관적이거나 절대적일 수 없다. 지적 영역에서든 도덕적 영역에서든 ‘절대성’을 자임하는 모든 이론적 개념들은 그 자체로 허구다. 초월적이든 선험적이든 해체론적이든 모든 철학 이론은 은유적 경로를 따라 구성되며, 그 은유적 체계 안에서만 각자의 정합성을 유지한다.

체험주의는 철학적 개념들이 구체화하는 과정을 소위 ‘개념적 은유 이론’으로 설명한다. 신체적 활동을 통해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영상도식(image schema)은 은유적 사상(mapping)을 통해 추상적 층위의 경험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진리·이성·주체·자유 따위의 개념들은 물론 시대별로 나타난 갖가지 철학적 이론들은 몇몇 중심적인 은유와 상식적인 통속 이론으로부터 구체화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이론 체계들에 대해서는 은유와 통속 이론의 분석을 통한 해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체험주의는 서양철학사 전체를 자신들의 입장에서 새롭게 서술해 들어간다.

체험주의가 제2세대 인지과학의 성과에 힘입은 것이라면 초기불교는 사념처에 의해 지지된다. 이 점에서 서로는 완전히 다른 배경을 지닌다. 그럼에도 이 둘은 다른 이론 체계들을 대하는 태도와 문제의식에서 놀랄만한 유사성을 보인다. 예컨대 앞서 언급했던 《브라흐마잘라숫따》는 당시의 62가지 사변적 견해들을 일괄적으로 검토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이론가들은 스스로의 개념적 틀 안에서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추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붓다는 믿음(saddhā), 기호(ruci), 전승(anussava), 이미지의 숙고(ākāra-parivitakka), 견해에서 오는 기쁨(diṭṭhi-nijjhānakkhanti) 따위로 인해 사물에 대한 견해와 서술이 구조적으로 왜곡된다고 보았다.

붓다는 당시의 주변 사상가들이 바로 이 점을 간과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그들과 달리 인식이 성립하는 과정 자체에 관심을 기울였다. 《마두삔디까숫따(Madhupiṇḍikasutta)》에 나타나는 다음의 내용은 그러한 반성적 성찰의 귀결이다. 

벗이여, 눈(眼)과 시각대상(色)을 조건으로 눈의 의식(眼識)이 발생한다. 셋의 부딪힘이 접촉(觸)이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受)이 있다. 느끼는 그것을 그는 지각한다(想). 지각하는 그것을 그는 생각한다(尋). 생각하는 그것을 그는 희론한다(戱論). 희론하는 까닭에 그 사람에게 희론에 [오염된] 지각(想)과 관념이 생겨나고, [또한] 과거·미래·현재에 걸쳐 눈으로 인식되는 시각대상에 대해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생겨난다.] [귀(耳)·코(鼻)·혀(舌)·살갗(身)·마음(意) 등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앞서 몸의 우선성과 관련하여 언급했듯이 일체는 십이처(十二處)로부터 비롯된다. 거기에 각각의 감관에 대응하는 6가지 감각적 의식(識, viññāṇa)이 수반됨으로써 접촉(觸, phassa)이 발생하는 여건이 마련된다. 이렇게 해서 사변적 견해 일반을 가리키는 희론(戱論, papañcā) 구체화의 프로세스가 전개된다. 즉 접촉으로부터 느낌(受, vedanā)이, 느낌으로부터 지각(想, saññā)이, 지각으로부터 생각(尋, vitakka)이, 생각으로부터 희론이 발생한다. 또한 그렇게 형성된 희론은 다시 새로운 지각과 관념으로 순환하면서 확산된다.

위의 인용문에는 체험주의의 메타철학적 관점에 상응하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감관(根)과 대상(境)과 의식(識)의 부딪힘(saṅgati)으로 인해 접촉이 발생하고 그것에 뒤이어 느낌이 생겨난다. 바로 이 단계까지는 인칭적 서술이 등장하지 않으며, 단순히 그러한 과정이 존재하는 것으로만 기술된다. 그러나 지각의 단계에서부터는 문장의 형식이 달라져 “느끼는 그것을 그는 지각한다(yaṃ vedeti taṃ sañjānāti).”라는 방식으로 3인칭 동사가 사용된다. 이것은 느낌이 생겨날 때까지는 비인칭적 인식이 진행되지만 이후 지각이나 생각 혹은 희론의 단계에서는 인칭적·구성적 인식이 이루어짐을 나타낸다.

지각이란 느낌을 통해 전달된 대상의 특징을 붙잡거나 떠올리는 작용에 해당한다. 이 과정을 통해 특정한 대상에 대한 이미지를 고착화하게 된다. 한편 생각이란 이렇게 해서 지각된 내용을 언어화하는 작용에 해당한다. 이것의 원어인 위딱까(vitakka)는 추리라든가 추론 따위를 통칭하는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에 이르러 언어적·개념적 사고가 본격적으로 가동하게 된다. 마지막의 희론은 개념적 사고를 바탕으로 한 일체의 사변적 견해(diṭṭhi)를 망라한다. 여기에는 “나는 존재한다(asmīti)”는 따위의 단순한 진술에서부터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따위의 형이상학적 담론들이 포함된다.

희론과 더불어 인식은 최종 단계에 도달한다. 그런데 이것은 일회적인 발생에서 그치지 않으며 다시 지각으로 거슬러 올라가 확대·재생산될 수 있다. 예컨대 과거에 경험했거나 미래에 예상되는 무엇을 떠올리는 경우가 그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자신과 연관된 주변 사람들의 경험도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직·간접적인 경험을 떠올리는 순간 유쾌하거나 씁쓸한 감정들이 새롭게 유발되곤 한다. 바로 그때 앞서 언급했던 믿음이라든가 기호, 전승, 이미지의 숙고, 견해에서 오는 기쁨 따위의 변수가 개입된다. 이러한 과정을 걸치면서 최초의 감각적 지각에 의한 원래의 이미지에 새로운 이미지들이 덧씌워진다. 이것이 순환되면서 마음속 이미지는 채색과 변형을 거듭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구체화된 희론이란 몸에 의한 체험적 현실로부터 유리된 것이다. 이것은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며, 그에 따른 의견의 충돌이나 논쟁 따위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붓다는 희론이야말로 괴로움에 빠져들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언급한다. 또한 이것 때문에 탐냄·성냄·의혹·자만 등의 잠재적 성향이 더욱 왕성해지고, 언쟁·싸움·이간·거짓 따위와 함께 ‘몽둥이를 잡는 것’ ‘칼을 드는 것’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희론에 대해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음으로써 대처하였다. 이러한 대처법을 일컬어 무기(無記, avyākata)라고 한다. 붓다는 무기라는 수동적 대처법과 함께 앞서의 사념처라는 적극적 방안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희론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도록 이끌었다.

그런데 《마두삔디까숫따》는 희론이 구체화되는 과정 자체에만 초점을 모은다. 즉 물질현상(色)이라든가 감관(境) 혹은 의식(識) 등은 당면한 현실로 긍정하고서, 그들로부터 일체의 논의를 출발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는 그러한 현실들 자체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 않는다. 또한 이와 같은 부류의 의문들에 대해서는 체험주의에서도 적극적인 해답을 내놓기 곤란해 보인다. 그러한 해명의 시도가 자칫 스스로 비판했던 사변철학으로 회귀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붓다는 다른 경전들을 통해 이 부분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제시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초기불교와 체험주의는 완연히 달라진다.

붓다는 괴로움의 실존이 구체화되는 과정을 12단계로 설명하는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을 제시한다. 거기에 따르면 정신·물질현상(名色)과 의식(識)의 근저에는 지음(行, saṅkkhrā)이라는 조건이 작용한다. 지음이란 몸(身)과 입(口)과 마음(意)으로 짓는 육체적·정신적 행위를 뜻하는 동시에 그 결과로 고착화된 습관적 성향들까지를 포함한다. 또한 지음 너머에는 사성제의 고귀한 진리를 망각한 상태인 무명(無明, avijjā)이 자리해 있으면서 지음을 제약하는 역할을 맡는다. 지음은 업(業, kamma)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또한 업은 윤회(輪廻, saṁsāra)의 관념으로 확대된다. 경험적 현실로서 몸은 이러한 조건들의 총화로서 드러난 결과에 해당한다.

지음과 무명은 신체적 활동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역에 속하며, 업과 윤회 또한 경험적으로 입증되기 어려운 개념들이다. 붓다는 깨달음의 지혜로써 이들을 포섭하는 십이연기의 이치를 반조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이들의 특수성은 체험주의적 담론의 범위를 넘어서지만 이제까지의 논의에 대해 새로운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현재적으로 체험되는 생생한 몸마저도 습관적 성향이라든가 업 혹은 무명 따위에 지배된 것일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몸의 중심성’이라는 원래의 논제가 불가피하게 흔들리는 문제점이 노출된다. 또한 이와 관련해서는 단순한 물리적 유기체로서 몸만이 아닌 문화적 구성물로서 몸까지도 인정하려는 체험주의 자체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4. 괴로움의 보편성과 열반

체험주의의 시각에 따르면 절대주의가 추구해 왔던 ‘도덕적 객관성’은 경험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열망의 산물에 불과하다. 절대주의 도덕 이론에서 핵심적인 과제는 최고선의 근거를 밝히는 일이었으며, 그것은 경험적 영역을 넘어서야만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절대주의 도덕 이론은 초월이나 선험에 의지하는 사변의 길을 걷게 되었고, 그들이 도달한 최고선은 현실에서 획득 가능한 것이 아닌 피안(彼岸)의 영역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통해 드러났듯이 최고선은 단일한 방식으로 표현되지 않았으며, 이와 관련된 대부분의 주장은 서로 충돌하는 양상을 보여 왔다.

체험주의 담론의 외연 확장을 선도하고 있는 노양진은 이러한 문제점에 착안하여 도덕적인 것의 본성을 규명해 들어간다. 그에 따르면 전통적인 절대주의적 윤리학은 ‘좋은 것’을 통해 규범적 강제성의 근거를 확립하려는 시도에서부터 그 실패가 예고된 것이었다. 그는 절대주의적 윤리학이 야기하는 폐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더 나쁜 것은 최고선을 앞세운 도덕 이론들이 인간을 도덕적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특정한 권력을 옹호함으로써 인간을 억압하고 소외시키는 도구로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단지 시대적 우연이 아니라 경험적 세계를 넘어서려는 사변적 이론이 본성적으로 안고 있는 위험성이다. 사변적 이론이 도달한 최고선은 ‘우리의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실제 세계에 대한 해명을 자처하고 나설 때 그에 부합하지 않는 실제 세계의 일부는 억압되거나 소외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성은 ‘나쁜 것의 윤리학’으로 관심의 방향을 돌리도록 만든다. 사실 초월적 사변의 길을 포기하게 되면 당면한 현실만이 남게 되고, 현실에서 마주하는 괴로움에 자연스레 눈뜰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도덕적 탐구의 키워드는 ‘좋은 것’이 아닌 ‘나쁜 것’이어야 하고, ‘나쁜 것’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야말로 도덕의 온당한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타인에 대한 해악’은 도덕적 규범이 강제성을 띨 수 있는 근거가 되며, ‘나쁜 것의 윤리학’이 포기할 수 없는 마지노선에 해당한다. 또한 바로 이것은 사변적인 방식으로 논증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몸을 가진 유기체로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의 공공성’의 문제이다.

이러한 양상은 사변적 견해들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던 붓다의 실천적 교설에서도 두드러진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는 머릿속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현실을 희생시키는 방식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당면한 현실로서 마주하는 괴로움으로부터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그가 제시하는 사성제는 ‘괴로움이라는 거룩한 진리’ 즉 고성제(苦聖諦)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누각의 아래층을 짓지 않고서 위층을 짓겠노라.”라고 한다면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그러하듯이 비구들이여, “나는 고성제를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집성제를, 멸성제를, 도성제를 있는 그대로 여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괴로움을 바르게 종식시키겠노라.”라고 한다면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붓다는 이 사성제를 사념처의 실천에 연계시킨다. 사념처의 기제가 되는 마음 지킴(念, sati)과 알아차림(知, sampajañña)은 ‘지금’ ‘이 순간’의 몸·느낌·마음 등을 겨냥한다. 이들은 현재의 상태에 깨어 있는 태도를 확립시켜 스스로가 괴로움에 노출된 존재라는 자각을 유도한다. 또한 괴로움(苦聖諦)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전제될 때 괴로움의 원인(集聖諦)이 규명될 수 있고, 괴로움이 제거된 상태(滅聖諦)에 대한 전망과 함께, 괴로움을 제거하기 위한 실천(道聖諦)이 완성된다는 것을 일깨운다.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은 사성제를 사념처의 마지막 과정인 법념처(法念處)에 포함시킨다.

붓다는 상대방의 됨됨이에 따라 가르침을 펼쳤다. 바로 이것을 대기설법(對機說法) 혹은 임기응변(臨機應變)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설 방식은 자신의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기에 바빴던 주변의 다른 사상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었다. 또한 붓다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지라도 깨달음에 이르는 데 보탬이 되지 않는 내용은 가르치지 않았다고 밝힌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의 생각과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당면한 현실에서 마주하는 타인의 괴로움에 눈 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붓다는 ‘좋은 것’의 윤리학에 집착하지 않았다.

또한 붓다는 사성제의 보편적 성격을 묘사하면서 ‘경험의 공공성’을 떠오르게 하는 다음의 흥미로운 내용을 전한다.

비구들이여, 과거세에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깨달아 드러낸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깨달아 드러냈다. 비구들이여, 미래세에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깨달아 드러내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깨달아 드러낸다. 비구들이여, 현재세에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깨달아 드러내는 사문이나 바라문들은 모두 사성제를 있는 그대로 완전하게 깨달아 드러낸다. 사[성제]란 무엇인가? 고성제, 고집성제, 고멸성제, 고멸도성제이다.

《상적유경(象跡喩經, Mahāhatthipadopama-Sutta)》에 제시되듯이 붓다의 모든 가르침은 사성제로 집약될 수 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세상은 영원한가? 그렇지 않은가?” 혹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그렇지 않은가?” 혹은 “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은가?” 따위의 형이상학적 의혹을 내려놓으라고 강조한다. 더불어 사성제의 실현만이 괴로움을 완전히 제거해 줄 수 있고, 또한 청정한 생활의 근본이 되며, 완전한 깨달음(正覺, sambodhi)과 열반으로 이끌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붓다는 초월이나 선험에 의지한 사변가가 아닌, 현실의 괴로움을 직시했던 실천가로서 면모를 보인다.

‘나쁜 것의 윤리학’은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열반의 이해 문제와 관련하여 더욱 참고할 만하다. 열반이란 궁극의 목표로서 사성제에 배대하자면 멸성제(滅聖諦)에 해당한다. 예컨대 사성제를 설명하는 경전들에서 멸성제는 “갈애의 남김 없는 소멸, 포기, 버림”이라는 방식으로 기술된다. 또한 열반에 대한 간략한 묘사로서 “갈애의 소멸이 열반이다”라든가, “갈애를 버리는 것이 열반이다”라는 등의 경구를 찾을 수 있다. 이들을 통해 멸성제와 열반은 동일한 의미이며, 또한 이 둘 모두 ‘갈애’라는 ‘나쁜 것’의 부정으로 묘사됨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열반은 절대주의적 최고선의 형식이 아닌 ‘나쁜 것의 윤리학’에서 묘사되는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드문 경우이지만 열반은 행복하고 신비로운 초월적 상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예컨대 “열반에 대해 행복이라고 관찰하면서 머문다.”라는 경구가 그것이다. 따라서 불교 전공자들 간에도 ‘행복한 상태로서 열반(Nirvāṇa as a happy state)’과 ‘부정적 개념으로서 열반(Nirvāṇa as a negative conception)’이라는 상반된 이해가 존재한다. 그러나 열반에 대해 축복이 넘치는 초월적 세계라는 관념을 갖게 되는 순간 앞서 언급했던 절대주의적 최고선의 부작용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이해는 자칫 열반의 경지를 특정한 상태에 한정시키고, 거기에 속하지 않은 다른 상태를 억압하거나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열반이란 현실 감각이 마비된 몽환의 상태가 아니어야 한다.

초기불교 경전에서 가장 포괄적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열반에 대한 정의는 다음일 것이다. 즉 “열반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탐냄의 소멸, 성냄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바로 그것이 열반이다.”라는 경문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은 열반이라는 것이 ‘나쁜 것의 윤리학’에서 마지노선으로 내세우는 ‘타인에 대한 해악’과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탐냄이라든가 성냄 따위는 내면적인 상태에 해당하지만, 반드시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부각되는 특징을 지닌다. 즉 혼자서 살아간다면 탐냄이라든가 성냄 따위가 문제시될 이유가 없다. 또한 모든 유형의 ‘타인에 대한 해악’에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전제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관념적인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은 일상적인 삶의 와중에 포착할 수 있는 내면의 상태이다. 특히 사념처의 세 번째 과정인 마음에 대한 관찰(心念處)에서는 바로 이들을 마음 지킴(念)과 알아차림(知)의 대상으로 삼는다. 예컨대 자신에게서 탐냄이 감지되면 ‘탐냄이 있는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고, 성냄이 감지되면 ‘성냄이 있는 마음이다.’라고 알아차리며, 어리석음이 감지되면 ‘어리석음이 있는 마음이다.’라는 방식으로 알아차리라고 가르친다. 지속적인 알아차림은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무상함(無常, anicca)과 실체 없음(無我, anatta)을 체득하게 하여 그들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념처는 ‘타인에 대한 해악’의 근원을 차단한다.

붓다는 “욕심 따위는 몸이나 말로써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혜로써 관찰하여 버려야만 한다.”라고 하였고, 또한 “지혜로써 바르게 닦인 마음은 모든 번뇌로부터 바르게 해탈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있는 그대로(yathabhūtaṁ)의 몸과 마음을 통찰하게 함으로써 탐냄도 성냄도 불필요하다는 사실을 체득하도록 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사념처는 이러한 과정을 체계화한 종합적인 실천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념처를 통해 도달하게 되는 궁극의 경지로서 열반이란 ‘나쁜 것’에 대해 동요 없이 살아가게 하는 통찰의 능력에 다름 아닌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5. 마치는 말

초기불교와 체험주의는 다르다. 전자는 사념처로 대표되는 명상(meditation)의 실천을 통해 사성제를 실현해 나가는 방식으로 괴로움을 다스리는 방안을 제시한다. 한편 후자는 최근의 철학적 흐름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간의 서양철학을 주도해 왔던 객관주의에 대한 반성에 초점을 모은다. ‘제2세대 인지과학’은 객관성에 대한 기존의 믿음이 인지의 본성에 대한 그릇된 가정에서 출발한다는 후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당연히 서로의 목적은 다를 수밖에 없다. 초기불교에서는 통찰의 능력을 배양함으로써 부정적 정서들에 휩쓸리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기술을 일깨운다. 한편 체험주의는 객관주의를 거부하면서도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는 제3의 철학적 방안을 모색하는 데 주력한다.

그러나 이 둘은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다. 서로는 몸의 현실에 우선성을 부여하면서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라는 양단을 거부한다. 즉 몸/마음이라는 이원론을 부정하고서 신체적 경험으로부터 마음이 구체화된다는 입장을 공유한다. 특히 체험주의에서는 인지적 무의식이 사고와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한편 초기불교에서는 지각의 확대·재생산 과정에서 개입되는 기호, 전승, 이미지의 숙고 따위의 변수를 지적한다. 이들은 유사하면서도 이질적인 방식으로 몸의 차원으로부터 인식과 경험이 구체화하고 또한 왜곡되어 나가는 메커니즘을 제시한다. 나아가 초월이나 선험에 의지하는 절대주의적 도덕 이론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닮아 있다.

체험주의와의 비교는 초기불교의 이해에 경각심을 높인다. 일부 연구자들은 초기불교를 몸을 부정하고 마음만을 중요시하는 가르침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붓다는 몸과 마음 모두가 중요하며, 둘 모두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편 또 다른 연구자들은 초기불교의 교리 체계를 새로운 유형의 형이상학적 기획으로 간주한다. 여기에 대해서도 붓다의 독창적인 업적은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 즉 형이상학적 기획에 대한 반성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사실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또한 궁극의 목적인 열반을 초월의 영역에 배대하고서 절대주의적 최고선의 형태로 이해하려는 일부의 시각도 존재한다. 이들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빈도로 등장하는 사성제의 순서와 열반에 관한 부정적 표현들을 사례로 논박할 수 있다.

필자는 체험주의와의 비교를 진행하면서 이러한 시각을 더욱 분명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점에서 체험주의는 초기불교 자체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강화하는 데 보탬이 된 셈이다. 초기불교와 체험주의의 유사성은 우연의 소산이 아닐 것이다. 붓다는 생생한 삶의 현실로부터 일체의 논의를 출발했고, 경험적으로 접근 가능한 범위 안에서 다양한 방편(方便, upāya)을 펼쳤다. 필자는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체험주의가 표방하는 ‘경험적으로 책임 있는 철학(empirically responsible philosophy)’의 정신과 통해 있으며, 또한 여기에 서로에게서 발견되는 유사성의 근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체험주의에서는 종래의 철학적 전통에 대한 스스로의 지적 도전을 ‘인지적 전환(Cognitive Turn)’으로 부르며, 이것이야말로 철학사에 기록될 결정적인 전환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2,50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지닌 초기불교는 그러한 시도가 새로운 것만은 아닐 수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분별력 있는 사람들에게 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인식되고 있다. 붓다는 그러한 분별력을 체험적 삶 자체로부터 끌어내고서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행적은 시대를 가로질러 오늘날의 체험주의 지지자들에게 스스로의 몸에 대해서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한다고 타이르는 듯하다. 이러한 메시지는 인지과학으로 무장한 체험주의가 새로운 유형의 희론으로 흐를 가능성을 적절히 제어해 줄 수 있을 것이다. ■

 

임승택 / 경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박사학위 논문은 〈Paṭisambhidāmagga(無碍解道)의 수행관 연구〉. 주요 저술로 《초기불교, 94가지 주제로 풀다》 《붓다와 명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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