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신문〉의 티벳 오보에 대한 소고

지난 8월 25일부터 사흘간 티벳 망명 정부가 위치한 북인도 다람살라의 남겔 사원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한국인 법회’가 열렸다. 4천5백여 명 정도의 대중이 모였고 직접 달라이 라마를 보며 법문을 들을 수 있는 법당 안에는 3백여 명의 한국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필자 또한 그 속에 끼어 있었다. 해마다 한두 번씩 학회나 법문 자리에서 달라이 라마를 뵙던 처지라 굳이 참석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누군가 〈한겨레신문〉의 달라이 라마 폄하 발언에 대한 체계적인 비판을 가할 필요가 있다는 게 이번 법회의 참석 배경이었다.
그 이전 7월 12일과 26일 자 〈한겨레신문〉에는 달라이 라마를 포함한 티벳의 근현대사를 다루며 미국 CIA의 영향력을 강조한 기사들이 실렸다. 정문태 ‘국제분쟁 전문기자’의 ‘환상을 먹고 자란 세계 평화의 우상’과 ‘CIA의 비밀 작전’이 그것들로, 티벳 인권 활동가들을 비롯해 티벳불교에 관심 있는 이들 사이에서 여러 말이 오갔고 이미 이 기사들에 대한 반박과 정정 보도 등이 끝난 뒤였다.
막상 그 일이 터졌을 때 필자는, 지난 20년 인도 생활을 마감한다는 의미에서 기획한 실크로드 주 노선인 중앙아시아 답사를 다니던 중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실천불교 쪽 활동가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던 중, 지난해 말까지 ‘타고르 대학’으로 알려진 비스바 바라띠의 인도-티벳학과에 재직하며 ‘티벳 문화와 역사(Tibetan History and Culture)’라는 과목도 가르쳤던 까닭에 전체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반박하는 일을 떠안게 되어 귀국하자마자 인도로 날아갔던 것이다.
이미 ‘철 지난 기사에 대한 구체적인 반박이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당시 그 반론을 담당했던 실천불교 활동가들이 놓쳤던 점과 한국 티벳학(Tibetan Studies)을 약간이나마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이 글을 쓴다.


오리엔탈리즘의 상징 ‘제3의 눈(The Third Eye)’

보통 사람들에게 티베트가 알려지기 시작한 건 신비주의 상술에 힘입은 바 크다. 1933년 제임스 힐턴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이상향 ‘샹그릴라’(이하 본문 필자 강조)가 티베트에 있다는 소문이 나돌면서부터다.

1편 ‘환상을 먹고 자란 세계 평화의 우상’의 본문 가운데 나오는 이 대목에서 ‘상술’이라는 표현을 빼고 싶은 것은 서구에 티벳이 알려지는 과정이 그렇게 흘러왔기 때문이다.

여기다 기독교 교조주의 문화에 회의를 느낀 서양인들 사이에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즘이 되살아나면서 티베트 불교 바람이 불었다. 사람들은 달라이 라마라는 상징을 앞세워 정치·경제·문화를 비롯한 사회 전 부분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며 절대적 신정 봉건체제를 구축해온 티베트 불교의 본질은 무시한 채 밀교적 신비주의에 빠져들었다.

‘되살아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랬던 게 티벳학의 역사다. 항상 강조하는 바이지만 제대로 된 티벳학을 하기 위해서는 이 오리엔탈리즘의 편향과 역편향을 먼저 생각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기독교 교조주의 문화에 회의를 느낀 서양인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우월성을 통해서 다른 문화를 폄하하며 그 속에서 신비주의에 강조의 방점을 찍는 것 때문이다.(이성·문화의 부재가 그 이면의 모습이므로 ‘이성적·문화적인’ 그들의 침략과 점령, 교화는 당연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티벳학의 첫 단추는 이런 식으로 끼워졌다.
맨 처음 티벳학이 시작된 것은 19세기 초반으로 그때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인도를 영국이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그리고 그때 서구에 알려진 것은 티벳 본토 게룩빠의 불교가 아니라 인도령 티벳 지역, 즉 히말라야 남면에 근거를 둔 종파들인 닝마빠와 까귀빠의 불교였다. 이 두 종파는 밀교 수행에 강조의 방점을 찍는데 바로 이것이 서구에 처음부터 알려졌다. 티벳인들 가운데 90% 정도를 차지하는 티벳 본토의 최대 종파인 게룩빠는 보리도차제(菩提道次第, 점수사상)에 근거를 둔 수행을 강조하고 있으나 이것은 1959년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즉 1970년대나 돼서야 본격적으로 알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티베트는 대대로 신정통치를 해온 달라이 라마들이 쇄국정책을 편데다 히말라야, 카라코람, 쿤룬 산맥에 둘러싸인 지리적 환경이 이방인의 접근을 차단해 오랫동안 세상 밖의 세상으로 존재했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으로 불린 영국과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충돌을 통해 티베트라는 이름이 국제 정치판에 올랐다. 20세기 들어 영국이 군사·외교적으론 티베트를 독점했지만 그 땅은 여전히 접근하기 힘든 사각지대로 남아 있었다.
지형적인 특징만 보았을 때, 티벳−중원은 평균 해발 4천5백 미터인 서티벳부터 시작되어 오늘날 중국의 칭하이성(靑海省), 즉 북티벳 ‘암도(Am do)’ 지역을 지나 내몽고, 황하 지역을 거쳐 황해까지 점차 내려오는 계단식 형태를 띠고 있다. 이처럼 ‘말 타고 내려와 쑥대밭으로 만들기 좋은 구조’ 때문에 전전기, 즉 초기 티벳 역사는 중원 침략사(侵掠史)이고, 후전기는 이 침략에서 벗어나기 위한 중원의 여러 왕조의 방어사(防禦史)로도 볼 수 있는 등 티벳과 중국은 정치적·문화적으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일단 위의 ‘샹그릴라, 오리엔탈리즘,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티벳이 어떻게 서구에 알려졌는지 살펴보자.

오래전부터 티베트인의 마음속에는 샴발라(香巴拉)라는 이상향이 있었다. 샴발라는 티베트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인간 정토(淨土)였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황량한 사막과 험준한 산맥을 넘고 넓고 거친 강물을 건너야 할 뿐만 아니라, 호법신들의 도움을 받아 연도의 악마를 굴복시켜야 하기 때문에, 정신을 수련하고 몸과 마음을 정화시켜야 한다. 아름다운 공원과 성곽이 중첩된 설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곳은 활짝 핀 연꽃잎처럼 8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그곳에는 각종 음식과 금은보화가 풍요롭게 가득 차 있고, 그곳 주민들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지혜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티베트 불교의 최고 불법인 시륜금강법(時輪金剛法, 까라짜끄라 바지라다르마라는 뜻)을 수행한다. 샴발라 왕국 가운데에는 국왕의 궁전이 있는데……,
 
티벳인들의 ‘(서방) 정토’인 샴발라는 ‘샹그릴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제임스 힐턴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이라는 중편 소설에 나오는 이 ‘샹그릴라’를 유명하게 해준 이는 다름 아닌 제2차 대전 중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었다. 그때도 오리엔탈리즘의 편향 속에서 서구에 알려진 티벳은 설산 깊숙이 숨어 있는 잃어버린 낙원, 이상향, 파라다이스, 에덴동산 등의 이미지였다.
비록 동아시아의 한반도 남쪽에 산다지만 서구의 영향이 극대화된 현대에 사는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할 바는 우리 안에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이다. 재미난 것은 정문태 기자의 메인타이틀인 ‘제3의 눈’이 바로 이 오리엔탈리즘의 상징과도 같다는 점이다. 아마도 타자를 객관적으로 살펴보기 위한 ‘제3의 관점(The third view)’을 유념하면서 쓴 듯한데, 《제3의 눈(The Third Eye)》과의 이미지 교차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이 내재화된 오리엔탈리즘이다.
1956년에 티벳 신비주의에 빠진 한 영국의 사기꾼(그는 티벳을 다녀왔다고 우겼다!)이 롭쌍 람빠(Lobsang Rampa)라는 필명으로 쓴 이 ‘체험담’이 아직까지도 외국인 여행자들이 자주 가는 인도나 네팔의 서점에 번듯이 전시되어 있으니 어지간한 성공을 이룬 셈이다.
마지막 키워드인 ‘그레이트 게임’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인도를 둘러싼 당대의 서구 열강을 상징하던 영국과 러시아의 ‘세계 지배를 위한 각축전’을 뜻한다. 영국과 러시아가 대표 주자였던 제1라운드는 1917년 러시아의 붉은 혁명으로 막을 내렸고, 제2라운드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미국으로 짜인 냉전 시대로 소연방 붕괴 이후 막을 내렸다.
1784년에 설립된 인도 ‘콜카타 아시아틱 소사이어티(Calcutta Asiatic Society)’는 당시 인도의 종교, 언어, 철학 등을 포함한 인도학과 그 접경 지역 연구를 위한 근거지였다. 바로 여기서 남하하는 러시아를 차단하기 위해서 히말라야 산악 지역에 거주하는 티벳인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체계적인 티벳학의 첫 단추였다. 그때 등장한 인물은 헝가리의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 위대한 티벳학자인 쾨로스(Alexander Csoma de Kőrös, 1784?~1842)이다. ‘현대 티벳학의 아버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그는 당시 대영제국의 지원을 받은 선교사들이 주장했던 티벳어에는 알파벳 구조가 없다는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혀냈다. 티벳어는 기본적으로 산스끄리뜨어의 50자를 줄인 30자를 기본으로 한 표음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지도상에 티벳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르던 시절, 러시아 남하 저지에 사활을 걸던 영국 측에서는 인도 북부의 데라둔에서 인도인들을 교육시켜 티벳으로 들여보내 ‘도대체 어디에 뭐가 붙어 있는지’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온도계로 고도를, 별자리로 경·위도를, 그리고 보폭으로 거리를 측정하여 마침내 티벳의 수도 라싸의 위치를 알게 되었는데 오늘날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한다. 티벳으로 들어가기 위한 탐험가들의 피가 끓었던 ‘그레이트 게임’이 한창이던 시절, 티벳을 다녀오며 ‘러시아제 소총이 라싸에 돌아다닌다’는 에카이 가와구치(1866~1945)의 그릇된 정보에 기초하여 영국은 1903~4년 서둘러 라싸를 침공하게 된다. ‘쌍무협정’이라는 그럴듯한 구실을 내세웠지만 러시아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선빵’이었다.
이와 같은 ‘침략’과 불평등 조약을 일삼았던 영국이었기에 이후 티벳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이 ‘그레이트 게임’ 제2라운드의 대표주자인 미국이었다. 정문태 기자는 티벳−미국과의 긴밀한 역사적 관계를, 그리고 미국 정보부의 활약 속의 티벳 역사를 언급하며 ‘미제의 도움을 받은 티벳 지도부를 비판하는 반제국주의’ 기조를 유지하고자 했을지라도, 사실 이 제2라운드의 티벳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중국군의 티벳 침공과 이후 연이은 대약진과 문화혁명의 폐해였다. 즉 ‘CIA의 비밀작전, 상처는 컸다’가 아니라 ‘중국의 티벳 침공, 상처는 컸다’였다. 

1959년 중국의 소위 인민해방군이 대대적으로 침공해서 달라이 라마가 티벳을 떠날 때, 당시 있었던 6,259개의 사찰 중 겨우 8개만 남고 모두 폐허가 되었으며, 많은 절이 도살장, 돼지우리, 감옥, 창고 등으로 바뀌었고, 59만 승려 중 11만 명이 박해로 죽고 25만 명은 강제 환속되었다고 합니다. 6백만 티벳인 중 1949년부터 1979년까지 30여 간 박해와 총격으로 죽은 티벳인이 86만 4천 명, 기아로 34만 2천 명이 죽었는데 티벳인 6명 중 1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문혁 시기에만 25만여 명에 달했던 승려는 강제 환속되거나 숙청을 당해 3,500명 정도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한규 《티베트와 중국》 p.379 ; 김윤태 〈중국 티벳 민족주의 발전의 본질〉 《중국학연구》 2004, p.58.

그는 숲을 보고자 했으나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를 보자고 했으나 나무를 보지 못한 셈이다.


티벳 문화의 근간인 달라이 라마와 린뽀체 제도에 대한
오해와 이해

샹그릴라, 오리엔탈리즘 그리고 그레이트 게임이라는 같은 개념자들을 사용했음에도 정문태 기자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티벳에 대한 이해의 깊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부터 달라이 라마를 비판하고자 하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이유는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던 경우’의 경험 때문인 듯하다.

하물며 온갖 비판이 날을 세우는 외신판에서조차 달라이 라마를 좀 삐딱하게 들먹거리기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중국 정부 시각’이란 비아냥거림이 따라붙는 통에 상당한 용기가 필요할 정도다. 내 경험엔 1998년 달라이 라마가 애플 컴퓨터 광고에 등장한 걸 놓고 외신기자들과 논쟁을 벌이다 멱살잡이 직전까지 갔던 경우도 있다.

그래도 지켜야 할 금도라는 게 있다. 바로 이 앞의 문단이다.

그이가 구치 신발을 즐겨 신는다거나 루스벨트 대통령이 준 황금 롤렉스 시계를 찬다거나 스키를 탄다거나 할리우드 스타들과 논다거나 고기를 먹는다거나 따위를 놓고 알음알음 못마땅히 여긴 이들이야 있겠지만 그이의 정치나 종교를 대놓고 나무란 경우는 흔치 않았다.

언제부터 〈한겨레신문〉에서 종교지도자를 ‘그이’라 불렀는지, 아니 제3자를 지칭할 때 이 표현을 썼는지 모르겠다. 이 표현은 기자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한겨레신문〉 편집국의 ‘편집지침’마저 의심이 되는 대목이다. ‘알음알음 못마땅히 여긴 이들’ 가운데 한 명인 그를 비롯해서 〈한겨레신문〉에서는 정정 보도를 통해 ‘달라이 라마의 사생활을 언급한 부분에 대해 적대자들의 비방을 일방적으로 옮겨 달라이 라마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독자들의 지적’에 대해서는 ‘유감의 뜻을 표’했다.
그리고 본문의 두 내용인 1)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략전쟁, 2)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기업 광고 등장은 사실이 아닌 것이라고 했다. 달리 말해 1편 ‘환상을 먹고 자란 세계 평화의 우상’의 알맹이는 ‘유감’이 아니라 ‘오보’였던 셈이다. 예상치 못한 독자들의 격한 반응 때문이었는지 2편 ‘CIA의 비밀 작전’ 첫머리에서는 1편을 쓴 배경까지 등장한다.

나는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20년 넘게 전쟁을 취재하면서 늘 ‘공격당하는 쪽에서 취재한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그럼에도 티베트의 상징인 달라이 라마를 이전 글에서 비판적으로 다루었던 까닭은 역사적으로 달라이 라마라는 신정 체제가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절대권력이었기 때문이다.

자그만 에피소드를 들려주고 싶다. 이 원고를 써야 한다고 하니 존경하는 어느 선생께서,“김구 선생은 그럼?”이라는 촌철살인을 들려주셨다. 앞서 언급한 제2차 그레이트 게임 때, 달라이 라마가 티벳의 근간마저 송두리째 뽑아버린 중국이 미워 미국에 몸을 의탁하는 것 자체가 ‘반제국주의’ 기조에 문제라면 할 말이 없다. 아마 미국에 의탁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짰던 김구 선생도 할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 등장하는 ‘CIA의 활약’이 사실인지는 의문이다. 소연방 붕괴도 예측하지 못했던 ‘돈 먹는 하마’인 미국의 정보기관이 1959년 티벳 음력설에 자연발생적인 대중 결집의 결과로 망명길에 올랐던 달라이 라마를 배후에서 조종할 정도였다는 것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당시 라싸 신년 축제에 모였던 티벳인들은 ‘경호원 없이 중국군 기지로 찾아오라’는 중국 측의 ‘초대’에서 6대 달라이 라마의 ‘실종’을 연상했을 것이다. 6대 달라이 라마는 오늘날에도 유명한, 밀라 레빠와 더불어 티벳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민중의’ 달라이 라마이자 음유시인이다. 5대 달라이 라마의 죽음마저 감춘 채 이루어진 대역사(大役事)였던 뽀다라궁 공사 때문에, 너무 늦게 환생 영동이 된 그는 밀교 수행에 열중한 ‘플레이보이’였다. 후사가 있을 것을 염려한 외세인 청과 몽고는 그를 북쪽으로 데리고 갔다. 죽음을 예견한 그는 다음의 환생지인 동티벳 ‘리탕’을 감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게송을 남겼다.
 
저 새 (중의 새) 하얀 학이여!
나에게 (그대의) 날개를 빌려다오.
(멀리) 가지 않을 터이니 거기까지만 돌봐주오.
리탕에 도착하면 되돌아올 것이니.

미국 CIA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정문태 기자는 “티베트의 상징인 달라이 라마를 이전 글에서 비판적으로 다뤘던 까닭은 역사적으로 달라이 라마라는 신정체제가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절대권력이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역사적’으로 일어나지도 않았다!
참고로 한국의 티벳학을 살펴보면 1) 인도와 서구에서 비롯된 티벳학 2) 티벳불교, 그리고 3) 중국 측의 티벳학 등 크게 세 그룹으로 나눠볼 수 있다. 1), 2)번 그룹의 연구자들은 티벳학과 티벳불교를 등치시켜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체제를 포함한 티벳학이 인도−티벳 전통의 불교와는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티벳어, 영어 등을 통한 티벳불교 연구에 대한 강조의 방점을 찍다 보니 티벳학 연구가 굼뜨기만 한 것이 1), 2)번 연구자들의 단점이다. 이와 달리 중국 측의 연구는 풍부한 역사적 사료를 통해서 티벳과 중국의 역사적 관계를 재구축해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3) 중국 측의 티벳학 연구는 서구의 어느 나라들보다 훨씬 풍부한 한문 사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 티벳학의 독특함을 구축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 그룹의 대표적인 주자는 《티베트와 중국−그 역사적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이해》(소나무, 2000), 《티베트와 중국의 역사적 관계》(혜안, 2003), 《천하국가》(소나무, 2005)를 펴낸 김한규 교수를 꼽을 수 있다. 또한 1), 2)번 그룹에 관련되어 상당한 문제점들이 산재하고 있음에도 현장 답사를 통한 실증적 연구로 《티베트의 활불제도−신을 만드는 사람들(서강대학교 출판부, 2010)》을 펴낸 심혁주 선생도 빼놓을 수 없다. 1), 2)번 그룹 연구자들에게 티벳의 역사는 불교의 역사와 거의 등치되는 관계로 그다지 역사적인 측면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3)번 그룹은 기본적으로 중국과의 역사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10여 년 전, 김한규 교수가 《티베트와 중국−그 역사적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이해》를 펴냈을 때, 필자는 근대 민족국가의 형성 이전의 역사적 관계에 ‘민족국가’라는 개념자를 도입하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는 요지를 이메일로 주고받으며 피력한 적이 있었다. 그 이후 그는 ‘역사 공동체’라는 새로운 개념자를 만들어 이 문제 극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심혁주 선생의 경우 활불 제도를 다루면서 실제로 티벳의 귀족과 승원이 결합된 독특한 봉건적 형태에 주목하고 있다.
정문태 기자는 ‘역사적으로 달라이 라마라는 신정체제가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절대권력이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티벳의 정교일치 사회에서 권력자로서 활동한 달라이 라마는 5, 13 그리고 14대뿐이다. 그리고 이 달라이 라마들의 재위 시절에도 중국 측의 청, 몽고 그리고 영국과 청의 침략으로 인해 ‘절대권력’이라는 말을 붙이기 옹색할 정도다. 이것은 역대 달라이 라마 재위시기를 분석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위대한 5대(The Great Fifth)’라 불리는 나왕 롭쌍 갸초만 청나라와 몽고 사이에 끼여 그나마 장기간 재위에 머물며 게룩빠 일통을 이루었을 뿐, 13대는 영국군을 피해서 몽고로(1904년), 그리고 청 군대를 피해 인도로(1911년) 망명을 다니던 처지였고, 14대 달라이 라마는 잘 알다시피 1959년 인도의 다람살라로 망명한 처지다.
그는 아마도 14대 달라이 라마의 절대적인 인기를 ‘역사적’으로 확대 소급한 듯하다.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다. 다소 길지만 심혁주 선생의 책에서 이 부분을 인용해보자.

현재까지 14명 달라이 라마의 환생 역사 속에서 과연 몇 명이나 제대로 친정을 행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왜 그들은 친정을 할 수 없었을까? 학계에서는 여전히 많은 의구심을 갖는 부분이다. 여기에 관하여 부정할 수 없는 공식(共識)은 기본적으로 타인에 의한 전세영동(轉世靈童)의 점지로부터 활불로 확인되는 시기는 대부분 어린 나이였고 소활불의 수습 기간을 거치고 난 후에도 대부분 20세를 넘지 못하는 나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섭정이라는 막후 실력자가 활불의 모든 행정과 활동을 안배하였으며 귀족세력과의 결탁으로 활불은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살펴보면 현재의 14대를 제외한 13명의 달라이 라마의 평균 수명은 40세를 넘지 못했다. 심지어 11대 활불 켄둡 갸초(1838~1855, 티벳어 원음에 따른 필자 표기)는 17세에, 9대 활불 룽똑 갸초(1805~1815)는 10세의 어린 나이로 숨졌다.

티벳 역사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없었던 정문태 기자의 ‘직업적인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 백번 양보해 오리엔탈리즘의 편향 속에 숨어 있는 환생 영동 제도(린뽀체)의 문제까지 생각해볼 수 있는데, 즉 신정체제에 대해서는 다음의 인용들이 유효할 듯하다.

티베트에서 활불이 전세(轉世)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종교적 이유에서였다…….

티베트 활불전세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대승불교의 보살관념이 발전하여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전세의 중심인 활불은 열반의 세계에서 인간 세상에 다시 재림한 부처의 화신이다. 그런데 이러한 화신의 관념은 티베트에 활불전세의 제도가 확립되기 이전에 고대 토번(吐藩) 시대부터 이미 광범위하게 전파되고 인식되어 있었다.

두 번째 인용문은 동의하기 어려운데, 전전기 즉 대표적인 3대 법왕 시대의 ‘첸뽀(chen po)’들에게는 아직 환생이 적용되지 않았다. 불교 교리사 측면에서 이 윤회 환생의 문제가 완결적 형태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일단 유식삼성에서 중요한 제8식인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을 뜻하는 아라야식(阿賴耶識, ālaya vijñāna), 즉 장식(藏識)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전변할 수 있는 식(識)이 준비되고 대승의 보살사상 그리고 수행자의 신통력이 극대화되는 밀교의 수행 또한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인도 후기 불교의 사상적·실천적 총화의 티벳형 버전(version)이 ‘린뽀체(rin po che)’ 또는 환생 영동을 있게 한 것이다. 물론 깨달음을 얻었으면서도 고통의 바다에 빠져 있는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염원으로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오는 자들이 존재한다는 보살사상이 대중적 지지 위에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티벳불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린뽀체의 탄생은 마하무드라(大手印) 수행의 신통력으로 유명한 까귀빠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기원전(본문의 오자다. 기원후) 1097년, 백교(까귀빠, 이하 티벳어 원음으로 표시한다.) 조주 마이파가 승하(圓寂)하고 오랜 기간 동안 본 종파는 구심점을 잃어버려 내홍에 휩싸인다. 이때 나타난 영웅이 바로 두셰 켄빠(dus gsum mkhen pa, 1110~1193, 원문에서는 欽巴)라는 고승이다. 그는 능히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즉 삼세(三世)를 관통할 수 있다 하여 ‘두셰 켄빠’라는 이름을 지었다. ……흠파의 특이한 점은 그가 흑색(黑色)에 특히나 흥미를 가졌다는 점이다. ……백교(까귀빠)의 4대 지파 중에서 깔마 까귀빠는 티벳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파 중 가장 먼저 활불전세의 전통을 채택했고 가장 오랫동안 그 전통을 유지해오고 있는 종파이다. ……흠빠는 훗날 갈마 까귀빠의 제1대 활불로 추존 받는다.
 
이 깔마 까귀빠의 법맥을 이은 이가 바로 오늘날 ‘호안(虎眼)’의 제17대 깔마빠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환생 영동 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식사상의 식의 전변, 보살사상 그리고 밀교의 수행력 등이 요구되는데 이것에 대해서 동의하거나 공감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티벳 특유의 문화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는 있다. 옛 티벳이 귀족과 승원 세력들이 지배세력을 형성하던 봉건제였던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또 이 독특한 환생 제도가 티벳불교의 한 축을 이룬 것에 대한 여러 이설(異說)이 있을 수 있겠지만 달라이 라마와 세속의 ‘절대권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멀었다. 다른 것은 다 차치(且置)하고 역사적으로 달라이 라마의 절대권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만 이해해도 정문태 기자의 ‘역사적인’ 것이 오리엔탈리즘의 편향에서 비롯된 허구임을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티벳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2011년 4월 26일은 티벳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이미 두 번의 임기를 모두 마친 삼돈 린뽀체의 후임으로 1968년생인 롭상 쌍게라는 젊은 인물이 티벳 망명정부의 최고 수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그 직전 상징적인 ‘국가원수’의 자리를 유지하던 14대 달라이 라마가 그것마저도 내려놓았기 때문에 더 이상 중국 측의 ‘위대한 조국의 반동분자 달라이 라마’를 비난할 근거마저 없어졌다. 이 ‘위로부터’ 실시된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인해 13세기 이래 후전기를 장식했던 티벳의 정교일치 사회는 막을 내렸다.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도입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변화를 뜻한다.
이것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전 티벳에서 무력 투쟁이 심각하게 벌어졌을 때 달라이 라마의 ‘너희가 그만두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겠다!’는 발언과 요즘 이어지는 티벳인들의 분신 사태에도 침묵하는 모습 사이의 차이를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그는 현실 정치에서 대중국 발언을 자제하여 신진 세력의 새로운 정치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 자리를 대신한 ‘서구 민주주의’ 세례를 받은 티벳 청년의회 등의 정치 세력들은 역사적으로 중국과의 독립된 국가 형태를 갖추었던 티벳을 상정하고 있다.
‘과연 이것이 올바른가?’를 두고 티벳 측과 중국 측의 논의가 치열하게 진행된다는 점에서 큰 프레임이 잘못 짜였다고 10여 년 전 김한규 교수는 지적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역작인 《티베트와 중국−그 역사적 관계에 대한 연구사적 이해》로, 이 책에서 주목하는 바는 티벳의 싸꺄빠와 원나라 사이에 시작된 공시(供施) 관계다. 티벳 쪽 입장, 또는 불교적 입장에서 이 공시 관계는 재물보시와 법보시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쿠빌라이 칸이 자신의 스승, 즉 황사(皇師)였던 싸꺄빠의 고승 팍빠가 베풀었던 법보시에 대한 답례로 싸꺄빠의 티벳 자치를 재물보시로 올린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보시’로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서구적 개념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김한규 교수는 ‘역사 공동체’라는 새로운 개념자를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인이나 티베트인들이 전통적으로 오랫동안 사용해 온 티베트와 중국을 가리키는 말의 개념을 통해 티베트와 중국의 관계를 확인한다면, 양자는 서로 포함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구별되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전통시대에는 중국인이나 티베트인이나 구별 없이 모두 티베트와 중국을 서로 엄격하게 분별되는 별개의 역사 공동체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 현재 상황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어 충분히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중국과 티베트라는 별개의 두 역사 공동체를 같이 지배하는 통합국가라는 사실이다. 한 역사 공동체를 두 개의 국가가 나누어 지배하는 한국과 같은 상황도 불안정하듯이, 복수의 역사 공동체를 한 국가가 통합 지배하는 것도 불안정하다. 티베트의 독립이나 자치는 중국인이 이러한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두 역사 공동체를 융합시킬 수 있는지, 혹은 티베트의 전략적 가치 등이 이 불안정성의 크기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게 할 것인지에 달려 있으며, 중국인과 티베트인은 모두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은 냉철한 분석은 그가 중국 역사를 다루다 마주친 중국과 그 주변에 대한 사료를 고찰한 덕분이다. 덕분에 한국의 티벳학은 매우 독특한 지위를 갖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이란 말은, ‘중국의 국가’란 말과 혼용되어 있다. 즉 ‘중국’을 하나의 국가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언어 관행은 근현대에서 국한하여 인정될 수 있을 뿐, 전통 시대에 대해서는 허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중국’은 여러 성읍 국가들에 에워싸인 중심이 된 성읍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성읍 국가가 끝나고 영토 국가 시대로 이행된 뒤에는 전혀 다른 뜻을 가진 ‘중국’ 개념이 출현했다. ……‘중원’은 단지 ‘중국’이라는 역사 공동체의 공간적 범주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역사 공동체라는 개념자로 티벳과 중국의 관계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중국’이라는 약칭을 사용하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이 연이어 건립됨으로써, 이제 ‘중국’은 공식적으로 특정한 국가의 명칭임이 선포되었다. 이는 곧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배 대상은 모두 ‘중국’이며 그 구성원은 모두 ‘중국인’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했음을 뜻한다. 그러나 역사 공동체란 역사의식이 만들어 낸 실체이기 때문에, 그 성격과 내용이 일시적 정치적 조처로써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이 ‘역사 공동체란 역사의식이 만들어 낸 실체’를 줄여보면 ‘의식이 만들어 낸 실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역사 공동체로, 이것은 유식사상에서 마음의 작용에 의한 ‘형상(形相, Skt., kāra)이 곧 실재하는 대상이다’는 대목과 겹친다. 이와 같은 유식사상이 좀 더 보편적이기를 바라지만, 실재하는 대상에서 의식이 반영된다는 전통적인 유물사관 쪽의 비판과 서구적 개념자들이 대세를 차지하는 처지에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관념적인 것’이라는 날 선 비판을 견디어낼지 의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존의 민족국가라는 개념자 대신에 등장한 ‘역사 공동체’라는 개념자는 기존 학계에서 다루지 못했던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 새로운 개념자를 통해 티벳−중국과의 역사적인 관계를 설명하려는 김한규 교수와 달리 필자는 근대적 개념자를 비판함으로써 그 허구성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나가려 하지만 아직 그 결론을 내지 못한 처지다.
그 기본적인 틀거리는 우리가 오늘날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민족(民族, nation)의 탄생, ‘민족국가’라는 개념은 근대 이후에 탄생한 개념이었으므로 그 이전을 소급적용하는 데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민(民, people)과 족(族, race)은 다르다는 것 등을 두루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가 뒷받침될 때만 티벳과 중국과의 특수한 역사적 관계의 발전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과거 동아시아 국제 정치 관계를 민족국가를 통해 설명하는 것은 맨 처음 민족국가가 출현했던 유럽에서 그것을 넘어 통합으로 나아가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지향적이지도 않다. 이 불균등한 세계사적인 조류 속의 시금석이 바로 티벳과 중국과의 관계다.
이와 같은 인식틀의 기본적인 변화를 갖추고 티벳 문제에 접근하지 않으면 그 대책 또한 없다는 것을 정문태 기자에게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을 것이다.

다시 8월의 다람살라, 법문 마지막 날인 27일 달라이 라마는 신심 가득 찬 한국 불자들과 사진 촬영까지 마치고 왕궁으로 발길을 돌렸다. 특유의 울림 강한 너털웃음을 지으며, “세계를 싸돌아다니다 보니 무릎이 좋지 않다.”고 말했다.여느 때처럼 필자는 하얀 목도리 ‘하타’를 들고 도열한 한국 불자들 뒤쪽에서 〈한겨레신문〉 휴심정에 ‘히말라야 통신’을 연재하는 청전 스님의 가사(袈裟)를 받아 들고 서 있었다. 갑자기 정론직필을 강조했던, 그리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앞장섰던 송건호 선생 생각이 났다. 이번 ‘오보’는 진보적 가치, 노동, 인권, 민주주의를 생각하는 이들의 보루라 여겼던 〈한겨레신문〉의, 특히 편집국의 전체적인 난맥을 보여주는 한 예라는 생각이 스쳤다.‘한 사회의 전체적인 퇴보는 어떻게 되었든 드러나는 법이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로 경호원의 부축을 받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달라이 라마는 향년 78세, 그가 세상에 좀 더 오래 머무를 때 최소한 극단적 유혈 충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대한 티벳 대중의 절대적인 존경 때문에. ■

 

 

신상환
/ 고려대장경 전임 연구원. 아주대학교 환경공학과 졸업. 인도의 비스바 바라띠(Visva-Bharati) 대학 인도·티베트학과 석사, 캘커타 대학 빠알리어과 철학박사. 비스바 바라띠 대학 인도·티베트학과 조교수 역임. 주요 논문으로 〈삼예 논쟁의 정치적 배경과 까마라쉬라의 수습차제에 대한 비판적 고찰〉 〈한문 대장경에서의 밀교의 자취〉 등과 저서로 《세계의 지붕, 자전거 타고 3만리》 《용수의 사유》 역서로 사꺄 빤디따의 《선설보장론》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불교평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