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교 정체성에 대한 순행기(巡行記)

들으니 ‘땅에 걸려 넘어진 사람은 땅을 딛고서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땅을 떠나서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恭聞, ‘人因地而倒者, 因地而起’. 離地求起, 無有是處也.)
— 지눌의 〈권수정혜결사문〉 중에서
 
고전에서 옛사람의 말씀을 되새기는 것도, 지난 역사를 돌이켜 더듬는 것도 모두 지금의 내 삶을 비추어보고 바르게 나아갈 바를 되새기기 위함일 것이다. 지난 역사가 현재에 다시 반복되고 개인의 삶에서 후회가 되풀이되는 것은 그런 지난 역사, 지난 삶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우리의 공부, 거창하게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처한 현실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거창한 학문 세계가 펼쳐지는 와중에 우리는 곧잘 우리가 출발했던 ‘현실’을 ‘거창한 학문 세계’의 저편에 두고 잊어버리곤 한다. 현재의 삶을 제대로 보고, 현재의 삶을 더 나은 삶으로 바꾼다는 전제가 되었던 학문이 어느새 이론적인 자기위안 행위 혹은 자기만족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어떤 것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결과를, 우리는 이른바 학문 세계에서 종종 목격하곤 한다.
신규탁 교수의 ‘불교평론 학술상’ 수상작 《규봉 종밀과 법성교학》을 처음 접했을 때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엉뚱하게도 ‘왜 이렇게 두꺼워?’라는 생각이었다. 요즘 우리가 흔히 접하는 책의 두께를 가뿐하게 넘어섰기 때문이기도 하고, 리뷰를 맡은 입장에서 ‘언제 다 읽어?’라는 암담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본론만 4부로 나누고 총 18장으로 구성된 7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 읽기는 우려에 불구하고 어느새 탐독으로 변해 있었다. 재미있기도 했고, 고민스럽기도 했고, 중간중간에 ‘아, 그래서 그때 이런 논문을 발표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로서 결론은 이렇다. “제목은 ‘규봉 종밀과 법성교학’인데,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 현재의 불교에 어떠어떠한 문제점이 있고, 이런 문제점들은 어떠어떠하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닐까?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저자의 뇌리를 달군 화두는 결국 지금의 우리 불교였구나. 나는 아직 그 현실의 수렁에 발을 꼭 담그고 있는 걸까? 혹시 나는 그 현실의 수렁에서 발 벗고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리뷰의 제목이 정해졌다. ‘우리 불교의 정체성에 대한 순행기(巡行記)’라고.

글쓰기는 우리 학계 혹은 좀 더 나아가 한·중·일 삼국 학계의 불교학 방법론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저자가 찾아낸 불교학 방법론의 문제점은 일곱 가지이다. 동아시아 사상사를 배제한 불교연구, 호교론적 불교연구, 종파적 접근, 이데올로기에 의한 불교 해석, 문헌지상주의적 접근, 삼국의 자국 중심적 접근, 불교의 특수성을 무시한 일반사적 접근 등(54쪽)이 그것이다. 그 방법론적 문제에 대한 저자의 접근은 이렇게 제시된다.

불교 자체를 ‘방법(方法)’으로 이해하는 시각을 제안하고자 한다. 즉 불교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불교를 방법으로 삼아 동아시아 사람들이 외래 사상인 불교를 어떻게 이해했고 자기화했는지를 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불교라는 보편성은 그것대로 유지되면서, 불교를 매개로 전개된 그 지역 사람들의 특수한 이해방식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59쪽)

사실 이 같은 접근 방식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저자가 이 책의 골간으로 삼는 규봉종밀의 방법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규봉종밀의 방법론에 대해, “종밀은 ‘회통(會通)’이라는 용어 대신 ‘화회(和會)’라는 용어도 사용하는데, 이것은 ‘사실 자체는 잘못이 없는데’ 그 사실을 대하는 ‘당사자가 잘못 이해했을 경우’ 원래의 사실을 기준으로 오해를 해소시키는 행위이다. 한편, ‘요간’이란 이치로 감별하며 시시비비를 갈라놓고 옳지 못한 것은 골라내는 행위이다.”(363-364쪽)라고 지적한다. 종밀이 자신의 학문을 ‘체계화’하는 방법으로 요간적(料揀的) 태도와 회통적(會通的) 태도를 병행했듯이, 저자 역시 종밀을 기점으로 그 이전과 그 이후를 요간하고 회통하는 방법론적 입장을 견지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2부와 제3부에 ‘종밀교학의 지평’과 ‘법성교학의 정립’이 놓이고, 제1부에 ‘중국불교의 시작’이라는 제목 아래 불교 중국화의 과정 혹은 종밀에 이르는 중국불교의 여정이 놓이고, 제4부와 맺음말에 종밀 이후의 불교사가 우리 불교에까지 닿는 과정과 함께 법성교학의 생활화라는 관점의 접근이 놓여 있다. 달리 말하면, 저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교학 방법론에 대한 문제의식을 해소하기 위해서 종밀의 방법론적 관점을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종밀의 방법론적 관점의 발견과 채용의 양자에 선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저자가 그들 내용에 접근하는 방식은 기존의 일반적인 접근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있다. 특히 2부 이후가 그렇다. 2부 이후의 내용에는 불교의식, 더 좁혀서 불전의식에 대한 저자의 남다른 사색과 시각이 담겨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부처님의 내자증(內自證)’과 ‘불교의식’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부처님의 내자증’은 ‘유불여불 내능구진(唯佛與佛 乃能具盡)’이기 때문에 중생들이 이것을 알기에는 한계가 있다. 지전(地前)보살들조차도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일대사인연’의 원력에 의해서 교(敎; sāsana)로 드러나야만 비로소 우리 중생들이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중생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교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 의(儀; kalpa)이다. ‘내자증(內自證)’을 겉으로 ‘표현’한 것이 ‘불교의식’이라면, 중생들은 ‘불교의식’을 통해서 ‘내자증’을 ‘체험’할 수 있다. 이 둘은 쌍방향적인 관계이다.(321-322쪽)

흔히 외연에서 내포를 감득하고 내포로부터 외연을 펼쳐낸다고 말하고 그 내외가 둘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실제 그런 관점을 적용하여 사상사를 해명하거나 접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상사에 대한 접근이 그 의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우 문헌학적 접근에 그치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자신이 채택한 극복의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고 또 적용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론의 적용이 위의 인용문 안에 들어 있다. ‘부처의 내자증’은 불교의식(佛敎儀式) 더 좁혀서 불전의식(佛前儀式)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중생은, 우리는 그 불전의식, 더 넓게는 불교의식을 통해서 ‘부처의 내자증’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2부 이후의 내용에서 줄곧 놓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같은 방법론적 접근의 적용이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상을 포착할 때만이 그 유효성을 수용하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에 하나 더해지는 것이 바로 ‘우리 불교의 현재’라는 당연 전제이다. 이 같은 세 가지 방법론적 접근의 전제 위에서 저자는 ‘법성교학’이라는 범주에 대한 탐색을 시도한 것이다.
그럼 저자가 말하는 ‘법성교학’ 그리고 그 현상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저자에 의하면 그것은 규봉종밀이 나눈 대승의 3종 중에서 성종 곧 법성종에 연원한 것이다. 그 “성종 내의 교학을 근간으로 하는 우리나라 재래의 전통 강원에서는 〈대승기신론〉을 근간으로 해서 특히 〈대승기신론필삭기〉로 그 이론적 체계를 단련하고 있다. ……‘법성교학’의 마음 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한다. 다만 무시이래의 무명 ‘번뇌’로 인해서 그 지혜가 흔들린다는 것이다. 마음을 이렇게 이해하는 ‘법성교학’에서는 수행의 문제도 여기에서 출발한다. 나 자신에게 본래 ‘지혜’가 있음을 자각하고, 그런 다음에(또는 동시에)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법성교학’의 수행 이론이다. ‘번뇌’를 소멸시키는 방법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화엄종에서는 ‘보살행의 실천’을 통한 번뇌의 소멸을 말하고, 남종선에서는 ‘무심 수행’을 통한 번뇌의 소멸을 말하고, 정토종에서는 ‘염불 삼매’를 통한 번뇌의 소멸을 말한다.”(11-12쪽)고 저자는 서문에서 정의한다.
법성종 혹은 법성교학의 범주에 대한 저자의 이 같은 규정은, 종밀을 계승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국 재래의 전통 강원의 학습 내용과 한국불교 전통의 의례와 수행에 대한 검토에서 나온 결과이기도 하고, 동시에 종래의 종파적 구분에 의거하여 사상사에 접근하는 입장을 지양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법성교학의 핵심 내용에 대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법성교학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우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즉, 사람은 물론 생명체를 가진 모든 존재들은 도덕의 측면에서 보나, 지혜의 측면에서 보나, 내지는 그 밖의 어느 측면에서 보더라도 전지하고 전능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서로서로 중첩적으로 연기(緣起)하고 있는데, 그런 연기 현상은 생명체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본바탕으로 하여 전개된다. 설혹 어떤 ‘악(惡)’이 현실적으로 있더라도 그것은 인간이나 세상의 본질은 아니다. 그것은 탐진치(貪瞋癡)로 표현되는 어리석음 때문에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공(空)하고 무상(無常)하고 부질없는 작용일 뿐이다. 그런 것들에 간섭되지 말고, 자신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발휘하라. 이것이 법성교학에서 말하는 가르침이다. 법성교학에서는 이런 가르침을 믿으라는 것이다.(418쪽)

그리고 그러한 사상 내용에 의거한 법성교학의 실천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부처가 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 대답은 이렇다. 이제까지 우리는 ‘생명 운동의 긴 역사’ 속에서 ‘업(業)’에 끌려서 수동적으로 인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업’과 맞선다. 그리하여 수동적이고 자연적이었던 삶과 결별한다. 인생의 방향을 전회(轉回)한다. 이제는 ‘업’의 힘이 아닌, ‘서원’의 힘으로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세상을 살면서 그 ‘서원’을 실현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깨침을 완성한다. ‘축원문’ 맨 끝의 “세세상행 보살도(世世常行 菩薩道) 구경원성 살바야(究竟圓成 薩婆若)”가 바로 그 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구절이다. …… 자기 본질을 완성하는 과정의 부산물로 너와 내가 행복해진다. 그런데 법성철학의 궁극 목표는 이런 너와 나의 평화와 행복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정상에서 나오는 부산물이다. 궁극의 목표는 일체의 ‘업장(業障)’을 소멸시켜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바탕인 법성을 ‘깨쳐야 하고’ 그것도 완전하고 철저하게 깨쳐야 한다. 이런 깨침을 ‘돈오’라고 한다. 이렇게 ‘돈오’하기 위해서는 티 없는 ‘무공용(無功用)’의 무심한 보살행을 실천해야 한다. 무분별지가 발동되어야 하고 무심해야 한다.(680쪽)

이와 유사한 내용이 책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럼 법성교학의 본지와 실천의 기본은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그것의 한국적 전개는 어떻게 보는 것일까. 규봉종밀의 의례관을 검토한 제9장에서 저자는 현행의 예공의식에 대한 저자의 사색 결과를 “현행 〈삼보통청〉은 ‘소례(所禮)’의 대상은 3신불을 중심으로 하여 그와 관련된 불보살, 그리고 선종의 역대조사 등임을 알 수 있다. ‘청사(請詞)’ 부분에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조선시대)불교가 ‘통불교’라는 점이 이런 사례들을 통해서도 반증된다. 조선시대에 제종이 강제적으로 통합되면서, 종파에 따른 독자적인 참회법은 사라졌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통합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예문을 정비한 것은 아니다. 그 원칙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화엄경》을 근간으로 하는 법성사상을 교리적 바탕으로 하여, 그 위에 남종선의 법맥을 첨가한 것”(355쪽)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관점에서 현행의 한국불교를 저자는 법성종 나아가 법성교학의 그것을 내포로 하는 불교전통이라고 읽는다.

역사적으로 대승불교의 전통을 이어온 한국의 전통 종단은, 이미 법신(法身)의 상주를 믿고 있고, 또 모든 중생들은 불성(佛性)을 갖추고 이어서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이미 일용 의식(儀式)을 통하여 우리들의 신행 생활 속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조석으로 올렸던 ‘향수해례(香水海禮)’가 그렇고, 현재도 쓰는 삼보통청의 ‘청사(請詞)’와 각종 시식의 ‘착어(着語)’들도 역시 그렇다. 이런 전통을 필자는 ‘법성종’이라는 범주로 묶어서, 그 철학적 역사적 전개와 의미를 제시한 바 있다. 그러니 이 법성의 전통을 계승하여, 현 조계종은 대승 불자 공동체의 실천 규범을 이 시대에 알맞게 정비해야 할 것이다.(627쪽)

이 같은 저자의 강조는 그래서 가능한 것이며 유효성을 가지는 것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내연과 외포의 쌍방향성을 동시에 순행(巡行)한 이력을 바탕으로 저자는 “남종의 간화선을 중심으로 하든, 화엄의 교학을 중심으로 하든, 정토의 염불을 중심으로 하든, 밀교의 진언을 중심으로 하든, …… 교리적 중심을 분명하게 정립하고 그에 상응하는 의례와 수행방법과 신행지침을 제시하고 현대적 실정에 맞는 ‘법회’를 열 것”(713쪽)을 제안한다.
순행(巡行)의 결론은 그렇다. 사실 화엄 전공자로서 그리고 한국불교사상의 전공자로서 화엄과 화엄선의 세례를 듬뿍 받아온 필자로서는 솔깃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접근법에 의해 전체적인 통찰을 시도해낸 안목에 찬사를 보낼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점도 존재하는데, 이 책에는 적지 않게 한국불교라는 종교에 대한 종교사적 접근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한국불교라는 종교 현상의 변천사에 대한 저자 나름의 시각이 투영되어 있는 것인데, 특히 조선시대의 강제적 통합에 따른 의례의 정비에 대한 분석이 그렇다. 일종의 통불교적 시각이 반영되는데, 그 통불교는 거슬러서 다시 법성종 혹은 법성교학으로 치환된다. 저자의 관점을 수용한다는 전제를 한 상태에서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은 이른바 ‘법성종’이라는 입장에 의한 배제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입장이 성립된 시점 역시 임란 이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부분이다. 동시에 저자가 의도한 것은 법성교학이라는 이름 아래의 다양성이겠지만, 그 다양성에 대한 여지가 별로 고려되지 않은 점도 역시 고민스러운 부분이라 할 것이다.
이런 점은 종밀교학, 이른바 법성교학 등장 이전의 중국불교사에 대한 서술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저자가 말했다시피 불교사상사는 특정의 사상사라서 ‘불교의 특수한 신앙이나 교리 체계’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저자가 말했던 ‘보편성은 그것대로 유지되면서 불교를 매개로 전개된 그 지역 사람들의 특수한 이해방식’에 대한 모색이, 실제는 그 ‘특수한 이해방식’과 그 ‘지역 사람들’에 편중되면서 균형을 놓친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특정의 사상체계를 매개로 전후의 사상사를 추궁하면서 보편과 특수의 균형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한편으로는 보편 내지 불교사상사 내부에 지나치게 기울어져서 서술되는 기존 서술방식을 고려한다면, 저자의 서술방식이 또 다른 관점에서 균형의 시도라고도 납득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책이 우리 불교의 정체성 혹은 우리 불교전통 보기에 있어서 우리가 놓치고 있던 접근의 방식,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저자는 새로운 사색의 순행을 독자들에게 요청한 것으로 생각된다. ■

 

석길암 / 금강대학교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경제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주요 논문으로 〈기신론 주석서에 나타나는 여래장 이해의 변화〉 등과 《지론사상의 형성과 변용》(공저) 《불교, 동아시아를 만나다》 등의 저서가 있다. 전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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