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이웃종교에서 보내온 우정의 충고

1. 도입

나에게 주어진 주제는 ‘가톨릭의 입장에서 불교에 줄 수 있는 충고’이다. 가톨릭 신자이면서 불교에 관심을 지닌 종교학자라는 점에서 나에게 원고를 제안했으리라 추측해본다. 하지만 불교계의 정황을 발 빠르고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 힘겨운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의 입장을 대변하여 불교에 충고를 준다 하기에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렇듯 불량 필자이면서도 감히 원고를 쓰겠다고 나선 것은 그동안 《불교평론》을 통해 얻은 공부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이 우선이었다. 아울러 한국불교에 대한 《불교평론》의 관심과 애정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불교평론》은 지금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한국불교의 현황 혹은 문제점을 분석하고 발전적인 개선 방안에 관한 논의를 다루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한국불교의 올바른 방향 모색을 위해 이웃종교들로부터의 충고까지 경청하려는 《불교평론》의 열린 자세와 진지한 열의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뜻깊은 기획의도에 충분한 보답일 수는 없지만 나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논의를 구성해보았다. 크게 나누어 두 부분으로 구성했다. 전반부는 불교와 가톨릭 더 나아가서는 모든 종교가 함께 맞이하고 있는 현대의 종교 상황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실 현대 종교 상황에 관한 고찰을 중요한 한 부분으로 다루는 것이 이 글 전체에서 유지하려는 나의 취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셈이다.

가톨릭의 입장에서 불교에 줄 수 있는 충고로 어떤 내용이 있을까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결국 그 내용들이 불교뿐 아니라 가톨릭에도 똑같이 해당하는 것들이었다. 불교와 가톨릭이 처한 개별적인 조건들도 있지만 보다 근원적인 차원으로 시각을 옮기면 두 종교 모두 같은 문제에 처해 있고 같은 해결 방향을 모색해야 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가톨릭의 입장에서 불교에 주는 ‘충고’라기보다는 불교와 가톨릭이 함께해야 할 방향을 ‘제안’한다는 취지가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런 취지에서 불교와 가톨릭이 함께 처해 있는 현대의 종교 상황을 전제로 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의 두 번째 부분은 불교와 그리스도교가 현대 상황을 대처 혹은 극복하기 위해 어떤 방향을 모색해야 할 것인지에 관해서이다. 이 글에서는 아무래도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대책을 제시할 수는 없고, 가장 기본이면서 궁극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것으로 한계를 지을 수밖에 없다. 그 방향은 불교와 가톨릭 모두 진정한 자신의 정체성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정체성이란 불교의 가장 불교다운 특성, 가톨릭을 가톨릭답게 만드는 특성을 뜻한다. 그리고 이러한 특성은 무엇보다 한국인의 역사와 삶 안에서 확인해야 한다. 역사와 삶 안에서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특성이 곧 한국인들이 인정하고 주목하는 불교/가톨릭의 참모습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불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만큼 한국인의 역사와 삶 속에 드러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제시해볼 것이다. 이러한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충분히 살리면서 새로운 변화에 적절히 적용하려는 노력이야말로 현대 종교 상황에서 취해야 할 불교의 방향일 것이다.

이들 두 부분 이외에 불교와 가톨릭 각자의 상황에 관한 내용도 포함시킬지 고려했었다. 함께 맞이하고 있는 공통적 상황과 더불어 각자의 개별적인 상황도 정리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와 가톨릭의 상황에 관해서는 기존에 여러 논의가 이루어졌다. 그 외에 이 글에서 새로이 제기할 문제는 없는 듯하여 굳이 반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실 개별적인 상황들을 정리해보면 여기에서도 역시 불교와 가톨릭이 근원적으로는 같은 문제를 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이 좀 다르게 표현되고 있을 뿐 안으로는 결국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2. 현대 종교 상황의 몇 가지 양상

불교와 가톨릭 모두 현대의 상황 안에서 이런저런 변화의 흐름을 겪고 있다. 불교와 가톨릭의 현재와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현대 상황에 대한 고려에서 출발해야 한다. 현대 상황을 충분히 읽어내고 그에 대응하는 적절한 방향을 모색할 때 현재는 물론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현대 종교 상황 안에서 불교와 가톨릭은 동반자일 수밖에 없다.

현대 인류 공동체에 종교가 지니는 의미는 얼핏 보기에 상반되는 두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믿는 종교적 신념과 원칙을 극단적으로 절대화하여 현세적 삶의 모든 맥락과 상황에 관철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의 근본 가치와 의미를 철저히 해체하면서 종교로부터 벗어나는 인간 해방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전자는 종교를 절대화하고 후자는 종교를 부정한다는 점에서 얼핏 상반되는 양상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 극단의 상황 사이에 공통적인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양쪽 모두 종교의 본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 종교 상황의 근원적인 문제를 ‘종교문맹(宗敎文盲)’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양상 몇 가지를 정리해본다.

1) 왜곡된 종교적 열정

종교에는 필연적으로 강렬하고 절대적인 열정이 수반한다. 종교적 열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현세적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 심지어 온갖 시련과 유혹을 극복하면서 온전히 초월적 진리에 따른 삶을 살 수 있게 해준다. 종교적 열정은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이룰 수 없는 일까지 가능하게 한다.

문제는 이 종교적 열정이 자칫 왜곡되었을 때는 그만큼 강렬하고 극단적인 모순과 폐단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왜곡된 종교적 열정은 그러한 모순과 폐단을 좀처럼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없도록 맹목적으로 정당화시킨다. 어떤 합리적인 설득이나 인간적인 호소로도 그렇게 고착화한 정당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
한마디로 표현해 종교적 열정은 양날의 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칼을 잘 사용하면 초월적 진리에 이르는 길을 헤쳐나가면서 세상과 인간을 구원할 수 있지만, 자칫 잘못 사용하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고 세상과 인간 모두를 죽이게 된다. 사람을 살리는 종교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종교가 되는 것이다.

종교적 열정이 왜곡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종교 이해 자체가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종교가 본래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이고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 것인지에 관한 이해가 온전히 구현되지 못한 기반 위에 형성된 종교적 열정은 잘못된 방향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2) 근본주의(根本主義, Fundamentalism)

근본주의는 성서무오설(聖書無誤說) 등을 주장하는 보수적이며 배타적인 미국 개신교 신앙집단에 의해 전개된 종교운동에 한정하여 사용되었다. 하지만 최근 유대교 정통주의, 시크교와 힌두교 원리주의 집단, 알 카에다와 탈레반 등의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 등 보수적이며 과격한 근본주의 종교운동에 더욱 폭넓게 적용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들은 보수적인 정치 세력과 동맹하여 국가, 가족,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 물결을 경계하고 차단하기 위한 극단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들 근본주의자는 자신은 강렬한 종교적 열정으로 종교생활을 유지한다. 하지만 인간 본성과 삶 본연의 의미 그리고 현실 삶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외적인 형식 차원에서 편협하게 설정한 왜곡된 종교 범주 안에 갇혀버리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종교 본래 의미에 상반되는 왜곡된 종교적 열정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3) 세속화(Secularization)

현대사회의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종교도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고, 이러한 변화를 세속화의 개념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세속화가 진행되는 상황을 대략 다음 여섯 가지 형태로 설명한다. 첫째는 종교의 쇠퇴이다. 종교 신도, 성직자, 조직 등의 수가 감소하고, 종교적 관심과 참여율, 사회적 중요성 등이 약화되는 현상이다. 둘째는 이 세상과의 동조로서, 종교의 형태가 점차 세속적인 것을 닮아가는 현상이다. 셋째는 종교로부터 사회의 이탈이다. 사회 전체가 점차 종교적인 영향으로부터 이탈하는 현상이다. 넷째는 종교적 신앙과 제도의 변형이다. 다섯째는 세계의 탈성화(脫聖化)이다. 여섯째는 성스러운 사회에서 세속적 사회로의 이행(移行)이다. 결국, 세속화는 본래 종교가 지니고 있던 의미와 영향력이 축소되거나 상실되는 양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현대를 종교의 부활 혹은 탈세속화 상황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현대에 종교의 의미와 영향력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확대 강화되고 있다는 판단이다. 세속화냐 탈세속화냐의 문제는 단순히 외형적인 차원에서 종교의 영향력만을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내면적인 차원에서 종교 본연의 의미가 온전히 유지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왜곡된 종교의 형태가 확대되고 있는지를 식별하여 판단하는 것이 적합하다. 종교 본연의 의미가 온전히 유지되지 못하고 있다는 상황 자체가 엄밀한 의미에서 종교의 영향력이 축소된 세속화 상황인 것으로 판단해야 할 것이다.

4) 신의 존재와 종교의 의미 부정

최근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을 비롯하여 신의 존재와 의미에 대하여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 도킨스의 주장에 대해 알리스터 맥그라스(Alister McGrath)와 조애너 맥그라스(Joanna McGrath)가 함께 저술한 《도킨스의 망상?(The Dawkins Delusion)》과 데이비드 벌린스키(David Berlinski)가 저술한 《악마의 계교(The Devil’s Delusion)》 등의 반론서들이 나와 논쟁을 더욱 뜨겁게 만들고 있다.

도킨스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석좌교수이면서 여론조사 결과 세계 최고 지성으로 뽑힐 정도로 영향력 있는 과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저술가이다. 그는 여러 저술을 통해 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종교의 비합리성과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해악을 역설하고 있다. 도킨스는 자신의 저서에서 미국의 광적인 신앙을 비판하며 무신론자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했다. 그는 신이 없음을 주장하면서, 오히려 신을 믿음으로써 벌어진 참혹한 전쟁과 기아와 빈곤 문제들을 일깨운다.

도킨스의 문제 제기는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종교 관련 폐단이나 모순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주목할 만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그가 전개하는 종교 비판[부정]은 종교 본연의 의미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도킨스의 비판은 종교 본연의 의미에서 어긋난 왜곡된 형태로서의 종교가 드러내는 폐단과 모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종교 본연의 의미에 관해서는 도킨스도 다른 평가를 할지 모른다. 결국 도킨스의 종교 부정을 통해 현대 종교 상황의 문제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5) 대체종교[유사종교] 현상

종교의 세속화 문제는 일차적으로 기존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비판 현상으로 이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현상을 초래했다. 현대인들은 종교의 세속화, 과학의 발달, 물질문명의 발달 등으로 인해 일단 기존 종교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나 영적인 가치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본성으로 인해 기존 종교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 형태들을 찾게 되었다. 이러한 현대의 새로운 문화 형태들은 형식적인 면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와 다르지만, 현대인들에게 작용하고 있는 의미와 기능은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새로운 종교문화 현상을 ‘대체종교[유사종교, 신영성 운동]’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이에 관한 분석과 평가 작업이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뉴에이지, 단학(丹學) 등이 이 범주에 해당한다.

이러한 대체종교 혹은 유사종교 현상에 대해 최근 개신교와 가톨릭 교회에서는 심각한 우려와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들 현상이 교회 내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신자들이 현혹되지 않도록 여러 분석 자료나 지침서를 내놓기도 한다. 여기에서 이 문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평가할 때 대체종교 현상에 대한 파악과 대응은 결코 단편적이고 단순한 논리로 이루어져서는 충분하지 않다. 대체종교 현상은 단순히 불온한 조류로 단죄하여 금지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할 정도로 현대문화 전반에 걸친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대체종교 현상이 깊은 의미를 지니게 된 배경과 현대의 종교 상황 전반에 관한 분석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6) 다종교 상황과 종교 간 갈등

현대의 다종교 상황은 단순히 숫자상으로 종교가 여럿 존재한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종교가 여럿인 것이 현대에 와서 처음 벌어진 상황이 아니니 굳이 새삼스러운 일로 주목할 필요는 없다. 현대 다종교 상황의 초점은 여러 종교 사이의 갈등과 대립의 문제, 그리고 공존과 조화의 문제이다. 지금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종교로 인한 갈등과 대립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종교들이 지구촌 인류 공동체 안에서 공존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지의 문제가 현대사회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최근 현대 인류 공동체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자주 거론하는 개념이 ‘다문화’이다. 아울러 ‘세계화’라는 개념도 자주 언급된다. 세계화와 다문화에 따른 문제 상황에서 종교는 근저·핵심으로서 작용한다. 각 지역 문화의 기반에는 종교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문제는 ‘과연 종교는 갈등의 원인(Trouble Maker)이기만 한가?’라는 점이다. 종교는 인류 공동체 갈등의 근본 원인이고, 평화와 행복을 위해 미래 인류 사회에서 사라져야 하는가?

사실 종교는 갈등의 원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통합과 공존 그리고 소통을 이루어주는 원리를 간직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 다문화 상황에서 우리가 우려하는 문제는 개별 문화들이 배타적으로 자기 특성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다른 문화와의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인류 공동체 전체가 문화적으로 조화와 공존을 이루지 못하는 상황이 점차 심화된다. 따라서 세계화 시대 다문화 상황에서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긴밀하게 상호 연결된 이 세상에서 차이 때문에 위협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자신이 커질 수 있다고 느끼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차이의 존중’ ‘다름의 이해’가 절실하다. 종교는 이러한 통합과 소통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원리를 제공할 수 있다.

3. 현대 종교 상황 대처를 위한 올바른 종교 이해 회복

이상에서 정리한 현대 종교 상황의 몇 가지 양상은 그 근원에 왜곡된 종교 이해의 문제가 있다. 종교의 외적인 형식에 사로잡혀 편협하고 맹목적인 종교적 열정을 드러내고, 종교의 현실적 폐단과 모순을 문제 삼아 종교의 내면적인 본래 의미마저 부정한다. 종교 안에서든 종교 밖에서든 종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절실한 상황이다.

인간에게 종교가 지니는 본래 의미는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라고 하는 종교학의 기본 명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모 렐리기오수스는 ‘인간은 종교적 존재’ ‘인간은 종교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은 ‘초월’ 추구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일차적으로 현세의 세계[현상 세계, 경험의 세계, 유한의 세계] 안에 살면서 현세적 가치와 기준에 따른 삶을 산다. 하지만 인간은 현세의 삶을 살면서도 어느 순간인가 현세의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는 진리가 존재함을 경험하게 된다. 현세의 가치가 결코 궁극적이고 완전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는 사실, 현세적 가치 너머에 궁극적 의미를 지니는 완전한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궁극적 진리는 어떤 언어나 개념에 의해서도 규정될 수 없는 무한성이지만, 현세의 가치와 기준을 넘어서는 전혀 다른 진리라는 의미에서 ‘초월’이라 통칭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초월적 진리를 깨달은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현세적 가치에 의한 삶을 살지 않고 초월적 진리에 따른 삶을 살고자 한다. 이전까지와는 다른 삶의 가치와 기준, 방향성을 지니게 된다. ‘초월 추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은 현세의 삶 안에서도 그 한계에 머무르지 않고 초월적 진리가 궁극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는 점에서, 초월적 진리에 따른 삶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초월 추구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인간은 종교적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이런 의미를 지닌다.

인간이 초월 추구의 삶을 산다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도 있다. 고대인에서부터 현대인에 이르기까지, 동서양 어느 문화권에 살고 있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게 되는 질문이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태어났을까, 인간의 삶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인가,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 무엇이 진리인가…… 이런 질문은 누구에게 억지로 부여받아 해결해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인가 불현듯 스스로 떠올리게 되는 질문이다. 이런 점에서 이들 질문을 ‘궁극적 질문[관심]’이라고 표현한다.

인간은 이러한 궁극적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한다. 하지만 현세적 차원에서는 이들 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을 얻을 수 없다. 현세적 가치와 기준은 유한하고 가변적인 의미를 지닐 뿐이고, 궁극적 질문은 보다 근원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와 기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결국 인간은 궁극적 질문에 대한 온전한 답을 초월적 진리 안에서 확인하게 된다. 초월적 진리야말로 인간의 궁극적 질문에 대한 온전한 답을 제시해줄 수 있다.

결국 인간은 초월적 진리를 만나면서 비로소 진정한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다. 궁극적인 삶의 의미와 방향성을 찾게 된다. 인간에게 종교가 갖는 의미는 바로 이렇게 초월적 진리를 깨닫게 이끌어주는 것이다. 종교는 초월적 진리에 입각하여 인간 삶의 의미 그리고 원칙과 방향을 제시해준다.

4. 현대 종교 상황 대처를 위한 한국불교의 정체성 회복

인간에게 종교가 지니는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 현대 종교 상황을 대처하는 가장 근원적인 방향이다. 현대 종교 상황 안에 처해 있는 불교와 가톨릭 역시 ‘삶의 종교’로서의 본래 의미를 회복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둘 필요가 있다. 인간에게 삶의 의미와 방향을 제시해주는 살아 있는 종교로서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 불교와 가톨릭이 처한 여러 세부 문제 상황들을 근원적으로 극복하는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회복’이라고 표현했듯이 사실 삶의 종교로서 본래 의미는 이제부터 새롭게 찾거나 만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다. 이미 지니고 있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글자를 눈앞에 놓고서도 읽지 못하는 것처럼 이미 지니고 있는 종교 본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종교문맹’이다. 종교문맹을 벗어나 그 본래 의미를 온전히 드러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불교와 가톨릭 모두 분명 이러한 삶의 종교로서 의미를 본래 지니고 있다. 본래 지니고 있는 특성이라는 점에서 자기 정체성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대 종교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근원적 노력은 불교와 가톨릭의 자기 정체성 회복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역사와 삶 속에서 확인해야 한다. 한국인의 역사와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는 점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자기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기준이다. 특히 불교는 가톨릭에 비해 오랜 역사의 검증 과정을 거쳤다는 점에서 이러한 자기 정체성 확인 작업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제 한국인의 역사와 삶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불교의 역할과 의미 몇 가지를 정리해볼 것이다. 이러한 모습으로서의 불교 정체성에 더욱 초점을 맞추기를 제안하는 것으로 이 글의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1) 초월적 인식 제공

불교는 한국인에게 초월적 인식을 제공해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초월적 인식이란 현세적 가치와 질서에 연연하거나 종속되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불변의 진리[초월적 진리]에 입각하여 세상과 삶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 초월적 진리에 입각하기에 현세적 삶의 상황에 대한 비판과 개혁 의식을 지니게 된다. 현세적 삶을 초월적 진리에 부합하는 삶으로 변화시키려는 비판과 개혁 의식이다.

불교가 이러한 초월적 인식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은 깨달음 추구와 출가수행이라는 불교 특성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불교는 무엇보다 깨달음의 종교라는 점에서 그 특성이 있다. 불교의 깨달음은 단순한 앎이 아니라 존재의 변혁을 의미한다. 인간과 세상의 참모습을 깨우침으로써 온전히 초월적 진리에 입각하여 세상과 삶을 대하는 새로운 존재로 변화된다. 이렇게 변화된 존재이기에 진리에 어긋난 모습을 보이는 현세적 삶의 상황에 대해 비판과 개혁 의식을 지니게 된다.

그리고 불교의 깨달음 추구는 출가수행이라는 삶의 형태를 선택함으로써 구체화된다. 출가수행의 삶은 결코 현실도피나 부정을 의미하지 않는다. 출가수행의 삶은 포기의 삶을 의미한다. 현세적 가치와 질서에 종속된 삶을 포기하고 부정한다. 출가수행의 삶을 선택한 것에서부터 현세적 삶의 상황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 같은 불교의 초월적 인식은 한국 역사의 여러 시대에 정화(淨化)와 개혁의 정신으로 드러났다. 대표적인 예로 우선 신라시대 대중 교화에 헌신한 선각자적인 고승들을 들 수 있다. 혜숙(惠宿), 혜공(惠空), 대안(大安), 원효(元曉) 등이 규범적인 틀과 형식을 떨쳐버리고 서민들의 삶과 함께했던 것은 현세적 가치 추구에 빠져버린 당시 귀족불교의 흐름을 부정하고 상구보리 하화중생(相求菩提 下化衆生)이라는 불교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비판과 개혁의식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말여초의 선불교 운동 역시 당시 상황에 대한 비판과 개혁의식을 보여준 사례이다. 선불교 운동은 비록 선불교가 지니는 사상적 한계로 인하여 전통적 불교의 한계를 철저히 극복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지만, 국가불교로서 기성 교단이 왕실과 중앙 귀족의 안위를 기원하는 기복적이고 의례적인 불교를 지향했던 점을 비판하면서 개혁적인 성향을 띤 운동이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고려시대 지눌(知訥)에게서도 이러한 비판과 개혁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지눌이 주도한 정혜결사(定慧結社)는 무신정권 시대의 혼란 속에서 침체되고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린 불교계를 정화하려는 실천운동이었다. 두텁고 짙게 드리워져 있던 현세적 혼란의 어둠 속에서도 불교 본연의 초월적 인식이 빛을 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휴정(休靜) 역시 불교 본연의 초월적 인식을 잘 보여준다. 휴정에 관해서는 극심한 배불(排佛) 정책으로 암울했던 조선시대 불교의 명맥을 유지시킨 공헌과 승군(僧軍)을 일으켜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구한 공헌 등을 떠올리지만, 그에게서 주목해야 할 보다 중요한 점은 철저한 수도승(修道僧)으로서 면모이다. 휴정은 현세적 상황에서 그에게 주어진 책무를 결코 회피하지 않고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현세의 일에 연연하거나 종속된 것은 아니었다. 시대적 상황이 그에게 요구한 역할이 끝나면 휴정은 아무런 미련 없이 현세의 삶을 떠나 본연의 모습인 산승(山僧)으로 되돌아갔다. 현세의 삶을 살면서도 초월적 인식을 잃지 않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불교의 초월적 인식과 연관하여 근대 한국불교계의 개혁운동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고, 현대 한국불교의 민중불교 운동과 재가불교 운동에 대해서도 보다 집중적인 관심과 진전이 요구된다. 전통적인 한국불교의 특성으로 산중불교 혹은 은둔불교적 성격이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지만, 도심 포교당 활동과 현실 삶의 상황에 대한 불교계의 적극적인 대응 등에서 현대 한국불교의 변화와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다. 재가신자들의 역할 참여 제한과 재정구조의 불투명성 등 사찰 운영의 비근대성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개혁 노력이 필요하다. 불교 수행에서도 지금까지의 한계와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개혁의식이 필요하다.
위에 언급한 한국 역사 속 불교의 비판 개혁적 역할이 현대 한국불교에 또다시 필요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와 연관하여 2010년 3월 11일 입적하면서 불교 신자들은 물론 사회 전반에 큰 반향을 일으킨 법정(法頂) 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2) 조화와 공존적 인식 제공

한국 역사 속에서 불교의 역할로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특성은 조화와 공존적 인식을 제공한 점이다. 이 점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지만, 특정 시대의 이념적 산물로서가 아니라 실제 역사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긍정적 역할에 대한 온당한 평가라는 원칙에 따른 논의가 필요하다.

불교가 조화와 공존적 인식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불교 자체의 특성에 기인한다. 불교는 표면적[현상적] 다름과 그로 인한 갈등·대립을 근원적[본질적] 통일성에 의해 조화시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불교의 특성이 자기중심적 포괄주의의 성향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갈등과 대립을 조화와 공존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원리를 간직하고 있다는 점은 불교의 두드러진 특성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불교의 보편적 특성이 한국 역사 안에서 드러난 구체적 사례를 여러 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새삼 논의가 필요 없는 신라시대 원효(元曉)의 화쟁(和諍) 사상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원효는 일승(一乘)과 삼승(三乘), 중관(中觀)과 유식(唯識) 등 중국불교를 비롯한 당시 불교계의 이론적 종파적 갈등과 대립을 일심(一心) 개념에 근거하여 종합하고 회통시키는 절묘한 논리를 제시했다. 원효의 화쟁 논리는 상극(相剋)이 아닌 상생(相生)의 방향으로 조화와 공존을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의 갈등과 대립 상황과 관련해서도 여전히 주목을 받는다.

원효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조화와 공존적 인식은 고려시대의 의천(義天)과 지눌(知訥) 등에게 이어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의천은 천태종 개창을 통해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의 조화를 도모하는 등 불교 개혁 의지를 실천하였다. 지눌 역시 선(禪)의 가르침과 교(敎)의 가르침이 하나의 근원을 지닌다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수행에서도 정(定)과 혜(慧)의 방법을 함께 닦을 것을 제안하였다. 표면적인 다름에 얽매이지 않고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조화와 공존적 인식을 제공한 것이다.

한국불교가 조화와 공존적 인식을 제공한 또 하나의 사례는 조선시대 기화(己和)이다. 기화는 정도전(鄭道傳)으로 대표되는 조선 초기의 극심한 배불론(排佛論)에 대응하여 유(儒)·불(佛) 조화론을 제시하였다. 궁극적 진리로서 유교와 불교는 서로 다를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상대방의 공격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똑같이 맞받아 공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배불론에 대응하는 기화의 방식은 싸워서 결판을 내보자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하나로 조화시키고 공존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화의 방식이 조선시대 불교계의 절박한 열세 상황을 반영한 전략적 선택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분명 기화의 방식에는 불교 본연의 조화와 공존적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조화와 공존적 인식 제공의 불교 역할에 관해서 기존 연구에서 적지 않은 문제 제기가 이루어졌지만, 이들 문제 제기로 인해 한국 역사 속에서 지속적이고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성을 폄하하거나 소홀히 다룰 수는 없다. 아울러 이러한 특성이 한국불교만이 아닌 불교 전체의 보편적 특성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점은 불교의 보편적 특성이 한국불교 맥락 안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드러났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 자체가 지닌 보편적 특성이라 할지라도 유독 한국불교 전통에서 지속적이고 두드러지게 드러났다면 분명 그 사실 자체가 한국불교의 특성일 수 있을 것이다.

3) 삶의 가치관과 윤리의식 제공

불교가 한국인의 삶과 역사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은 삶의 가치관과 윤리의식을 제공한 점이다. 이와 연관하여 우선 불교의 업보(業報)−윤회(輪廻) 사상의 영향을 들 수 있다. 특히 삶의 현세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는 유교적 세계관에 비해, 불교의 업보-윤회 개념은 삼세(三世, 과거−현재−미래)를 관통하는 세계관을 제공하였다. 아울러 선(善)을 행하고 악(惡)을 멀리해야 하는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이유를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였고,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현실 삶의 고통과 불의(不義)에 대한 이해와 위안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불교가 한국인의 가치관이나 윤리의식에 영향을 준 것과 연관하여 강조할 만한 또 하나의 내용은 자비(慈悲)의 개념이다. 대승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비의 마음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보살(菩薩)이라는 이상(理想)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그들의 상황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지니고 더 나아가 그들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이상적 가치로 생각하게 된 것은 분명 불교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불교가 제공해 줄 수 있는 삶의 가치관과 윤리의식은 현대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을 위해 새롭게 해석되고 적용될 필요가 있다.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 경향이 사회 전반에 부정적 측면으로 작용하는 문제점이 더욱 심각해지는 현실을 보면서, 이에 대한 적절한 치유가 필요하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여러 종교적 가르침에 근거한 영성적 대응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불교의 특성과 역할이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

 

 

오지섭
서강대 종교학과 대우교수.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동 대학원 졸업(석사, 박사). 서강대, 한신대, 가톨릭대 강사와 서강대 종교연구소 책임연구원 등 역임. 주요 논문으로 〈한국 유(儒)·불(佛) 공존의식의 배경에 관한 연구〉 〈한국불교의 특성과 정신 : 한국인의 역사와 삶 속의 역할을 중심으로〉 등과 저서로 《아이와 함께하는 아주 특별한 즐거움》 역서로 《인도인의 신비사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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