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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영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장선재 도서출판 장경각 편집부
[30호] 2007년 03월 10일 (토) 장선재 sudhana21@hanmail.net

1. 영화는 이제 생활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국 관객 수는 2000년 6169만 명이던 것이 이후 5년 연속 연 평균 20.4%의 성장을 계속하여 2004년에는 2000년의 2배가 넘는 1억 3000만 명을 넘었다. 2005년의 경우 전국 관객 수는 1억 4300만 명에 한국 영화 점유율이 59%2)였으며 급기야 2006년에는 1991년 이후 가장 많은 110편의 영화가 제작되면서 전국 관객 수 1억 6400여 명에 전국 점유율 64.2%(추정치)라는 파격적인 기록을 낳았다. 특히 연초의 <왕의 남자>에 이어 <괴물>도 1000만 관객을 돌파3)하면서 한 해에 두 편의 영화가 1000만이 넘는 관객을 모은 해로 기록되었다.

전국 관객 수가 1억 6000만에 한국 영화 점유율이 64.2%라면 대략 모든 국민이 1년에 3번 정도 영화를 보았고 그 중에 2번은 한국 영화를 보았다는 이야기이다.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는 일부러라도 봐주는 센스를 발휘해야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 낄 수 있고, 영화평론가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영화를 보는 안목과 의견이 있어야 제법 문화인 대접을 받는 형편이다. 이런 수요 덕분에 각종 포털사이트가 영화정보를 주요하게 전달하는 것은 물론 공중파와 케이블을 가리지 않고 영화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방송사마다 있다. 심지어 뉴스 시간에까지 영화가 거론된다. 이 정도로 영화는 이미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1000만 불자를 자랑4)하는 불교계로서도 제대로 영화를 활용할 수만 있다면 불교를 전달하는 데 큰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 영화의 필요성과 가치는 높다. 이 글에서는 불교 영화의 현실과 문제점들을 짚어보고 과연 불교가 어떻게 영화를 품어 안고 포교의 방편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로 한다.

2. 불교 영화, 소재인가 해석인가

불교 영화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아쉽게도 아직까지 우리 영화계와 불교계가 불교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지 않아 제대로 된 불교 영화 담론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정확하게 불교 영화에 대한 정의조차 내려져 있지 않은 상태이다. 그저 개인적인 차원에서 몇 가지 정의가 제시되어 있다.5) 몇 가지를 살펴보자.

불교는 우리 민족의 상징적이며, 보편적인 정서로 누구나 알고 있다. 비록 그것이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것이기는 하나, 다른 어느 종교보다도 우리에게 토착화된 민족종교인 것이다. 불교 영화의 개념 역시 그러한 범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정서, 설화, 민담의 자연스런 표출이 영화로 나타나면 그게 불교 영화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6)

지금까지 제작된 한국 불교 영화를 굳이 ‘장르의 한 범주’ 내로 규합시키고자 한다면 그 부분은 ‘불교 소재나 주제를 다룬 영화’에로 귀결된다.…… 그런데 ‘불교 소재와 주제’라는 것은 대체적으로 불교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 넓게는 불교경전에서부터 좁게는 불교에 관련된 미미한 소재에 이르기까지 그 폭이 넓고 깊다. 이런 이유로 어떤 식으로 만들어지든 불교적인 요소가 들어간 영화는 불교문학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힘들다.7)

불교는 이미 우리 민족의 상징적이며, 보편적인 정서가 되었다. 불교 영화의 개념 역시, 불교 문학이나 불교 연극의 개념과 같은 인식에서 출발한다. 우리 민족의 정서, 설화, 신화, 역사, 그리고 민담의 자연스러운 표출이 영화로 나타난 것을 이름한다. 그러한 까닭에 불교 영화 또한 다른 저작과 마찬가지로 불교라는 공통의 개념 줄거리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불교 영화는 어떤 이야기 구조를 갖는 영화를 말할까? 이 범주에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불교적 소재 혹은 불교 사상적 주제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교 영화란 좁은 의미로는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넓은 의미로는 스님, 불교의 교리, 의식, 일화가 굳이 등장하지 않더라도 불교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면 불교 영화라 볼 수 있다. 8)

대체로 기본적인 불교 영화의 정의를 “우리의 전통 문화인 불교를 소재로 하고 있는 영화”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전통 문화로서의 불교를 소재로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교를 소재로 새로운 형태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또 다른 전통 문화인 국악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국악을 소재로 현대에 맞는 음악을 만드는 일은 크게 네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9)

첫째, 전통 음악을 일반인에게 친숙한 서양 악기로 연주하는 경우로, 가장 오래되고 쉬운 방법으로서 민요를 피아노로 연주한다든지 대중 가수가 민요를 부르는 경우이다.

둘째, 일반인에게 친숙한 서양 음악을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경우로, ‘슬기둥’의 캐럴 음반이나 숙명가야금연주단의 활동을 예로 들 수 있다.

셋째, 전통 음악을 변주하여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를 섞어 연주하는 경우로, 수궁가를 재즈로 편곡한 안숙선의 “토끼이야기(Rabbit Story)”(김덕수 패 사물놀이의 <난장, 뉴 호라이즌>에 수록)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넷째, 완전한 창작곡을 만들어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를 섞는 경우이다.

셋째와 넷째는 본격적인 퓨전 국악으로서 창단 20년이 넘는 ‘슬기둥’을 시작으로 최근 10년 사이에 많은 연주자와 그룹이 등장하여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해금 연주자 정수년·강은일·꽃별, 소금 연주자 한충은,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25현 가야금 연주자 정민아, 그룹으로는 해금실내악단 이현(二鉉)의 농(弄)·노리터(Noriter)·그림 (The林)·바이날로그(Vinalog)·뮤직꼬레(Music Core)·소리아(Sorea)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퓨전 국악을 길게 거론한 이유는, 전통 문화인 국악을 일반인들과 함께 하려는 국악계의 노력이 이만큼 치열하다는 것을 보이려는 목적 때문이고, 이런 퓨전 국악을 통해 불교 영화를 정의하는 데 힌트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가락과 박자를 기본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서양 음악과 다른 전통 국악의 가락과 박자를 아무리 변주하더라도 국악의 맛을 느끼게 할 수 있다. 완전한 창작곡이어도 어떤 악기를 사용했느냐와 상관없이 국악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다음과 같은 우봉규의 설명을 보자.

대부분의 불교 영화들은 문학과 마찬가지로 불교라는 무거운 종교적 주제 속에서 불교를 다뤄 일반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 데는 실패하고 있다. 불교 영화는 불교 문학과 같이 스님과 절, 부처님의 가르침이 직접적으로 꼭 나와야 한다는 과도한 소재주의에 빠져 불교의 보편적인 진리를 오히려 왜곡하는 현상을 빚고 만 것이다. 즉 제목만 불교 영화이고, 그림만 불교 영화인 영화가 생산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진정한 불교 영화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 불교 영화는 단순히 소재의 문제만이 아니어야 한다.

대승적 차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대부분의 영화는 다 불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령 기독교 영화라고 해도 불교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다. 세상의 희로애락 모두를 불교는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문제는 우리의 눈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불교 영화냐 아니냐가 결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 영화의 과제는 그 생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해석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명한 선사의 일대기를 그리거나 불교적 소재를 영화적으로 생산해내는 일보다는 그러한 소재를 얼마나 불교적인 입장에서 해석해내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10)

제대로 된 불교 영화란 불교를 소재로 한 것에 그치면 안 되고 불교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21세기에 맞게 불교를 전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관객과 소통하여 관객이 극장을 찾게 해야 하는 영화의 기본적인 역할을 위해서도 더욱 그렇다. 불교 신자도 일반 영화와 불교 영화를 앞에 두고 불교 영화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은데 일반 관객들이 불교 영화를 선택할 리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불교적 소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불교적인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가 불교 영화여야 한다.

3. 불교 코드를 제공하는 매뉴얼이 필요하다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은 현재 불교계의 사정으로는 영화를 직접 제작하기 힘든 상황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은 일반 영화나 방송 등에서 바로 이용할 수 있는 ‘불교 코드’를 마련해 주는 일이다. 일종의 ‘불교 매뉴얼’을 마련하는 것이다.

조셉 캠벨(Joseph Campbell)의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The Hero with a Thousand Face)》11)이 미국 영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아이디어를 줄 수 있는 지침서를 마련하자는 것이다. 순수하게 불교를 담고 있는 종교 영화도 포교의 중요한 방법이겠지만 조금 더 확실하게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일반 영화 속에 불교적 코드를 넣는 일이기 때문에 지침서는 중요하다.

기독교가 문화의 상식인 미국 영화에는 이미 일반 상업영화 속에 자연스럽게 기독교 논리가 녹아 있다. 영화 <보디가드(Bodyguard, 1992)>를 보면 ‘남성이 여성과 남자 아이를 지켜준다’는 큰 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보디가드인 남성을 십자가와 한 화면에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영화는 보디가드가 하나님이고 가수인 여성은 마리아이며 그의 아들은 예수님이라는 구조를 드러낸다.

따라서 영화의 주제곡인 “나는 항상 너를 사랑한다(I will always love you).”는 영화 중간에 나오는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Jesus loves me).”라는 찬송가에 대한 응답곡인 셈이다. 이처럼 부성(父性)을 강조한다거나(<퍼펙트 월드(Perfect World, 1993)>, 서로 다른 두 형제를 등장시켜 아버지와의 대립을 그리는 등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 1992)>은 기독교적인 코드를 선양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3부작 <매트릭스(Matrix, 1999, 2003)>는 예수의 비유를 넘어서 모세의 구도까지 차용할 정도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불교 코드는 영화가 전하려는 주제와 부합하여 설명할 수 있는 ‘바른’ 불교 개념이다. 몇 가지 한국 영화를 거론하면서 코드 고민을 해 보자.

1)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김기덕의 우리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은 ‘조신설화’를 차용하고 있는 점에서 전통의 불교 문화를 현대적으로 변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불교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는 전혀 답을 주고 있지 못하다.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어 제대로 삶을 살고 있다는 암시를 주지 못하고 모두 윤회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출가와 재가의 냉정한 구분이나 수행을 방해하는 여성 등 불교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줄 수 있는 요소들이 담겨 있다.12)

노스님과 젊은 스님이 사는 절에 동갑내기 소녀가 요양을 위해 찾아오고, 거의 강간에 가까운 관계를 맺는다. 소녀는 이제 요부가 되어 스님을 유혹한다. 결국 젊은 스님은 소녀를 따라 절을 떠난다. 소녀와 결혼한 스님은 결국 아내의 불륜을 참지 못하고 살인범이 되어 절로 도망쳐 온다. 자신에 대한 학대만을 일삼다 노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참회를 하고 경찰에 잡혀가 세속의 죄값을 치르고는 중년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그 후 평생을 짓누르던 마음의 돌을 털고, 어느 여인이 두고 간 아이와 함께 산다는 것이 이 영화의 큰 줄거리이다.

병을 치유하려고 오는 여인, 그 여인의 유혹, 살인을 저지른 주인공의 도피, 세간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절로 돌아오는 주인공이라는 모든 설정이 한 편의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더욱이 아이를 두고 간 여인은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주인공의 젊은 시절을 유혹한 소녀의 대가를 치르는 것 같다.

하지만 《능엄경》에서 아난을 유혹한 마등가녀도 이런 벌을 받지는 않는다. 부처님을 해치려던 그 모든 이들도 결국은 모두 구원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그런 점에서도 이 영화는 전혀 불교적이지 않다. 사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스님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법복인지도 알 수 없는 옷에 불상 앞에 절 한 번 제대로 하지 않는데 그저 머리만 깎고 있다고 스님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은가?

절이라는 공간이 세간의 윤회를 비유하는 공간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윤회만 하고 있는 중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절이라는 공간을 철저하게 세간과 분리된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 역시 설득력이 없다. 일주문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구조가 바로 ‘차안’과 ‘피안’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산 위의 불상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신의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에 잘못된 설정이다. 주인공이 깨달았다면 자신의 삶을 반복하는 동자의 모습은 설명할 방법이 없다. 깨달은 사람이 윤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아제 아제 바라아제

임권택의 <아제아제바라아제(1989)>의 이야기 구조는 어빙 랩퍼(Irving Rapper)의 <기적(The Miracle, 1959)>과 너무도 닮아 있다. 두 영화는 성직자의 길을 걸으려는 여주인공이 그 길을 포기하고 세상 속에서 부대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두 영화의 이야기 구조가 같다는 것은 이런 전체 구도를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주인공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이다. 두 여주인공은 본인의 의지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남자 때문에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다음 상황이다. 만나는 남자들, 정확히 표현하면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남자들이 죽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테레사 수녀가 처음 수도원을 나왔을 때 그를 겁탈하려는 프랑스 군인을 시작으로 영화 <기적>에서는 네 명의 남자가 죽음을 맞는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도 처음에 등장한 순녀의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현우와 송기사 모두가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왜 세속에서 만나는 남자들은 죽을 수밖에 없는가? 혹시 성직자는 신성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간의 범상함이 근접할 수 없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세간 사람들은 함부로 성직자에 대해 연정을 품지 말라는 경고일까?

테레사 수녀가 수도원을 비우는 사이 마리아상이 테레사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청화 스님에게는 그런 기적이 없다. 테레사의 육체는 비록 세상 속을 떠돌고 있지만 그 영혼은 늘 하느님 곁에 있다는 의미이다. 수녀는 하느님과 결혼한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을 섬기지 않고 인간의 남성을 따른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 점은 “하느님이 늘 경고했다.”는 마이클의 대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테레사 수녀는 마리아상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되어 그가 수도원을 비운 사이 풍요롭던 마을에 가뭄이 들다가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와 하느님과의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자 비가 내림으로써 축복이 깃들게 된다.

<기적>은 그렇게 이해할 수 있지만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는 왜 남자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영화에서는 청화 스님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는 진성 스님이 등장한다. 중생과 함께 해야 하고 세간 속에서 법을 펼쳐야 한다는 청화 스님과 달리 진성 스님은 엄정한 출가주의자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는 두 스님의 삶을 끊임없이 대조시킴으로써 진정한 불교의 모습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강조하려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화의 그런 의도를 쉽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특히 그것은 남자들이 죽는다는 사실 때문에 더하다.

중생의 아픔과 함께 한다는 일이 중생에게 다가갔을 때 그가 죽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애욕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 애욕을 없앨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잘 된 불교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기적>의 구조를 닮아 있는 변형된 기독교 영화로 보인다.13)

3) 귀신이 산다

김상진의 <귀신이 산다(2004)>는 귀신이 우리와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그저 우리 곁에서 늘 살고 있는 존재라는 말을 한다. 인간계의 중음신이 바로 영화에서 이야기하는 귀신이다. 영화는 연화와 필기가 아웅다웅하며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즐겁게 보여준다. 일찍이 <전설의 고향>이나 <월하의 공동묘지>, <구미호> 류의 영화에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교통사고로 죽은 많은 귀신들과 일상적인 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공사장에서 늘 귀신과 함께 사는 장반장의 모습을 통해 귀신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이라는 이야기를 전한다.

귀신이 등장하는 <전설의 고향> 이야기가 그렇듯이 <귀신이 산다>도 귀신의 한을 풀어 주는 일이 영화의 큰 핵심이다. 그런데 이게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해서 그 범인을 찾아 원한을 풀어 주는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이 다시 돌아와야 할 집을 지키는 일이다. 영화는 집을 둘러싼 양쪽의 공방을 통해 귀신 이야기를 슬쩍 돌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연화라는 귀신을 보호하려는 필기의 노력은 철거지역 세입자들을 방치하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일갈이고, 온갖 귀신들이 모여서 연화의 집을 지키는 장면은 그 동안 그 많은 재개발 지역에서 벌어진 폭력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경책하는 몽둥이인 셈이다. 귀신은 쫓아내야 할 불안한 존재가 아니라 함께 도우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14)

4) 거울 속으로

김성호의 <거울 속으로(2003)>는 거울을 통해 ‘둘’의 이야기를 하고 이것을 ‘직선’을 통해 말한다. 영화는 반복적으로 직선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배경이 되는 백화점 건물, 뒤쪽의 아파트 건물, 보안실의 모니터 화면들, 엘리베이터, 그 속의 거울 등 온통 직선과 격자 무늬투성이다. 직선은 하나이지만 양 끝점을 갖는다는 점에서 ‘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장치이다. 영화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통해서도 ‘둘’을 말한다.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우영민’, 두 여자주인공의 이름은 ‘이지현’과 ‘이정현’. ‘우(보통 성씨에 쓰이는 우는 禹이지만 맥락적으로는 偶라고 생각해도 관계없으리라 본다)’라는 성이나 ‘이(마찬가지로 李가 아니라 二로 보고)’라는 성이나 모두 ‘둘’이다.

‘둘’은 대칭이고 대립이며 분열이다. 반면 ‘하나’는 통일이자 조화이며 근원이다. 하지만 이때의 ‘하나’는 두 개 중의 하나가 아니라 그들을 다 포함하는 전체의 의미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여러 개의 사과 중에서 개별의 사과 하나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사과’라는 전체 개념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효 스님의 ‘일심’이 바로 이것이고 《기신론》의 중생심이 바로 이것이다. 분별이라는 말이 무엇이든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하려고 하는 망상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세상을 둘로 보려는 것은 결국 무명 탓이다. 그러니 둘로 나누어 보지 않고 근원의 하나로 바로 보는 일이 바로 해탈이 된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한 것 아닐까?

거울을 바라본다는 일이 나 자신을 바로 보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이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하며 내내 입김으로 자신의 모습을 가렸지만 끊임없이 거울에 끄달리다 보니 결국 거울 속에 갇혀 버린다. 엘리베이터 양쪽에 있는 거울 속에 비친 무수한 나 중에서 누가 진정한 나이겠는가? 거울의 나도 내가 아니고 현실의 나도 거울에 비치는 한 내가 아니다. 그러니 무아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15)

외양은 불교 영화이면서 불교 영화로 보기 어려운 영화 두 편과, 일반 상업 영화인데도 불교 코드를 뽑아낼 수 있는 영화 두 편을 거론해 보았다. 아무래도 후자 쪽으로 불교 영화를 마련하는 것이 일반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쉽다. 물론 후자의 영화들이 불교 코드를 알고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영화에서 뽑아낼 수 있는 불교 코드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4. 불교 코드의 예

일반 영화에 불교를 담을 수 있는 두 가지 코드를 예로 들어 보자. 부파불교의 교리를 이용한 기억의 문제와 시간의 문제이다. 부파불교에서는 기억의 문제로 윤회한 사람의 동일성을 확인하는 논쟁이 등장한다.16) 어떤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과 같은 사람인가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기억을 이용하는 것으로 달라이 라마를 모실 때에도 이런 방법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코드는 영화적으로 상당한 매력이 있는 코드이다.

이미 이재한의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원작은 일본 드라마 <순수한 영혼 : 당신이 나를 잊어버려도>)나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의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은 물론 많은 영화에서 부분적인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데, 단순히 연인과의 추억을 내용으로 하는 영화에서 그치지 않고 ‘과연 나는 누구인가?’ 또는 ‘나라고 결정짓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등의 주제를 표현하는 영화로도 만들 수 있다.

우리 영화에서는 드물지만 타임머신이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부파불교의 시간관을 구현할 수 있다. 존 맥티어넌(John McTiernan)의 <백 투더 퓨처(Back to the Future, 1985)>에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 갔다가 출발한 시점으로 오지 않고 약간 다른 시점으로 돌아와 예전과 다른 현실을 만나는 구조가 나타나는데, 다층적인 시간층을 거론하는 부파불교의 시간론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5위 75법 중에 어떤 것들과 상응하는가에 따라 세상이 펼쳐진다는 것이 부파불교의 일반적인 설명이다. 지금 찰나에 60가지 법과 상응하면 나머지 15가지 법은 지금 찰나에 생기지 못하기 때문에 비택멸무위(非擇滅無爲)가 된다. 이 설명은 근(根),경(境),식(識) 3사의 화합만을 세계로 인정하는 냉정한 사유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마디로 하자면 내가 지금 이 순간 6근으로 만나는 것만이 세계라는 뜻이 된다.

2007년 3월 1일 아침 10시에 1967년으로 가서 어떤 일을 하고 과거로 돌아간 그 시점, 즉 2007년 3월 1일 아침 10시가 아니라 <백 투더 퓨처>처럼 아침 9시 55분으로 돌아온다면 불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세상과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경험한 세계는 과거로 간 시점부터 과거에서 활동한 시간, 다시 돌아오는 과정 등이 모두 포함되므로 이미 원래의 2007년 3월 1일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9시 55분으로 돌아왔다고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10시로 돌아왔더라도 세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백 투더 퓨처>뿐만 아니라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의 <터미네이터(Terminator, 1984)>, 제임스 웡(James Wong)의 <더 원(The One, 2001)> 등도 모두 이런 코드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시간의 문제는 타임머신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시간을 소재로 한 다양한 영화에 응용할 수 있으며 더 확장하여 다층적인 세계를 소재로 하는 영화로도 만들 수 있다.

이런 큰 틀의 코드뿐만 아니라 소품이나 간단한 영화적 상징으로 이용할 수 있는 코드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 코드가 듬뿍 담긴 <매트릭스>는 불교 영화를 위해 학습해야 할 중요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용어사전까지 있다.17)

장기적으로는 이런 코드가 포함된 제대로 된 매뉴얼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불교 개념을 영화에서 응용할 수 있도록 하는 세부적인 개념 설명과 소소한 소도구를 이용할 수 있도록 소품에 대한 설명까지도 거론해 주어야 한다. 매뉴얼 마련에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선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모니터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영화인들의 문의에 적극적으로 응대하는 일이다. 또한 그들의 문의에 대해 세세한 부분까지 검토하고 알려 주어 불교를 오해하는 부분이 없도록 해야 한다. 박철관의 <달마야 놀자(2001)>가 좋은 예이다.

5. 불교가 문화의 상식이 되어야 한다

전통 문화인 국악이 우리 사회에 퓨전의 옷을 입고 조금이나마 대중의 관심을 얻을 때까지는 국악계의 많은 노력이 있었다. 국악이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는 가장 큰 이유로 국악계에서는 서양 음악 위주로 되어 있는 학교 교육을 꼽는다. 우리는 종교이기 때문에 학교 교육 탓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종교로서의 불교는 어쩔 수 없더라도 문화로서의 불교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학교 교육에서 제대로 불교 문화를 이해시켜야 일반화되어 있는 대중 문화의 기독교 코드를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전통 문화는 불교로 가득 차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우리 문화는 기독교 문화 일색이다. 초파일은 ‘석가탄신일’이면서 크리스마스는 ‘성탄절’인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왕의 남자(2005)> 영화 1편이 1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모으면서 우리 전통의 놀이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말아톤(2005)>이나 <레인맨(Rain Man, 1988)>은 발달장애에 대한 관심을 높이게 해 각각 ‘한국자폐인사랑협회’와 ‘케네디크리거 의료원’에 대한 후원으로 이어졌다. 자연스럽게 불교적 소양이 깊어져 지금의 문화 불균형이 조정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끝으로 불교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불교 이야기를 전하시며 불교 코드가 지향해야 할 모범을 보여주신 성철 스님의 법어 한 대목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본래 순금입니다.
욕심이 마음의 눈을 가려 순금을 잡철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하는 생각은 버리고 힘을 다하여 남을 도웁시다.
욕심이 자취를 감추면 마음의 눈이 열려서, 순금인 자기를 바로 보게 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아무리 헐벗고 굶주린 상대라도 그것은 겉보기일 뿐 본모습은 거룩하고 숭고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불쌍히 여기면, 이는 상대를 크게 모욕하는 것입니다.
모든 상대를 존경하며 받들어 모셔야 합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이 세상이 본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 주려고 오셨습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다 함께 길이길이 축복합시다.
(1982년 부처님 오신 날 법어 중에서)■


장선재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및 동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재 도서출판 장경각 편집부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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