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문화의 정신사적 맥락 심층 고찰

박동춘 지음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한국 차문화사에서 조선 후기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가 침체된 차문화를 중흥할 수 있었던 배경과 다도 정립 및 초의차(草衣茶, 초의가 만든 차) 완성을 소개한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박동춘, 2010)가 발간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저서는 초의와 교유했던 사대부들의 문집과 서간문을 고찰하는 한편 초의의 차 관련 저술을 연구한 것으로 초의가 저술하고 편집한 다서를 중심으로 차 이론을 정리하였다. 아울러 초의의 제다와 탕법을 직접 실행하여 체득한 과정을 연구한 것이다. 따라서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는 초의의 차이론 및 제다와 탕법에 대해 초의의 제자인 응송(1893~1990)에게서 전승받은 다도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거쳐 저술했다는 점에서 그의 실증적인 학술 연구는 주목할 만하다. 저자는 초의의 선다사상(禪茶思想)이 불이선(不二禪)을 바탕으로 한 다삼매(茶三昧)와 명선(茗禪), 전다삼매(煎茶三昧)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초의의 다도사상이 현대 한국 선차(禪茶)의 원형을 이룬다고 하였다.
조선시대 음다(飮茶)는 배불정책(排佛政策)으로 일부 문인들이나 수행승들 사이에서 그 명맥이 이어졌을 뿐 차 문화가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초의가 만든 초의차는 경화사족(京華士族)들에게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을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830년 이후, 초의차에 대한 찬탄시와 걸명시가 잇달아 출현하게 되었는데, 이는 경화사족들과 초의의 교유 확대로 인한 이들의 차에 대한 관심이 확산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이들의 차에 대한 애호와 관심이 많은 서찰과 문집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제시하였고, 경화사족들의 초의차 애호가 실제 차문화 중흥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 이 연구가 종래의 차문화 연구에서 한층 발전된 연구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는 한국 차문화 연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러한 연유에서 저자는 초의의 《동다송》 《다신전》 《일지암시고》 《일지암 서책목록》 및 초의차의 감탄과 차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은 김정희, 김명희, 정학유, 황상, 허련의 시문과 간찰들, 박영보의 〈남다병서〉와 신위의 〈남다시병서〉를 새롭게 발굴하여 고찰함으로써 경화사족들의 차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어간 정황을 자료로 제시하였다. 또한 초의의 차문화에 미친 영향과 유·불 간의 교유 관계를 다양한 측면에서 연구하였다. 저자는 당시 주자학에 편중된 학문적 방법론에 대한 반성과 문화 자존의식의 다양한 양상을 보였던 조선 사회의 변화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당시 상황과 이들과 교유가 유(儒)·불(佛) 간의 교유이며 초의의 주도적 역할로 다도 확립의 토대가 되고 차문화 중흥의 배경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 예로 초의차에 대한 애호와 신뢰를 드러낸 김명희의 다시(茶詩)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고 있다.

 

노스님 차 가리기 마치 부처님 고르듯이 하였으니
일창일기(一槍一旗) 엄격 지켰네.
더욱이나 차 덖기 정성을 들여 원통함을 얻었으니
향미를 따라 바라밀에 든다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통찰한 저자는 초의의 다도 완성을 차이론의 정립을 통한 제다와 탕법의 완성에 있다고 하였다. 지금까지는 초의의 다도사상을 중정·다선일미라는 전제하에 《동다송》 연구가 진행되는 경향이 있었다. 또한 중정은 유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였으며, 다선일미는 ‘차(茶)’와 ‘선(禪)’의 경지가 같다는 의미로 초의의 다도사상이 ‘다선일미’로 획일화되어 온 것이 지금까지의 추세였다. 이는 초의가 젊은 시절 정약용에게 나아가 《시학》과 《주역》을 배웠고, 김정희와 신위, 정학연 등의 경화사족들과 교유를 통해 고증학이나 실학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의 사상적인 요소를 유·불 관계에서 살펴본 연유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초의가 율(律)과 선(禪)과 교(敎)에 밝았던 수행승으로 다도의 사상적 바탕은 본질적으로 불교에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차는 선의 최종 목적이 아니라 선 수행에 필요한 매개물이기 때문에 선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더구나 《동다송》은 초의가 육우(陸羽, 733∼804)의 《다경》을 이미 고찰하고, 《다신전》을 등초, 정서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차의 이론을 정립했던 결과물이라는 점을 강조 하고 있다. 따라서 《동다송》에 드러난 차의 중정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접근된 것이라기보다는 제다와 탕법의 정수를 드러내는 방법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제시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김정희와의 관계를 살피고 있다.
김정희와 신위는 차를 우리는 삼매의 경지를 전다삼매(煎茶三昧)라 표현한 바 있고, 아울러 김정희는 초의에게 명선(茗禪)이라는 호를 지어주었다. 초의의 제자 향훈에게도 다삼매(茶三昧)를 써주었다는 점에서 저자는 초의의 다도관은 조선 후기에 회자되었던 전다삼매 및 다삼매·명선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강조하였다. 이는 김정희의 차에 대한 안목과 불교에 대한 탁월한 경지에서 나온 것으로 초의의 다도를 극찬한 표현이라고 여겼다.
《동다송》에서 “체(體)와 신(神)을 나누지 말라”고 한 것과 같이 초의의 다도관은 불이선(不二禪), 혹은 일미선(一味禪)을 바탕으로 전개되며 초의의 다도의 근원은 불이선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어 박영보의 〈남다병서〉와 신위의 〈남다시병서〉 등을 고찰하여 당시 사대부들이 초의차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는지 밝혔다. 특히 초의의 유품 목록인 《일지암 서책목록》에 기록된 초의의 다구 목록을 드러냄으로써 초의의 제다법(製茶), 탕법(湯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이 연구의 특징이라할 수 있다.
다도는 일반적으로 차를 우리는 과정으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저서에서 다도는 제다법과 탕법으로 나뉘며 제다가 다도로 완성되는 배경에 대해 1838년에 신위의 시에 부기된 내용에서 “초의 차의 맛은 너무 여리므로 지난번 보관해 두었던 학원 차와 고루 섞어 같은 통에 저장했다. 다시 새로운 차 맛이 생기기를 기다렸다가 사용하였다”라고 하였고, 김정희가 1838년에 초의에게 보낸 편지에 “매번 차를 덖을 때마다 화기(火氣)가 조금 지나쳐서 정기(精氣)가 조금 침체된 듯합니다. 다시 차를 만들 때는 불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초의의 제다법은 미흡한 수준이었지만 이들의 조언으로 초의의 다도가 완성되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초의는 다도의 시작과 완성을 좋은 물을 어떻게 선택하고 끓이느냐에 따라서 차의 진수가 드러난다고 확신했다는 점이다. 그는 《동다송》에서 탕법의 중요성이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차를 따는 것은 그 오묘함을 다 해야 하고, 차를 만드는 것은 그 정미(精微) 함을 다해야 한다네. 물은 그 진수(眞水)를 얻어야 하며, 포법(泡法)은 그 중도(中道)를 얻어야만 물(體)과 차(神)가 서로 어우러져 차의 건(健)과 영(靈)이 서로 드러난다네.

이러한 탕법을 밝힐 수 있는 초의의 다구에 대해서는 확인된 바가 없었다. 다만 최근 저자는 초의 유품 목록인 《일지암 서책목록》 〈물종기(物種記)〉 편에 기록된 동철다관 (銅鐵茶罐) 일좌(一座), 납소다관(鑞小茶罐) 일좌와 흑색다관(黑色茶罐) 일좌와 백자다완과 중국 찻종(茶鐘)을 사용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다. 특히 동철이나 납소는 모두 철이나 백동으로 만든 것이며, 흑색 다관은 옹기 종류로 짐작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당시 옹기 다관은 사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그의 후인 범해의 〈다구명(茶具銘)〉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저자는 초의의 탕법이 탕관에 차를 직접 넣어 우리는 방법이었으며 뜨거운 차를 마셨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초의가 체득한 제다법과 탕법이 우리 역사의 오랜 전통과 환경 속에서 만들어낸 한국 차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저자의 견해에 대해 그의 학술적 연구는 과거와 현대를 이어 줄 소중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조선 후기 초의에 의해 중흥된 차문화가 근현대까지 이어지지 못한 원인을 밝히면서 초의의 선다 계승은 범해, 금명, 응송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범해(1820~1896)는 시기적으로 초의차의 제다 과정을 보았을 가능성이 큼으로 범해의 다시를 통해 초의 차의 제다 과정을 어느 정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범해는 〈초의차〉에서 초의의 제다 과정이 ‘채다−덖음−유념−건조 및 숙성’으로 이어졌음을 확인해 줌으로써 초의의 제다법과 장다법이 체계적이었음을 드러냈다. 또 범해는 〈다약설〉에서 차를 마신 후 몸과 마음의 변화를 자세히 서술하여 자신의 실증적인 체험을 전한 바 있다. 이렇게 수행 중 음다가 생활화되었던 범해였지만 초의가 이룩한 차문화를 계승 발전시키지 못한 시대적 한계를 지닌다. 다만 그는 초의차의 원형을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범해의 후인 응송은 근현대로 이어진 대흥사의 선다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실제 경험한 인물이다. 그는 출가 당시 다각의 소임을 맡았던 인물로, 불교 정화 이후 백화사에서 자신의 스승이었던 초의의 연구에 매진하는 한편 초의에 대한 자료와 차에 대한 문헌을 수집 연구하였다. 그는 차 이론 연구와 제다에 심혈을 기울여 그 결과를 《동다정통고》에 집약하였다. 1980년대 문화재관리국의 조사 보고서인 《전통다도풍속조사》(1980)에서 응송에 대한 평가를 “초의의 다풍을 그대로 간직한 인물이며 초의의 유품을 오늘날에 전해주어 우리의 다전(茶典)들을 말하게 된 것은 응송의 노력이다.”라고 전하고 있음을 보아, 선다는 초의로부터 범해 그리고 응송으로 이어졌음을 밝힌 바 있다.
초의에 의해 이룩된 차문화가 후대까지 계승 발전되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의 우수한 문화유산이 민멸될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 그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의 공적을 재조명한다는 것은 우리의 차문화 유산을 재론함으로써 그 가치를 인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외에도 우리 차문화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일이다. 더구나 저자는 초의의 다도를 전승한 응송의 제자로서 초의의 차문화를 구현하였다. 하지만 그의 저서가 한국 차문화의 전반을 밝힐 수 있는 자료가 희박한 실정에서 초의와 교유했던 인물들의 편지나 시문을 통해 초의의 차문화 중흥을 드러내는 데 그쳐, 조선 후기 차문화의 전반을 연구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다. 이는 한국의 다도를 일괄할 수 있는 다서가 부족하다는 한계 이외에도 음다층의 범위를 확대해 연구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초의의 차문화 중흥과 다도관, 선다 계승이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한 권의 책에 담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추후의 후속 연구를 기대한다.
불교는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문화이며 우리 민족성에 내재되어 있는 정신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그 속에 담긴 차문화는 이어 발전되어야 할 중요한 문화이다.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한양대학교 대학원 문화인류학과 졸업(문화인류학 박사). 주요 논문으로 〈한국 현대다도의 여성화와 그 특성〉 〈기호식품으로서 차의 이미지 형성과 효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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