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예술작품과 마주한 인간 혹은 연희에 참여하고 있는 인간은 종종 일상적인 삶의 구속에서 빠져나온 듯 느낀다. 이는 예술적 경험 내지는 유희의 체험이 일상의 유용성에 따라 조직된 감각과 감정들에 어떤 동요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때로 이 동요는 미적 체험을 통해 더 고양된 심미적 질서를 창조하는 계기로 작용하지만, 때로는 다만 기존의 가지런한 질서를 흩트리는 불편함으로 작동한다. 그 결과가 무엇이 되었건, 예술적 경험을 ‘비일상성’의 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영화는 19세기 말 대중의 연희거리가 부쩍 많아지던 시절 대중예술의 하나로 등장했다. 특히 20세기 초 영화의 ‘대중성’을 확보해 준 장르는 멜로드라마였다. 사랑과 증오에 관한 인간사의 고(苦)의 격정을 다루는 멜로드라마는, 골격을 갖춘 이야기 속에 절제된 감정을 담았던 고전주의 연극과 대조되는 방식으로 관객을 잡아끌었다. 멜로드라마는 단순한 이야기로 삶의 국면들을 모방하고, 고급 예술 작품과 달리 과장된 방식으로 파토스를 폭발시킴으로서 관객들에게 비일상성의 경험, 어떤 해방감을 안겨주었다. 새로이 생겨난 매체인 영화가 멜로드라마라는 장르를 통해 대중성을 확보했다는 사실은 영화가 태생적으로 지닌 일종의 감성·감상주의, 반지성주의와 세속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영화가 탄생한 지 백 년 이상이 지났고, 가장 대표적인 대중‘오락’의 하나였던 영화는 영상언어의 끊임없는 갱신을 통해 기존의 문자 매체나 시각예술 매체가 이루어 낸 예술적 성과에 버금가는 성과들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한편에선 여전히 산업시스템이 가공해낸 대중영화들이 대중에게 감정의 일차적인 분출을 돕고, 오락거리를 제공하고 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선 가장 새로운 예술적 실천이자 경험으로서 영화들이 유한한 인간 존재와 무한한 세계에 대한 사유의 기회를 제공한다. 영화라는 매체가 어떻게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을 대중/중생에게 전할 수 있는지 혹은 영화 작품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불교적인 세계관을 깨달을 수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선 영화가 가진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두 성격−태생적인 대중성의 면모와 가장 현대적인 예술적 실천의 면모−에 대한 고려를 전제해야 한다.
우선 붓다의 가르침은 대중영화의 틀 안에서 대중에게 전해질 수도 있다. 불교와 관련된 인물 혹은 불교의 교리를 구현하고 있는 인물을 시나리오에 배치하거나, 해탈에 이르는 구도자의 여정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삼는 영화들이 그 예일 것이다. 붓다의 삶을 다룬 영화들 이외에도 동승, 비구니, 승려 심지어 파계승이 중심인물이나 주변인물로 등장한 영화들이 한국이나 여타의 불교문화권 국가에서 만들어졌고, 서구에서도 〈티벳에서의 7년〉 〈리틀 부다〉 등의 영화가 제작되었다. 그런데 ‘불교코드의 영화화’를 위한 기획은 크게 두 가지의 난점에 봉착한다.
첫 번째 난점은 영화라는 매체가 지닌 태생적인 대중성, 세속성이다. 어떤 극영화가 여덟 가지의 수행방식을 따르는 어느 출가승의 구도를 제시함으로써 대기설법을 전하려 한다면, 흥미를 쫓는 대중영화에 익숙한 관객에겐 지나치게 무료한 영화가 되고 말 것이다. 또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찾는 진지한 관객에겐 견디기 힘든 도식적인 영화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실제로 고(苦)를 경험하고 있는 인간의 격정을 드러내 볼거리를 마련하는 것에 우선 관심을 가지기 마련인 대중영화의 속성상, 영화 제작자들은 출가자가 경험하는 번뇌만을 이야기의 중심 소재로 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경우 불교적 사유는 사라지고, 불교와 관련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들만이 한낱 영화의 흥미로운 소재거리로 전락하게 된다.
두 번째 난점은 종교적인 세계관을 예술적 창작의 가이드라인으로 제시하는 일의 어려움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전하기 위해 회화 및 벽화 등의 시각매체를 활용하였던 서구 기독교 문화권의 경우, ‘성스러운 예술’이라는 개념이 본래 존재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시종일관 도전받아왔다. 특히 1920년대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이 수난을 당하는 예수의 표상을 종래의 관습과 다르게 표현하여 가톨릭 종단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영화 등 대중적인 영향력이 큰 세속 세계의 문화적 경험들이 가톨릭 종단이 주장하는 ‘성스러운 예술’의 규범에 어긋나는 창작물들을 쏟아냈다. 가톨릭 종단은 1936년 비지란티 큐라 회칙을 통해 영화 등의 창작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세속적인 창작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대한 반발에 부딪혀야 했다.
1964년에는 실질적으로 어떤 스타일의 가이드라인을 세우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기독교의 경우 모방해야 할 ‘이상적인 모델−이미지’란 ‘예수의 몸−이미지’였고, 이에 어긋나는 이미지들은 ‘타락한 이미지’로 규정했다. 따라서 이 타락한 이미지에 대한 검열은 언제나 가혹했다. 그러나 2천여 년간 서구 유럽의 정신문화를 지배하며 시각적 재현물 및 문화적 생산물에 지속적으로 모방해야 할 ‘모범’들을 제시했던−그와 동시에 검열을 멈추지 않았던− 가톨릭교회가 20세기 이후 더 이상 같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거의 모든 문화와 예술의 생산 및 소비가 속세의 아틀리에에서 이루어지는 오늘날 성스러운 예술의 원형을 뒤쫓으라는 원리적 호소는 별반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 가장 현대적인 예술 언어를 실험하며 영화가 관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부여하는 순간, 영화는 붓다의 가르침과 더 많은 지점에서 공명한다.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 현대 영화의 시간관, 주체 없는(無我) 시선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영화의 카메라, 평행하고 있는 여러 삶의 교차,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 속 생명과 생명의 이어짐, 영혼의 여행, 현대 영화의 가장 새로운 시도들은 이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실험한다.
우리는 서구의 폴 뉴먼(Paul Newman) 감독이 만든 〈감마선이 금잔화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나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Abbas Kiarostami)의 영화들이 보여주는 현대적인 면모에서 불교적 사유와 겹쳐지는 어떤 면모들을 발견할 것이다. 이어 불교 신자이기도 한 아시아의 두 감독 아핏차풍 위라세타쿤과 차이밍량의 영화들을 살펴볼 것이다. 태국과 대만에서 활동하고 있는 두 감독은 가장 실험적인 형식으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이들은 영화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며 이를 시네마토그라픽한 경험으로 제시한다.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경험 그 자체는 어떻게 불교적 사유와 울림을 만들어낼까?


영화와 세계의 연기성(緣起性)
-〈감마선은 금잔화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

세계 영화계의 오늘을 진단하고 내일의 영화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하는 프랑스 칸 영화제가 끝난 후, 유수의 영화 월간 평론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는 2013년 칸 영화제에 개체의 삶을 넘어 더 큰 생명체 무리의 삶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영화가 선보이지 않았다고 통탄했다. 영화란 개체와 낱낱의 종, 식물과 동물, 광물의 삶까지 넘나들며 보듬을 수 있는 매체인데, 이 가능성을 보여 준 영화, 이를테면 명배우 폴 뉴먼이 1972년에 제작·감독한 〈감마선은 금잔화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쳤나〉와 같은 영화가 부재했다며 안타까워했다. 과학 다큐멘터리인지 의문을 표하게 할 만큼 도무지 어떤 내용인지 짐작하기 힘든 제목의 이 영화는 실은 두 딸을 키우며 힘겨운 삶을 사는 40대 여인에 대한 이야기다. 이 작은 영화는 오랫동안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 몇 해 전 새로이 복원되어 재개봉되었고, 평자들과 관객들에게 주제와 형식의 현대성으로 인해 주목받았다. 영화는 열세 살 난 딸아이의 시선을 빌려 어미로서는 그다지 모범적이지 않은 어떤 여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제목에 등장하는 ‘감마선’과 ‘금잔화’는 다름이 아니라 어린 딸아이가 학교 과학경시대회에서 발표할 내용이다. 계속 무너져가는 엄마, 위험천만하게 방탕한 생활을 이어나가는 큰 언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둘러싸인 채, 딸아이는 금잔화를 관찰한다. 방사선의 일종인 감마선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영화란 매체는 때로 일상적으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환영을 가시화하지만, 폴 뉴먼이 연출한 이 영화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감마선의 어떤 작용을 가시화하여 현실 너머 환영을 창조하려 하지 않는다. 영화는 다만, 이해할 수 없는 삼라만상의 한 양태인 감마선과 여기저기 눈앞에 지천으로 널린 금잔화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라고 엉뚱하게 가정하고 있는 소녀가 자신의 상상력을 토대로 과학경시대회 발표문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어린 소녀임에도 보살핌을 받기보다, 남을 보살펴야 하는 소녀는 소박한 들꽃이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를 상상하며 염려로 지친 마음을 다독인다.
무엇 때문에 이 영화는 소녀의 시선을 차용했을까? 아이의 어머니가 자신의 상처 속에만 빠져 남, 심지어 자식도 돌아보지 못하며, 자신의 ‘자아’에만 갇혀 있다면, 아이는 미물에서 우주에 이르는 촘촘한 인연의 양상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번하게 아이의 시선을 따르는 영화의 조심스러운 카메라는 사실적이고 일상적인, 누추한 삶을 필름 안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카메라가 잡아낸 이미지 속에, 소녀와 어른, 개인과 사회, 인간과 식물, 광물의 삶이 ‘동등’하게 존재하며, 관객은 이 이미지 속에서 우주-늘 변화하는 세상, 소녀의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것, 소녀가 실체를 따져 물을 수 없는 것-와 ‘교감’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어쩌면 영화는 카메라와 카메라가 잡아내는 이미지의 세계를 통해 자아의 구속/번뇌 밖의 세계, 세상의 빛을 체험하게 하는 가장 탁월한 매체일지 모른다. 영화가 제안하는 세계의 물질성과 외면성에 대한 주의가 외려 붓다가 설파한 연기(緣起)와 무아(無我)의 세계에 대한 통찰과 조우하는 셈이다. 다시 올해 칸 영화제의 경향을 되짚으며 새로운 영화, 진정 현대적인 영화의 부재를 아쉬워했던 어느 영화 비평가의 글을 상기해보자. 글쓴이가 기대하는 새로운 영화란 대중에게 어떤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잘 짜인 이야기가 아니다. 글쓴이는 영화라는 매체의 미학적 성과, 형식의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영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폴 뉴먼의 영화가 고된 삶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치유된 마음을 통해 다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면, 이는 이 영화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 금잔화의 향기가 스며 있는 우주, 그 안에 속해 있는 우리의 삶 하나하나에 빛을 비추며, 영화라는 매체의 형식에 가장 충실했기 때문이다.   


카메라와 무아(無我)의 시선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폴 뉴먼의 상기한 영화가 그러하듯, 카메라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영화는 주체가 발화하는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도 사물이나 피사체를 표현하기에 용이하다. 따라서 영화 속 무언의 목격자로 아이들이 종종 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를 보다 일반화하면, 영화라는 매체가 가능하게 하는 체험의 지점, 진리 탐색의 방식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제시하는 체험의 세계는 주도면밀한 자아/주체의 확립에 기반한 내면성(intériorité)의 탐색, 진리의 탐색과 다른 방식으로 마련되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카메라가 외면성의 현전 속에서 ‘시선(regard)’의 의미를 정립한다고 보는 프랑스의 철학자 장 뤽 낭시(Jean-Luc Nancy)의 언명을 잠시 상기해보자. 하이데거 사유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는 움직임 없는 조용한 카메라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아이들의 얼굴, 걸음, 뜀박질을 담아냈던 이란의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초기 작품세계−〈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체리 향기〉 등−에 《영화의 확실성》이라 이름 붙여진 한 권의 책을 헌정한다. 그에 따르면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는 “자아의 망각(oubli de soi)”을 통해 확실성·명증성의 세계에 도달한다. 그는 세계의 모든 것을 회의하더라도 회의할 수 없이 자명하게 남아 있는 실체가 사유하는 ‘나’ ‘자아’라고 가정하는 서구 합리론의 출발점과 전적으로 다른 출발점에 선다. 장 뤽 낭시에 따르면 아이들의 세계를 담은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의 시선은 자아·내면성의 자리를 ‘회피하고(évitement de l’intériorité)’ ‘비운다’. 자아의 내면성이 비워지고 회피됨에 따라, 카메라는 좁힐 수 없는 거리에 놓여 있는 대상, 피사체에 대한 일종의 ‘고려’와 ‘존중(égard)’을 표할 수 있다. 주체에 종속된 시선, 주관성의 시선 회피 속에서만 “이곳에 있는 것” “일어나고 있는 것” “일어나길 멈추지 않는 것”에 대한 ‘존중(égard)’으로서 ‘시선(regard)’은 다시 등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단순히 닮은꼴을 재생산하는 도구가 아니다. 카메라는 어떤 이미지들을 현전하게 하는데, 이 이미지들은 판에 박은 듯 동일한 세계의 재현이거나, 순전한 환영의 산물이 아니다. 절대적인 자아의 독단, 주체 시선의 독단에서 인간을 한발 물러서게 하는 키아로스타미의 카메라는 안과 밖이 나뉘지 않은 상태의 ‘밖’을 향하고, 외면성에 대한 고려를 통해, 멈추지 않고 일어나고 있는 세계의 면모, 제행무상의 면모를 밝힌다.


영화적 체험의 공성(空性)
-아핏차풍 위라세타쿤

아핏차풍은 2001년 초현실주의자들의 문장 만들기 놀이를 차용한 첫 번째 장편영화 〈정오의 낯선 물체〉를 만든 이후 독창적인 영화를 제작하기 어려운 열악한 태국 영화계 여건에도 불구하고 〈친애하는 당신〉 〈열대병〉 〈징후와 세기〉 〈엉클 분미〉 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의 작품 대다수는 세계 유수 영화제를 통해 평자들의 마음을 얻었고, 전 세계 관객들에게 소개되었다. 전 국민의 90% 이상이 불교 신자인 태국을 배경으로 한 그의 영화들엔 출가한 승려들이며 산속에 자리 잡은 불상이나 도심 병원 마당에 자리한 불상까지 불교문화와 관련된 이미지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그의 영화 속에서 승려나 사원, 불상의 이미지는 태국의 일상적 삶의 풍경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감독 자신이 나고 자란 태국 북동부 콘 가엔 지방의 작은 마을 의사였던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담아 시골 병원과 대도시 병원 두 곳을 중심으로 찍은 2007년 작 〈징후와 세기〉엔 닭들이 자기를 쫓아오는 악몽에 시달린다며 의사에게 약을 처방해달라고 부탁하는 노승려와 치과 진료를 받는 젊은 승려가 등장한다. 2004년 작 〈열대병〉의 경우에도 숲 속을 거닐던 두 사내는 낯선 여인이 이끄는 대로 지하 동굴 속에 자리한 부처상을 찾아 나선다. 〈징후와 세기〉에선 노승려나 젊은 치과의사가 전생과 윤회의 사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에피소드가 등장하며, 코끼리 사냥꾼, 소, 떠돌이 유령 등 여러 전생을 기억하는 어느 승려의 책에 바탕을 두고 만들어진 〈엉클 분미〉의 원제는 “전생을 기억하는 엉클 분미”이다. 물론 영화 속 윤회와 전생의 모티브엔 불교 사상뿐 아니라 크메르 라오스의 영향권 아래 있는 태국 북동부 지역의 정령들에 대한 민담과 애니미즘의 영향력 역시 강하게 드러난다. “샤먼의 영혼의 길”이라는 부제가 붙은 〈열대병〉의 후반부는 애니미즘의 영향력이 가장 두드러진 경우일 것이다.
이처럼 그의 영화 대다수엔 불교문화권의 문화적 징표들이 곳곳에 등장하지만, 그는 이 징표들로 극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성하지 않는다. 일각의 오해와 달리 그의 영화들은 불교의 품위를 손상하려는 의도 역시 가지고 있지 않다.(그의 영화 〈징후와 세기〉의 몇몇 장면은 국교인 불교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자국 내 개봉 당시 삭제 명령을 받기도 했다.) 같은 구조로 두 번 반복되는 〈징후와 세기〉에선 닭고기를 많이 먹은 자신의 업보 때문인지 꿈속에서 닭들에 쫓긴다고 말하는 승려에게 콜레스테롤이 많은 닭고기 소비를 줄이라고 주문하는 의사와의 대화가 거의 동일하게 두 번, 길게 등장한다. 같은 승려가 시골 병원에서 여의사와 이루어지는 첫 번째 대화 장면이나 도심 병원에서 다른 남자의사와 이루어지는 두 번째 대화 장면 모두, 정 반대의 방향을 향하도록 카메라의 방향은 변주되어 있지만, 미동 없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이들의 ‘일상적인’ 대화를 따라가는 촬영법은 여전하다. 의사에게 악몽을 호소하는 장면에 등장했던 승려는 영화 속 다른 장면에선 나타나지 않다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다시 잠시 등장한다. 한적한 강가 공원의 벤치, 공원에서 에어로빅을 하는 사람들 등 특별한 인과적·서사적 연결고리가 없는 장면들을 몽타주 한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는 공원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공중을 나는 작은 원반 접시를 조종하며 즐거워하는 노승려의 모습을 지나치듯 보여준다. 이런 소소한 장면에서 노승려는 분명 여전히 육체의 나약함에 갇힌 존재로 그려지지만, 이 장면에서 노승려의 부족한 수양을 드러내 조롱하려는 의도를 읽는다면 이는 영화에 대한 피상적인 독해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다. 감독의 미학적 선택−영화의 형식과 흐름−을 고려한다면, 외려 감독은 심원한 불교적 사유를 영화 속에 녹여 내고자 했다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우리는 온전히 다른 영화적 스타일을 지닌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었던 감독의 전작 〈열대병〉과 이 영화를 관련짓고, 〈친애하는 당신〉을 구상하며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여러 시간의 흐름을 떠올리며, 이 영화나 〈엉클 분미〉에 등장하는 윤회와 기억, 그리고 영화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상기할 때에야 아핏차풍의 영화 형식이 불교적인 세계관과 내밀하게 엮여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징후와 세기〉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거의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른 장소에서 반복하여 전개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감독의 작은 고향 마을의 병원을 배경으로 한다. 막 부임한 군의관에게 심리 평가를 하는 젊은 여의사를 보여주면서 시작되는 영화는 평온한 논밭 옆에 있는 작은 병원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폴 뉴먼의 영화가 한 소녀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소녀에 이어진 식물과 동물, 아이와 어른의 세계에도 빛을 비추었던 것처럼, 아핏차풍의 영화 역시 여의사, 이 여의사를 짝사랑하며 병원에 드나드는 군인, 여의사가 연정을 품고 있는 화초상, 약을 얻으러 온 승려, 이빨을 치료하러 온 승려, 이들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맺고 있는 크고 작은 인연을 따라간다. 감독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이 영화를 기획하였고, 영화 속에서 부모님의 젊은 날과 젊은 날을 보낸 시골 마을에 대한 기억을 닮고 싶었다고 전한다. 이 영화에서 병원은 무엇보다 모든 기억의 장소이고, 인연의 장소인 셈이다. 여느 환자처럼 진료실에 찾아온 승려는 자신의 사연을 듣는 의사 앞에서 유한한 육체와 지난 생의 갈애에 대한 근심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간이다. 그런데 아이처럼 악몽을 호소하던 승려는 다음 순간 의사에게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릴 차를 선물한다. 젊은 승려의 이빨을 치료했던 다른 의사가 다음 순간 승려에게 어린 시절 떠나보낸 동생의 사연을 소소히 전하며 전생에서 아마도 승려와 자신이 형제였을 것이라 말하는 대목에서도 마찬가지의 전도가 일어난다. 의사는 더 이상 환자를 일방적으로 치료하는 이가 아니라 환자에게 치료를 구하는 이가 된다. 이는 어느 병사의 연정의 대상이면서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마음을 품고 있는 여의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작은 병원의 진료실은 육체적인 질병에 대한 진단이 하나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인간들−의사와 환자, 승려와 신도−이 징후와 마음의 틈새를 내어 놓고, 세기(의 흐름)와 연기(緣起)를 보는 곳이며, 이런 마주침과 깨달음 속에 치유의 단초를 찾는 곳이다. 아핏차풍은 자신이 영화와 만나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자신의 첫 번째 영화적 세계는 의사였던 어머니의 병원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붉은 혈구들의 세계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도 현미경이란 그가 경험한 첫 번째 카메라−일상의 구속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인 셈이다. 그래서 병원이란 그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생명의 움직임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곳이며, 잃어버린 기억을 상기하는 곳, 또 하나의 ‘극장’인 셈이다.
영화의 제목 〈징후와 세기〉에서 ‘징후’란 물리적인 감염과 그로 인한 고통을 함축하기보다 타인과의 인연을 감지하는 마음을 함축한다면 제목을 구성하는 또 다른 단어인 ‘세기’의 의미는 전반부, 또 이와 동일하면서도 구분되는 영화의 후반부, 두 부분의 맞물림 속에서 드러난다. 자연에 둘러싸인 전반부의 작은 병원과 달리 후반부의 병원은 첨단 시설을 갖춘 채 하얀 벽에 둘러싸여 있다. 전반부와 후반부는 각각 안과 밖, 농촌과 도시, 숏과 리버스 숏, 과거와 미래 등의 영화적·서사적 장치의 쌍을 변주한다. 특히 후반부의 카메라는 어떤 인물의 시선도 차용하지 않은 채, 주체의 망각을 깨닫게 했던 키아로스타미의 부동의 카메라와 정반대의 방식으로 커다란 병원의 공간들, 진료실과 복도, 지하실을 차례차례 흩으며, 다시 이 자유로운 움직임과 끝없는 이행으로 한 자리에 머무는 주체의 고정된 자리가 얼마나 무력한지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우리는 전반부에 보았던 시골 여의사가 세련된 도시의 여의사로 다시 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같은 승려가 같은 질병을 다른 의사에게 호소하는 장면을 마주하며, 최신식 치과 진료실에서 치료를 받는 젊은 승려의 얼굴을 알아보게 된다.
전작 〈열대병〉이 현실의 세계(마을)와 정령들의 세계(숲)를 나누어진 두 부분에 배치했고, 〈엉클 분미〉가 병든 분미의 집에 죽은 아내와 실종된 아들을 한 시에 불러 모았다면, 〈징후와 세기〉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서로 ‘침투’하는 두 개의 시간, 두 개의 장소를 보여준다. 애초에 아핏차풍은 이 영화의 제목으로 〈인티머시(Intimacy)〉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화를 편집하며 그는 자신의 영화가 마치 ‘움직이는 수레’를 닮았다고 생각했고, ‘세기’라는 단어를 떠올렸다고 전한다. 〈징후와 세기〉를 만들기 전 가진 한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전 작품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열대병〉은 인간의 고통과 행복에 관한 발언이다. 〈친애하는 당신〉을 찍을 때 숲에서 촬영하다 석양이 물들었는데 순간 모든 기분이 바뀌었다. 밝음과 어둠, 그 시간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느낌이나 생각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인간은 똑같이 시간을 공유하고 있지만 나의 시간과 너의 시간은 다르다. 그럼에도 이 시간들은 어떻게든 영향을 주고 다 연관이 되어 있다. 불교적인 사상인데 내 영화에 그런 것들을 녹이려고 했다.

영화를 만들 때마다 하나의 키워드를 떠올리고, 그 키워드에 관한 내용을 자유롭게 구성하여, 영화가 완성되었을 때에야 본인 역시 어떤 영화의 모습을 지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고 말하는 감독에게 매번 그의 작품 속 이미지와 이야기들은 “움직이는 수레”에 실려 순간순간 가득 찬 의미를 비우고 다음 순간, 다음 장소, 나와 같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다시 열리고 채워진다. 그리고 비워지길 반복한다.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들, 개발이나 탄압에 의해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기록해야 한다는 위급함” 속에서 그는 언제나 영화를 찍는다. 사라지는 것들을 영상 안에, 작품 안에 붙잡는 일은, 버려야 하는 것들을 붙들어 매는 욕망과는 다른 일이다. 세속의 욕망에 가려 보이지 않는 영혼의 목소리를 불러내고 대면하게 하는 그의 영화 작업은 작가 그 자신에게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떠나보내기 위한 하나의 의례이며 수행이다. 나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고, 나의 시간과 타인의 시간이 뒤섞이는 이 연쇄와 이 연쇄의 공성(空性)이 병원이라는 극장, 극장이라는 병원 속에서 드러난다. 이처럼 그가 전하는 영화적 체험 속에서 우리 관객은 삶의 공성(空性)과 마주하게 된다. 


시간의 고통과 영화적 수행
-차이밍량

후샤오시엔 이후 세계 영화평자들에게 가장 큰 주목을 받았던 대만의 감독 차이밍량의 작품에서도 윤회전생(輪廻轉生)에 대한 감독의 관심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주제의식이 가장 두드러지는 작품으론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내와 그런 어머니를 힘들게 지켜보는 아들의 이야기를 다룬 〈지금 거기는 몇 시니?〉(2001년)를 들 수 있다. 아핏차풍이 아버지를 잃은 후 〈징후와 세기〉를 만들었던 것처럼 차이밍량도 그와 꾸준히 함께 작업했던 배우 이강생의 부친이 타계한 이후 〈지금 거기는 몇 시니?〉를 만들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을 다루는 감독의 문제의식과 스타일은 여러 면에서 아핏차풍의 그것과 차이를 가지고 있다. 차이밍량의 영화는 일상의 불안과 고통을 보다 극단적으로 표현한다. 아핏차풍의 영화가 육체의 질병−병원을 배경으로 한 〈징후와 세기〉 이외에도 그의 영화의 주인공들은 매번 어떤 질병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친애하는 당신〉의 남자 배우는 피부병을 앓고 있고, 〈엉클 분미〉의 주인공은 신장병을 앓고 있다-을 언급하는 까닭은 역설적으로 육체의 질병보다 육체를 이고 있는 마음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따라서 질병은 고통의 등가어가 아니다. 이에 반해 차이밍량의 영화는 집요하리만치 주인공의 고장 난 신체가 겪고 있는 고통 그 자체를 찍어낸다. 고집스러운 카메라는 우리에게 “이 고통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에 대해 자문하도록 한다.
그의 영화에선 삶을 지탱하고 있는 기본적인 조건들 자체가 고통의 근원이다. 특히 대도시에서 삶의 지반을 잃은 부모와 자식들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는 그의 초기 ‘타이베이 삼부작’에서 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고통과 욕망의 생산지처럼 그려진다. 〈징후와 세기〉에 부모님과 유년에 대한 추억을 담았고 〈엉클 분미〉에서도 피안과 차안의 가족들이 함께 모이지만, 아핏차풍의 영화에서 가족이란 구성원 각자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공동체로 보이지 않는다. 달리 말해,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정원사와 그가 가꾼 정원의 식물이 맺고 있는 인연보다 더 강렬한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반면 유교 문화권의 세례를 더 강하게 받은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가족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집합체이면서도 구성원 각자에게 일종의 족쇄처럼 작용한다.
따라서 ‘집’ 그 자체를 구현하고 있는 ‘아비’의 죽음은 무엇보다 큰 상실이다. 시종일관 고장 난 ‘가족’, 부서진 ‘집’ 속에서 사는 개인의 육체적, 심리적 ‘고통’에 초점을 맞추었던 차이밍량은 〈지금 거기는 몇 시니?〉에 이르러 ‘상실’을 경험하며, 처음 망자와의 이별에 대해 성찰적인 자세를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 거실에 홀로 앉아 식사하던 아버지가 화면 끝 문밖으로 사라지고 나면, 다음 장면에서 아들은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있다. 우리는 어떤 연유로 아버지가 이승을 등졌는지 알지 못한다. 이후 영화는 아내와 아들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돌며 부재와 상실에 대한 경험을 보여준다. 남편의 죽음으로 상심했던 아내는 그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계속 남편의 영혼이 집 안에 머물러 있다고 믿는다. 세상을 뜬 남편과 계속 함께 찬을 들기 위해 한밤이 되어서야 저녁을 마련하는가 하면, 온 집안의 창과 문을 막아 집안이 완전히 어둠에 잠기게 하기도 한다. 길거리에서 시계를 파는 아들은 프랑스로 떠난다고 하는 낯선 여자에게 손목시계를 선물한 이후 그 여자에 대한 집착으로 매일매일을 보낸다. 자신이 파는 시계를 비롯해서 거리 곳곳 집안 곳곳의 시계들을 모두 프랑스 시간으로 바꾸어버리는 기행을 지속하는가 하면, 프랑스가 나오는 영화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밤마다 들여다본다. 어머니와 아들은 모두 떠난 것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애도에 이르지 못한다. 상실과 부재 앞에 무력한 아들은 시계와 시간에 집착하며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시간을 ‘통제’하기를 꿈꾼다.
아핏차풍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인간을 이야기하면서도 인간 너머의 시간들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차이밍량 역시 끊임없이 흘러가는 이미지의 세계인 영화라는 매체와 시간의 흐름을 병치시킨다. 특히 아들이 밤마다 들여다보는 영화가 프랑스 감독 프랑스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차이밍량에게 프랑스와 트뤼포는 영화적인 아버지다. 따라서 영화 속 아들은 영화 속 영화적 아버지의 이미지들은 유령처럼 일회적으로 ‘현전’하며 이중적인 ‘부재’−프랑스로 떠나버린 어떤 여인의 부재와 아버지의 부재−를 보상받는다. 물리적 시간은 불가역적이나 영화적 시간은 가역적이다. 영화적 시간은 물리적 시간의 고통에 빠진 인간에게 시간의 의미를 다시 상기한다. 한편, 낯선 프랑스에서 움츠려 있던 여자는 밤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내내 불안해하다 상(喪) 중인 사내에게 건네받은 손목시계 때문이라고 믿기에 이른다. 영화의 마지막, 홀로 이국의 정원에 앉아 잠이 든 그녀 앞에 영화의 첫 장면에서 사라진 아버지가 홀연 나타나−죽은 아버지와 아들이 스쳐 만난 이 여인은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연못에 빠진 그녀의 가방을 꺼낸다. 공원 뒤로 커다란 시계처럼 돌아가고 있는 대관람차를 향해 걸어가는 아버지-망자를 비추며 영화는 끝난다. 프랑스 평론가는 이 영화를 본 후 감독에게 “당신은 윤회를 믿습니까?”라고 질문했고, 차이밍량은 “당연하다. 나는 불교 신자”라고 답한다. 아핏차풍의 영화가 그러하듯, 그의 영화 역시 망자를 놓아 보내기 위해 망자를 불러 온다. 집착과 고통,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아버지-망자는 영화의 마지막 가장 평화로운 얼굴로 홀연 나타나 ‘둥근’ 연못에 빠져 부유하는 가방을 건져낸다, 마치 모든 것을 자기 자리로 되돌리려는 듯.
2009년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얼굴〉이란 마지막 장편 영화를 찍었던 차이밍량은 지난 2012년 〈행자(行者)〉라는 제목의 단편영화를 찍었다. 그의 모든 영화에 출연한 이강생은 이 영화 속에서 승복을 입고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홍콩 시가지를 아무 말 없이 걸어간다. 영화를 통해 부재의 슬픔과 현존의 고통 사이의 인간, 육신에 갇혀있는 인간에게 다가갔던 차이밍량은 이 영화에 이르면 영화 찍기 그 자체를 수행의 과정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규정된 영화의 문법−인물과 사건, 구조−을 떨쳐내는 그의 창작의 여정이 마치 세속 영화의 집을 떠나 더 큰 영화−깨달음을 찾는 과정처럼 보인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나가며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관객들 위를 비추던 불빛은 잦아들고, 상영관 안은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잠겨든다. 대여섯 상영관이 동일한 블록버스터 영화를 상영하는 시끌벅적한 멀티플렉스 극장일지라도,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더라도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영화가 마련해준 세계 속으로 떠날 준비를 한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 서구의 폴 뉴먼이나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아시아의 아핏차풍 위라세타쿤과 차이밍량의 영화는 격정적인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을 잡아끄는 대신, 수십, 수백의 좌석에 나란히 앉은 관객들에게 숨을 죽이고 어둠 속에서 한 곳을 응시할 것을 요구한다. 이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곳은 다름 아닌 스크린, 얇은 막 위로 빛으로 축조된 이미지와 소리들이 삼라만상에 깃든 사연을 전한다. 관객들의 몸은 지금 여기, 각자의 좌석에 남아 있되, 이들의 마음은 빛의 언어에 이끌려 타인의 삶과 영혼의 사연 속으로 잠입해 들어간다.
영화란 언제나 깨어 있는 채 꾸는 꿈이며, 나를 잊고 여럿이 꾸는 꿈이다. 이 꿈 속에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다른 시간의 관념을 경험하고, 나를 벗어난 카메라가 전하는 세계를 새로이 만나며, 이들과 교감하도록 한다. 빛의 언어로 엮어진 이미지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거나 잊고 있었던, 끝없이 이어진 세계의 오랜 인연을 다시 불러낸다. 기억과 시간, 영혼의 세계를 새로이 탐색하는 영화들, 영화가 지닌 모든 가능성을 실험하는 영화들은 바로 그 형식의 진리를 통해 붓다가 설파한 세계의 모습을 체험하도록 한다. ■

 

이나라 
고려대 강사. 고려대 사회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미학과에서 〈벤야민의 이미지 개념〉으로 석사학위 취득 후 파리 1대학에서 현대영화에 대한 이론으로 영상미학 박사학위 받음. 현재 고려대, 강원대 등에서 ‘영화와 미학’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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