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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보 위에 펼친 화엄세계
김경진 어린이 교육극단 사다리 음악감독.
[30호] 2007년 03월 10일 (토) 김경진 muse@haja.or.kr

1. 음악의 본질과 화엄세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음악의 본질을 우주적 조화의 울림이라고 했다. 그는 음악을 통해 고대철학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조화라는 개념을 설명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타고라스를 따르자면 우주 전체가 음계(조화)와 수(數)”1)라고 했다. 이 ‘조화’는 카오스에 대비되는 코스모스(cosmos)다.

그것은 만물에 내재한 법칙들의 통일이며, 우주 만물이 운행하는 질서다. 피타고라스에 따르면 음을 만들어 내는 비례관계와 아름다운 화음의 수적(數的) 질서가 이러한 우주적 조화를 표상한다. 그들은 음악의 조화로운 울림과 공명하면서 거대한 우주를 감각했다. 방 안 가득 저 우주를 채워 놓고 그 리듬을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음악의 본질과 우주의 본질이 다르지 않으며 음악의 조화로운 울림이 수수께끼 같은 우주의 질서를 설명해 줄 거라고 믿는 시대였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음악의 본질을 우주의 조화로운 울림으로 파악했다면 화엄학에서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법(緣起法)을 통해 우주의 조화로운 세계를 묘사한다. 우주의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음악과 연기하는 존재의 조화를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화엄의 세계는 서로 통한다. 음들은 흐름과 멈춤,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연속적인 진행을 통해 독립적으로 자신의 시공을 가지면서도 기대어 존재한다.

음악이라 불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런 관계의 조화다. 화엄 세계에서는 먼지 한 점과 광활한 우주의 시간과 공간은 분할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따로 존재하고 함께 존재한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현실이다. 현실이 논리에 앞서는 것이다. 다음은 신라의 고승 의상의 <법성게> 일부다.2)

一中一切多中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고 모든 것 속에 하나가 있으며
一卽一切多卽一 하나 그대로 모든 것이며 모든 것 그대로 하나다
一微塵中含十方 한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고
一切塵中亦如是 모든 티끌마다 또한 그러해

無量遠劫卽一念 한량없는 시간이 한 생각이요
一念卽是無量劫 한 생각이 한량없는 시간이며
九世十世互相卽 구세와 십세가 서로 같지만
仍不雜亂隔別成 뒤섞이지 않고 제 모습을 이루네3)


정화 스님은 “앞의 네 게송은 정적인 측면이 강조된 공간의 연기관계를 다뤘다면, 이 게송부터 네 게송은 인과관계의 동적인 측면이 강조된 시간의 연기관계를 다루고 있다.”(정화, 76쪽)고 말한다. 시간의 연기관계는 유동성을 염두에 둔 말이다. 그렇다고 절대적 시간을 의식하여 단순한 시간적 흐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당연히 한 찰나가 무량한 시간일 수는 없다. 시간을 재료로 해서 연기관계를 설명하는 아래 네 구는 음악의 세계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지금 이 글은 바로 이 네 구 28자를 음악을 통해 풀이하려는 시도다. 정화 스님은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인 연기법은 모든 법들이 그 자체로 불변의 자성을 갖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곳이 되어 존재하며, 시간과 공간도 그 자체로서 독립된 요소가 아니라 서로들 기대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연기관계는 공간의 연기관계와 독립적으로 다루지만 공간의 연기관계와 떨어질 수 없는 인연관계로서 그 게송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정화, 75쪽)

위에서 공간과 시간이라는 방식으로 위아래 각 네 구를 나눴지만 그것이 기필코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다시 한 번 음악이라는 코드를 발견한다. 시간과 공간은 하나의 장면으로서만 나타난다. 그것은 사건적 존재다. 그러기에 존재의 무상성을 말할 수 있다면 시간이나 공간의 무상성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다.

사건이라는 개념을 상기한다면 그것을 음악과 관련시키는 것은 더욱 설득력이 있다. “시간은 존재에 빌붙어 사는 우연성을 지닌다. 존재자가 있어야 시간이 있다. 시간이 있어서 존재자가 자리를 잡는 게 아니다. 시간은 존재자의 움직임을 통해서만 알려진다.”4) 음 각각은 차이나 사건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사건은 관계론적인 수사(修辭)다. 음의 굴곡은 복수적 출현으로서만 가능하다. 시간과 공간도 결국 연기할 것이다.

2. 시간 예술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을 보자. 무량이라는 말은 저울질이나 잣대질을 하지 못할 정도라는 말이다. 이것은 우주적 거대함을 말한다. 우주 바깥에는 시간과 공간이 없다. 이른바 바깥이 없는 크기, 크기의 최대치다. ‘원겁’이라는 말에서 겁(kalpa)은 시간 개념이다. 그런데 다시 멀다고 했다. 멀다는 표현은 공간적인가 시간적인가. 사실 둘 다이다. 하지만 이 구절의 뒷말 때문에 우리는 굳이 선택하라면 시간적 거리 쪽이다. ‘일념’에서 ‘념’은 단지 생각하다라는 말이 아니다. 찰나의 개념이라고 해야 한다.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매 찰나 상속을 말한다. ‘즉’이라는 말에서야 비로소 관계론이 등장한다. 이것은 ‘상즉(相卽)’이다. 상즉은 ‘불일불이(不一不異)’다. 부정이 중첩되면서 결국 긍정이 중첩될 것이다.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큰 시간과 작은 시간이 차이와 동일을 함께 드러낸다는 것이다. 하나의 음과 음악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한 시간과 우주적 시간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를 보여준다.

현대과학에 힘입어 시공간을 통합하여 인식하게 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위치와 변화에 따라, 같은 시간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정화, 76)

이 시간의 결정은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관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한 중생의 시간이 결정되려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시간이 원인이 되어야 합니다. 곧, 서로 다른 시간의 요소가 한 사람에게 그 사람의 시간이 되게 합니다.(77)

음악이 시간예술이라 함은 시간의 길이에 따라 음표와 쉼표 하나하나가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일정한 시간 안에 배치되면서 음악이라는 형태를 갖게 된다. 각각의 음표나 쉼표는 자신의 독립적인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음 하나하나는 길이의 다름을 통해 자신의 속성을 갖는다. 이 ‘다름’에 주목해야 한다. 다름은 타고나는 속성이 아니다. 그것은 군중 속에서야 탄생한다. 그래서 그것들 낱낱이 하나로 존재할 때 음악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음표나 쉼표의 조합을 통해 2마디 이상의 시간을 가져야 하며 그 때 비로소 음악이 시작한다. 꽃이 되는 것이다.

분명 음악에서 음들은 각각의 자기 시간이 존재하지만 그 자체로는 음악이 될 수 없다. 다른 음들과의 연관관계를 통해서만이 음악이라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교향곡이라는 음악 장르가 있다. 교향곡은 서로 다른 악기들이 서로 다른 선율을 각기 자기의 시간대별로 연주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악기가 한꺼번에 연주되지는 않는다. 어느 때는 같이 연주되어 어울림을 만들고, 어느 때는 솔로를 한다. 각각의 악기별로 자신의 시간을 가지면서 동시에 다른 악기들의 시간과의 어울림을 보여준다. 첼로가 솔로를 하고 있다고 주변에 있는 연주자가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들의 침묵은 악보에 나와 있다. 그들은 여전히 연주하고 있다.

분명 첼로 솔로지만 저들은 협연인 셈이다. 하나의 독립된 악기 속에서도 흐름과 멈춤이 존재하고, 서로 다른 악기들 속에서 또한 흐름과 멈춤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멈춤이라고 해서 연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일어나서 나가는 사람도 없다. 저 멈춤도 연주일 수 있는 것은 흐름과 멈춤이라는 관계 때문이다. 연기론적 사건이다.

   


위의 악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처음 부분이다. 이 악보를 가로의 시선으로 보면 바이올린 둘과 나머지 11개의 악기가 자신의 파트에서 서로 다른 선율의 독립된 시간대를 가지고 활동한다. 세로의 시선으로 악보를 보면 저들은 같은 시간대를 가지고 어울림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의 악보에 있다. 독립된 악기의 연주는 하나의 음과 음악이라는 시간적 연기를 드러내고, 함께 상이한 악기의 동시적 연주 속에서 공간적 연기를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렇게 한 파트 한 파트 나눠져 있는 시간 관계로 인해 악기마다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히 각인한다.

좀 더 자세하게 공간과 시간과의 관계를 살펴보기 위해 화음의 개념을 도입해 보자. 4분음표의 ‘라’ 음이 울렸다. 이것은 4분음표라는 시간과 더불어 440헤르츠의 진동이 합쳐져서 시간과 공간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 확대하여 4분음표 ‘라’와 ‘파’와 ‘도’가 만나서 동시에 연주 될 때 각각의 시간과 공간이 다른 시간들과 공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울리면서 하나의 새로운 소리로(화음) 들린다. 정화 스님의 말대로 독립된 시간의 관계를 보면서도 공간과의 인연관계를 동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3. 닫힌 시간과 열린 시간

다음 구는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다. 앞의 구를 뒤집었다. 이 뒤집힘으로 ‘상즉’을 확인한다. 정화 스님은 다름과 같이 풀고 있다.

변화는 변화하지 않는 데 있으니 변화에서 보면 연속되지 않으나 변화하지 않는 데서 보면 오히려 연속되고 있습니다. 연속과 불연속이 무상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속인 진여공성만을 이야기하거나 불연속으로 변화만을 이야기하면 한 쪽에 치우치게 됩니다.(정화, 80)

이 게송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음악에서 흐름과 멈춤이 하나로 어울려 리듬을 만든다. 음악에서는 쉼표를 통해 멈춤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인과관계를 통해 상승작용을 한다. 멈춤은 그 자체로 자기 리듬을 갖고, 이후 진행되는 음과 관계 속에서 리듬은 점프한다.

좀 더 자세한 예로 위의 교향곡 악보 맨 밑 마지막 ‘바순’ 파트를 살펴보자. 쉼표들이 연속적으로 나오다 음표들이 2번 등장한다. 이 구조를 설명하면 첫 번째 마디 빼고 4마디씩 쉼표들과 음표들이 교대로 나오면서 자기 리듬구조를 갖게 된다. 이렇게 바순의 자기 파트를 완성한다. 이것을 <법성게>의 이야기로 바꾸면 “전후 찰나의 흐름이 인연 조건의 변화를 그대로 나타내면서도 그 가운데 아무런 실체가 없는 공성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과 결과로 존재하고 한 순간 그대로 모든 시간의 속성이 될 수 있다.”(정화, 81)라고 할 수 있다.

음악에서는 하나하나의 음표들이 흐름과 멈춤, 협화음과 불협화음이라는 각각의 특성을 통해 나타난다고 볼 때 그것은 분명 “한 순간과 모든 시간이 연속과 불연속, 긍정과 부정으로 시간의 특성인 변화를 나툰다.”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 순간의 시간이 무량한 시간과 아무런 다름이 없음을 뚜렷이 알게 된다.

4. 음의 생성과 해체

세 번째 구절은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다. 과거의 과거, 과거의 현재, 과거의 미래, 현재의 과거, 현재의 현재, 현재의 미래, 미래의 과거, 미래의 현재, 미래의 미래를 합치면 구세(九世)가 되고 여기에 현재의 일념(一念)이 합쳐져 십세(十世)가 된다. 여기서 한자 ‘세(世)’는 물론 시간을 말한다. 우리는 쉽게 한 개의 시간을 말한다. 이 한 개의 시간은 닫힌 문도 열고, 막힌 벽도 통과한다고 생각한다. 물 속에서도 흙 속에서도 신의 권능처럼 펼쳐진다. 이것이 일반적인 시간의 관념이다. 다분히 근대적이다.

연기의 장은 나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연기의 장이라는 총상에서 낱낱이고, 이 낱낱이 그대로 연기의 장인 데서만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것입니다. 연기의 장에서 낱낱이 자기로 환원될 수 없음에서 낱낱은 무자성의 공성으로 같고, 그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이룬 데서 보면 서로가 다릅니다.(정화, 85)

다시 간단한 악보를 통해서 이런 관계를 살펴보자. 참으로 유명한 <학교종>이다.

   


이 곡의 3번째 마디 2번째 솔음은 그 울림이 울리는 그 순간 현재이자, 앞의 솔의 미래이고 뒤의 미의 과거이다. 이 잠깐의 울림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본다면 저 솔은 구세(九世)가 되며, 동시에 다른 모든 음도 이렇게 존재하여 하나의 곡으로 완성됨으로써 십세(十世)가 된다. 여기 있는 모든 음들과 쉼표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이 노래는 <학교종>이 될 수 없다. 또한 여기 음들은 그 앞뒤의 음들과 결합하여 <학교종>을 만든다. 또한 이 곡에는 ‘솔’이라는 계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솔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때 그것은 음악이 아닌 그냥 솔이라는 음가를 가진 울림일 뿐이다.

연기의 장에서 모든 것들은 생성 소멸하면서 순간순간 연기의 장을 새롭게 이루면서 동시에 해체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생성 소멸은 다만 하나의 생성 소멸이 아니라 연기 전체의 장을 생성 소멸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정화, 86)

앞의 노래 <학교종>의 각각의 음들은 울리고 나서 바로 다음 음으로 존재해야 한다. 각각의 음들이 생성과 동시에 해체되지 않고 지속된다면 다음 음이 올 수 없고 그 순간 이 노래는 다른 노래가 된다. 이렇게 앞뒤의 음이 생성과 소멸을 하는 그 때 우리는 이 노래가 <학교종>임을 알게 된다. 이 하나 하나의 음들이 존재하고 소멸함으로써 우리는 하나의 노래를 노래로서 인식할 수 있다.

5. 차이의 가치

네 구 가운데 마지막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이다. 정화 스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인연의 조건에 따라 모든 것이 존재한다고 하면 독립된 개별자로서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낱낱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지 못하고 뒤섞여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변과의 인연관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무상·무아의 변화만이 삶일 수 있고 여기에서 제 모습을 이룰 수 있습니다.”(정화, 85)

음악의 조표와 음 간의 관계를 가지고 이런 점을 살펴보자. 여기 하나의 ‘도’가 있다. 이 ‘도’는 다장조에서는 ‘도’로 들리고, 바장조에서는 ‘솔’로 불린다. 물론 다른 조에서는 또 다른 음들로 들린다. 이 ‘도’는 여러 다른 조표라는 인연조건에 따라 마치 서로 다른 음으로 불려서 자기 정체성이 없는 것 같지만 어느 조표에서건 동일한 헤르츠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 단지 조건이 바뀌었을 뿐이다. 이렇듯 ‘도’라는 음은 동일한 자기 울림의 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이한 배치 속에서 다른 이름으로 변한다. 그것은 변화무쌍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보인다.


또한 이 ‘도’가 공간의 개념으로 수직적으로 ‘미’음과 함께 나오면 우리는 이를 장3도의 협음정이라 한다. 그런데 ‘도’ 다음 ‘레’가 오면 장2도로 불협음정이라고 한다. 보통 장3도 같은 협화음정은 사람들의 귀에 익숙하고 듣기 편한 음정이라면, 장2도 같은 불협화음은 마음이 불안할 만큼 귀에 익숙하지 않은 음정이다. 이렇게 똑같은 도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울림을 만들고 그로 인한 느낌, 정서도 다르다. 그러니 이 ‘도’ 자체를 어찌 ‘좋은 음’이다 ‘나쁜 음’이다 말할 수 있겠는가.

6. 화엄적 윤리

음악은 단 하나의 곡으로 우주를 보여준다. 또한 한 음 한 음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그 순간의 시간이 독립된 우주다. 이렇게 음악의 시간과 공간의 연기관계를 보면 음 하나 하나가 사람 한 명 한 명을 말해준다. 한 사람이 바로 우주라고 하는 화엄의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음악이 보이는 시간과 공간의 연기처럼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떤 시간과 공간과 인연 맺느냐가 우리의 삶을 구성한다.

‘나’라는 존재는 개별 존재로만 또는 전체 관계로만 설명할 수 없다. 관계를 구성할 때 필요한 자발성은 어쩔 수 없이 개별 존재자의 몫이다. 가만히 관계의 변화를 기다린다고 특별한 인연이 닥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쁜 음’ ‘좋은 음’이 없듯 완벽한 의미의 나쁜 인간 혹은 좋은 인간을 말할 수 없다. 화엄의 세계는 단지 상상 속에 있지 않다. 형이상학적인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삶의 행위 기술이기도 하다. 조화로운 우주를 말하면서 조화로운 삶을 생각할 수 없는 자는 바보다. 적어도 인간 세계에서 코스모스를 꿈꾼다면 자신이 세계와 맺는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관계 구성에 대한 자기 고민이 필요하다. 비록 생멸상속 하지만 자신의 음가(音價)를 내야 한다. 적어도 그렇게 해야만 리듬이 발생한다. 리듬으로서 자기 존재가 값없다 생각할 필요가 없다. 화엄적으로 보자면 그것이 다(多)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분하다. ■

김경진
서울시 청소년직업센터 하자 작업교육장 학교 담임, 어린이 교육극단 사다리 음악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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