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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불교를 통해 본 한국불교의 지향* / 명법
[55호] 2013년 09월 01일 (일) 명법 myeongbeop@gamil.com

들어가는 말

해방 이후 한국사회 변화를 주도한 가장 강력한 원천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정치, 군사, 경제뿐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종교계 역시 미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한반도 종교지형에 가장 극적이며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기독교, 특히 미국의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도입뿐만 아니라 “미국과 연계된 기독교는 올바른 한국의 성장을 위한 정치적, 경제적인 그리고 심지어는 정신적인 길로 등장”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그에 반해 불교는 한국 내의 최대 종교라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상당 기간 한국사회 변화의 동인이 되지 못하고 무력하게 변방으로 물러나 있어야만 했다. 이러한 처지는 조선시대 이래 한국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었던 불교로서는 그다지 새로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사회의 ‘근대화’ 곧 ‘서구화’ 과정에서 한 발짝 비켜나 미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지점에 머물러야 했던 불교의 상황은 놀랍게도 불교에 한국의 고유한 전통을 보존해온 계승자로서 위치를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그 위치는 스스로 노력하여 얻은 것이라기보다 우연하게 외부에 의해 주어진 것이었다. 왜냐하면 한국불교가 떠맡은 ‘전통’은 실은 근대국가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전통’은 원래 그곳에 있었던 그대로가 아니라 ‘서양 근대’와의 대비 속에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이 메이지 시대의 일본 미술사가 오카쿠라 텐신이 일본적 정신성의 하나로 재현한 불교가 “이미 근대적 관점”에서 해석된 것이며, “반근대, 반산업자본주의를 외치고 토착의 문화적 생산물을 높이 평가할 때, 그의 태도는 그야말로 근대적이고 식민주의적이다.”라고 비판했던 것처럼, 근대화에 의해 상실한 한국 고유의 전통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진 한국불교의 자부심 역시 근대화의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표면적으로는 세상과 그 세상을 변화시킨 근대화의 저편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만 한국불교는 한국사회의 변화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 근대 이후 확립된 정교분리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종교와 정치가 결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문화정치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더라도 한국불교는 정치적인 것과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근대와 전통의 관계가 이항대립이 아니라 공모의 관계였다는 사실은 베네딕트 앤더슨과 가라타니 고진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의 근대 민족국가의 탄생에 대한 해체적 연구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나, 전통과 미국의 관련성, 특히 한국불교의 미국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특히 한국불교에 끼친 미국의 영향을 복음주의 개신교의 도입과 그를 통한 미국문화의 주입이라는 지점을 넘어서 ‘전통과 근대’라는 틀을 통해 바라본 연구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런 관점을 취하지 않는다면 양자의 관계는 미미하고 피상적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이루어졌던 한국 전통과 민족 정체성에 대한 담론이 19세기의 ‘동도서기론’과 비슷한 논리를 구사함에도, 70년대 이후 한국사회에서 설득력을 가진 배경에는 그 담론에 추가된 새로운 자료 때문이다. 서양에서 불고 있다는 불교 붐과 동양의 지혜를 찾아 파란 눈의 외국인이 한국 산사를 기웃거리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이 새로운 자료들은 동양 정신성의 우수성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로서 제시되었으며 그 결과 한국불교의 우수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사회의 급격한 근대화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양의 물질문화보다 동양의 정신성이 우수하기 때문에 결국 동양의 정신성으로 회귀할 것이라는 낭만적 기대가 1970년대 한국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또한 근대화 과정에서 수반되는 민족 정체성 담론에서 불교는 ‘한국적인 것’의 원천으로서 주목받았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다른 어떤 전통적인 영역보다 동양의 정신성과 한국 전통에 대한 특권적 위치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언젠가 한국불교도 세계무대에서 그 우수성을 과시할 날이 오리라는 막연한 기대 덕분에 크고 작은 분쟁과 추문으로 손상된 한국불교의 자부심을 회복할 수 있었다. 불교야말로 한국사회 헤게모니의 원천인 미국에 대하여, 또 그곳에서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미국불교에 대하여 우월한 위치에 설 수 있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미국과 불교의 관련성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성립한다. 다시 말해, 미국이라는 ‘거울’은 한국불교가 한국의 전통으로서 부상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불교는 어떻게 한국불교에 영향을 주었나

한편, 미국에 전해진 선불교는 전후 세대의 풍요와 불안 속에서 반사회적이고 반문명적인 히피 운동과 결합했다. 저항문화와 결합한 선불교는 환각체험과 유사한 특별한 체험이나 개인적인 자유를 강조함으로써 아시아의 맥락에서 이탈하여 신비화되고 낭만화된 선으로 재현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초감 트룽파가 ‘영적 물질주의’라고 명명했듯이 스스로 변화하지 않고 선수행을 흉내만 내면서 여기저기 선센터를 기웃거리는 새로운 풍경도 나타났다. 1960년대 들어서면서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선센터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며 ‘젠붐’이라고 일컬을 만큼 주목할 만한 사회적 현상으로 등장한다. 아시아에서 근대화의 후발주자인 한국이 미국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의 하나로 불교를 주목하게 된 것도 이즈음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의 우수성에 대한 증거로서 제시되는 젠붐은 사실은 한국불교와 무관한 현상이다. 젠붐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서양 근대의 기획, 다시 말해 이성과 과학의 진보가 인간의 삶을 개선시킬 것이라는 기획의 좌절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젠붐은 어떻게 한국불교와 관계를 갖게 되었을까?
동양에 대한 서양의 관심이 기본적으로 오리엔탈리즘과 관계가 있지만, 1960년대 젠붐은 서양에 의해 주도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젠붐을 이런 시각에서 읽을 때 미국에 소개된 선불교에 숨겨진 일본의 국가주의적 입장을 읽을 수 있으며 한국불교에 끼친 미국의 영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이른바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에 의해 열등한 존재로 투사된 동양이 자신을 낭만화하고 신비화하여 서양이 잃어버린 정신성으로 재투사함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담론이다. 그것은 “서양이 고안해낸 동양의 이미지에 근거하여 ……일본 이외의 나머지 동양이라는 ‘타자’를 미개의 범주로 몰아넣는 동시에, 유럽이 진보의 정점에 도달해있다는 편견, 곧 오리엔탈리즘을 정당화시켜 주었던 논리를 역전시킨다. ……일본은 서양에 대하여 서양을 능가하는 자로서 자신을 재현하고 그것을 서양 오리엔탈리즘의 문맥 속에 적극적이고 적절하게 개입시킴으로써 서양에 대한 그들의 권력을 쟁취했다.”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을 모방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이차적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리거나 서양 오리엔탈리즘의 역전된 형태라는 의미에서 “역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선불교는 바로 일본식 역오리엔탈리즘의 대표적인 산물이다.
선불교의 역오리탈리즘적인 해석에 가장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람은 D. T. 스즈키이다. 그는 “선불교를 일본문화의 정수로서 소개함으로써 일본은 물질적 서양에 대한 정신적 우위를 주장했다. ……일본은 선불교를 동아시아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격리시켜 서양의 모더니티와 결합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로 제시했다.” 또한 “선을 일상생활 속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었으며 그 결과 사람들은 좌선 수행보다 독서와 예술을 선적 활동으로 생각했다. 선은 일종의 체험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독서와 예술 활동, 활쏘기나 모터사이클, 심지어 마약 흡연을 통해서도 체험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종교 제도나 성직자, 경전이 없이도 종교적으로 될 수 있으며 일상적인 삶이 곧 종교가 된다고 믿었다.” 이렇게 재현된 선은 1960, 70년대 미국사회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은 동아시아에서 제국으로서 일본의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 “아시아 문화를 구분 짓고 오리엔탈화함으로써 일본을 아시아로부터 분리”시키는 차원을 갖는다. 그런데 불교의 경우, 일본이 한반도 식민을 위해 적용했던 오리엔탈 오리엔탈리즘의 담론이 그다지 적용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은 한반도 지배를 위해 한반도의 후진성을 근접한 과거인 조선에서 찾았으며 그 원인으로 당쟁을 유발시킨 유교를 지목했다. 더구나 조선불교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에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불교의 영향 아래 들어왔기 때문에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둘째, 일본을 아시아에서 가장 문명화된 국가로 서양에 소개할 때 가장 큰 장애는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었다. 중국문화는 서양에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과 차별화를 위해 오리엔탈 오리엔탈리즘과는 다른 전략을 취했다. 그들은 일본을 대표하는 정신으로서 유교가 아닌 불교를 선택한 다음,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한국은 아예 언급되지 않는다.) 일본에 이르러 정점에 도달한다는 사회진화론을 채택했다. 이 주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본은 당나라 때 정점에 도달한 불교가 송 대 신유학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쇠퇴하고 그 맥이 일본에 전해졌다는 논리를 구사했다.
조선 역사와 문화에 가해진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한국불교는 일본의 역오리엔탈리즘 논리를 전유하였으며 “선을 낭만화시킴으로써 서양의 합리주의와 낭만주의의 대결 사이에” 두었던 스즈키의 해석은 대부분의 한국 선불교 담론에서 반복되었다. 그와 함께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의 선례를 쫓아 미국 진출을 자신의 과제로 삼게 된다.
1960년대 미국 이민법 개정 이후 물밀 듯이 미국으로 떠나는 이민자들의 보따리에 얹혀 한국불교도 태평양을 건너게 되었다. 1964년 서경보 스님이 최초로 미국으로 건너가 6년 동안 한국불교를 전했으며, 1973년 송광사 방장 구산 스님이 삼보사 낙성식에 초청되어 도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송광사 국제선원이 설립되었다. 이즈음 삼우 스님과 숭산 스님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주류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이때부터 한국불교의 미국 개척사가 시작된다.
한국 승려들이 미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젠붐이 시작된 뒤였으므로 한국 승려들은 처음부터 주류사회의 진출을 목표로 활동했다. “쉽고 단순하고 재미있으며 동시에 정곡을 찌르는 법문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한국불교는 한국에서 수행되는 전통적인 불교보다 현대적인 맥락에 맞게 변용된 일본불교의 재현 방식을 차용했다. 훗날 젠붐의 쇠퇴와 함께 한국불교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한국불교의 미국 진출은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을 적용함으로써 성공할 수 있었다.
한국불교는 일본불교와 다른 아시아 전통의 불교와 달리 한인사회를 토대로 성장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곧장 주류사회에 진출했다. 그래서 이민불교가 아닌 개종불교로 분류되지만, 그 결과 1세대 승려들의 입적 이후 한인사회의 물적, 인적 지원을 받지 못해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할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한인사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기독교에 밀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불교의 성공적인 미국 진출 소식과 한국 사찰을 찾아와 수행하는 푸른 눈의 수행자 모습은 한국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맨손으로 미국에 건너간 숭산 스님의 성공은 한국불교계를 고무시켰으며,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 《하버드에서 화계사로》는 한국불교의 우수성을 한국인들에게 확신시켰다. 한국 내에서 불교의 양적 성장이 이루어진 것도 비슷한 시기이다.
그렇다면 외국에서 이룬 한국불교의 성공과 한국 내의 불교의 양적 성장은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양자 사이에 일종의 연관성이 없는 것일까? 젠붐과 한국불교의 미국 진출 성공은 한국불교가 한국 내에서 전통의 담지자로서 자리매김하는 데에도 중대한 역할을 했다.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해방 후 한국불교는 미국에 재현된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을 모방하여, 한편으로는 가장 우수한 불교의 계승자로서 갓 태어난 미국불교를 무시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 세계불교가 모여드는 미국을 선망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미국의 젠붐과 뉴에이지 종교는 한국에서 명상에 대한 컬트적 취향의 발생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인도와 스리랑카, 미얀마 등 아시아 문화에 대한 관심과 인도 여행이나 미얀마 사원에서의 수행과 같은 새로운 수행문화와, 나아가 남방불교 교리와 수행법에 대한 폭넓은 관심의 발생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그것은 한국의 종교지형을 변화시키고 한국불교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새로운 관심의 대상이 미국이 아니라 아시아 국가라는 점에서 미국불교와 무관하다고 비판할 수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글은 아시아 수행 문화에 대한 관심이 미국에서 현대적인 문맥에 맞게 변형되고 혼종된 젠붐과 컬트적인 뉴에이지 취미를 통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우선적으로 주목한다. 한국불교의 양적 성장과 정체성 담론 사이의 관계, 불교의 전통적 수행과 뉴에이지적인 컬트 문화의 관계에 대하여 차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숭산 스님을 제외하면 한국불교의 미국 진출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한국불교의 세계화’는 아직까지 한국불교의 과제로서 제시되고 있다. 그에 앞서 일본식 역오리엔탈리즘과 젠붐, 그 배후의 국가주의를 가늠해본다면 한국불교가 만들어낸 자기 신화에 개재된 국가주의와 오리엔탈리즘에 대하여 여러 가지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불교의 새로운 방향

1960년대와 2010년대까지 약 반세기 사이에 미국불교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물이 저수지로 흘러들 듯이 전 세계의 불교전통이 미국으로 모여들고 다시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이 시기에 일어났던 미국불교의 변화는 젠붐 쇠퇴와 불교 세속화의 확대로 요약될 수 있다.
이 변화의 기폭제는 1970년대 미국 선센터에서 발생한 재정 및 성 문제와 관련된 스캔들이다. 1960년대 히피문화와 연계되었던 젠붐이 수행과 일탈, 도덕적 방종과 종교적 깨달음을 혼동한 결과, 1970년대 선센터의 재정과 성문제와 관련된 스캔들이 일어났다. 그 후 선불교에 대한 관심이 완전히 식은 것은 아니지만 기존의 선수행과 선센터 운영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일어났으며 새로운 방향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위기에 처한 미국불교의 새로운 방향은 대강 다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선불교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수행법에 대한 관심이다. 선사들의 도덕성 문제는 선불교의 역사와 수행 전반에 대한 반성을 이끌었다. 먼저 미국 불교학자들에 의해 태평양전쟁 기간 중에 있었던 일본 승려들의 전쟁 독려 행위와 국가주의적 불교관의 문제가 드러났다. 이어서 몇몇 일본 불교학자들과 미국 불교학자들에 의해 선적 깨달음과 선불교 담론의 진정성과 기원에 대한 비판이 행해졌다. ‘비판불교’라고 지칭되는 이 연구들은 선불교 전체를 허위라고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는 반면, 그들과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컬럼비아 대학의 버나드 포레와 같은 학자들은 D.T. 스즈키에 의해 주도된 선불교 담론을 해체하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수행 면에서 볼 때, 선불교의 신비하고 즉각적인 깨달음에 대한 히피세대의 열광은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수행 방법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으로 바뀌고 있다. 그 결과 남아시아 불교전통에서 유래한 위빠사나 수행과 자비명상 등 여러 가지 수행법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또한 전통적 불교명상을 심리치료에 접목시킨 새로운 심리치료 방법이 개발되어 전문적인 수행자뿐 아니라 심리학자, 전문직 종사자, 영화배우, 가수, 대학생, 청소년, 심지어 재소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실천되고 있다.
둘째, 히피세대들이 아시아의 신비와 선적인 깨달음에 매혹되었던 것과 달리, 불교에서 사회의 부정과 갈등을 해결하는 실천적 지혜를 찾는 새로운 세대에 의해 참여불교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현재 서양에서 인기 높은 불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와 틱낫한의 활동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으로서, 이들이 제시하는 평화적 해결방법은 서양의 지성인들과 젊은이들에게 현대사회의 여러 가지 갈등과 문제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공하고 있다.
참여불교는 현대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에 대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그 변화를 주도하고자 하는데, 여기서 히피 시대에 사적이고 비의적인 영역으로 후퇴했던 불교가 공적인 영역으로 등장함을 목격할 수 있다. 그것은 신비화된 젠붐이 방기했던 수행과 도덕성, 사회적 실천의 문제를 다시 종교 활동 속으로 끌어들이는 시도로서 아시아의 불교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이다. 참여불교는 평화적인 이념의 제시에 그치지 않고 명상과 사회적 실천의 통합을 주도하고 있다. 이제 불교수행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수행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미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참여불교의 중요한 이슈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불교의 문제이다. 1970년대 미국 선센터에서 발생한 성 추문 결과, 피해당사자인 여성들을 위한 여성 불교 지도자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최근에는 티베트, 스리랑카, 태국 등 아시아 비구니 승단 복원 문제와 맞불려 국제적인 활동으로 조직화되고 있다. 미국 내에서는 여성의 권익 증진과 관련된 활동과도 연계하고 있다.
둘째, 비폭력 저항과 반전반핵,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소수민족의 독립에 대한 지원, 인권 보호, 국제 평화의 증진과 같은 정치적 이슈를 요구를 다룬다.
셋째, 다종교적 사회에서 종교평화를 증진하기 위한 종교 간 대화를 강조하며 종교들 사이의 연대를 통한 세계평화나 환경문제에 적극적이다.
넷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 인종적, 성적 소수자들의 권익보호와 그들을 위한 자비의 사회적 실천에 관심을 갖는다.
다섯째, 불교의 연기사상을 통한 지구 환경의 개선과 보호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을 한다.
선불교에 대한 반성은 선센터 내부의 민주적 체제를 확립하는 힘이 되었다. 선사와 제자 사이에 좀 더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였으며 선원 운영에서 지도자의 절대적 권위를 약화시키고 집단지도체제로의 변화를 가져오거나 좀 더 민주적인 방식의 운영체계를 지향하게 되었다. 또한 계율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으로 말미암아 마약과 환각의 체험을 수행과 혼동했던 초기 선센터의 반문화적 분위기는 수행의 윤리적 차원과 심리적 이해를 강조하고 사회 속에서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선불교의 신비하고 즉각적인 깨달음보다 마음의 평화와 자비심을 개발하는 자비명상이나 위빠사나 명상법을 선호하고 있다. 불교는 사회의 변화를 위한 비전과 에너지를 얻는 활동으로서 세속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는데, 이 모든 움직임은 불교 세속화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전통적인 승가의 권위 약화와 새로운 명상수행법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놀랍게도 한국불교의 현실과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평행이 가능할까?
류대영이 지적하듯이 “종교의 다원화 현상은 한국에서도 이미 경험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종교지형 다원화의 가장 큰 원인은 여러 종교를 가진 이민자들의 유입이며, 한국도 이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기독교, 불교라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모습의 전통들이 들어오고 있다.” 류대영은 이 변화가 이주민보다 다른 문화권과의 교류와 접촉의 증가에 따른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좀 더 정확히 이해하면 미국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는 세계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와 관련하여 이 변화가 “점점 더 복잡한 종교지형”을 가져오고 “환경의 변화, 그리고 다른 종교 전통과의 공존은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한국 기독교”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류대영의 지적은 한국불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 가능하다.
최근 들어 한국불교의 변화를 주도하는 가장 중요한 원천은 미국불교이다. ~~가 주장하듯이 “‘서양불교’ ‘미국불교’ ‘신불교’라고 말하는 것은 한 지리적이거나 문화적 환경의 배타적 산물이 아닌 운동의 지구적 네크워크의 국면”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게 된 것은 미국이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때문이다. 티베트, 미얀마, 태국 등 다양한 불교 전통의 유입도 최근 한국불교의 지형을 바꾸는 원인 중 하나이지만, 그것들은 원래의 토양에서 자라난 것이라기보다 미국이라는 터전에서 자라난 ‘혼종’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젠붐 시대와 마찬가지로 한국불교를 미국에 수출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지만 실제로 한국불교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식의 ‘혼종’ 불교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이다.
서두에 지적했듯이 한국불교는 줄곧 세계사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처음에는 미국식 복음주의 기독교를 통해서, 1970년대 이후에는 서양을 위해 재해석된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에 바탕을 두고 있는 젠붐과 서양의 오리엔탈리즘에 바탕을 둔 뉴에이지 컬트 종교의 형태로, 그리고 최근에는 마인드풀니스라는 이름으로, 자아초월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불교 깊숙이 흘러들어왔다. 이렇게 뒷문으로 들어온 새로운 수행법들에 우리의 앞문마저 열어주고 있다. 확대된 시야는 괴롭고 부끄럽지만 우리 불교의 종속적 현실을 정확하게 집어내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미국불교는 과거의 젠붐과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위한 새로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미국은 두 가지 점에서 한국 현대불교에 영향을 주었다. 첫째 한국불교 전통의 확립과 관련하여 젠붐은 일종의 증거 역할을 했다. 둘째 현대화된 미국불교가 세계화의 흐름에 맞추어 한국불교의 다양성을 확대시키고 세속화를 가속화하고 있다. 이 두 방면의 영향은 첫 번째 것의 영향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면 두 번째 영향은 한국이 수용자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불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이제 미국불교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도 달라져야 한다. 먼저 젠붐에 기대어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하고자 하는 ‘한국불교 세계화’를 재고해보아야 한다. 한국과 전혀 다른 문화적, 인종적, 종교적 배경을 갖는 미국사회에서 한국불교가 그 특수성과 고유성을 변함없이 유지하기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미국불교는 이미 새로운 장으로 넘어가고 있다. 오히려 미국의 현대적인 환경에 맞게 혼종된 새로운 불교가 한국으로 침투하는 상황이다. 한국불교를 진정으로 세계화하고 싶다면 전략의 수정이 필요하다.
어쩌면 미국불교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이 경험하는 문제가 곧 동시대인으로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현대인들에게는 현실적 실천에 대한 강조와 친절한 가르침, 배려와 관용의 문화 등 미국불교의 장점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미국불교의 영향력은 앞으로도 계속 확대될 것이다. 그러나 젠붐에 의해 한껏 부풀려진 신비화된 불교가 아니라 탈신비화와 세속적 환경에 적응하는 새로운 불교라는 점에서 그 영향은 과거의 이중적이고 오도된 영향과는 다른 지점에 있다.
그러나 아직 대안적인 종교에 머무는 이 새로운 불교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여전히 문제이다. ‘혼종’불교에 대하여 진보라는 이름으로 앞마당을 통째로 내어줄 수도 있고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문을 걸어 잠그고 있을 수도 있다. 또한 “한국불교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무엇인가”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 그래서 한국불교에 두 가지를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한국불교에 대한 해체적인 독해이다. 문을 걸어 잠그고 한국불교 전통이 독자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것이다.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한국불교의 고유한 전통은 일본강점기 이후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두 가지 오리엔탈리즘, 즉 역오리엔탈리즘과 오리엔탈 오리엔탈리즘에 의해 규정된 것이다. 그것은 한국불교를 타자화함으로써 역사와 환경에 따라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규정하였던 한국불교의 힘을 부정하고, ‘자랑스러운’ 한국불교의 전통이 인종과 지리적 환경이라는 숙명적인 힘의 규정 아래 있었던 것처럼 한국불교의 역사를 날조했다.
그러나 한국불교는 한 번도 한국사의 변화와 무관하게 존재한 적이 없다. 근대 이전 중국의 주변부에 있었던 한반도는 한편으로 중국의 영향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영향을 수용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 일본, 멀리 서역과 교류하면서 역동적으로 아시아 불교문화의 형성과 변화 과정에 참여했다. 근대 이후에도 한국불교는 한국사회가 겪은 식민체제와 후기식민체제, 그리고 세계화라는 거시적 차원의 변화와 밀접하게 상관관계를 맺으면서 변화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나 일본식 오리엔탈리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민족적 정체성의 본질을 상정하는데, 아시아 문화 또는 한국 문화를 긍정적으로 재현하든 부정적으로 재현하든 민족 정체성에 대한 본질주의 담론은 변치 않는 실체를 상정한다는 점에서 어떤 한 민족이나 문화가 경험했던 역사적인 차원을 부정하고 미래의 변화 가능성도 봉쇄한다. 그러므로 본질주의적 정체성 논의에 빠지는 순간, 자기전통의 틀에 갇혀 외부의 변화와 시대적 요청에 귀를 막게 된다.
비판적인 해체를 통해 우리는 한국만의 특징이라고 주장해온 한국불교의 전통이 사실은 타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일본에 의해 심각하게 타자화된 모습을 걷어내고 서양과 일본에 의한 근대적인 왜곡 이전의 한국불교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근대적 왜곡 이전의 참모습”은 본질주의 담론이 주장하는 어떤 변치 않는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시대와 환경의 변화를 수용하고 그것에 반응해간 힘,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불교의 역사적인 차원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불교, 특히 선불교의 담론이 얼마나 깊이 역오리엔탈리즘적인 담론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 확인되어야 한다. 비판불교학자들의 주장처럼 선불교가 통째로 날조는 아니지만, 한국불교 고유의 선수행이 존재한다는 생각은 선불교를 초역사적인 것으로 낭만화하고 신비화하는 왜곡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교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점은, 선불교 담론에 대한 해체적인 독서가 종교적인 체험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제안하는 해체적 연구는 불교적 체험을 단순히 사회적인 기능이나 주관적 체험의 차원으로 환원시키는 환원주의와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일본과 서구에 의해 날조된 사이비 신비를 걷어냄으로써 선수행을 고상한 취미쯤으로 여기는 ‘영적 물질주의’가 감추고 있는 세속화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삶에서의 깨달음이라는 선불교 정신을 충실하게 살려낼 수 있다. 동시에 모호하고 막연한 설명으로 선수행을 호도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현대사회의 이슈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다. 그것은 ‘진보’와 ‘현대’라는 명목으로 미국불교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에 대한 것이다. 미국불교에서 제기된 문제들은 우리와 동시대적인 상황에서 제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선구적인 부분이 있다. 이러한 장점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구적인 동시성에도 불구하고 지역적 차이가 여전히 존재한다. 미국불교가 만나는 환경과 문제는 서양문명의 전제 위에서 제기되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미국불교의 대응도 서양문화의 문맥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문제가 제기되는 문맥은 문제해결의 방향을 제한하기 때문에, 미국불교의 새로운 해법에는 충분히 불교적이지 않은, 다시 말해 서양문화의 가치가 그대로 스며든 지점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서양문명의 한계를 돌파하는 진정한 불교적 해법을 모색하려면 서양문명의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그 근거에서부터 새롭게 바라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시아의 불교 전통은 서양문명에 전제된 근거들을 드러내고 비교할 수 있는 비평의 지평을 제공할 수 있다. 전제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문제의식, 그리고 그 해결방식에서 우리는 현대의 문제를 새롭게 규정하는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서양과 동양을 진보와 보수, 현대와 전통의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어느 한 편을 고집하는 방식으로는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이분법에서 벗어나 동양과 서양을 상보적일 수도 있고 대립적일 수도 있는 두 개의 문화로 바라보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가치 판단을 보류하는 상대주의가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절하고 타당한 선택을 감행하며 보편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지역성에 대한 충분한 고려와 두 개 또는 여러 개의 문화 전통 속에서 더 보편적인 것을 선별해가는 감식안을 요구한다. 따라서 한국불교는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힘을 행사하고 있는 전통적인 가치를 방기하지 않고 현대적인 문맥 속으로 가져오는 노력을 경주하는 동시에, 현대 한국사회를 규정하는 세계화와 후기식민주의적 지역성을 충분히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서양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사용하는 히잡에 대해 여성차별적인 문화적 관례이므로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서아시아의 지리적 환경 때문에 여성을 보호하는 수단이라는 주장이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여성의 해방과 권리를 추구하는 서구적 가치와 여성 보호를 위해 히잡 사용을 주장하는 이슬람적 가치 사이에서 이슬람 여성의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결정하기 어려운데, 후기식민주의에서 제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도 이와 같은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책에서 언급했던 임신중절 문제도 지역적인 차이가 있다. 미국에서도 여성의 자기 결정을 존중하느냐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느냐에 대하여 서로 다른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미혼모의 임신중절이 많은 미국사회에서 진보주의자들은 대체로 임신중절을 찬성하는 입장인 데 반해, 기혼여성의 임신중절이 많은 한국이나 일본에서 불교 지도자들은 생명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입장을 지지해왔다. 그러나 최근 미혼모와 버려진 아이가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면서 불자들의 올바른 선택이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대두되고 있다.
최근 한국불교계에서 승려 취처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 서양이나 일본의 전례를 따라 취처를 허용하자던 20세기 초반의 불교개혁론을 지지하는 주장이, ‘취처’가 왜 불교개혁에 필요한가에 대한 면밀한 논의 없이 서양과 일본의 전례를 근거로 삼는 것은 대단히 아쉬운 대목이다. 한국불교가 오랫동안 취해온 독신승려제도가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가볍게 부정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서양에서 일어난 변화를 모두 진보적이라고 수용하는 것은 그야말로 근대주의의 함정에 빠지는 일이다. 불교가 현대의 새로운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현재 사람들의 호응을 얻는다고 하여 그들의 변용을 반갑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니면 아시아에서 보존되어 왔던 낡은 불교 속에 확장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인지 성급한 판단보다 치열한 사유와 성찰이 필요하다.
따라서 미국불교를 수용하거나 한국불교의 전통을 재평가할 때, 보편성과 지역성을 고려하는 후기식민주의적 관점이 필요할 뿐 아니라, 불교를 현대문명에 대한 대안적인 해답으로 제시하느냐 아니면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비서구적인 해결로서 제시하느냐에 대하여, 그리고 한국불교 또는 아시아의 전통적인 수행과 문화에서 무엇을 보편적인 가치로 제시할 수 있을지에 대한 숙고가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불교학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적 연구와 실천을 제안한다.
이 두 가지 제안은 한국불교에 대해 부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 태도는 한국불교의 문제를 미국불교의 수용이나 한국불교 전통의 보존이냐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로 단순화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양변을 부정함으로써 양자의 장점을 고루 취하여 실제적인 변화를 모색하는 중도적인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한국불교가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규정하고 변화해 간 문제의식을 이해하고 한국불교에 가해진 타자성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법화경》에서 이야기하듯이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보물을 스스로 알아내지 못하고 오히려 타자를 통해 발견하는 뿌리 깊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한국불교가 미국불교에 대해 갖는 이중적 태도라는 것도 사실 우리 자신이 한국불교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한다. 그런데 자신감이란 한국불교가 독보적이며 가장 우월하다는 식의 인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월성에 대한 주장은 끊임없이 타자의 동의를 요구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타자에게 예속되게 만든다.
한국불교 전통에 대한 담론을 해체함으로써 한국불교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질주의적 정체성 담론은 그 어떤 작은 문제도 허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작더라도 그것은 본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치명적인 약점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비본질주의적 입장은 이와 달리 역사와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구성하고 규정하는 힘을 평가하기 때문에 문제보다 문제를 대처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한국불교가 완벽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고치면 그만이다. 《법화경》에서 ‘자기 집의 보물’의 비유를 통해 그토록 고구정령하게 불성이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라고 말씀한 바처럼, 스스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힘에 대한 인식이야말로 진정한 자신감의 원천이며 이 자신감이야말로 자신의 문제를 은폐하기보다 정확하게 반성하고 동시에 타자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

 

명법 
조계종 교수아사리. 주요 저서로 《선종과 송대 사대부의 예술정신》 《미학의 역사》(공저) 《미국부처님은 몇 살입니까?》 등과 〈서양 현대예술에 나타난 선과 오리엔탈리즘〉 등 논문 다수가 있다. 현재 서울대·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강사, 동국대 불교대학원 명상상담학과 겸임교수. 본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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