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초한지》를 다시 봤다. 필자가 ‘읽었다.’가 아니라 ‘봤다.’라는 서술어를 쓰는 이유는 그 책이 고우영의 만화이기 때문이다. 고우영 만화가 특유의 해학 때문에 낄낄대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말미에는 비장감이 가슴에 충일(充溢)했다. 책장을 덮고 나니 예전에 봤을 때와는 달리 《초한지》의 진정한 주인공은 승자인 유방이 아니라 패자인 항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우영 만화가는 유방과 항우라는 캐릭터를 과장되리만치 대비되게 그렸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유방이 바위도 들었다 놓는 항우를 이기는 이유가 뭘까? 이에 대해 고우영 만화가는 유방이 천운(天運)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항우가 유방과의 마지막 싸움에서 진 뒤 읊는 〈해하가(垓下歌)〉는 눈물겹다. 
 
힘은 산을 뽑아낼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한데
형편이 불리하니 오추마도 나아가질 않는구나
오추마가 나아가질 않으니 내 어찌할 것인가 
우 미인아 우 미인아 너를 어찌할거나

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騶不逝
騶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오추마는 항우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빈 명마이다. 항우가 임전무퇴의 각오로 전장에 나설 때 오추마는 기를 쓰고 발을 떼지 않으려고 했다. 게다가 중군기(中軍旗)가 부러지는 불길한 징조를 알리는 사건도 일어났다. 싸움의 결말을 예상이라도 한 듯 우 미인은 꽃수레를 타고 항우를 따라나선다. 참담한 패배로 8백여 명의 군사만 남은 상황에서 항우는 굵은 눈물을 흘리면서 〈해하가〉를 읊는다. 하늘이 초나라를 버렸음을 짐작하고 있는 것이다. 〈해하가〉를 듣고 우 미인은 아래와 같은 화답시를 짓는다.

한나라 병사들이 이미 모든 땅을 차지하였고
사방에서 들리느니 초나라 노래뿐인데
대왕의 뜻과 기운이 다하였으니
천한 제가 어찌 살기를 바라겠나이까 
漢兵已略地
四方楚歌聲
大王意氣盡
賤妾何聊生

화답시를 읊조린 뒤 우 미인은 항우의 칼을 빌려서 자결한다. 패잔병들과 함께 배에 태워 보낸 오추마는 물에 빠져 죽고 만다. 실의에 빠진 항우 앞에 왕좌와 1천 금의 현상금을 노리는 이들이 몰려든다. 하지만 용장 항우 앞에 섣불리 나서는 이는 없다. 항우는 우 미인이 그랬듯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른다. 옛 부하인 겁쟁이 여마통에게 자신의 시신을 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항우의 자결은 자신이 아닌 유방을 택한 하늘에 대한 마지막 항의인 셈이다.
매일 자신을 “주인공”이라고 부르고 “예”라고 답했던 서암 스님의 “암환주인(巖喚主人)”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그 누구나 이 세상의 주인공은 자신이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영역이든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긴 이는 매우 소수다. 서글픈 것은 가장 순수한 마음의 발현인 사랑조차도 승자와 패자가 나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은 주연이 아닌 조연, 그마저도 안 되면 엑스트라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 중 주인공 아닌 이가 없는데도 영화(榮華) 앞에서는 주연과 조연과 단역이 나뉜다는 것은 가장 지독한 아이러니이자 부조리라고 할 수 있다. 오랜 세월 《초한지》가 사랑받는 이유도 많은 독자가 산을 뽑아낼 만한 힘과 세상을 덮을 만한 기운을 지니고도 천운을 얻지 못해 천하를 빼앗겨야 하는 항우와 자신을 동일시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라도 자기 위안을 삼고 싶었는지도.
이번에 《초한지》를 보고 난 뒤 필자의 심경도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필자는 대학졸업 후 기자, 편집장, 구성작가, 대필작가, 국회 비서관 등 이런저런 직업을 가졌다. 돌이켜보면 그 일들은 남의 글을 쓴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작가로서 이렇다 할 작품을 창작하지 못한 채 남의 글을 써서 연명한다는 사실이 쓰라리게 느껴졌다. 술자리에서 서로 속 깊은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다른 선후배들도 필자가 느꼈던 자괴감과 밥벌이의 지겨움을 느끼며 살고 있었다.
유식학의 정수(精髓)라고 평가받는 세친 스님의 《유식(唯識) 30송》을 보면, 인간의 고통은 크게 자기 자신과 상대를 비교하는 생각(我慢), 자기중심적인 사랑의 욕구(我愛), 자기는 독립적으로 영원히 존재한다는 생각(我見), 자신이 연기(緣起)적 세계의 일부임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我癡) 네 가지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과도한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모든 고통이 비롯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구적인 것은 없다. 사람들이 집착하는 욕망들은 봄바람에 하르르 흩날리는 벚꽃이나 후 불면 사라지는 비눗방울에 지나지 않다.  
기실, 인간의 삶은 산 정상까지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노역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정상에 오르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바위는 다름 아닌 무용한 일상의 상징일 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희망이라고는 없는 시시포스의 형벌이 긍정적 허무주의(Positive Nihilism)에 닿는 여정이라고 봤다. 시시포스야말로 불가능한 운명에 도전하는 영웅이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나 하루하루 무용한 시시포스의 노역을 해야 한다. 그러니 이 세상에 영웅 아닌 이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다만, 경허 선사가 말한 ‘무사유성사(無事猶成事)’ 즉, ‘일이 없는 게 외려 일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가, 모르는가 하는 차이만 있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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